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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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극우현상, 실체는 있는가

 

 

이승원 (李昇媛)

언론인, 시사평론가. 북한대학원 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이데일 리, 내일신문 기자를 역임하고 MBC, TBS, OBS 등에서 시사 프 로그램을 진행함. 저서 『바이든 플랜』 등이 있음.

 

김내훈 (金來薰)

문화연구자. 연세대 미디어문화 연구 박사과정 수료. 저서 『급진 의 20대』 『프로보커터』, 공저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자유로 운 개인들의 연합을 향하여』, 역 서 『법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배 신하는가』 『인싸를 죽여라』 등이 있음.

 

황희두 (黃熙斗)

정치·미디어 활동가.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이사, 사이버 크래프트 대표. 전직 스타크래 프트 프로게이머. 저서 『사이버 내란』 『꼰대 정치의 위기, 90년 대생의 정치질』 등이 있음.

 

이태호 (李泰鎬)

시민운동가. 참여연대 운영위원 장·평화군축센터 소장, 시민사 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 4·16 연대 상임집행위원장, 10·29 이 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공동운 영위원장, 내란청산·사회대개 혁 비상행동 공동운영위원장. 공저서 『변혁적 중도론』 『봉인 된 천안함의 진실』 등이 있음.

 

 

이태호(사회) 반갑습니다. 저는 『창작과비평』 겨울호 대화 사회를 맡은 시민사회 활동가 이태호입니다. 지난겨울 군을 동원한 친위쿠데타가 45년 만에 재발했습니다. 계엄령이 ‘계몽령’이었고, ‘반국가세력’에 포획된 국회와 ‘부정선거’ 때문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했다는 극우 유튜버 수준의 선동을 대통령 자신이 이어가는 가운데, 그것을 믿는 이들 중 일부는 ‘국민저항권’을 주장하며 법원을 상대로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탄핵 국면은 사실상 정치적인 내전상황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어요. 극우의 확산 문제는 최근 수년간 전지구적인 양상으로 여겨져왔지만, 12・3 내란사태와 그 이후의 상황이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극우의 세력화를 둘러싼 배경과 특징은 무엇이며 특히 한국사회에서의 양상은 어떤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나가야 할지 이야기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이승원 안녕하세요. 저는 시사평론가로 활동하는 이승원입니다. 한양대 교육대학원 겸임교수로 국제정치 강의를 하고 있고요. 약 10년간 기자생활을 하다가 이후 시사평론가로서 활동하면서 주로 정치·외교·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오늘 전문가분들과 함께 극우현상에 대해 이야기 나눌 기회여서 기대하며 왔습니다.

 

김내훈 저는 김내훈이라고 합니다.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그동안 몇몇 책을 쓰고 번역했고, 여러 칼럼도 기고하고 있습니다.

 

황희두 저는 노무현재단 이사로 활동하는 황희두입니다. ‘알리미 황희두’(youtube.com/@heenimhwang)라는 개인 유튜브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자리가 부담도 되지만, 한때 ‘키보드 워리어’의 세계 속에 빠져 있었고 이후 이 문제를 추적해온 사람으로서 저의 경험과 고민을 많이 공유하고 싶습니다.

 

극우의 정체, 어떻게 봐야 하나

이태호 먼저 극우란 무엇인지 이야기해보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은 남북 모두에서 생각이 다른 이들을 죽이거나 휴전선 반대편으로 쫓아내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극우적 상태로 출발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냉전체제 해체 이후 이 문제를 조금씩 극복해왔습니다. 촛불혁명을 거치는 동안에도 기득권의 반발과 일탈적 양상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지난 12·3 내란사태와 내란세력을 지지하는 이들의 확산은 확실히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이 문제를 면밀히 살피기 위해 우선 극우세력 혹은 극우주의자, 극우현상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세분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이승원

이승원

이승원 글로벌 양상과 한국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파시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외국어이다보니 사용하는 사람마다 뉘앙스가 좀 다를 때가 있는데요. 유럽, 미국 사례와 비교하면서 맥락을 이해하면 좋을 듯합니다. 아시다시피 파시즘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인 1919~39년 전간기(戰間期)에 등장하고 확산됐어요. 1차대전 이후 경제적인 피폐함과 박탈감 속에서 극우민족주의가 대두한 것인데, 지금 유럽의 극우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입니다. 2011년 시작된 시리아내전 이후로 유럽에 난민문제, 이민자문제가 특히 심각해지고 경제성장률은 현저하게 떨어지면서 유럽인들은 자신의 문화와 기득권이 침탈당한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슬람 종교나 비백인 비율이 급속히 증가하는 것을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고,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가 커지는 데도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된 거죠. 백인, 남성, 민족주의, 경제문제 등의 맥락에서 전간기와 2010년대 극우의 등장에 유사한 점이 보입니다. 트럼프의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보호무역주의에 기반한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이 시행된 바 있는데, 최근 그 당시와 오늘날 트럼프의 관세전쟁을 비교하는 논의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관세 같은 경제적 갈등은 민족주의 경향성과 연결되는데 어쨌든 거기엔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겠다는 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극우에는 기원이랄까 논리가 없습니다. 주말에 광화문 근처에 가면 극우집회 구호를 듣는데 국가나 민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논리는 전혀 없어요. 오히려 ‘상대편이 하는 일은 무조건 반대해야 한다’는 식의 파괴주의(vandalism)에 가깝습니다. 자기 근거와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들이 남의 것을 부러워하고 ‘무조건’ 따라 하듯 해외 극우의 메시지를 수입해와 한국사회에 강제로 이식하려는 흐름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의 극우는 최소한의 국익 추구도 없는, 한마디로 강제로 이식되는 느낌입니다.

 

김내훈

김내훈

김내훈 단순하게 말하면 극우적인 메시지를 내는 정치인이 극우 정치인, 극우 정치인을 지지하는 이들이 극우 유권자일 텐데요. 저는 한국사회의 극우현상을 이런 정치적인 개념보다 좀더 폭넓게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정치인이나 정당을 지지하는 문제를 넘어 문화적·인지적 문제이기도 한 거죠. 그래서 저는 극우화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과격화’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제가 정의하는 과격화는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 혹은 뚜렷한 이념이 형성되기 이전, 맹아적 상태의 강한 에너지’입니다. 어떤 정치인이나 정당에 대한 반응이 정서적 판단에만 의존하고 ‘신격화’와 ‘극혐’ 양극단만 남아서 어떤 이슈든지 간에 그 양극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게 과격화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급발진’이고, 인터넷문화에서 더 두드러지는 현상이에요.

 

이태호 극우화가 아닌 과격화라고 하면 진보진영이나 극좌에도 그런 경향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걸까요? 극우적 정체성과 과격화는 좀 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내훈 진보 쪽에도 과격화 경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방점을 찍으려는 것은 아니고요. 겉으로 드러나는 지지정당과 극우적 성향은 다를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의 절대다수, 70% 이상이 계엄에 반대하고 윤석열 탄핵에 찬성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보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섣부르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불쾌한 정보를 접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성찰하는가에 따라 관용과 포용으로 향할 수도 있고, 폭력과 혐오, 배제로 흘러갈 수도 있는데 과격화의 경향에서는 너무 쉽게 후자로 나아갑니다. 지금의 현상은 어떤 이념을 표지로 삼아서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과격화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황희두

황희두

황희두 저는 온라인문화를 지켜보고 참여해온 입장에서 극우세력은 다양성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편 아니면 적’으로 이해되고 상대한테 지면 안 된다는 논리 속에서 강한 자에 대한 동경이 따라붙고요. 『강자 동일시』(강수돌 지음, 사무사책방 2021)를 보면서 저의 10대 시절을 많이 떠올렸습니다. 프로게이머를 준비하던 시기에 모두에게 무시받는 것 같은 초라한 현실을 극복하고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강한 사람을 동경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아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민주진영에서 ‘대화가 중요하다’ 하는 것이 매력적이지 않아 보였습니다. 2019년부터 직접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민주진영이 이런 게임 구도에서 얼마나 취약한지 더 잘 느꼈습니다. 도덕적 완벽함을 추구한다고 하면 오히려 좋은 먹잇감이 됩니다. 극우가 생각하는 현실은 적을 ‘말살’시키는 게임과 같습니다. 얼마 전 『사이버 내란: 댓글 전쟁』(시월 2025)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그들이 벌이는 일은 경쟁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뒤에서 좀더 말씀드리겠지만 이 전쟁을 국가공권력을 동원해 벌여왔다는 점이에요. 극우와 극좌의 결정적 차이가 여기 있다고 봅니다. 역사적으로 공권력은 극좌와 진보진영을, 나아가 평범하고 상식적인 시민들까지도 탄압했기 때문에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 없는 것이죠.

 

이태호

이태호

이태호 한국의 극우가 국가나 민족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 ‘신격화 아니면 극혐’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양극단을 오간다는 것, 공통분모는 혐오이고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 등으로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보수와 극우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사실 보수가 진화해서 극우가 되는 사례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분단체제의 한국에서는 애당초 ‘합리적 보수’라는 것이 존재한 적 없었다고 볼 수도 있고요. 극우가 기존의 기득권세력과는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때로는 사회적 동기랄지 경제적 이해관계와도 상관없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승원 통용되는 용어로서 보수와 극우의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 저는 보수는 적어도 가족이든 국가든 전통이든 어떻게 이 공동체를 유지할까를 고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와 생각이 달라도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 수 있는 사람들이고요. 그런데 극우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는 사람들 같아요. 황희두 선생님 말씀처럼 상대를 경쟁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아예 죽여 없애야 하는 대상으로 배타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고요. 이게 보수와 극우의 차이라고 봅니다.

 

황희두 ‘나 같은 사람이 사회를 어떻게 바꾸겠어’라는 인식이 팽배하고 양극화가 심해질 때 그 불안을 파고드는 것이 극우 포퓰리즘입니다. 기존 체제를 바꾸지 못할 때 그 체제에 올라타는 것이 영리한 것이라는 가스라이팅에 점점 길들여지는 거죠. 보수는 적어도 공동체적 질서와 전통을 인정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에 비해 극우는 도태되면 죽는다는 인식 속에서 재벌과 권력자를 동경하고 그 편에 서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민주주의나 인권은 물론이고 헌법질서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보수가 진화해서 극우가 됐다고 이야기하면 이상한 것이죠. 지금 한국정치에서는 이 순간에도 국민의힘에 몸담고 있는 자들은 보수가 아닌 내란세력이자 극우세력이라 해야 합니다.

 

김내훈 현재까지도 윤석열을 지지하고 그의 복귀를 바라는 사람들은 ‘왕당파’ 내지는 ‘신정제’ 신민으로 보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요. 우리 사회에 ‘민주당 혹은 민주세력이 집권하는 것을 결코 곱게 봐줄 수 없는 기득권 최상위 엘리트층’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반드시 전제해야 합니다. 제가 과격화를 이야기했지만 어떤 세력 없이 파편화된 개인들만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이들 세력에 사회적·경제적 이해관계가 아예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보다 ‘평생 야당이나 하고 있어야 할, 엘리트나 상류층 출신도 아닌 자들’이 감히 자신들의 독점적 위치로 기어오르는 것에 대한 앙심이랄까 원한감정이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종북좌파 프레임은 유효한가

이태호 한국의 수구세력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오랫동안 활용해온 프레임은 사실 ‘종북좌파’였습니다. 분단체제와 군사주의, 안보지상주의와 깊은 연관을 보여온 것인데 지금의 극우도 그런 프레임을 쓰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제 한국에서 ‘종북좌파’는 혐오와 적의의 상징이나 기표로만 머무르게 되었고, 그보다는 여성·중국·이주민·소수자 등 여러 대상—혹은 정체성—에 대한 감정적인 혐오반응과 공격이 극우의 본질이 된 것이라고 봐야 할까요?

 

 

이승원 한국 극우의 뿌리 없음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야 할 듯한데요. 같은데요. 한국전쟁 이후 반공・반북 구호가 사회 전반에 있어왔지만 최근 분위기는 그것과는 또다른 이물감이 있습니다. 내부에서 어떻게든 분열을 만들고 싶어하는 세력과 한국 내의 반중정서, 심지어 복음주의 기독교 등을 확산시키려는 외부의 힘이 결탁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일례로 한국에서 찰리 커크(Charlie Kirk)를 알던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추모공간이 마련될까요? 극우집회마다 이스라엘 국기와 성조기를 함께 드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제대로 된 이데올로기라면 어떤 지향점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만약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물어보면 대개는 답이 없을 거예요. 그러다보니 표적을 중국・난민·이주민·페미니즘·동성애 등으로 계속 옮겨다니며 공격하는 거고요.

 

김내훈 저도 비슷한 의견인데 내란세력, 극우세력이 외치는 메시지나 구호를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의 적’으로 설정한 그 기표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화교와 중국인과 조선족을 하나로 묶어서 본다거나, 대화를 하다가 조금이라도 어려운 단어를 쓰면 ‘왜 한자 쓰냐, 중국인이냐’ 하고 공격해버리는 것처럼요. 겉으로는 확신에 차 보이지만, 거기에 어떤 이념과 가치 지향은 일절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만의 언어로 남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데, 그걸 그들만의 중얼거림으로 묶어두지 않고 주류 정치인과 언론이 끌어올리는 게 큰 문제인 겁니다. 극우의 결집은 그 기표를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찾는 게 중요할 것 같고, 그 진원지로부터 기표가 대중 담론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고 실은 그 기표가 아무런 실체도 없는 상태라는 것이 드러날 때 극우의 결집력도 약해지리라 생각합니다.

 

이태호 그런데 12・3 계엄선포도 공식적으로는 ‘종북척결’을 내세워 군을 동원하는 것을 골격으로 했고, 남북간 국지전을 벌이려는 시도도 확인되었습니다. 표면화된 양상은 타자에 대한 집중공격이지만 한국이 자신과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가 된 데에 분단체제의 영향력은 없을까요? 저는 한국의 극우가 미국이나 유럽과 다른 양상을 보이는 데는 분단과 전쟁의 기억, 그리고 적대상태로 지속되어온 분단체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2016년 촛불 당시 보수집회에서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구호를 들고 나오기도 했고 그즈음 ‘4·16 동성애 빨갱이’라는 말도 극우 현수막에 종종 등장했어요. 우리로선 세월호참사와 동성애와 빨갱이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나 싶은데 저들한테는 그게 다 연결되는 ‘적’의 이미지이고, 그 핵심에 종북좌파 프레임이 있지 않나 생각해볼 문제 같습니다. ‘적’을 만들고, 혐오와 적대를 확산시키고, 정치를 내전화하거나 전쟁을 부추기는 경향을 가진다는 점에서 한국의 극우는 극우의 일반적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분단체제 속에서 재생산되며 안보지상주의와 착종할 가능성이 높고, 소수의 지배세력들이 이 분단체제를 활용해온 것 아닌가 하는 말씀도 보태고 싶습니다.

 

황희두 한국 극우의 발화나 공식문건을 살펴볼 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게 ‘좌파척결’이라는 네글자입니다. 극우 SNS에서 이상형을 이야기할 때 ‘키 작은 남자도 괜찮다, 좌파만 아니면 된다’라고 하면 반응이 엄청나요. 그런데 이때 좌파가 뭘 가리키는지를 보면, 결국 그 안에 모든 걸 때려 넣는 방식이에요. 상식적인 목소리를 내도 좌파라고 하는 겁니다. 종북좌파 프레임은 일종의 게임 전략 같은 것이고 정해진 공식이 있어요. 얼핏 상식적인 수준의 토론을 이어가다가도 마지막에 ‘좌파네’ 하고 응수하면 끝인 거죠. 개개인으로 보면 누구는 페미니즘에, 누구는 북한에, 누구는 복지문제에 분노하고 있을 수 있는데 그 땅을 다 먹는 것이 좌파척결이라는 구호인 거죠. 이들은 국가공권력까지 동원해 온라인 공론장을 점령합니다. 그 과정에서 ‘기득권=586=친중=종북=페미니즘=민주당=위선=내로남불=무능함’이라는 키워드를 확산시켰고, 이 모든 걸 한 단어로 요약하면 ‘좌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원에선 ‘일베’를 중요한 거점으로 삼았어요. 현재 일베의 영향력은 과거보다 많이 줄어들었지만, 사이트 자체보다는 그 세계관이 확산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세계적인 극우의 확산, 그 이유는?

이태호 앞서 이승원 선생님이 한국의 극우를 글로벌 양상과 비교해서 살펴보아야 한다고 짚어주셨는데, 한국의 상황만 아니라 극우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G7 국가의 거의 대부분에서 극우정당이 정치적으로 약진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요?

 

이승원 G7 국가들의 현상을 살펴보면 독일에선 ‘독일을 위한 대안’(AfD) 당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고, 영국 Reform UK(영국개혁당)도 올해 각종 조사에서 30% 중반대 지지율이 나옵니다. 이딸리아에서는 무솔리니를 추종한 극우 정당에서 활동했던 멜로니(G. Meloni)가 2022년 총리로 당선됐고, 프랑스는 마린 르펜(Marine Le Pen)이 이끌었던 국민연합(RN)이 무려 30%대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어요. 미국은 현재 MAGA이고, 일본은 원래 보수-극우 진자를 오갔고 현 타까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는 극우파입니다.

G7 중 캐나다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극우현상들이 도드라집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2016년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눈에 띕니다. 당시 브렉시트에 압도적으로 찬성한 이들은 주로 고령층과 저학력·저소득자였습니다. 고령층에게는 ‘세계를 지배하던 우리’ 같은 제국주의 노스탤지어가 작용했을 겁니다. 저학력·저소득자들은 양극화 속에서 지갑은 가벼워지고 정치적 발언권은 줄어든다고 느끼던 중에 유럽연합(EU)으로 인해 비백인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는 불만이 누적되었을 거고요. 공교롭게도 같은 해 11월에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됐는데 충격적이었던 것이 ‘러스트벨트(Rust Belt, 미국 중서부·북동부의 제조업 중심 지역)가 민주당을 버렸다’는 것이었어요.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가 강했던 이곳의 민심이 변한 것은 제조업의 침체와 더불어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거라는 불안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 불안과 분노가 2024년 11월 대선에서도 작용했고요. 2016년 대선 때는—승자독식 선거인단 제도로 트럼프가 당선되긴 했어도—힐러리가 트럼프보다 약 286만표 더 득표했으니 위안이라도 삼을 수 있었지만, 2024년에는 트럼프의 압도적 승리였죠. 더욱이 2020년 대선과 대비해 흑인과 히스패닉의 트럼프 지지가 10% 정도 올랐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들이 트럼프를 반대할 것 같지만, 이민 2·3세대 입장에서는 넘쳐나는 이민자 문제부터 일자리, 월세 임대료 등 다양한 불만들이 쌓여왔던 겁니다.

 

이태호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던 노동계급이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쪽으로 기울기 시작해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완전히 흔들렸고, 이번에는 아예 작심하고 트럼프를 선택했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여기서 고민해볼 부분이 미국의 리버럴리즘(자유주의)이나 유럽의 사민주의가 어떤 의미에서 시효를 다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에요. 시효를 다했는데 대안이 등장하지 않는 거죠. 2009년 뉴욕에서 열린 미국역사협회(AHA)의 역사학대회와 국제학회(ISA) 연례회의를 참관할 기회가 있었는데, 세계금융위기 직후라 신자유주의 이후의 체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습니다. 저는 사회주의나 생태주의, 혹은 연대의 경제 같은 새로운 대안을 기대했는데 ‘근본주의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전망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더군요. 특히 종교적·인종적 근본주의 같은 부정적인 흐름이 많이 언급되어서 크게 실망했었고, 저는 이를 신자유주의는 붕괴했지만 대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그뒤로 실제 기존의 이념과 체제가 한계에 부딪히면서 국가와 정치에 기대던 사람들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쏠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요.

 

김내훈 2016년을 기점으로 몇년간 포퓰리즘 논의가 많이 되었잖아요. 브렉시트와 트럼프가 있었는가 하면 그리스의 시리자(SYRIZA)나 스페인의 뽀데모스(Podemos) 같은 좌파 포퓰리즘의 약진도 있었습니다. 더불어 국제질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거라는 전망도 컸습니다. 이대로 가면 망하는 길일 것이 뻔하기에 전환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거죠. 그래서 트럼프의 첫 당선에 대해서도 외형으로는 백래시와 혐오가 있을지언정 그 뒤에는 사회변혁의 열망이 숨어 있다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위선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면서 실제로 인민만을 위해줄 권위적인 통치를 바라는 향수가 작용했다는 해석이었어요. 그러나 지금 양상은 그것과는 많이 단절된 상태이고, 2024년의 트럼프 당선에 대해 이전과 똑같이 항의성 투표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트럼프 집권 1기에는 트럼프를 찍은 유권자가 전부 그와 같은 여성혐오자·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트럼프의 통치를 겪으면서 그에 맞춰 실제로 많은 사람의 수준이 떨어졌다는 말입니다. 트럼프의 폭정과 극우 논객들의 흥행으로 인한 담론의 오염과 퇴행이 시민성의 퇴행을 야기했고, 이제는 실제 인종차별주의자와 여성혐오자가 늘어난 현실을 직시해야 해요. 사회구성원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인 자질을 내던지고 공동체의식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죠.

 

이승원 저는 지금의 극우현상이 일종의 백래시이기도 하다고 봅니다. 미국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 재임기간(2001~2009) 동안 이라크전쟁, 글로벌 금융위기로 사회적·정치적 위기가 고조됐어요. 미국 국민들은 변화를 원했고 오바마를 선택했습니다. 당시 한 카툰에서 오바마를 베트맨으로 묘사할 만큼 일종의 구원자로 인식했습니다. 그런데 오바마 정부에서도 현실은 크게 나아지지 않고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워싱턴 엘리트들은 똑같다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우리로 치면 ‘강남 좌파’처럼 미국에서 ‘리무진 리버럴’로 불리는 민주당과 엘리트층에 대한 반감이 컸어요. 얼마 전 한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가자지구 평화 정착을 위한 정상회의’(2025.10.13)에서 트럼프가 멜로니 총리를 향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칭하더군요. 그러면서 “미국에서는 여성에 대해 ‘아름답다’는 단어를 쓰면 정치 이력이 끝장난다”며 PC주의를 비아냥댔습니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리버럴이 양극화 속 시민의 불안과 고통을 직시하지 못한 채 집권기에도 결정적인 변화의 모멘텀을 만들지 못하면서 시민의 불만이 누적되었고, 그 불만의 불똥이 리버럴의 PC주의로 향했고, 그런 백래시를 등에 업고 극우 논객들이 힘을 얻으면서 극우현상의 확산으로 이어진 게 아닌가 합니다.

 

황희두 글로벌 극우화에 대해 신자유주의의 한계나 경제적 양극화 얘기가 많이 되지만, 저는 기술의 발전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2010년대부터 스마트폰이 전세계적으로 보급되며 일상이 달라졌잖아요. 스마트폰 이후 미국 10대 여학생들의 극단적 선택이 많아진 것도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의 영향이 큽니다. SNS에는 부유한 삶만이 보여지고 그것이 자기 삶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압박으로 작용하고요. 문제는 이런 심리를 극우세력이 정치적으로 잘 활용한다는 거예요. 복잡한 사회문제를 페미니스트 때문, 이민자 때문이라는 식으로 단순화하고 사람들의 불만을 한 방향으로 묶어버리죠. ‘리버럴은 위선자’다 하는 공격도 손쉬워지고 그것이 SNS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오고요. 기술의 변화가 젊은 층의 일상을 어떻게 바꾸었는가를 진지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 리버럴과 사민주의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어요. 기술발전으로 인한 일상과 정서의 변화를 너무 가볍게 본 거죠.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진영에서 혐오·선동을 통한 극우의 확산에 대해 보이는 반응을 세가지로 정리해보면 첫째가 ‘한줌론’입니다. 극단적 사례는 소수일 뿐이니 하나하나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두번째는 관심을 주지 않으면 알아서 사라질 것이라는 ‘먹이금지론’이고, 세번째는 어려서 그렇지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하면 달라질 거라는 ‘자정작용론’입니다. 어느정도 일리는 있는 말이지만, 여기에만 기대기엔 사태가 너무 커졌어요.

 

정신적 영토를 황폐화하는 극우의 심리전

이태호 한줌론, 자정작용론 등에 한계가 있다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스마트폰과 AI를 통해 인류가 가장 똑똑해진 시대라고들 합니다. 궁금한 것을 스스로 찾아볼 수 있고, AI한테 질문을 잘 던지면 양질의 정보도 받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강한 리더에 대한 의존과 맹신, 정치적 몽매주의가 기습해오는 것일까요?

 

김내훈 정보가 많이 있다는 것과 사람들이 실제로 정보를 잘 찾아보는 일은 다른 문제 같습니다. 정보가 알고리즘을 타고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에 내가 많은 것을 찾아보고 알고 있다는 착시가 생기게 되고요. 나아가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앞서 말한 과격화와도 연결되는데, 무지로 인한 불쾌감을 어떻게 성찰하느냐에 따라 학문적 호기심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만, 과격화의 경향 속에서는 불쾌한 자극이 오면 ‘극혐’으로 ‘급발진’하는 겁니다.

 

이승원 교육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할 텐데요. 이때 교육이란 민주주의제도와 규범을 배우고 사회가 서로 죽고 죽이는 곳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쌓는 과정이겠죠. 그런데 지금은 교육현장에서 아무리 이런 교육을 해도 스마트폰을 통해 극우 혹은 여성혐오 성향의 영상을 접하고 펨코(에펨코리아, 게임 커뮤니티로 출발해 2030 남성 중심의 종합 커뮤니티로 발전) 같은 커뮤니티에 쉽게 접속할 수 있어요. 사회적 규범과 질서 등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기 이전에 비뚤어지고 폭력적인 주장에 쉽게 노출되는 상황이죠.

 

황희두 기술의 발전은 생각의 외주화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자신이 보기 싫어하는 불쾌한 무엇을 누군가 긁어주면 그가 하는 말이 곧 진실처럼 받아들여지죠. 그리고 요즘 10대를 예전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스마트폰이 퍼지면서 더이상 예전의 「무한도전」 「1박 2일」 같은 ‘국민예능’이라는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제가 요즘 일부러라도 10대 대상 강의를 다니는데, 같은 교실에도 공통분모가 없습니다. 누구는 게임만 하고, 누구는 정치 콘텐츠를 보고, 누구는 브이로그를 봅니다. 그만큼 관심사가 미시적으로 흩어져 있어요. 팔로워가 수백만명인 인플루언서라는데 처음 들어보는 경우 많잖아요. 지금 상황은 ‘시선 전쟁’ ‘시간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보는 무한하지만 개인의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누가 어떻게 시선을 끄느냐가 중요해졌어요. 자극적이고 과격한 방식이 클릭을 쉽게 얻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저렇게 극단적·자극적으로 가면 안 돼’라는 입장을 취하면 선택에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독재에 맞섰다, 거대악에 맞섰다 하는 정서와 인식이 공유되었다면 지금은 그게 어렵습니다. 시스템은 사람들을 계속 쪼개기 때문에 ‘내 편’을 만드는 건 쉽지만 ‘우리’를 만드는 건 훨씬 힘들어졌어요. 이게 결국 연대와 공감의 어려움으로 이어지고요. 아직 어느 나라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말은 못 들어봤습니다.

 

이태호 그래도 저는 꿋꿋하게 인간은 연대하는 종이라고 믿고 싶은데요.(웃음) 극단적·자극적으로 가지 않으면 시선을 끌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우리가 거기에 항복하면 독약을 먹는 것 아닌가요?

 

황희두 물론 균형은 필요하지만, 지금까지 민주진영의 대응은 극히 미진했다, 사실상 실패에 가까웠다고 보는 입장이에요. 무엇보다 저들의 심리전·인지전을 주목해야 합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위기의식을 느낀 한나라당이 ‘사이버전사 양성’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2008년 정권을 잡은 이명박 대통령은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와 국가정보원(국정원)을 계속해서 언급했어요. 이때부터 이미 국가기관을 동원한 심리전을 진행하기 시작한 것이고, 그게 지금은 인지전 단계까지 넘어왔습니다. 내란 국면에서 ‘인지전 TF’를 꾸리려 했던 정황도 드러나고 있잖아요(「[단독] 방첩사, 사이버여론전 노렸나...계엄 전 ‘인지전TF’ 신설 추진」, 오마이뉴스 2025.2.4; 「[단독]특검 ‘사이버작전사, 계엄전 댓글부대 성격 TF 운영’ 의혹 수사」, 동아일보 2025.8.29.).

저들은 군사작전하듯 움직입니다. 전쟁에서 물리적 영토와 정신적 영토를 보면, 물리적 영토는 12・3 내란 당일 총을 들고 서 있는 군인을 볼 때 시각적으로 바로 와닿습니다. 그에 비해 정신적 영토는 보이지 않는 전쟁터인데, 여기 침투해 정치적 무기력을 학습시키는 일의 두려움은 우리가 너무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의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왝더독(Wag the dog)이라는 말처럼 정신적 영토에서 벌어지는 일은 시끄러운 소수에 의해 다수가 먹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인간의 뇌가 전쟁터가 되어버린 시대입니다. 미국에서 중국의 숏폼 동영상 플랫폼 ‘틱톡’을 퇴출할지 말지를 두고 논란이 일었던 것도 틱톡을 중국공산당이 개입한 인지전 도구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승원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 당시 기득권세력에게 큰 충격이었죠. 수십년을 지켜온 기득권에 대한 위협, 자신들의 실존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그때부터 소위 심리전을 펼친 것 아니겠습니까.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에 이들은 언론·경제 모든 분야를 통해 자신들의 흔들리는 기득권을 다시 공고화하려는 반격을 시도했습니다.

 

황희두 저들이 얼마나 치밀하냐 하면, 보편적으로 통하는 것이 있다 싶으면 민주진영의 것이라 해도 모방하고 흡수해 갑니다. ‘리박스쿨’의 배후로 지목되는 사람으로 이희범이 있는데(「리박스쿨 뿌리② 리박의 아버지가 만든 괴물 ‘아스팔트 삼총사’」, 뉴스타파 2025.7.10) 극우 네트워크 수십개를 꽉 쥐고 있던 인물이에요. 그가 운영한 곳 중 하나가 ‘자유연대’로 그 모티브가 ‘참여연대’입니다. 최근 사례로 치면 팬덤정치를 비난하면서 자신들은 청년 백골단인 ‘반공청년단’을 재등장시킨 방식이죠. 더구나 지금은 AI의 발전도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위험한 미행이나 도·감청이 아니라도 알고리즘 분석을 통해 훨씬 더 면밀한 사찰이 가능해지니까요. 최근 여론 지도층이나 주도자를 합성한 AI 딥페이크 유튜브 채널까지 나왔는데, 아직 어설픈 수준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속아서 응원 댓글을 달았어요. 기술이 발전할수록 거짓이 더 그럴듯하게 진실이 되고 무한 반복・유통될 수 있습니다.

 

이승원 말씀해주신 AI 문제는 저도 염려가 큽니다.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박사가 말했듯 AI를 핵문제처럼 생각해야 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같은 시스템 안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요. AI 기술이 극우화 전략에 동원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 동감하고, 국제사회가 모여서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논의하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는 블랙홀 그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청년극우는 왜, 어떻게 자라나는가

이태호 청년 백골단을 언급하셨는데 극우세력 형성을 위해 국가와 정당이 조직적인 심리전·인지전의 방식으로 간여해온 상황에서 청년들의 극우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청년극우만의 독특한 양상이나 형성 원인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보는지요?

 

김내훈 서구에서는 경제적 양극화나 기성정치에 대한 불만 때문에 극우가 탄생하는 맥락이 있다고 논의되지만, 한국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청년극우의 경우 대부분 서울에 사는 대졸 이상 학력자, 경제적으로는 중상층이 많습니다(「“서울 거주 경제적 상층일수록 극우 청년일 확률 높다”」, 『시사IN』 2025.7.2). 경제적 불만보다는 진보적 의제가 힘을 얻어가는 것에 대한 반발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 거죠. 그리고 청년들이 인터넷 혹은 또래 사이에서 쓰는 유행어나 단어를 보면 굉장히 빠르게 퍼져요. 문제는 이런 단어를 그냥 재미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정치 판단의 기준, 템플릿처럼 삼는다는 것입니다. 윤석열 당선 직후 MBC 「PD수첩」에서 ‘젠더 갈등과 여성가족부’라는 제목의 방송을 했어요(2022.3.15). 거리 인터뷰에서 한 20대 남성이 여가부가 말도 안 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대답해 어떤 정책이 그러냐고 되물으니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합니다. 잘 모르겠지만 여가부는 싫다, 그것이 자신의 신념이 된 거죠. 어느 조사에서는 34살 미만 응답자 중 절반 가까이가 ‘586이 뭔지 모른다’면서도 ‘586은 기득권이다’라는 말에는 80% 가까이 동의했어요(「KBS세대인식 집중조사① 586, 그들은 누구인가」, KBS뉴스 2021.6.22). 뭔지도 모르면서 반감을 키우고, 온라인이나 또래집단에서 주워들은 이미지나 단어를 자기 논리로 삼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승원 한국에서 젠더갈등, 20대 성별 인식 차이가 본격적으로 부각된 선거가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였던 것 같아요. 당시 20대 남성의 72.5%가 오세훈 후보에 투표했는데 60대 이상보다도 높은 득표율이었습니다. 20대 여성들은 오세훈, 박영선 후보에 각각 40%대의 비슷한 투표율을 보였습니다. 저들의 전략을 정치혐오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쪽이나 저쪽이나 똑같다’라고 주장하면서 무관심 혹은 혐오감을 부추기는 전략입니다. 트럼프도 유사한 전략을 썼습니다.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까지 싸잡아서 ‘워싱턴 엘리트’ ‘딥 스테이트’ 같은 말로 공격하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책을 썼죠. 이 또한 무관심 내지 혐오를 자극하는 방식이었고 이를 조직적으로 이끌어간 사람이 얼마 전 사망한 찰리 커크 같은 인물이고요. 양극화가 극심한 상황에서 청년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조직화된 소수 극우 스피커의 힘이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황희두 찰리 커크의 방식을 이준석이 지금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보는데요. 커크는 대학가를 돌며 반PC주의, 반페미니즘을 확산시키려 했고, ‘멍청한 페미를 박살냈다, 제압했다’ 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장면만 잘라낸 쇼츠로 승리서사를 확산시키며 강자에 동조하는 심리를 자극했어요. 처음에는 이게 일부 남성들에게 통하지만 결국 그들의 또래집단에 영향을 미치고 실질적 힘을 갖게 됩니다. 반사회적·혐오적 발언이 솔직하고 쿨한 것처럼 포장되고요. 아시다시피 박근혜정부 땐 세월호참사 유가족의 단식 농성장 앞에서 일베가 이른바 ‘폭식 투쟁’을 벌였어요. 그런데 그런 극단적 행동이 아니라도 일베 등 커뮤니티에서는 ‘유족들이 일상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잊어주자’ 하는 말이 많이 돌았어요. 공감과 연대를 막기 위해 그럴듯한 언어로 포장하는 겁니다. 최근 사례로는 ‘영포티’(young-forty)라는 말이 있는데, 원래는 과거 X세대였던 40대를 겨냥한 마케팅 용어였지만 요즘 남초 커뮤니티에서 진보적 성향의 40대를 조롱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에 MBC, 매불쇼, 김어준 등의 이미지를 결합하거나 진보적 성향의 글에 ‘영포티’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비난하고 고립시키는 거예요. 이게 쿨한 것, 재미있는 게임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이 저들의 심리전 전략 중 하나입니다. 여성과 남성이, 40대와 20대가 서로 선을 긋고 싸우게 하고, 결국 진실이나 정치 자체를 혐오하게 만드는 거죠. 일종의 우민화 정책입니다.

 

김내훈 말싸움을 할 때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어요. 내가 어떤 말을 하든지 말끝마다 상대가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하는 거죠. 논쟁의 중심이 되는 단어의 정의가 한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으면 어떤 이야기를 하든 토론은 일방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늦게 잡아도 2021년 4월경부터는 정치담론이 이런 형편으로 흘러갔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민주진보 세력이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문재인정부 때 화두였던 단어들로 ‘위선’ ‘공정’ ‘청년’ 등이 있었는데, 정부 및 여당 인사들이 이에 영합한답시고 했던 발언들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반감만 더 샀습니다. 이 단어들의 의미가 담론적으로 왜곡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편에 당시 ‘청년 정치인’들이 내부비판이나 반성이랍시고 ‘586의 위선’ ‘586 용퇴론’을 운운하니까 지지율을 깎아먹기만 했지요. 요컨대 지금 수많은 중요한 단어들이 극우의 언어에 의해 심각하게 오염돼 있다는 겁니다. 민주주의라는 말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금 청년세대에게 민주주의를 지지하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지지한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극우의 언어는 기표가 비어 있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믿으면 안 돼요. 가령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이들이 이재명 대통령이 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민주주의라는 소중한 것, 이를 지키는 시민의 역량에 대하여

이태호 극우문제가 어렵고 복잡하다보니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자꾸 부정적인 기류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악화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씀해주셨을 텐데, 극우가 득세하는 배경에는 수구 기득권세력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민주화과정과 시민사회의 자구적 역동성을 떠올려보면, 시민들은 정치적 리더가 타락하거나 부재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연대를 조직하고 변화의 요구들을 만들어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만 해도 민주진영에 일정한 대안이 보이지 않자 시민들이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직접 발굴하고 리더로 키운 것이잖아요.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미선이·효순이 사망사건 때 촛불이 일었고 이후에도 정치적·사회적 위기 때마다 시민들은 힘을 모아 촛불대항쟁을 펼쳤어요. 수구 기득권세력이 이러한 시민들의 에너지에 공포를 느끼고 경합하는 과정에서 공권력을 동원하며 온갖 발버둥을 쳐온 결과가 지금의 극우현상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김내훈 저는 우리가 두차례의 대통령 탄핵과 평화적 정권교체를 경험하면서 오히려 다소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착근시킬지 수십년 고민했던 나라라는 것을 거의 잊다시피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민주주의 공고화를 위한 순탄치 않은 여정을 지나면서 여러차례 고비와 부침을 겪었는데 이번 내란사태도 그 연장선에 있고, 내란의 진압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최근에 옮긴 책으로 정치학자 신디 L. 스캐치(Cindy L. Skach)의 『법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배신하는가』(위즈덤하우스 2025)가 있는데, 민주주의 원칙과 공동체적 가치관이 시장경쟁과 이윤추구의 관행에 밀려나는 문제가 임계에 달하면서 정치와 시민의식의 심각한 퇴행이 누적되었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주체적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삶의 지침이 법 해석의 전권을 쥔 소수의 사법관료 엘리트에게 완전히 위임되고, 정치적·정무적인 결정도 법에 의존하게 된 현실을 비판합니다. 이는 우리가 지난 내란사태를 거치면서 똑똑히 목격한 바이고, 사법개혁이라는 의제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죠. 여기서 더 큰 문제는, 원래 넓은 개념이었던 시민이 좁은 의미의 ‘준법시민’으로 축소되었고 극우화 물결이 이 ‘준법성’이라는 시민성의 최후의 보루마저 무너뜨린다는 겁니다. 극우세력이 불신을 조장하는 선동을 하고, 엘리트 집단이 이 불신을 증폭시키는 행태들을 하면서요. 황희두 선생님 말씀처럼 오랜 시간 우리의 정신적 영토가 많이 훼손되어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승원 말씀처럼 마냥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유럽에서 극우가 확산되고 미국에서는 MAGA를 앞세운 트럼프가 당선하고, 미국의 스티브 배넌(Steve Bannon)은 ‘더 무브먼트’라는 이름으로 극우연대를 유럽까지 확산시키려 시도했어요. 한국도 서부지법 폭동이라는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고요. 글로벌 환경과 극우의 득세가 위협이 되고 있고, 실제 지난 대선에서 김문수 후보의 득표율이 41.15%나 됐습니다. 한쪽에서는 ‘막아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다른 한쪽에서는 ‘너무하다, 억울하다’는 심정을 느끼며 물과 기름처럼 나뉘어 있는 거죠. 그럼에도 저는 기본적으로 이 사회의 힘을 믿는데요. 지난 12월 3일 밤 슬리퍼를 끌고 목숨 걸고 집 밖으로 나선 시민들의 힘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지탱되었어요. 민주주의는 유리알 같아서 언제나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고 닦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꾸역꾸역’이지만 한발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내훈 얼마 전 『몸, 스펙터클, 민주주의』(창비 2025)에 대한 서평(「한국 민주주의의 ‘상상계’,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창작과비평』 2025년 가을호)을 썼는데, 책에서 제가 특히 와닿았던 부분은 한국인들이 박근혜나 윤석열 같은 사람을 탄핵할 수 있는 시민적 역량은 충분하지만, 애초에 그런 사람들을 뽑지 않을 수 있는 역량은 아직 충분히 길러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저는 우리가 두번의 힘든 탄핵을 거치면서 이제는 저들을 끌어내릴 역량마저도 소진해가는 중일 수 있다, 시민의 역량이라는 것이 영원히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는 점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민의 역량은 조금씩 소모되는 것이고 계속 훈련되어야 합니다. 시민의 민주적 역량이 어떤 광장에서의 이벤트로만 터져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일상에서의 다원화와 진보적 문화를 만드는 일이나 다른 미래 비전을 위한 진보적 논의도 사치스러워 보이게 될 테고요.

민주진영이 기고만장해선 안 된다고 한 까닭도, 시민의 정신적 영토를 훼손하며 시민역량을 갉아먹는 세력은 끊임없이 준동하기 때문입니다. 대선 때마다 들리는 뻔한 말이 있습니다. 이른바 ‘소신투표’를 독려하며, ‘최악의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또 탄핵하면 된다’는 말이죠. 무책임의 소치입니다. 저는 우리가 박근혜 탄핵을 거치면서 시민역량의 절반 이상을 소진했다고 봅니다. 그 탓에 ‘최순실 게이트’에 견줄 대형 사건들—명품백 수수, 채해병 사망, 명태균 게이트 등—이 터졌음에도 국민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고, 내란이 일어나 군인들이 국회로 간 것을 생중계로 목격한 뒤에 비로소 큰 흐름으로 들고일어났습니다. 다음번엔 들고일어날 마지막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이태호 그렇다면 시민의 역량은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극우의 거짓뉴스에 맞선 팩트체크의 중요성이 그간 많이 강조되어왔지만 이것만으로는 다소 부족하고 아쉬운 처방 같습니다. 그보다는 지금 이재명정부에서 숙의 공론장의 필요성을 강조하듯 정치적 진영화로부터 안전한 토론공간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김내훈 팩트체크에서 한발 나아가 디지털 리터러시를 포함한 제반 리터러시의 함양이 필수적이라고 봅니다. 그것이 시민의식 교육과 연관이 될 텐데,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 불안, 불만을 자신의 정치적 언어로 능동적으로 표현할 어휘와 수단을 결여한 상태에서 극우진영이 여기에 언어를 부여해주고 있기 때문에 이 언어를 부여하는 경로를 차단하는 것이 1차적인 과제입니다. 여기서 나아가 사람들이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리터러시를 갖추게 하는 것이 더 큰 과제이고요.

 

황희두 2030 남성 하면 ‘이대남’ ‘이준석 지지자’로 싸잡혀 얘기되고, 민주진영 커뮤니티도 보통 4050을 주축으로 합니다. 우리가 공론장의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 민주진영 청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 꼭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이런 공간이 생기면 극우세력의 표적이 되기도 십상이지만, 어쨌든 일베와 펨코의 의견만 보고 20대 남성들의 의견이 이렇구나 하고 다 아는 것처럼 넘기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드리면 팩트체크나 리터러시, 안전한 공간 등을 논의할 때 민주진영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 ‘규제’입니다. 지금 청년들에게 민주당은 재미있게 게임하고 있는데 갑자기 와서 컴퓨터 플러그를 뽑는 규제의 이미지예요. 그 거부감을 활용하는 게 이준석 같은 인물이고요. 이제는 우리가 먼저 ‘자유의 철학’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온라인 영역에서 자유를 강화하면 혐오범죄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지만, 그럴수록 진정한 자유의 철학이 무엇이며 어떠한 방향인지 토론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하면서 자유로운 공론장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이승원 이전에는 사실 저들과 굳이 말을 섞지 않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고, 개인적으로 댓글도 일부러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유튜브 채널 ‘14F’(www.youtube.com/@14FMBC)에서 제가 운영하는 코너인 ‘월드클로즈업’ 영상에 맥락 없는 중국혐오 댓글들이 달리더라고요. 그런 걸 보건대 팩트체크가 전부는 아니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최소한 팩트에 어긋나는 것들을 바로잡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고요. 나경원 주진우 같은 사람들이 정제되지 않은 막말과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그냥 내뱉고 있는데 지금은 그 갈라치기에 열광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어요. 표현의 자유에 있어서도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레드라인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숙의민주주의가 꼭 필요한데 지금은 숙의 공론장을 가꾸어갈 체력이 소진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안타깝습니다.

 

이태호 정리해보면 작은 것부터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 같습니다. 결국 극우현상의 반대편에는 정치적·시민적 다원주의의 회복이 있고, 혐오와 배제를 넘어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연대할 수 있는 사회가 우리가 기대하는 방향이겠죠. 그런데 이것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황희두 ‘승리한 게 정의다’라는 세계관과 ‘정의가 승리한다’는 세계관의 대결 속에서 민주진영은 후자를 밀어붙이지만 오히려 무기력이 학습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가 팩트다, 옳은 이야기다, 우리가 이만큼 진심으로 정치를 하고 있다 하는 어필에만 의존해온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시민사회와 정당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가 필요합니다. 특정 키워드를 오염시켜서 그 리스크를 민주진영에 뒤집어씌우는 전형적인 패턴이 있는데 여기 주목해야 합니다. 그나마 ‘합리적’인 정치를 하겠다던 김재섭 의원이 이재명정부의 정책을 두고 ‘부동산 계엄령’이라는 말을 쓰고 있어요. ‘카톡 검열’ ‘입법 내란’ ‘민주 독재’ 같은 프레임을 평시에도 가랑비 옷 젖듯이 계속 뿌려대는데 정치 저관여층에는 이런 언어가 먹힙니다. 집권여당과 민주진영이 이런 키워드와 프레임 전쟁의 중요성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합니다.

 

김내훈 진보진영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 ‘현상이 아닌 본질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상만 보다가 본질을 놓친다고 하는데, 저는 반대로 본질을 찾으려다가 현상을 완전히 놓쳐버린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 즉 유튜버들의 혐오 선동이나 가짜뉴스 같은 문제와 언어의 오염에 대해서 더 큰 문제의식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내부에 대해서도 돌아봐야 합니다. 진보진영 일부에서 간혹 ‘차악이 최악이다’라는 논지를 펴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사회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이상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똑같이 나빠질 뿐이라는 뜻이죠. 그러나 시민성과 시민의식은 지도자의 수준과 동기화됩니다. 최악의 대통령이 되면 그 나라의 시민성도 최악으로 곤두박질쳐요. 따라서 최악을 막는 것이 언제나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또 이들은 대통령이 대놓고 나쁜 짓을 하면 시민들이 자동적으로 들고일어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논리로 삼기도 하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아주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논리로 이념적·도덕적 우위를 점하려 하는 것은 사회혁명에 대한 열망을 빙자한 냉소일 뿐이에요. 이런 냉소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선거연대가 필수적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함께 키워가야 할 ‘빛의 혁명’ 에너지

이태호 선거연대의 필요성에 대한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흐른 김에 제도정치권에서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을 짚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내훈 프랑스와 독일 등에서 극우의 집권을 막아내고 있는 이유로 ‘방역선’ ‘방화벽’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것이 가능한 것은 결선투표제와 같은 제도의 뒷받침이 있어서이지만, 극우세력을 절대로 협치 대상으로 보지 않는 원칙이 서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선거연대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에도 결선투표제 같은 제도적인 보완이 있으면 좋을 것 같고요. 거듭 이야기한 것처럼 극우라는 최악을 막고 퇴출시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담론과 시민성의 수준이 지도층의 수준과 얽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시민성의 완전한 결여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세력을 축출한 뒤에야 비로소 후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비상한 상황에서는 비상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황희두 제가 민주당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당에 불만이 굉장히 많습니다. 민주당이 선거를 치를 때마다 애쓰는 것은 카카오톡 지역 단체채팅방입니다. 지역위원장이 카톡방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았냐가 성과가 되는데, 이제는 이게 아무 쓸모가 없어요. 그 카톡방에서 지난 문재인정부가 잘했네 못했네, 정책 방향이 문제네 속도가 문제네 하며 우리끼리 싸우는 동안 신남성연대는 인터넷 기사나 커뮤니티 글에 좌표를 찍고 우르르 달려가서 여론작업을 합니다. 민주진영이 가진 무기는 자유와 다양성인데, 그걸 유지하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싸울지 당에서 더 많이 토론해야 합니다. 그게 앞서 말씀드린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이고요.

중요한 건 극우적 언어가 쿨하고 힙한 것이 아니라, 찌질하고 부끄러운 것이라는 인식을 퍼지게 해서 사회적 집단면역을 늘리는 일입니다. 그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제 경우엔 어떻게 하면 지금 청소년·청년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게임의 비유를 들면 10대 학생들이 금방 이해합니다. ‘게임에서 나 하나 잘났다고 계속 어그로 끌고 트롤짓하는 플레이’가 바로 이준석식 정치라고 이야기하면 바로 설득이 돼요. 이런 플레이어가 있으면 그냥 무시하고 게임에 집중하는 게 현명한 선택입니다. 다만 이준석처럼 언론에서 띄워주는 경우엔 적극 대응이 필요하고요. 한편으로 스타크래프트처럼 혼자 싸우는 개인전이 아니라, 리그오브레전드처럼 한 사람이라도 삐끗하면 다 같이 지는 팀 게임에서는 플레이어들이 본능적으로 깨닫습니다. 협업과 인내, 그리고 공동체적 감각이 승리의 핵심이라는 것을요.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르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어도, 민주주의라는 팀을 함께 지켜내기 위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 지금 우리가 극우세력들에 맞서 가장 시급하게 가져야 할 태도와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태호 저는 우리 시민사회의 축적된 역량을 믿는 사람으로서 ‘빛의 혁명’에서 드러난 힘을 살려가는 게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제안을 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승원 저는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노력은 내란의 완벽한 청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죄를 지으면 사회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어요. 지난 내란사태를 겪으면서 우리가 전두환·노태우를 사면하지 않고 끝까지 벌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통한이 들었어요. 민주정권의 대통령 임기가 지나고 나서 보니 대통령은 바뀌어도 다른 국가권력은 그대로였던 거잖아요. 가령 MB 때 댓글 여론조작 작업을 했던 국정원 세력이 그 자리에 있었던 거예요. 이제는 뒤에서 암약하던 세력들을 발본색원하고 확실하게 청산해야 합니다. 내란청산은 애매한 것도 아니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분이기 때문에 이번이 중요한 기회예요.

 

황희두 시급하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이버내란 특별법 제정입니다. 공권력이 전쟁에서 쓰이는 기술을 자국민한테 적용하려고 했던 내란의 정황이 나온 만큼 여기에 대해선 철저히 추적해야 해요. 극우의 인맥·정보·자금이라는 세가지 네트워크를 추적하려면 특별법이 필요합니다. 가령 양지회(국정원 퇴직자 친목단체), 양우회(국정원 현직 공제회)가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어 어마어마한 자금을 운용하고 있다는 기사(「‘양지회’도 있다」, 한겨레 2016.9.7)가 나온 것이 벌써 10여년 전인데, 기밀이라는 이유로 아직도 이 문제를 건드리지 못하고 있어요. 이번 내란사태 때 인지전 TF, 사이버정찰 TF가 등장했고, 비밀해킹부대 ‘900연구소’와 대북감청전문부대 777사령부까지 내란에 투입하려고 했던 정황이 드러났는데, 특검이 왜 이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는지 갑갑할 따름입니다. 국가권력은 과거에는 빨갱이 간첩몰이를 했고, 이제는 그걸 정신적 영토로 끌어와서 대중의 심리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촛불혁명, 빛의 혁명에 나섰던 시민들께도 대한민국 정보기관이 행했던 수많은 공작의 역사를 잊지 말고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김내훈 저는 본질보다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정치투쟁은 담론투쟁이자 헤게모니 투쟁인데, 우리의 언어를 오염시키고 담론을 퇴행시키는 진원지와 패턴을 봐야 해요. 저는 기본적으로 대중이 불빛을 좇아가는 나방과 다르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김내훈 「시위=나쁜 것? 시민은 정부 좇는 ‘불나방’이 아니다」, 한겨레 2022.12.24. 참조). 이때 불빛은 오늘 계속 이야기했던 유행어일 수도, 밈일 수도, 당대의 화두가 되는 단어일 수도 있어요. 지금은 극우에서 불빛을 설치하고, 일부 정치와 언론이 그 불빛을 증폭시키면 사람들이 휩쓸려가고 있는데 그 패턴을 끊어야 합니다. 저쪽에서 전유하는 언어들을 우리가 재전유해와서 우리의 방식으로 재정의하거나 그 단어를 쓰면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려야 합니다. 새로운 불빛을 만드는 것도 물론 필요한데, 가령 미국에서는 오카시오코르테즈(A. Ocasio-Cortez, AOC)의 ‘Tax the Rich’(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라), 샌더스(B. Sanders)의 ‘억만장자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같은 구호에 시민들이 공명한 바 있어요. 우리에겐 내란이라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저들에게 ‘반애국세력’ ‘반국가세력’이라는 프레임을 씌울 조건도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과 위치에 불빛을 설치하고 빛의 혁명 에너지도 더해진다면, 극우화·과격화를 덮는 더 긍정적인 에너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태호 오늘 긴 시간 극우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정의로운 사회가 되면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같은 막연한 낙관보다는 극우화를 지속시키는 구체적 세력과 메커니즘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아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번 내란사태 역시 그 구조의 일부로 보고, 명확한 청산과 개혁이 필요하다는 말씀도 있었고요. 아울러 진보진영 역시 현실을 직시하는 정치적 프로그램과 연대 등 실질적 대응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짚어주셨어요. 오늘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이 좀더 나은 세상을 함께 꿈꾸고 만들어갈 수 있는 모두의 힘이랄지, 마음속의 빛이랄지, 하여간 혐오와 적대를 넘어설 긍정적인 연대의 에너지를 모아 빛의 혁명을 이어가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2025.10.25.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