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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세희 金世喜
1987년 전남 목포 출생. 2015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가만한 나날』, 장편소설 『항구의 사랑』 『프리랜서의 자부심』 등이 있음.
alie0077@naver.com
엄종길 영감
판다. 그게 그 사람의 별명이었다. 엄종길 영감을 구해준 사람. 본인도 자기 별명을 아는지는 모르겠으나, 엄종길까지 알 정도면 병원 안에 널리 퍼진 별명임은 분명했다.
사람들은 별명을 참 잘도 짓는다고, 종길은 그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동물탈을 쓴 것 같은 큼직한 머리통에 짧고 굵은 다리로 어기적어기적 걸어다니는 모습이 영락없이 동물원 안을 걷는 판다 같아 피식 웃은 적이 많았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엄종길 영감으로 불리니 대접받는 호칭이었다. 듣자 하니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사는 남자라고 했다. 저렇게 살이 뒤룩뒤룩 찐 놈이랑 살고 싶겠어? 사람이 자기관리를 해야지. 종길은 혀를 차곤 했다.
그런데 판다가 종길을 구하다니.
그 일이 있고 나서 이틀이 지났지만 종길은 여전히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붙들고 너무 세게 흔들어버린 것 같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도 넋을 놓고 있으면 어느새 그때로 되돌아갔다. 평소처럼 다섯시에 출근해 병원을 한바퀴 돌았던 것. 숙직실로 돌아오는 길에 전화가 왔던 것. 모르는 번호가 뜬 화면을 보면서 내일 온다는 에어컨 청소 팀인가 하며 수신 버튼을 눌렀던 것. 그런데 휴대전화를 귀에 대자마자 여자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빠, 나 혜윤이야. 나 큰일 났어. 사채 쓰고 끌려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딸 혜윤의 울음소리, 세상이 무너진 듯 엉엉엉엉 울던 그 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대체 그건 뭐였을까. 새빨간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는 지금도 그 울음소리를 떠올리면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때 판다가 지나가지 않았다면, 완력까지 써가며 휴대전화를 빼앗아 끊고 대략의 사정을 들어 혜윤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분명 그 길로 은행에 가서 삼천만원을 입금했을 터였다. 그 상태로 은행에 갈 수는 있었을까? 가는 길에 차 사고를 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치고, 인도 위로 올라가 건물을 들이받았을지도.
혜윤은 많이 걱정했고, 화를 냈다. 아빠, 어떻게 그걸 믿을 수가 있어? 전형적인 보이스피싱이잖아.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돌이켜보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수법이 맞았기 때문에 부끄럽고 침통했다.
*
“생각해보니까 안 넘어갈 수가 없겠더라고요.”
사흘째 되는 날 종길을 보러 온 판다가 말했다.
“저도 영감님 일 있고 신경이 쓰여서 검색을 좀 해봤거든요. 일부러 어르신들을 노리는 거예요. 자식들 걱정하는 마음을 이용하는 거죠. 지나고 보면 말도 안 되지만, 그게 판단을 마비시키는 고도의 수법이더라고요. 영감님이 바보 같은 게 아니고, 자식 걱정하는 마음을 갖고 노는 그놈들이 천하의 나쁜 놈들이죠. 그런 놈들은 사형해야 해요. 교수형시켜야 된다니까요.”
종길은 빨려들어가듯 귀를 기울였다. 마음속에서 뭔가가 울컥했다.
“그놈들이 참, 뭘 알고 그랬는지.”
종길이 머뭇거리며 입을 떼었다. 판다는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혜윤이가, 하나밖에 없는 각별한 딸이야. 아내 죽고 나서 내가 걔 하나 보면서 살았어. 지금도 걔 아니면 내가 이 나이에 밖에서 자는 야간 경비일까지 하겠어. 대충 편하게 살지.”
판다가 혜윤의 형편을 오해할까봐 종길은 급히 덧붙였다.
“걔가 서울에서 잘살아. 남편이 교수야.”
아직 정식 교수는 아니고 조교수인가 부교수인가라고 했지만 설명하기가 애매했다. 딸애를 생각하면 왠지 애가 탄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걔가 어딘가 그늘이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좋은 직장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들을 끼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시골이야 일자리가 없지만 서울은 다를 텐데. 혜윤이 정도면 편한 일도 구할 수 있을 텐데. 종길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돈 안 번다고 남편이 눈치를 주진 않을까. 지난번 만났을 때 가시처럼 말랐던 혜윤이 떠올랐다. 종길이 보기에 혜윤은 아이들에게 물러터졌다.
“내가 마음이 약해졌나봐. 이 휴대전화도 누가 어디서 감시하고 있을 것 같고, 조종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크게 놀라셔서 그래요.”
판다는 악성 앱이 깔려 있지 않은지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종길의 휴대전화를 붙들고 여기저기 들어가보더니 깨끗하다며 돌려주었다.
“원격조종 같은 건 아니에요. 안심하고 쓰세요.”
휴대전화를 건네주는 판다의 눈망울이 맑고 선했다. 기계에도 밝은 모습을 보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 이렇게 똑똑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나. 비록 얼굴 피부가 거무튀튀하고 입술이 물에 불은 것처럼 지저분했지만, 자세히 보니 코는 펑퍼짐하긴 해도 반듯했다.
“조심하시는 건 나쁘지 않아요. 인터넷 검색해봤더니 심란해요. AI로 목소리도 변조하고, 가짜 영상까지 만든대요. 영상통화를 해도 가짜일 수 있다는 거죠.”
“세상에. 그럼 어떡해.”
“전문가들이 말하는 걸 보니까, 암호를 정하라고 하더라고요. 가족끼리 돈 얘기 하거나 뭔가 수상할 때는 암호를 대라고 하는 거죠. 가족 암호가 뭐야? 이렇게.”
하. 종길의 입에서 탄식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린애들 장난도 아니고.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되었나.
판다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요. 이 시대에는 정신 차리고 깨어 있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뉴스도 신문도 못 믿는 세상이잖아요. 선거까지 조작하는 마당인데요.”
“선거?”
“이번 국회의원선거요. 지난번 21대 총선도 그렇고요.”
무슨 소리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종길을 보며 판다는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밤에 심심하실 때 보라며 유튜브 링크를 보내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던 판다가 문득 멈춰 섰다.
“영감님, 주말에는 뭐 하세요?”
판다는 일요일에 교회에 한번 나오라고 했다.
“혼자만 계시지 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리세요. 저희 교회에 좋은 분들 많아요.”
“이주사, 교회도 다녀? 몰랐네.”
“모르셨어요? 저희 병원 이사장님이 장로로 계셔요. 한번 나오시면 좋을 거예요.”
병원 이사장이? 종길은 이사장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강릉, 속초, 삼척 일대에 요양병원과 요양원을 여럿 가지고 있는 요양 재벌이라는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판다가 그 집안과 끈이 닿는가. 그렇게 보면 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행정실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이주사로 불리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날 밤, 종길은 판다가 보낸 유튜브 영상을 클릭했다.
*
투두두둑.
두번째 링크를 받았을 때, 엄혜윤의 귓가에는 실밥이 터지는 것 같은 환청이 들렸다. 어떤 입구가 벌어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봉합해두었던 입구.
혜윤은 주방에서 지단을 부치던 중이었다. 남편 준일이 늦는 날이라 아이들과 간단하게 김밥을 싸 먹을 생각이었다. 카톡 알람을 듣고 혜윤은 인덕션 불을 작게 줄였다.
휴대전화 화면을 켜는 순간 몸이 굳었다.
‘선관위놈들 다 잡아 족쳐야 합니다.’
처음 종길이 보낸 유튜브 링크를 받은 건 사흘 전이었다. ‘차고 넘치는 부정선거 증거들’이라는 썸네일 문구가 시선을 잡아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혜윤은 무시했다. 답장을 하지 않고, 전화도 걸지 않았다. 어차피 종길은 평소에 카카오톡을 쓰지도 않았다.
더는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혜윤은 전화를 걸었다.
“방금 보낸 거 봤냐?”
종길이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아빠. 누가 아빠한테 이런 걸 보내?”
차분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격앙된 목소리가 나왔다. 누가 보낸 걸 전달한 게 분명하다고 혜윤은 생각했다. 아빠가 스스로 검색해서 보냈을 리가 없다.
“그게 아니고.”
딱딱한 혜윤의 목소리에 종길은 당황한 것 같았다.
“누가 아빠한테 이런 걸 보냈냐고.”
곤란한 질문을 무시하고 종길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도 알고 있었냐? 이번 4・10 총선이 완전히 사기라는 거?”
혜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빠.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부정선거를 해.”
“목소리도 조작하는 세상인데 투표조작을 못할까.”
종길은 혜윤의 반응이 생각과 달라 당황하면서도 자기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았다.
“보긴 했냐? 보고 얘기해.”
“그따위 걸 내가 왜 봐.”
“너,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라. 한두 사람이 하는 얘기가 아니야. 해커들을 고용해가지고 다 바꿔놨단다.”
종길은 마음이 급한지 흥분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빠, 정신 차려.”
강한 표현에 두 사람 모두 멈칫했다. 하지만 종길은 물러서지 않았다.
“일단 보고 얘기해. 왜 자꾸 아빠 말을 허투루 들어. 아빠도 판단력이 있는데, 다 판단을 하고 말하는 건데 왜 무조건 아니라고 해?”
“그렇게 판단력이 좋아서 보이스피싱에 넘어갔어?”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어, 전화 끊자.”
갑자기 종길이 말했다. 끊을 만한 일이 생긴 것처럼, 누가 옆에서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그저 당황해서 그런 것 같았다. 혜윤도 자기 입에서 튀어나온 공격적인 말에 놀랐으니까. 언성을 높이다보니 그런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멍하니 서 있던 혜윤은 벽시계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태권도 버스가 올 시간이었다.
대체 아빠가 요즘 왜 이러는 걸까. 현관을 나서며 혜윤은 생각했다. 보이스피싱에 당할 뻔하질 않나, 이제 괴상한 음모론까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보니 슬리퍼를 신은 맨발이 보기 흉했다. 길 건너편에는 매끈한 얼굴의 엄마들이 모여 있었다. 혜윤은 그쪽으로 가지 않고 가로수 뒤에 몸을 숨겼다.
태권도 버스를 기다리며 모여 있는 엄마들은 얼굴부터 발뒤꿈치까지 갓 까놓은 삶은 달걀처럼 새하얬다. 마치 어린 시절 드라마 속에 나오던 엄마들 같았다. 아빠 엄종길과 함께 봤던 많은 드라마들.
혜윤의 엄마는 혜윤이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돌아가셨다. 그렇지만 혜윤이 특별히 빈자리를 느끼며 컸던 건 아니다. 주변에는 부모님이 이혼하거나 그냥 따로 살거나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와 사는 애들도 많았다. 친구 미라는 엄마와 둘이 살았는데 엄마가 욕을 퍼붓고 때렸다. 혜윤은 자기 처지가 나은 편이라고 느낀 적이 많았다. 엄종길은 성실했고,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지도 않았다. 오직 일과 혜윤뿐이었다. 매일 밤 혜윤은 아빠와 야구를 보고 뉴스를 봤다. 찬스에서 허망하게 헛스윙 삼진을 당하거나 땅볼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을 욕했고, 뉴스에 나오는 정치인들을 욕했다. 저런 저 빨갱이놈들. 아빠와 나란히 앉아 혀를 차고 품평하고 욕하던 저녁시간이 혜윤에게는 어린 시절 가장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찬바람이 휘잉 불어 혜윤은 몸을 움츠렸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빠에게서 서서히 떨어져나온 것이. 아빠가 무식해 보였던 것이. 혜윤은 아빠를 보며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고, 그때마다 죄책감을 느꼈다. 아빠를 판단하고, 우월감을 느꼈다는 사실에.
답이 없을 것 같던 불편함을 해소해준 사람은 대학에서 만난 전라도 출신의 룸메이트였다. 기숙사에 들어간 첫날, 룸메의 부모님이 진보정당을 지지한다는 걸 확인하고 혜윤이 말했다.
“좋겠다. 너는 부모님이 진보적이어서.”
“우리 부모님?”
룸메는 의아해하다가 웃음 지었다.
“민주당 지지하지만 진보적인 분들은 아니야. 그냥 기아타이거즈 응원하는 거랑 똑같지 않나? 민주당에 투표하지만 동성애는 상상도 못하고 낙태도 반대하셔.”
멍한 혜윤을 보며 룸메가 말했다.
“태어나는 순간 정해지잖아. 전라도 사람들은 기아타이거즈 응원하고, 경상도 사람들은 롯데자이언츠 응원하고.”
뭔가가 생각난 듯 룸메가 웃음 지었다.
“이번에 엄마 아빠랑 이태원에 갔는데, 주변에 외국인들 많은 거 보고 무서워하셨어.”
“왜?”
“단일민족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고.”
혜윤도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강아지 안고 가는 여자들 보면서 몸서리치셨어. 말세라고 엄청 우울해하시고. 우리 엄마 아빠가 경상도에서 태어났으면 보수당에 투표한다는 데 내 손모가지를 건다.”
룸메는 시니컬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친구는 그날의 대화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혜윤은 잊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 말에 기대 살아왔다. 아빠가 거슬리는 얘기를 할 때도 굳이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아빠가 무식한 게 아니야. 틀린 것도 아니고. 그냥 연고지 야구팀을 응원하는 거랑 똑같은 거지. 다들 그러잖아.
두두둑 두두둑. 다시 실밥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당겨진 실밥이 터지면서 더이상 그걸로 막을 수 없는 것이, 안에 든 내용물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안 돼. 혜윤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버스 소리가 들렸다. 길 건너편에 빨간색 태권도 버스가 멈춰 섰다.
아빠한테 한번 다녀와야겠어.
준후, 은후를 향해 손을 흔들며 혜윤은 생각했다.
*
—아빠 나 10분 뒤 도착.
메시지를 확인하고 종길은 현관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가 사는 낡은 아파트에는 지하주차장이 없어서 주차할 만한 자리를 봐두어야 했다.
문득 딸이 혼자 오는지 손주들도 데려오는지 묻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손주들이 보고 싶었지만, 거실 화분이 신경 쓰였다. 화분을 건드릴 텐데.
종길의 거실에는 크고 작은 화분이 많았다. 병원에 내놓아진 화분들 중에 살릴 만한 놈들을 날라 온 거였다. 화분 말고도 병원에서는 많은 물건이 버려졌고 종길은 그중에서 쓸 만한 걸 챙겨 왔다. 베란다 창고에는 몇번 쓰지 않은 물감이며 흰 종이들, 포장을 뜯지 않은 줄넘기도 있었다.
아파트 입구에 딸의 차가 나타났다. 앞유리 너머로 혜윤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저기 내 딸이 있구나. 저 안에 타고 있구나. 아비를 보러 먼 길을 달려왔구나. 새벽부터 일어나 고속도로를 달려왔을 모습을 떠올리니 종길은 주책맞게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애들은 못 데려왔어. 애들 보고 싶으셨을 텐데.”
주차를 마친 혜윤이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순간 종길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고 대꾸를 했어야 하는데.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커피 줄까?”
집으로 올라와 종길이 물었다. 하지만 혜윤은 자기 커피를 가져왔다며 텀블러를 들어 보였다.
“화장실 가고 싶을까봐 많이 못 마셨어.”
혜윤은 식탁에 앉아 텀블러에 든 커피를 마셨다. 언젠가부터 혜윤은 믹스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집에 오면 아빠가 세봉씩 넣어 타주는 믹스커피를 큰 컵으로 마시곤 했는데. 지난여름에는 커피 원액이라는 걸 가져와서 물에 섞고 얼음을 넣어 마셨다. 종길에게도 권하길래 입에 대봤지만 쓰디쓸 뿐이었다.
종길은 자기 몫으로 믹스커피를 타서 식탁으로 갔다.
“아빠, 지난번에 많이 놀랐지?”
혜윤이 물었다.
“보이스피싱 말만 들었지, 막상 우리한테 그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종길은 다시 수치심이 밀려왔다. 놀라고 겁을 먹어 어쩔 줄 몰라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뒤로는 휴대전화로 오는 거 다 못 믿겠다. 가끔 너랑 통화할 때도 네 목소리가 맞나 싶어. 다른 여자 목소리처럼 들린다니까.”
혜윤이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종길은 문득 재미있는 얘기가 떠올랐다.
“암호를 정하라고 하더라.”
“암호?”
“그래. 가족끼리 돈 얘기도 하고 그럴 수 있는 거 아니냐. 딸이 정 급하면 아빠한테 돈 달라고 할 수도 있지, 왜. 그럴 때 쓰는 암호.”
혜윤은 시선을 피했다. 불편한 표정이었다.
“네가 하나 정해봐. 다른 사람들이 모를 만한 걸로.”
종길은 커피를 다 마신 컵에 생수를 부어 입을 헹궜다. 양볼을 부풀리며 입을 헹구다가 혜윤의 표정을 보고 멈췄다. 이거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익숙한 낭패감이 밀려들었다. 언젠가 사위와 밥을 먹고 나서 요란하게 입을 헹구고 있을 때 사위가 나쁜 냄새라도 맡은 표정을 지었고, 나중에 혜윤이 따로 주의를 줬었다.
“이게 뭐야? 아빠 교회 다녀?”
혜윤이 반으로 접힌 교회 주보를 집어들었다.
“아, 그 이주사라는 사람이 다니는 덴데, 하도 와보라고 하길래 몇번 나갔어.”
혜윤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주보를 살펴봤다.
“아빠, 여기 이상한 곳 아냐? 공산주의를 거부합니다? 무슨 교회 소개에 이런 말이 쓰여 있어.”
그 말을 듣는데 종길은 짜증이 치밀었다.
“너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더라. 뭐가 이상한 곳이야.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혜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아빠. 나한테 보낸 유튜브. 그거 이주사가 보낸 거야? 그 사람이 아빠한테 자꾸 그런 얘기 하고, 교회에도 나오라고 하는 거야?”
그러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그럴 것 같았어. 아빠가 혼자 이럴 리 없지.
종길은 왠지 속이 불편했다. 나는 혼자 생각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건가.
“유튜브 봤냐? 제대로 봐보라니까. 너는 아빠 말을 안 믿어. 이러다 우리나라가 중국에 넘어가게 생겼다. 아주 심각한 상황이야. 젊은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 빨갱이들이라는 게 원래 나라고 국민이고 없어.”
그때 종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주사였다. 종길은 의자를 끼익 밀며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영감님, 집이세요?”
거실 쪽으로 가서 받으려는데 혜윤이 종길을 따라왔다. 혜윤은 갑자기 휴대전화를 뺏더니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판다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흘러나왔다.
“토요일 점심에 박권사님이 같이 식사하자고 하셔요.”
종길은 혜윤과 이 사람이 이주사냐느니 박권사는 또 누구냐느니 하며 실랑이를 했다. 그러면서 이 소리가 판다에게 다 들리겠구나 싶었다.
“영감님? 무슨 일 있으세요?”
그는 스피커 버튼을 한번 더 눌러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게 했다. 그러자 혜윤이 옆에서 따졌다.
“식사를 왜 하는데? 그 사람이 왜 아빠랑 주말에 따로 밥을 먹자는데?”
판다에게도 들릴 만한 크기였다.
“너 지금 이게 무슨 행동이냐?”
전화를 끊고 종길이 소리쳤다. 혜윤이 어릴 때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는데. 그러나 혜윤은 놀라지 않았다.
“아빠, 저 사람 이상해. 돈 빌려달라고 하면 주지 마. 명의 빌려달라고 하면 절대 주지 마. 알았지?”
“나한테 돈 달라고 하는 사람 너밖에 없어.”
종길이 말했다. 노기 때문인지 이런 말을 하는 게 처음이어서인지 턱이 덜덜 떨렸다.
“뭐라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래서 그 피싱에도 내가 넘어간 거 아냐. 네가 돈 필요해서 사채 쓴 줄 알고.”
혜윤은 한대 얻어맞은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감정을 누르며 말했다.
“그랬구나. 근데 아빠, 진짜 정신 똑바로 차려. 부정선거니 빨갱이니 그런 말 하면 나 앞으로 애들 못 데려와. 박서방도 못 데려오고.”
뜻하지 않게 또다시 솔직한 말이 튀어나왔다.
“데려오지 마라. 오면 시끄럽기나 하고. 여기 오는 것도 여름에 갈 데 없으니까 오는 거지 내가 모를 줄 알고?”
혜윤의 두 눈에는 이제 눈물이 가득했다.
“아빠, 왜 그래.”
“너 집에 가라.”
종길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괴롭고 혼란스러웠다.
“얼른 가.”
*
종길은 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판다를 찾았다. 딸이 찾아왔었는데 오해를 한 것 같다고, 지난번 통화는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사과했다.
“내가 유튜브를 보라고 보냈었거든. 아주 그냥 펄펄 뛰고 난리야. 걔는 그, 좌파거든.”
마지막 말을 하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판다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판다는 말을 아꼈다.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종길의 말을 들었다. 그러더니 딸이 자주 찾아오느냐고 물었다.
“애들 여름방학에 와.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둘이거든. 와서 한주 해수욕장에서 놀다가 가지.”
그러면 온 집 안이 모래 천지가 된다. 현관도, 화장실 바닥도. 애들이 왔다 가면 종길은 한동안 청소기를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영감님은 서울에 자주 가시고요?”
판다의 질문에 종길은 당황했다.
“나야 병원에 매인 몸이잖아. 날마다 여기서 자야 되는데 어디 다닐 수가 없지.”
판다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실은, 사위가 나랑 말을 안 해.”
목소리가 왜 이렇게 떨리는지 알 수 없었다. 종길이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예전에 한번 세월호 얘기한 뒤로 나랑 말을 안 해. 아니, 말이야 바른말이지. 해상사고 난 걸 가지고 웬 지랄들이냐고 했단 말이야. 그랬더니 그뒤로는 나랑 거리를 둬버리더라고.”
부끄러웠다. 사위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인정하니 벌거벗은 기분이었다. 종길을 아는 사람들은 다들 그를 추켜세웠다. 마음씨 고운 딸, 교수 사위, 두 손주까지, 인생 참 잘 사셨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실은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왜 이 말을 한 걸까. 잘 알지도 못하는 이런 변변찮은 놈한테. 종길은 자기가 한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이제 이놈이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볼 것인가.
그때 판다가 말했다.
“그게 다 좌파가 하는 짓입니다.”
종길은 무슨 말인가 하고 고개를 들었다.
“영감님뿐만이 아니에요. 모든 집에서 정확히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좌파가 가족을 파괴하고 있다니까요.”
종길은 솔깃했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는 뜻처럼 들렸다. 내가 못나서 사위한테 푸대접을 받는 게 아니고 다른 집도 다들 그렇다니 반가웠다.
“제 전처도 그랬죠. 여성의 권리니 평등이니 하면서 바람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밥도 안 해, 빨래도 안 해. 오케이, 좋다 이거예요. 근데 돈은 공평하게 벌어오냐고요. 제가 훨씬 많이 버는 건요? 밖에서 훨씬 고생하는 건요? 그건 딱 모르쇠예요. 그러면서 저 하기 싫은 건 다 안 하겠대요. 저는 다른 것보다도요, 좌파가 이런 식으로 가족 파괴하는 걸 용서 못합니다.”
종길은 홀린 듯 판다를 바라봤다. 그렇구나. 그게 좌파놈들이 하는 일이구나. 좌파놈들이 나와 사위를 갈라놓았어.
“딸이 돈 달라고는 안 합니까?”
종길의 낯빛이 바뀌는 걸 보고 판다는 알 만하다는 표정이었다.
“교회 어르신들 중에 자식들한테 평생 모은 재산 뺏기고 비참한 처지에 계신 분들 많아요. 보이스피싱 당하면 신고라도 하고 어디 가서 억울하다고 하소연이라도 하죠. 자식한테 당하면요, 이건 어디 가서 말도 못합니다. 하긴 여기 병원에 계신 분들만 봐도 알죠. 평생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살았는데 자식들이 얼굴이나 비치나요. 하나뿐인 딸이라 애틋하시겠지만, 영감님도 조심하세요.”
종길은 벌게진 얼굴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숙직실로 돌아왔다. 그때 문자 알람이 울렸다.
—아빠, 토요일에 박서방이랑 애들 데리고 갈게. 아침 일찍 출발할게요.
*
“엄마, 심심해.”
“바다 가고 싶어. 심심해서 죽겠어.”
두 아이가 거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직 추워서 물에 못 들어가.”
혜윤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럼 우리 뭐 해? 여기는 할 거 없단 말이야.”
종길은 식탁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고 있느니 물에는 안 들어가더라도 바다에 데려갔으면 싶었다. 그러나 혜윤은 둘째가 얼마 전에 감기에 걸렸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이른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혜윤이 검색해서 찾은 맛집이라고 했는데 종길이 보기엔 비싸기만 하고 사람이 많아 번잡했다.
마침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종길은 밥을 떠먹다가 자기 뚝배기에 담긴 전복을 젓가락으로 집어 사위의 그릇에 넣어주었다.
“괜찮아요. 아버님 드세요.”
사위는 몇번 사양했다. 종길은 또다시 회 한점을 사위 그릇에 주었다. 그러자 사위가 정색했다.
“됐다니까요. 말씀드렸잖아요.”
그후로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순간 아이들은 다시 심심하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종길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왜 할 게 없어. 할아버지가 이거 주셨잖아. 그림 그려.”
혜윤이 종이와 색연필을 아이들에게 주었다.
거실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그림을 그리다가 준후가 바닥으로 내려갔다. 엎드린 채 종이에 무언가 끄적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팔에 힘을 주어 마구 색을 칠했다. 낄낄거리는 소리에 봤더니 바닥까지 칠하고 있었다.
“아이고, 이 녀석아. 바닥에다 칠하면 안 되지.”
종길이 다가가 종이를 집어들었다.
“윽. 할아버지 입냄새 나.”
준후가 외쳤다.
“으악, 입냄새.”
아이는 코를 싸쥐고 키득거리며 달아났다.
“아빠, 놔둬. 내가 닦을게.”
혜윤이 지친 얼굴로 부엌 싱크대 앞에서 거실을 건너다보며 말했다. 그때 종길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사위가 컵을 살펴보더니 찌푸린 얼굴로 혜윤에게 다시 내미는 모습이었다. 컵이 더럽다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사이 두 아이는 거실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고함을 치며 소파 위를 달려 뛰어내리다가 결국 화분 하나를 쓰러뜨렸다.
벌컥 화가 치밀었다. 종길은 큰아이를 붙잡아 손바닥으로 등짝을 때렸다.
“이놈아, 가만히 좀 있어!”
처음 보는 할아버지의 화난 모습에 준후는 울상을 지었다.
“할아버지 예전에는 착했는데 나쁜 놈 됐어.”
“나쁜 놈이라니!”
혜윤이 당황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통쳤다.
사위가 거실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희게 빛나는 무테안경 아래 굳은 얼굴이 보였다.
“장인어른, 그렇다고 애한테 손찌검을 하시면 어떡해요.”
기가 막혔다. 종길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폭발했다.
“너는 인마, 네가 그러고도 교수냐?”
그 말을 하는 자기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비현실적이었다.
“애들이 잘못하면 혼을 내야지. 나는 우리 혜윤이, 엄마 없이도 잘 키웠어. 이런 싸가지 없는 호래자식들처럼 안 키웠다고!”
입이 터진 것 같았다. 속에 있는 줄도 몰랐던 불덩이들이 터진 입으로 쏟아져나왔다. 내가 왜 이러지. 종길은 당황하면서도 전율했다. 처음 당하는 하대에 바보처럼 입을 헤벌린 사위의 얼굴, 고장나버린 기계 같은 혜윤의 모습……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했다.
속이 후련했다.
*
현충일 아침은 화창했다. 종길은 교회 주차장에서 버스에 올라탔다. 광화문에서 큰 집회가 열린다고 했다.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깨어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음을 드러내는 역대급 집회가 될 거라고 했다.
판다는 밝은 얼굴로 부지런히 짐을 싣고 있었다. 테이프를 두른 흰 스티로폼 상자가 한쪽에 쌓여 있었다. 종길이 근무하는 요양병원 이사장의 후원물품이라고 했다.
널찍한 버스에 앉으니 기분이 들떴다. 서울에 가는 게 얼마 만인가. 4년쯤 된 것 같았다. 혜윤의 집에 갈 때보다 마음이 가벼웠다.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어울려 야유회라도 가는 것처럼.
버스가 휴게소에 정차했을 때, 그들은 건물 옆 외따로 떨어진 정자에 자리를 폈다. 비닐에 싼 따끈따끈한 쌀밥과 수육, 가자미무침, 막걸리가 나왔다. 사람들의 주름진 입가에는 붉은 김칫국물이 묻었고, 이에는 고춧가루와 초록색 미나리 조각이 끼었다. 여기저기서 트림소리가 났다. 종길의 옆자리에 앉은 머리 벗겨진 노인이 막걸리 마신 종이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햄스터처럼 볼을 움직이며 한동안 입을 헹구더니 그 물을 꿀꺽 마셨다. 그 모습을 보는데 술기운이 오르며 유쾌해졌다. 종길도 똑같이 마음껏 소리 내며 입을 헹구고 꿀꺽 삼켰다.
“아이고, 저분 저러시네.”
누군가 손가락으로 산기슭을 가리켰다.
“요즘엔 노상방뇨하면 안 돼.”
“아니, 숲인데 어때. 거름 주는 거지.”
의견이 분분했지만 날이 선 목소리는 없었다.
“젊은 사람들 보면 질색해.”
“뭐 어떡해. 우리는 다 그렇게 컸는걸.”
옆 돗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가족 얘기를 했다. 들어보니 오늘 집회에 가는 걸 자식들한테 말 했느냐 안 했느냐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애들한테는 말 못하지.”
“왜 못해.”
“우리 손녀는 고등학생인데, 나랑 말을 안 해. 우리 박근혜 대통령님 탄핵하던 때부터.”
얇은 입술을 분홍색으로 칠한 여자가 말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교조가 학생들을 세뇌시킨대잖아. 그래서 그래. 정말 큰일이야.”
누군가는 산불 얘기를 했다. 오면서 보니까 산불 피해가 심하더라고. 그러자 다른 사람이 이쪽만 불이 나는 게 수상하다고, 좌파 쪽에서 불을 지른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에이, 설마. 종길은 생각했다. 그건 아니지.
그때 종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판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럴 개연성이 크다고 봅니다. 좌파가 원래 피도 눈물도 없어요.”
그러더니 종길을 슬쩍 보며 덧붙였다.
“부모도 없고요.”
종길은 갑자기 목이 콱 막혔다. 판다와 얘기할 때 혜윤을 가리키면서 좌파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그뒤로는 사람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면서도 기분이 찜찜했다. 판다가 자기를 보며 냉정한 표정을 지은 것 같았다.
종길은 바지 매무새를 만지며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너른 주차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버스가 세워져 있었고, 그 앞에서 판다가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놈이 나랑 혜윤이 사이를 이간질하는가?
나한테는 그래도 혜윤이밖에 없는데. 나랑 혜윤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거 아닌가? 아냐, 뭐 때문에 그러겠어. 내 돈을 노리는 것도 아닐 테고.
종길은 곰곰 속으로 생각했다. 판다는 혜윤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 혜윤이 이따금 손을 벌리긴 하지만 20만원, 30만원이었다. 사위란 놈이 워낙 차갑다보니 눈치가 보여 말을 못하는 것이다. 고얀 놈. 사위를 떠올리자 저절로 눈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틀렸다고 하지. 내가 뭘 해도 얼굴을 찌푸리지. 나쁜 냄새라도 맡은 것처럼. 빨갱이 같은 놈.
혜윤은 그럴 애가 아니었다. 아빠를 요양병원에 보낸 다음 들여다보지도 않을 그런 애가 아니다. 저 노인네들은 자식과 담을 쌓고 사는 모양이지만 종길은 달랐다.
아빠, 정신 차려.
혜윤의 목소리가 종길의 귓가를 때렸다.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혜윤이 보고 싶었다. 전화를 할까. 광화문으로 데리러 오라고 할까. 판다놈 보란 듯이 딸의 집에 간다고 가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집에서 나를 환영할까.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망설이는 딸아이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판다는 이제 버스에 오르는 노인들을 부축하며 활짝 웃고 있었다. 동물원에 갈 사람들을 태우는 마스코트처럼. 종길은 체념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내가 당장 집에서 쓰러지면 뛰어올 사람은 저놈이지.
그는 천천히 주차장을 가로질러 버스로 향했다. 손녀가 말을 안 한다던, 입술을 분홍색으로 칠한 여자가 옆에 앉았다. 그에게 말을 거는데 입냄새가 지독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손녀가 말을 안 하는 건 혹시 입냄새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종길은 졸린다는 핑계로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 머리를 기대다시피하고 눈을 감았다.
곧 여름이 될 것이고, 혜윤이 손주들과 와서 머물 것이다. 그때는 잘해주어야지. 지난번엔 내가 너무 심했어. 혜윤과 아이들을 생각하자 자꾸만 심장이 욱신거렸다. 다음에 만나면 암호를 정해야겠어. 종길은 생각했다. 심장. 그래, 심장이 좋겠어. 다음에 손주들이 올 때는 이를 잘 닦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잠이 들었다.
*
빨간색 태권도 버스가 단지 입구에 멈춰 섰다. 혜윤은 엄마를 발견하고 뛰어오는 아이들을 향해 팔을 벌렸다. 바람막이 점퍼가 볼수록 마음에 쏙 들었다. 남편 준일에게는 아웃렛에서 5만원씩 주고 샀다고 했지만 각각 15만원짜리였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브랜드 바람막이를 입는데 준후, 은후만 안 사줄 수가 없었다. 혜윤은 일을 그만둔 뒤에야 남편의 월급이 얼마나 적은지 알았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는 액수였다. 혜윤은 유일하게 아빠 엄종길에게만 그 사정을 털어놓았다.
아빠에게 다녀온 뒤로 2주가 흘렀다. 그날 이후 준일은 아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남편다운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그게 고마웠다.
그날 저녁, 혜윤이 고기를 굽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 강릉 갔을 때, 장인어른이 좀 우울해 보이지 않았어?”
준일이 말했다.
“오늘 기사를 봤는데 치매 초기 증상이 우울이래.”
혜윤은 순간 어깨가 뻣뻣해졌다.
“무슨 소리야.”
겨우 그렇게 대꾸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준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조기에 빨리 진단받아야 진행을 늦출 수 있대. 요즘 약이 좋대.”
그럼 이 사람은 아빠가 한 말이 다 치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혜윤은 식탁 옆에 잠자코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 아빠가 그렇게 이상한가? 생각해보면 다들 똑같지 않나? 전라도 사람들은 기아타이거즈 응원하고 경상도 사람들은 롯데자이언츠를 응원하잖아.”
“그게 어떻게 똑같아?”
준일이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것도 모르느냐는 눈길. 그 눈길만 보면 몸이 굳었다.
“기아 응원하는 거랑, 기아가 지면 승부조작이라고 생각하는 거랑 어떻게 똑같냐고. 이성의 영역을 벗어난 거야. 음모론을 믿는 사람하고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해.”
맞는 말이었다. 이런 설명은 이제 유효기간이 끝났다는 걸 비로소 혜윤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다.
혜윤은 밥을 푸면서 등 뒤에서 준일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늘 이성적이었다. 맞는 말만 했다. 사람에게 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모른다. 그래서 그에게 돈이 더 필요하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걱정 말라며 돈을 보내준 사람은 아빠였다.
혜윤은 기억하고 있었다. 결혼하고 처음 아빠 집에 갔을 때, 아빠가 세월호 얘기를 하고 준일이 면박을 주었던 것을. 그때 혜윤은 끼어들지 않았다. 준일이 그런 식으로 면박준 것이 속상하긴 했지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아빠가 다시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 테니까. 지금 돌아보니 잘못이었다. 그때 차라리 내놓고 얘기를 했어야 했다.
그들은 식탁에 앉아 저녁식사를 했다. 준일은 준후와 은후에게 음식을 씹을 때 입을 꼭 다물라고 주의를 주었다.
혜윤은 아빠가 자기 집에 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준일이 식습관이나 욕실을 사용하는 버릇을 두고 잔소리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강릉에 갔을 때도 먹던 그릇에서 전복을 준다고 정색했다. 그건 아빠의 사랑의 표현인데. 어릴 때부터 그랬다. 자꾸 먹던 음식을 주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싫어도 참았다. 하지만 준일은 참지 않았다.
이상했다. 이 남자와 결혼할 때, 분명 아빠는 기뻐했다. 준일은 아빠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남자였다. 혜윤이 교수 될 남자와 결혼한다고 주변에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그런데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차라리 고향에 남았다면. 아빠처럼 막걸리를 마시고, 아빠와 같은 정치인들을 욕하는 남자를 만났다면 아빠는 훨씬 행복하지 않았을까.
요즘 혜윤이 만나는 가족은 모두 번듯하고 깔끔했다. 어떻게 된 게 엄마나 아빠 없는 애들이 없었다. 다들 브랜드 옷을 입었고, 영어와 태권도와 체스를 배웠다. 그게 잘 살고 있다는 증거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혜윤이 이런 세계를 만난 건 아빠의 뒷받침 덕분이었고, 혜윤도 아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죽도록 열심히 살았다. 바로 이렇게 살려고.
그런데 아빠, 그렇게 도착한 이곳에 왜 아빠의 자리는 없을까. 혜윤은 생각했다. 정말 이상하지 않아?
코를 마비시키던 독한 입냄새와 아이의 등짝을 후려치던 화난 표정이 떠올랐다. 유튜브 속의 일그러진 얼굴과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이 떠올랐다. 그 위로 희번덕거리던 아빠의 눈알이 겹쳐졌다.
투둑. 마지막 실밥이 뜯기는 소리가 들렸다. 혜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날 밤, 양치를 하면서 아이들이 물었다.
“엄마, 여름방학에 할아버지 집에 갈 거지?”
아이들이 혜윤을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 집? 글쎄, 이번에는……”
혜윤이 대답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