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 K담론을 모색한다 ⑧
조영래의 실천적 인권사상
박범순 朴範淳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인류 세연구센터장.
공저서 『사회 속의 기초과 학』, 편서 『인류세 풍경』, 역서 『지구와 충 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등이 있음.
parkb@kaist.edu
1. 조영래는 누구인가
한국현대사에서 조영래(趙英來, 1947~90)의 독보적인 행적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60년대 한일회담 반대와 삼선개헌 반대를 비롯해 여러 사회정치적 이슈에 대한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70년대에는 유신독재에 맞선 투쟁에 나섰으며, 80년대에는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인권변호사로 활약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흐름이 교차하는 격랑의 한복판에서 국가폭력에 대항하고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친 활동가였다. 조영래가 걸어간 길은 정학과 근신, 투옥과 피신, 분노와 상실감으로 점철된 가시밭길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정의의 편이었고 억눌린 이들의 벗이었다. 1990년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를 추도하는 자리에서 1세대 인권변호사 홍성우는 “조영래는 항상 모든 사람들의 대장이었으며 (…) 기댈 언덕이었”다며 “조영래가 있음으로써 80년대 그 어둠의 세상도 신바람나고 즐거울 수 있었”1다고 말했다.
무엇이 조영래를 그 길로 이끌었을까? 기성 엘리트들에게 만연한 처세술을 따르는 대신 그는 왜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진실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까? 집안 교육 때문이었을까, 종교적 가르침의 영향이었을까, 사회변혁의 이념을 좇은 것일까?2 조영래는 혼신의 노력으로 이룬 성과에 대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대중매체와 종종 인터뷰는 했으나 대부분 80년대 그가 변호한 사건에 대한 것이었고, 각종 칼럼이나 기고문에서도 자기 경험을 내세우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겸양지덕(謙讓之德)의 자세를 넘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보고 활동했다.
조영래는 인권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 역사의 현장에서 그 흐름을 바꾼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인권은 실천적 원리였다. 헌법에 나오는 추상적인 조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발전과 노동현실, 민주주의와 민주화, 근대성과 생태환경, 과학과 법 사이의 긴장관계를 직시하고 해석하고 조율하기 위한 방향타와 같았다. 그런 만큼 이 글에서는 조영래의 인권사상이 단순히 해외에서 유입되어 적용된 것이 아니라 해방 후 우리 민족이 걸어온 역사적 경험과 현실에 뿌리를 두고 형성되었음을 강조할 것이다.
2. 민중사상으로서 ‘전태일 사상’
조영래는 일찍이 노동현장에 관심을 두었다. 1969년에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노동계약의 효력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석사논문 연구를 시작했다.3 이 작업을 잠시 중단하고 사법고시 준비를 하던 중 전태일 분신 소식을 듣게 되어, 법대 학생장(葬)을 주선하고 가칭 ‘민권수호학생연맹준비위원회’를 발족해 성명서(「농성근로자 분신자살: 처우개선 외치던 청년, 「근로기준법」 껴안고」) 발표를 주도했다. 여기서 전태일의 “내 죽음 헛되이 말라!”라는 유언과 함께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절규, 이소선 여사의 아들 시신 인수 거부 등을 소개하며 학우들에게 “전태일 선생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맙시다”라고 호소했다. 이를 시작으로 이화여대·연세대·고려대에서도 추도식과 집회가 열렸고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노동자 실태조사 실시와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4
조영래가 전태일의 전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몇년 후의 일이다. 1971년 사법고시에 합격한 직후 조영래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함께 옥살이를 한 장기표를 통해 전태일의 수기를 넘겨받았다. 곧이어 발생한 민청학련사건으로 수배되어 1974년부터 피신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 기간에 틈틈이 이소선 여사와 전태일의 지인을 만나 자료수집과 인터뷰를 하며 1976년 가을에 초고를 완성했다.5
『전태일평전』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노동자. 1948년 9월 28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랐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선언’이라고 부른다.”(17면)6 평전은 시간순으로 전태일의 어린 시절부터 평화시장의 재단사로 일하던 시절, 그리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가 좌절하고 공사판을 전전했던 때를 살펴본다. 그리고 분신의 결심과 실행의 순간을 담은 ‘1970년 11월 13일’을 다루기 전에 ‘전태일 사상’이라는 제목의 장을 별도로 배치했다. 이는 앞서 서문이 예고했던바, 전태일이 품었던 인간애의 철학적·사상적 중요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제목이다. 전태일의 ‘인간선언’이 우발적이고 감정적인 행위가 아니라, 삶과 세상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과 논리적 판단의 결과였음을 강조하려 한 것이다.
여기에서 조영래는 전태일 사상의 특징을 네가지 관점에서 조망했다. 첫번째는 그의 사상적 정체성이 철저히 “밑바닥 인간의 사상”(221면)이라는 것이다. 중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노동판에 뛰어들어 비인간적인 현실의 벽에 부딪혀 시달리고 지친 사람에게도 사상이 있고, 그것은 “그 어떤 고명한 철학자의 다변(多辯)보다도 더욱 생생하고 감동적인 진실을 담은 사상일 수가 있”(222면)다는 점이다. 가령 조영래는 전태일이 때와 기름에 전 운전수 모자를 쓰고 일하는 노동자를 본 뒤 “사실 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 때에 절은 모자가 하고 있는 걸세.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216면)라고 적은 편지를 소개한다. 설혹 그가 ‘소외’라는 개념을 알지 못해도 노동자가 노동 자체에서 멀어지게 된 소외와 시대적 모순을 그 누구보다 절실히 표현하고 있었음을 본 것이다.
조영래가 전태일의 현실인식과 함께 특별히 주목한 것은 ‘현실의 패자’에 대한 측은지심이었다. 이들을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로 보는 인간에 대한 사랑은 그에게 관념과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생생한 체험이었다. 그럴듯한 이론이 아닌 삶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이러한 깨달음을 조영래는 자생적으로 성장한 민중사상이라고 보았다.
전태일 사상의 두번째 특징은 “각성된 밑바닥 인간의 사상”으로, 조영래는 이 각성을 세계관의 전환, 가치관의 전환, 나아가 민중관의 “감동적인 전환”이 일어나는 과정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거꾸로의 거꾸로, 사회의 거꾸로 된 가치관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거꾸로 뒤집어놓는다. 그것은 자기비하에서 자존으로, 비굴에서 긍지로, 공포와 위축에서 분노와 용기로, 의존과 자학에서 자주와 해방으로, 체념과 침묵에서 비판과 투쟁으로 전환하여가는 사상, 노예에서 인간으로 거듭나는 민중의 사상이다.(223면, 강조는 원문)
전태일 사상의 세번째 특징은 이 각성된 민중의 투쟁과 관련된 것으로,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완전한 거부-완전한 부정”(226면)이다. 조영래는 그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탐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존 사회의 조직과 시스템을 ‘덩어리’로서 인식하고 이에 타협하거나 편입되기를 거부했으며 그것을 깨고 분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음을 전한다.
조영래는 전태일이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개혁의 사상·행동의 사상”(같은 면)을 네번째 특징으로 뽑았다. 이것은 개인적인 결심과 행동을 넘어서 한 인간도 남김없이 존중받는 사회와 그 질서, 즉 “모두가 용해되어 있는 상태”(227면)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전태일 사상이 내포한 연대와 협력의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서 조영래는 평전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유서의 전문을 실었다.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339면)
3. 조영래의 인권사상: 국가권력 비판부터 환경권의 구성까지
전태일을 부활시키고 그의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조영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과장된 평가가 아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은 전태일 정신을 하나의 민중사상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에서 조영래 본인도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조영래가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80년 초 도피생활을 마치고 복권된 후 사법연수원을 다시 다니면서 공해소송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에서 뒤늦은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83년에는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개설했다. 변호사로서 한국사회에서 새롭게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고 구상했던 이 시기에 전태일 사상은 그에게 중요한 가이드가 되었다.
하나의 예로 1981년 말 사법연수원에서 검사시보로 4개월간 재판에 참여했던 경험을 마무리하며 쓴 일기에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가 다룬 사건은 주로 업무상과실치사, 절도, 걸인 폭력 등 사회적 지위가 낮은 민중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이들에게 과도한 판결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했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도 경험했다. 이에 대해 그는 “이제 어느덧 조금씩 타성이 붙어가는 듯하다. 묶여 온 사람들을 바라보는 전율도 이젠 점차로 각질화되어 일상의 무감동에 조금씩 조금씩 압도되어간다”면서 “기이하게 주어진 넉달의 기회를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가장 맑고 신선한 숨결로 부딪쳐나아가”리라 다짐하고, 적어도 자세만이라도 바르게 갖자고 결심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다른 것은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더이상 좋을 수가 없겠다.”7
조영래는 이러한 자세로 전태일의 ‘밑바닥 인간의 사상’을 실천했다. 변호사로 일한 7년 동안 굵직한 노동사건과 시국사건을 다수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8 제도적·관행적으로 시민의 권익을 침해한 사건도 다루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경숙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여고를 졸업하고 봉제수출업체에 근무하던 이경숙(당시 24세)이 교통사고를 당해 회사를 다니지 못하게 되어 받은 배상금에 대한 것이었다. 1심 법원은 한국 여성이 통상적으로 결혼과 동시에 퇴직하고, 평균 결혼연령은 26세이므로 손해배상 산정은 25세까지의 수입만을 고려하는 것이 옳다는 판정을 내렸다. 근로기준법상 근로 가능연한인 55세와 다르게 판단한 것이었다. 이에 여성의전화·여성평우회·또하나의문화 등 여성계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조영래는 무료로 사건을 수임해 항소심 승소판결을 이끌었다. 그의 주된 논지는 이 사건을 미혼 근로여성들의 지위문제를 넘어서 이혼시 위자료 산정문제, 재산분할청구권의 입법문제 등 여성 전체의 권익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며, 남성지배적 편견을 넘어 시대적 변화 속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영래는 이처럼 법적 판결을 통해 민중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오랜 관습을 바꾸고 제도개혁의 길을 열었다. 동시에 사회시스템을 움직이는 정치적·경제적 관계와 국가권력, 바로 그 ‘덩어리’에도 소송의 방법으로 도전할 수 있다고 믿고 탐색했다. 이와 관련해 이정표가 된 세가지 사건에서 그의 의지와 전략을 볼 수 있다.
(1) 한국 최초의 집단소송: 망원동 수재사건
1984년 9월 1일부터 내린 집중호우로 인해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유수지 일대가 물에 잠기는 수해가 발생했다. 망원동 유수지는 평상시에는 물이 배수관로를 따라 한강으로 흘러가도록 되어 있고 한강 수위가 높아지면 유수지 쪽 배수관로의 수문이 차단되어 한강물의 역류를 막을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는데, 이 수문상자가 붕괴한 것이다. 피해를 본 가구는 총 1만 7900여가구, 피해주민은 8만여명에 달했다. 망원동 주민 80명이 서울시와 현대건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피해주민들이 조영래에게 소송을 의뢰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조영래가 실의에 빠진 이들을 만나고 설득해 법적 절차를 밟도록 한 것이다. 거의 3년을 끈 이 1심의 승소판결이 언론에 보도되자 곧 5천여가구 2만여명이 대거 소송장을 제출했다. 한국에서 집단소송의 선례를 만든 초유의 사건이었다.
쟁점은 분명했다. 홍수 피해를 자연재난으로 인한 불가항력적 천재(天災)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수문상자 시공자와 관리자의 책임으로 인한 인재(人災)로 보아야 할지였다. 이 문제는 설치물의 안전성 구비여부에 대한 것이기도 했기에,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전문지식이 필요했다. 여기서 조영래는 두가지 어려움에 봉착했다. 시당국과 엮인 문제이기에 전문가 자문에 응하는 공학자를 찾기 어려웠고, 이 사건을 ‘과학논쟁’으로 유도해 판결을 지연하려는 서울시의 의도에 대응해야 했던 것이다.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지 못한 어려움은 토목학·수리역학·수문학·콘크리트기술 등 관련 서적을 독파하며 해결해나갔다.9 서울시의 지연전략에 대해서는 법정에서 치열하게 다투는 것 외에 다른 대응방법이 없었다.
조영래가 법정에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그가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볼 수 있다. 과학과 공학의 전문지식을 필수적이라 파악하면서도 과도한 과학적·공학적 입증을 요구하거나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법적 판단을 내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가령 서울시 의뢰의 전문가 감정서에서 우리나라 실정은 전반적으로 ‘저수준’이니 망원동도 ‘보편적 안전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적은 것이나, 그 감정서를 제출한 전문가가 자신의 논문에서 저지대 주민은 홍수피해를 회피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한 바 등을 지적하며10 과학자로서 최소한의 성실성과 책임감을 버리고 서울시를 감싸는 열의에 의문을 던졌다. 이것은 국가권력과 관련된 문제였다.
홍성우는 법률전문가로서 이런 집단소송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강조한다.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법률 구조활동이나 단순히 형사피고인의 인권변호를 하는 것을 넘어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으로 “복지 차원으로까지 인권변호활동의 폭을 넓혀가는”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11 조영래의 의도는 사실 그 이상이었다. 망원동 수재사건을 통해 시민들이 이전엔 생각해보지 못했던 방법으로 국가권력에 대항해 진리를 말하고 저항의식을 경험하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각성’의 경험이었다. “시민들이 공권력을 한번 이기고 나면, 그 경험을 하기 전과 후의 시민의식은 완전히 별개가 됩니다. 혁명을 겪기 전과 후의 국민의식이 완전히 다르듯 말예요”12라고 한 대담에서 말한 것처럼.
(2) 국가폭력에 맞서다: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1986년 6월 위장취업 혐의로 부천서에 연행된 권인숙을 문귀동 경장이 노동운동과 관련된 정보를 빼내기 위해 강제추행해 성고문한 사건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권인숙을 접견한 변호인단은 ‘풍문’처럼 여성계를 통해 전해들은 성고문행위가 사실임을 확신하고 7월 고발장을 제출했다. 인천지검은 성적 모욕이 없었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문귀동을 기소유예 처분해 온 국민의 공분을 샀다. 전국에서 집회가 열렸다. 변호인단은 대규모로 재편되어 9월에 재정신청을 냈으나 사법부는 이를 기각했다.
이 사건에서 조영래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성고문 사실을 말하기 쉽지 않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무릅쓰고 정권의 부도덕성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권인숙의 용기와 투혼에 감명받아 거의 매일 권인숙을 찾아가 대화하고 공소장 작성을 주도하며 기자회견을 자청해 진행상황을 공유했다. “피고인석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로 시작하여 “처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는 슬픔과 절망으로 왔으나, 이제 우리는 가슴 가득한 기쁨과 희망으로 권양의 승리에 대하여 증언하고자 합니다”로 마무리되는 그의 유명한 변론13은 1986년 11월 성고문사건의 재정신청이 기각된 후 쓴 것이다. 이 감동적인 변론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권인숙에게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고, 그녀는 1987년 6월항쟁 이후에야 특사로 풀려났다. 성고문사건에 대한 재수사 역시 6월항쟁 이후에야 추진되어, 2년 뒤에 문귀동에 대한 징역 5년이 선고되고 피해자에 대한 4천만원 위자료 판결이 내려졌다.
조영래의 변론문은 형식과 내용에서 『전태일평전』과 유사한 점이 있다. ‘운동권 학생’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불리는 젊은이들의 등장, 경제성장의 주역이면서도 그 성과의 배분에서는 철저히 소외되어온 노동자들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대학생 신분을 숨기면서까지 현장에 뛰어든 위장취업자들, 기성세대에서는 보기 힘든 이 젊은 세대의 “놀라운 도덕적 용기”에서 조영래는 부활한 전태일을 보았다. 이들은 4·19에서 5·18까지 수많은 시련을 이겨낸 “우리 민족의 도덕적 원기와 사회적 양심을 대변”해온 사람들의 계보를 이어가는 세대였다.14
조영래는 권인숙도 새로운 세대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15 생활의 큰 어려움 없이 순탄하게 성장해 서울대에 들어갔으나 기성세대에게서 듣고 배워왔던 수많은 것이 거짓임을 깨닫고 사회정의와 현실문제에 대한 의식을 키워간 과정을 소개했다. 이런 배경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가명으로 공장에 취업했다가 며칠 후에 자진퇴사한 권인숙의 행위를, 말하자면 “그 양심의 표현을 단죄할 수 있는가” 물었다. 타인의 신분증을 사용한 사실이 있다 해도 더 큰 진실은 대학생의 공장 취업을 불순하게 보고 막으려는 정부의 발상, 노동운동 자체를 불온시하는 관점 자체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조영래는 “이 재판은 거꾸로 된 재판”이라고 말하면서 인권과 인륜과 사회의 법질서를 유린한 자는 문귀동이라는 논지를 폈다.16
그러나 조영래의 목표는 문귀동 한 개인에 대한 단죄가 아니었다. 그를 비호하고 진실 은폐의 조연이 되었던 다른 경찰들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었다. 전태일이 말한 ‘몸서리치고’ ‘저주받을’ 현실을 만드는 기존 사회의 ‘덩어리’를 더 크게 만드는 조건들의 혁파가 그의 목표였다. 조영래의 논리 싸움은 서울고등법원의 재정신청기각 결정 이후 본격화됐다. 재판부가 놀랍게도 원심과는 달리 피의자 문귀동이 “추행을 한 사실은 인정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폭언·폭행은 있었으나 성 모욕행위는 없었다”고 주장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똑같은 증거를 두고 검찰과 재판부가 다른 결과를 냈다면, 검찰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외부세력이 발표과정에 개입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할 수 있었다. 더구나 문귀동의 성고문 사실을 대부분 인정한 법원이 변호인단의 재정신청을 기각하는 자가당착적인 결론을 내린 것에 대해서도 사법부의 독립성 문제로밖에는 볼 수 없었다. “이것은 결코 독립된 사법부가 스스로의 법률적 양식과 양심에 입각하여 내린 판단일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오늘 우리 사법부의 몰락을 봅니다. 아무리 뼈아프더라도 이 말을 들어주십시오. 사법부는 그 사명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조영래는 ‘보도지침’에 따라 기사를 쓰고 편파보도를 일삼으며 권력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이는 언론에도 일침을 놓았다. “비대할 대로 비대해진 제도언론은 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까?”17
그럼에도 조영래는 희망을 보았다. 경찰·검찰·법원·언론과 같이 국가의 공권력과 이를 감시해야 할 기구가 한몸처럼 권인숙의 진실을 위한 투쟁을 짓밟으려 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맞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많은 선의의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추기경에서 이름없는 시골 촌부에 이르기까지, 노동자와 학생에서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실로 그 수효를 알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방방곡곡에서 소리 없는 외침으로 권양을 성원하고 축복하였으며 권양의 영혼이 피로써 내건 인간성과 진실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습니다. 혹은 교도소로 혹은 변호인들의 사무실로 수없는 사람들이 위로와 격려의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어떤 가정주부는 변호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나는 왜 이 나라에 태어났는지, 나는 왜 딸을 낳았는지, … 권양을 위하여 기도를 하려면 목이 맵니다”라고 호소하였습니다. (…) 우리 변호인들도 이 대열에 동참하여 미미한 노력이나마 보탤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이것을 더없는 일생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18
(3) 환경권으로 확장하는 인권: 상봉동 진폐증사건
진폐증은 미세한 돌가루나 쇳가루 등이 폐에 침착되어 세포조직에 손상을 입히는 질병을 말한다. 분진이 많이 발생하는 탄광 및 시멘트·벽돌제조공장 등의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그런데 1987년 3월 서울시 상봉동에 사는 공장노동자가 아닌 박길래19가 국립의료원에서 진폐증의 일종인 탄분침착증, 이른바 ‘광부직업병’ 판정을 받았다는 짧은 기사가 나왔다. 이 내용이 이듬해 1월 조선일보 사회면 주요기사로 자세히 보도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크게 끌게 되었다. 박길래는 기자의 주선으로 당시 시민공익법률상담소를 운영하던 조영래를 만나 바로 손해보상 소송에 들어갔다. 피고인은 삼표연탄 망우공장의 사업주 강원산업이었고, 1989년 1월 1심 승소판결이 나오기까지 약 1년간 14차례의 재판이 열리며 치열한 법정 공방이 오갔다.20
이 사건의 핵심은 질병 발생의 진위가 아니라 책임소재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는 공해와 질병 사이의 인과성을 증명해야 하는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마치 이런 환경소송을 다룰 것을 예견했듯이 조영래는 이 주제로 석사학위논문을 쓴 바 있는데 그 시작 부분을 조금 길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오랫동안 공업기술의 발달과 그에 힘입은 물질생산의 팽창에 심취하여 ‘하나밖에 없는 지구’의 하늘(대기)과 땅(토지)과 물(수질, 해양)이 오염되고 대자연의 생태계의 균형이 파괴되는 참혹한 재앙의 급속한 세계사적 진행에 맹목하였던 인류는 이제 이 위기적 상황에 부닺쳐 뒤늦게나마 종래의 경제성장지상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아름다운 환경과 자원의 지속성을 보존하는 과제의 중요성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을 보여가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이러한 과제를 인류사회가 지향하여야 할 미래의 최우선적 관심사의 하나로 삼는 ‘적정성장론’ 또는 ‘Small is beautiful’ 등의 이념까지 등장하고 있다.
60년대와 70년대를 통한 우리나라의 고도경제성장의 과정은 주지하다시피 공해다발산업들의 대거 출현으로 인한 급속한 환경오염을 초래하였다. (…) 이러한 추세는 우리나라에서도 환경문제의 중요성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제고시켜 급기야는 신헌법에 ‘환경권’이 국민의 기본권의 하나로 규정되기에까지 이른 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다.
(…) 아직껏 ‘경제성장의 절실한 요구’를 앞세워 환경보전에의 요구를 제이차적인 것으로 뒷전으로 밀어 버리려는 경향은 뿌리 깊게 남아 있으며, 이러한 경향이 환경보전법 등 환경관계입법의 충실한 정비를 가로막아 왔을뿐더러 미비한 법령이나마 제대로 준수, 실천되기 어렵도록 만들어 왔다. 이처럼 산업공해에 대한 공법적 규제가 미약하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공해피해에 대한 사법적 구제의 비중이 그만큼 증대됨을 말해주는 것이다.
—「공해소송에 있어서의 인과관계 입증에 관한 연구」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81)
조영래는 공해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공법적 규제는 그에 따르지 못한 상황에서 사법적 보상이라도 강화하고자 했다. 환경문제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인가? 피해자는 박길래와 같이 지방에서 올라와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일하다가 간신히 집을 마련하고 살게 되니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었다. 근대화의 과정에 내몰린 민중이었다.
박길래의 진폐증을 공해병으로 인정받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는 역시 인과관계의 입증이었다. 그리고 인과관계 입증을 위해 가장 어렵고 중요한 일은 사업장 인근 주민들에 대한 역학조사였고, 의학계의 참여가 절실했다. 이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소속 의사들이 상봉동 주민 검진에 나섰다. 상봉동 진폐증사건은 (이후 한국의 보건의료운동을 주도하게 되는) 인의협이 정식 출범한 뒤 처음으로 조사한 사건으로, 당시 산업의학이나 환경의학은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인의협의 역학조사는 4월 공장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 87명을 대상으로 행해졌고, 집단검진 실시결과 원고를 포함한 3명이 진폐증, 또다른 3명이 의사진폐증의 소견임을 밝혔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6월부터 시내 17개 연탄공장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 2천여명을 대상으로 진폐증 검사를 했고, 노동부에서도 피고회사 공장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들에 대해 진폐증 검사를 했는데 모두 환자가 발생하고 있음이 드러났다.21
‘수인한도론(受認限度論)’을 들어 공익성이 강한 회사에서 방출되는 일정량의 석탄분진에 대해선 주민이 참아야 한다는 피고측의 논리에 대해 조영래는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한 ‘환경권’으로 대응했다. 환경권의 인정여부는 위법성 결정의 잣대가 될 수 있었다. 종래에는 환경오염이 있더라도 수인한도를 넘는다고 판단될 때만 공해의 위법성을 인정하는 분위기였으나, 환경권을 인정하면 수인한도라는 개념을 허용하지 않고 바로 환경을 오염시키는 행위 자체에 위법성을 부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재판부는 1심 판결에서 인과관계, 고의과실, 위법성 세가지 측면에서 원고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재판부가 공해문제의 인과관계에 있어 조영래가 주장한 ‘개연성’의 이론을 받아들여 입증책임을 피고측에 전환하는 데 동의했다는 점이다. 개연성의 원리에 따라 공장의 석탄분진과 주민의 진폐증 사이에 관련성이 있다고 판단되기에 오히려 “석탄분진을 배출하고 있는 피고가 ① 피고공장에서의 분진 속에는 원고에게 피해를 끼친 원인물질이 들어 있지 않으며, ② 원인물질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그 혼합율이 원고의 피해발생에는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반증을 들어 인과관계를 부정하지 못하는 이상 그 불이익은 피고에게 돌려 (…) 인과관계의 증명이 있다고 하여야 마땅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공해사건에 대한 입증책임의 전환이 법적으로 인정된 순간이었다.22
1989년 대법원 판결로 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박길래는 조영래의 연구와 열정에 힘입어 한국 최초의 공해병 환자로 인정되었다. 그는 200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환경운동가로 살았다. 몇걸음만 옮겨도 숨이 가빴지만, 공해의 무서움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강연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과 고독과 질병의 삼중고와 싸우며 환경운동의 홀씨를 뿌린 박길래를 ‘검은 민들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23 최초의 공해병 환자 박길래씨」, 중앙일보 2000.5.3.]
4. 나가며: 역사 속의 인권사상
격변의 80년대를 마감하는 시점(1989.12)에 조영래는 「80년대에 우리는 ‘민주’를 잃었고 ‘민주화’를 얻었다」24라는 회고와 성찰의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지난 10년 사이의 변화가 1세기의 변화와 맞먹을 정도라고 하면서, 다른 것들에 앞서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혁명적 일들을 언급했다. 태양계 끝닿는 곳까지 향하는 우주탐사선의 비행, 유전공학의 발달을 통한 ‘황소만 한 쥐’의 실현 가능성, 반도체·컴퓨터·광섬유와 같은 낯선 용어의 일상화 등을 예로 들었다. 이와 함께 에이즈 확산, 대기권 오존층 파괴, 지구온난화와 같은 “죽음의 그림자”도 자라고 있음을 지적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류에게 재앙이 될지 축복이 될지는 판가름 나지 않았기에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가가 중요할 것이라는 말도 했다.
조영래는 왜 80년대 민주화에 관한 성찰의 글을 과학기술의 혁명으로 시작했을까? 이 변화가 세계를 더 연결되게 만들고 인류를 하나의 공동운명체로 몰아가기 때문이었다. 그는 냉전이 무너지고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변화의 물결이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데에 정보의 개방이 한몫했다고 보았다. 한국의 민주화와 근대화도 이런 물결 속에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흥미롭게도 남미 군사정권들의 연이은 붕괴와 독재정권을 몰아낸 필리핀의 2월혁명이 우리가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민주화를 쟁취하는 데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또한 한국이 어려운 조건 속에서 시장경제체제를 기반으로 단기간 주목할 만한 경제발전을 이룩한 사실과 그 경제성장 모델이 소련의 개혁정책 추진에 “좋은 모범”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한 소련 정부관리의 말에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조영래는 허전함을 느꼈다. 정치적으로 민주화는 이룩했지만 대통령후보 단일화 실패로 군부통치의 완전한 종식은 미루어졌고, 선거과정에서 드러난 극렬한 지역감정과 분열이 큰 숙제로 남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는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으나 노사분규는 심해지고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진 점도 큰 걱정이었다. 6월항쟁 후에 열린 한 좌담에서 조영래는 “현재 우리나라 보수야당은 노동자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25라는 말로 제도정치권에 대한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기층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나와 한국의 정치가 발전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조영래의 인권사상은 현실정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경제발전과도 유리된 것이 아니다. 민주화가 되었어도 밑바닥 인간의 권익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경제성장은 분배정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기 때문이다. 유신체제는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자유니 민주니 하는 서구적 환상에 사로잡힌 일부 몰지각하고 국적 없는 사대주의적 지식인들”이라고 드러내놓고 경멸했었다. 조영래는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했다. “‘인권’을 우리의 역사발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외부로부터 ‘이식’된 서구적 가치로 보는 것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국적 없는, 서구적 환상에 사로잡힌 사대주의적 발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해방의 이념으로서 인권은 “프랑스혁명과 미국독립전쟁의 깃발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학혁명과 3·1운동의 깃발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 그는 한국에서의 인권은 비극적인 민족분단의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할 것을 강조했다. “해방 직후 한반도의 남쪽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자본주의 체제를 지지했던 것도 아니고 북쪽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공산주의를 신봉하였던 것도 아니다. (…)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단의 현실은 구조적으로 우리의 인권에 대한 적대적·파괴적인 현실이었고, 그것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모든 노력은 온갖 참혹한 인권탄압의 원천이 될 수밖에 없었다.”26/p>
이런 상황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조영래는 전태일 권인숙 박길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삶을 인권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도왔다. 그에게 법정은 단순히 이권다툼의 장이 아니었다. 소송을 통해 힘없이 억압받던 민중이 관습과 국가권력과 자본주의체제의 ‘덩어리’에 저항하여 싸우고 승리하는 경험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곳이었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각성된 시민으로 거듭나 사회를 변혁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에게는 있었다. 또한 ‘기후위기’와 ‘인류세’라는 말이 없던 시절에 인간의 탐욕스러운 이윤추구와 경제성장제일주의의 관행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환경권과 개연성의 원리를 적용하는 방법을 제시하며 인권의 개념과 담론을 확장했다.
지난 12·3 내란사태에 많은 시민이 분연히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최근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의 미래세대가 헌법재판소에 기후소송을 제기하고 일부 승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혹독한 시련을 거쳐 단련되어 성장한 우리 민족의 소중한 시민의식을 그 이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으로부터 사오십년전, 조영래는 물질화되고 비인간화된 생명에게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을 누릴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과학기술 발전으로 인한 물질문명 변화의 세계사적 중요성을 직시하면서, 인간다운 삶을 지탱해주는 인권사상이 동학과 3·1에서부터 4·19와 전태일과 광주까지 이어져 내려온 우리의 실천이고, 미래의 새로운 도전과 시련에 응답하는 우리의 사상이라고 사유했다. 이처럼 조영래의 인권사상은 책이나 선언문에 나오는 고상한 이론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작동하는 실천적 이념이다. 그렇기에 가장 인간적이지만 정치적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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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우 「추도사」, 조영래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 창비 1991, 344면.↩
- 안경환은 『조영래 평전』(강 2006)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했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타인을 배려하고 교육을 강조한 부모님과 특히 큰누이의 영향을 언급했고, 그가 어려서부터 불교에 심취해 대학에서도 불교동아리에 가입했던 점을 들었으며, 서울법대에서 학생운동을 이끌면서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경모도, 북한정권에 대한 도덕적 신뢰도 가지지 않았다”(125면)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평전은 핵심서술에 대한 출처가 불명확하고 일반적인 주변 배경설명과 저자의 심증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 권인숙 「『조영래 평전』에는 조영래가 없다」, 『인물과사상』 2006년 4월호 187~98면; 권인숙 「‘조영래평전’은 나와서는 안될 책」, 한겨레 2006.3.21.↩
- 이 논문의 초고는 거의 완성되었으나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조영래는 법이론 연구보다는 노동자의 실태조사를 기반으로 하는 실증연구를 후배들에게 권한 바 있다. 안경환 『조영래 평전』, 195~96면.↩
-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에 응답한 서울대생들: 50주기를 맞아」, 서울대 홈페이지 ‘역사/기록으로 만나는 서울대’(www.snu.ac.kr/about/history/history_record?md=v&bbsidx=130361). ↩
- 이 원고는 여러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 1978년 『불이여, 나를 감싸 안아라: 어느 한국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한국에서는 원고 형태로 회람되다가 1983년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를 엮은이로 해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평전』(돌베개)으로 출판되었다. 지은이가 조영래임을 밝히고 제목도 『전태일평전』으로 바꾼 1차 개정판은 그의 사후인 1991년 1월에 출판되었다.↩
- 인용 면수는 전태일 50주기에 나온 『전태일평전』 5차 개정판(아름다운전태일 2020) 기준. 이하 이 책에서 인용시 면수만 표기. ↩
- 인용 면수는 전태일 50주기에 나온 『전태일평전』 5차 개정판(아름다운전태일 2020) 기준. 이하 이 책에서 인용시 면수만 표기. ↩
- 구로지역의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연대하여 벌인 대정부투쟁인 대우어페럴 사건, 세칭 ‘남매간첩사건’으로 알려진 나준·나미영 간첩사건, 한겨레신문 압수수색 취소청구사건, 사회주의 및 북한연구 관련 서적 출판사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사건, 언론 보도지침 관련 사건 등이 있다.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 까치 1992 참조. ↩
- 구로지역의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연대하여 벌인 대정부투쟁인 대우어페럴 사건, 세칭 ‘남매간첩사건’으로 알려진 나준·나미영 간첩사건, 한겨레신문 압수수색 취소청구사건, 사회주의 및 북한연구 관련 서적 출판사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사건, 언론 보도지침 관련 사건 등이 있다.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 까치 1992 참조. ↩
- 「준비서면(1986.4.8), 84가합 5110호」,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 ↩
- 홍성우·손학규·장기표·양건 「창조적 인권변호활동과 민주화운동」,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 398면↩
- 최장집·조영래·최재현 「좌담: 국민의 힘은 위대했다—6월사태에 대한 평가와 전망」, 같은 책 172면.↩
- 최장집·조영래·최재현 「좌담: 국민의 힘은 위대했다—6월사태에 대한 평가와 전망」, 같은 책 172면.↩
-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변론 요지」, 114~15면. ↩
-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변론 요지」, 114~15면. ↩
-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변론 요지」, 113~19면.↩
- 같은 글 129~30면.↩
- 같은 글 123~24면.↩
- 피해자 박길래는 8년 전 상봉동으로 이사를 왔으며, 처음에는 가정주부로 알려졌으나 자영업을 하는 미혼여성이었다. ↩
- 피해자 박길래는 8년 전 상봉동으로 이사를 왔으며, 처음에는 가정주부로 알려졌으나 자영업을 하는 미혼여성이었다. ↩
-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 238면.↩
-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 238면.↩
- 「[삶과 추억↩
-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 251~56면.↩
- 최장집·조영래·최재현 「좌담: 국민의 힘은 위대했다—6월사태에 대한 평가와 전망」,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 177면.↩
- 조영래 「언론자유 확보가 인권의 보루」, 같은 책 190~9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