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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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대림동에서 안녕을 묻습니다.

혐중세력에 맞선 우리의 맞불집회

 

 

한채민 韓採旻

교사, ‘각색교사모임’과 ‘연대 하는교사잡것들’에서 활동.

chaemin02@naver.com

 

 

“대림동 괜찮아?” 대림동 밖 사람들이 대림동의 안녕을 묻기 시작했다. 7월과 9월, 대림역 11번 출구와 4번 출구에서 극우 시위대가 혐중 구호를 외치며 주민들을 공격하는 집회를 열고 행진을 했다. 학교가 밀집한 대림역 4번 출구에 극우 시위대가 한달간 집회신고를 한 사실이 알려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일본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의 혐한시위를 떠올렸다.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을 향해 ‘때려서 쫓아내자’고 외치던 포악한 공격을. 한국 혐중 시위대가 일본 혐한 시위대를 꼭 닮아간다.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는 자꾸만 대림동에 온다. 텅 비어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나는 서울 대림동에서 이주배경학생들을 만나는 교사다. 영화 「청년경찰」과 「범죄도시」가 개봉한 2017년, 대림역 인근 중학교에 발령받았다. 많은 우려 속에 교직을 시작했다. “거기서 일하면 무섭겠다. 밤늦게 다니지 마.” “위험한 동네니까 큰길로 다녀.” “학생들도 칼 가지고 다녀?” 소위 ‘기피 학교’라고 했다. 교사들이 전보를 희망하지 않아 신규 교사에게 배정되는 곳. 이주배경학생이 많아 학생과, 때로는 양육자와도 소통하는 데 애를 먹는 곳. 대림동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이곳을 더욱 고립시킨다는 걸 깨달을 즈음 아쉽게 5년이 다 지났다. 마침내 벗어난다고 축하하는 이들이 있었다. 두번째로 발령받은 학교에서 5년을 채우기 전에 대림동으로 돌아왔다. 누군가는 왜 고생을 자처하냐며 제 발로 돌아간다는 나를 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대림동은 분명 더 많은 가능성 속에 있다. 각자의 배경이 다양한 곳에서라야 서로를 견디고, 환대할 방법을 고민하니까. 그런 곳에서는 나 역시 마음 놓고 숨 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기꺼운 ‘고생길’이라니. 가야지, 맨발로라도 걸어가야지.

 

 

“한국 사람들은 차별을 하나요?”

 

대림동의 서울다문화교육지원센터에 파견을 나와 있다. 이주배경학생과 한국의 다문화교육을 지원하는 이곳에서 나는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한국어가 서툰 이주배경 중·고등학생 10명의 담임교사다. 이들은 학교에 들어가기 전 한 학기를 센터에서 보내며 한국어를 공부하고 입학서류를 준비한다. 센터가 대림동에 있다보니 중국에서 온 학생이 가장 많지만, 베트남·몽골·파키스탄·방글라데시·필리핀·미국 등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찾아온다. “학생들이 한국어를 못하면 선생님하고 어떻게 소통해요?” 동료들이 묻는다. 우리는 서툴고 느리게, 커다란 동작을 그리며, 때로는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대화한다. 소통은 역시나 어려워서, 그러나 항상 언어가 문제인 것은 아니어서 많이 웃고, 자주 머뭇거린다.

의미의 핵심만을 남긴 대화는 오히려 예리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중국에서 온 한 학생은 이렇게 물었다. “한국 사람들은 차별을 하나요? 한국어를 잘 못하면 차별받나요?” 새로운 환경에서 가장 걱정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나는 무어라 답을 할 수 없었다. 뜸을 들이다 우물쭈물 말했다. “한국에서는 차별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배워요.”

 

화교는 수능 7등급도 서울대 의대 특별전형

한국인 1등급은 의대 탈락, 중국인 6등급은 의대 장학금

중국 유학생은 100% 잠재적 간첩

 

지하철역 주변에 붙어 있는 플래카드들이다. ‘내일로미래로’당에서 ‘애국현수막운동’이라며 도심 곳곳에 거짓정보를 담은 중국인혐오 현수막을 내걸었다. 퇴근길에 이 현수막을 보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모두 거짓말이었다. 교육부는 최근 5년간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중국 국적 학생은 한명도 없다고 밝혔다. 버젓이 내걸린 거짓말 아래서 한국에선 차별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배운다는 내 말도 거짓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실은, 알면서도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닌가. 설렘과 긴장 속에 힘주어 뜬 눈동자들 앞에서 네가 환영받지 못할 거라고는, 공격을 받기도 할 거라고는.

혐오가 지극히 소수만의 문제라고 여겨왔기 때문에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상황만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도 같다. 학생들은 이미 다 보고 있었는데. 중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학생이 한국의 차별이 궁금했던 건 이곳에서 느낀 ‘안전하지 않다’는 감각과 그에 기반한 불안 때문 아니었을까. 내가 던지지 않는 근본적인 질문을 학생들은 한다. 나를 비껴가는 불안을 학생들은 마주 본다. 지난 4월 건대 차이나타운이라 불리는 자양동 양꼬치거리에서 극우 대학생단체 ‘자유대학’ 소속 시위대 200여명이 ‘다 죽이자’는 혐오구호를 외치면서 행진했다는 소식 같은 것을. 참다못한 중국인 상인이 항의하다가 몸싸움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때까지도 나는 극우 시위대가 대림동에 쳐들어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극우의 선전포고에 맞서다: 7월 11일, 대림역 9번 출구

 

한 극우 유튜버가 대림동에서 7월 11일에 ‘윤 어게인’ 집회와 행진을 열 것이라고 예고했다. ‘화교들의 본진에서 윤 어게인을 외치는 대담함을 보여주면 반국가세력에 대한 강력한 경고가 될 것’이라고. 이주배경 어린이·청소년을 지원하는 지역사회와 교사 네트워크 단체채팅방이 쉴 새 없이 울렸다. 이주민인권단체,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주배경학생이 많은 인근 학교에서는 안전에 유의하라는 알림을 발송했고, 동포 청소년들이 다니는 학원은 수업을 쉬기로 했다. 극우의 선전포고를 받은 대림동은 경계태세였다. 자양동 양꼬치거리를 행진한 시위대의 이미지가 대림동에 포개졌다.

나는 3월부터 센터에 나오기 시작한 수연(가명)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1학년 나이인 수연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온 뒤 6개월간 어머니와 같이하지 않는 외출은 거부하며 집에서만 지냈다. 비로소 센터에 나오기로 결심했지만 첫날부터 줄곧 검은 마스크와 검은 모자로 자신을 꼭꼭 숨겼다. “모자랑 마스크 쓰고 있으면 불편하지 않아요?” 밥 먹을 때도 마스크를 완전히 벗지 않아 이유를 물었는데, 수연은 휴대폰 번역기에 무언가를 적더니 내 쪽으로 내밀었다.

사회적 공포.

자신의 외모와 동포 억양 때문에 무시당할 것 같아서 한국에 온 뒤로 단 한번도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 외출한 적이 없다고 했다. 중국에 있을 때는 모자도 마스크도 쓰지 않던 수연이었다. 무려 반년간 스스로를 집 안에 가두어둘 만큼의 커다란 두려움과, 마침내 집에서 나와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걸어서 센터까지 도착하게 한 더 커다란 용기에 대해 우리는 얘기를 나눴다. 앞으로 함께 서울 이곳저곳을 다니며 모자와 마스크를 천천히 벗어보자고,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용기를 내보자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를 중심으로 대응팀이 꾸려졌다. 연구소의 박동찬 소장은 이주인권 활동가이자 디아스포라 당사자다. 대응팀은 7월 11일 극우집회에 대한 맞불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 발언 신청을 받고, 공동주최 단체를 모았다. 시민사회·노동조합·정당 등 선주민 단체들의 연대가 실시간으로 겹겹이, 두텁게 쌓여갔다. 불과 하루 만에 69개 단체가 모였다.

7월 11일 금요일 저녁 7시, 맞불행동이 열릴 대림역 9번 출구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9번 출구는 대림동 주민들이 많이 오가는 대림중앙시장과 가깝다. 극우 시위대는 건너편 길에서 집회 후 행진을 시작할 것이다. 극우 시위대의 행진경로에는 플래카드 20여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혐오와 차별 대신 우정과 사랑을’ ‘차별을 말하는 시민에게도 빠짐없는 평등사회가 오길 바랍니다’ ‘당신의 혐오는 누군가의 일상을 위협합니다’.

맞불 기자회견장이 연대를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 거리는 환대와 공존의 거리입니다’ ‘혐오 OUT! 차별 OUT!’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200명 넘는 사람들이 저마다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환호했다. 중국어 피켓도 눈에 띄었다. 지나가다 멈춰 서서 피켓 문구를 보거나 한국어와 중국어로 작성된 기자회견문을 받아 읽는 주민도 있었다. 분위기를 살피며 내 발언 순서를 기다렸다.

승용차 두세대가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차고 손가락질을 하며 “정신 차려라!” 하고 기자회견장 쪽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손에는 ‘CCP OUT!’(중국공산당 물러가라) ‘부정선거 척결’과 같은 피켓이 들려 있었다. ‘Only Yoon’이라고 적은 빨간 띠를 이마에 묶은 사람도 있었다.

극우집회에 합류할 것으로 보이는 남성들이 다가와 채증하듯 기자회견장과 맨 앞줄에 선 발언자들을 촬영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염려하던 동지가 내게 다가와 손에 마스크를 쥐여주었다. “써야 할 것 같아.” 교사가 발언하면 극우 시위대의 공격에 더 쉽게 노출될까봐 급히 사 온 것이다. 마스크를 받아 들고 고민했다. 불필요한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쓰는 게 나을까. 수연의 얼굴이 스쳤다. 우리는 용기를 내기로 약속했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나의 순서가 왔다.

“중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잔뜩 긴장한 학생이 번역기를 써서 제게 물었습니다. ‘한국어를 잘 못하면 차별받나요?’ 저는 머리가 복잡해졌고, 쉽게 답할 수 없어 우물쭈물댔습니다. 선주민 학생들에게 이 일을 털어놨습니다. ‘어떤 학생이 한국어를 잘 못하면 차별받는지 물었는데, 잘 답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뭐라고 답했을까요?’ 학생들은 저마다 쪽지에 답을 적어 제게 건네주었습니다. 그중 이렇게 적힌 쪽지가 있었습니다. ‘너와 친구가 될 많은 사람들 중 한명이 나야.’ 차별을 묻는 질문에 우정으로 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로부터 배운 것을 행동에 옮기러 나왔습니다. 많은 친구들 중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요. (…) 학생의 삶이 학교에서만 머물지 않기에 학교 밖 역시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현장이며 교육의 현장입니다. 영화 「청년경찰」, 코로나19, 그리고 각종 극우단체에서 혐오와 차별을 들이밀며 위협할 때마다 우정과 연대를 확장해온 곳이 이곳 대림동입니다. 극우 시위대에 경고합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직접 배우고 돌아가십시오. 조촐한 혐오의 행진은 곧 끝나지만, 끝까지 남는 건 가해자에 맞선 이들의 우정과 연대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날 극우집회에는 40여명이 참가했을 뿐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적은 인원에 극우 성향 소셜미디어 계정을 살펴보았다. “애국하는 건 알겠는데 죽지 마라, 제발. 가면 칼 맞아 죽는다. 나부터 살아야 나라를 살리지.” “대림동 집회 가지 마세요. 유혈사태 발생하고, 괜히 가해자 프레임 뒤집어씀.” 이들은 정말로 혐오를 믿고 있었다. 혐오라는 신앙에 대한 독실함을 증명하듯 어떤 비판적인 시선도 없는, 맹목적이어서 순도 높은 믿음. 누가 가장 지독하게 믿고 있는지를 겨루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대림동 주민들은 맞불 기자회견에 나선 연대자들에게 박수를 치거나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호응했다. 기자회견 내용을 끝까지 듣고 가신 분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간 이주민이 받은 차별과 질시에 비해 한국 시민사회의 연대 움직임이 미비했음에도, 맞불행동은 축제처럼 끝났다. 우리는 “연대가 혐오를 이겼다!”고 외쳤다. 함께 박수 치고 환호했다. 대림동 주민과 연대자들의 새로운 우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또 한번의 침입: 9월 17일, 대림역 4번 출구

 

‘윤 어게인’ 시위대가 물러가고 일상으로 되돌아간 대림동에 또다시 극우 시위대가 선전포고를 해왔다. ‘민초결사대’였다. 이들은 중국인 체류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들을 골라 집회와 행진을 벌였고, 이들의 폭력적인 언행에 명동거리도 긴장감에 휩싸였다. 명동집회가 불가능해진 이들은 대림역 4번 출구에 한달간 집회신고를 했다. 4번 출구 인근에는 학교가 많다. 초등학교 2개, 중학교 4개, 고등학교 1개. 민초결사대의 집회는 조직력과 규모 면에서 극우 유튜버 개인이 조직한 집회보다 훨씬 위험해 보였다. 한 중학교 교장은 구청과 경찰서에 편지를 보내 혐오세력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해달라고 호소했다.

9월 17일 수요일 오후 7시, 지난 7월 집회에 대응했던 시민사회와 지역단체에서 그들의 규모와 분위기를 탐색하러 나왔다. 극우집회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더니 점차 인원이 불어났다. 경찰 비공식 추산으로 50명이라지만, 행진을 시작할 무렵에는 그보다 두세배는 많은 인원이 결집한 듯 보였다.

한 남성이 확성기를 높이 들고 시위대를 둘러싼 주민들을 의식한 듯 설교를 시작했다. “여러분! 우리는 중국인을 혐오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중국인들이 한국인의 세금을 쓰고,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수능 6등급인 중국인 학생이 서울대 의대에 입학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겁니다!” 하나하나 반박할 필요가 있는 가짜뉴스였고, 바로 그것이 혐오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 소리를 치려고 했는데 함께 간 동지가 나보다 먼저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러자 경찰이 다가와 우리 앞을 막아섰다. 혐오발언과 거짓정보가 확성기를 통해 울려퍼지고 그들의 집회는 경찰의 엄호를 받으며 진행되지만, 혐오에 대항하는 목소리는 충돌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저지당하고 말았다. ‘우리가 찰리 커크다’ ‘이재명 대통령 구속 수사’ ‘윤석열 어게인’ ‘China Out’ 깃발이 휘날렸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그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에 이어 애국가를 제창했다. 태극기를 향한 거룩한 얼굴들에서 어떤 신실함을 읽을 수 있었다. 곁에 있던 동지가 행인들 사이에서 태극기를 바라보며 가슴에 손을 얹는 젊은 남성을 보았다고 전해주었다. 시위대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고. 그 말을 들으니 혐오세력을 ‘그들’이라고 선 그으며 비웃을 수 없었다. 의식하지 못한 채 누군가를 배제해버린 순간이 내게도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인이 아니어서 죄인 같았어요.”

중학교 3학년 때 내가 담임을 맡았던 은영(가명)은 성인이 되고 나서야 이렇게 말했다. 친구들은 은영이 ‘너무 한국인 같아서’ 중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잊었다. 친구들이 중국과 중국동포를 비하하는 표현을 쓰며 웃을 때 은영은 웃을 수 없어 외로웠다. 상처를 받는다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러려면 자신이 중국 사람이라고 털어놔야 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은영은 대체로 묵묵히 참아냈다. 심지어는 이해하려 했다. ‘장난일 거야, 나를 공격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하고 친구들을 대신 변명해주면서. 하지만 실기시험을 보는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할 때, 같은 학교를 희망하는 학생 두명이 등 뒤에서 “자기 나라로 가지 왜 우리 자리를 빼앗아” 했을 때는 무너져내렸다. 은영은 ‘나도 한국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상처 줄 수 있어서, 그러고도 무심할 수 있어서 부러웠다.

“근데 어떤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다르다는 건 틀린 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 틀리지 않았구나, 했던 충격이 생생해요.”

청소년기 은영에게 필요했던 건 ‘네 존재는 틀리지 않았다’는 지극히 당연한 말과 굳건한 지지였다.

“짱X들 물러가라!” 하는 혐오구호를 참지 못하고 앞치마를 두른 채 뛰쳐나온 중년 여성 한분이 시위대 쪽으로 절절하게 외쳤다. 우리가 무얼 잘못했냐, 왜들 이러는 거냐라고. 그렇게 말하는 주민 앞을 경찰이 또다시 막아섰다. 태권도복 입은 어린이들이 자꾸 뒤를 돌아보며 그 곁을 지났다. 떡볶이 먹으러 분식점에 들어가다 말고 시위대 피켓과 깃발 사진을 찍는 청소년들도 있었다. 대림역 4번 출구로 빠져나온 사람들이 어디론가 흩어졌다. 그들이 지역사회 선주민인지 이주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은영이 중국인임을 드러내는 것을 약점을 노출하는 일, 안전하지 않은 일로 여겼듯 또다른 은영이들이, 학생들과 그들의 가족, 이웃과 친구들이 지금 이곳에서 존재를 부정당하고 폭력을 겪고도 오랜 차별을 익숙하게 견디는 중인지도 몰랐다. 차별받거나 불리한 입장에 놓이는 이가 자신의 피해를 호소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와 지지가 필요하니까.

대림동은 그 엄청난 용기와 지지를 앞두고 있었다.

 

 

극우집회에 더 큰 맞불을 놓다: 9월 25일, 대림동 5번 출구

 

다시 한번 민초결사대가 대림역 4번 출구에서 집회를 예고했다. 혐중시위의 심각성을 알리는 시민사회와 주민들의 목소리에 부응하여 혐오집회를 그냥 둘 수 없다는 남부교육장, 서울시교육감, 국무총리의 메시지가 나왔다. 언론의 관심도 집중되었다.

7월 극우·혐중 집회 대응에서 선주민 시민사회의 연대가 중심이 된 것과 달리, 이번에는 중국동포단체들과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가 중심으로 나서서 맞불 기자회견이 조직되었다. 그간 직접 나서지 못하던 동포단체는 7월 시민사회의 연대에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9월 25일, 도림천을 사이에 두고 4번 출구에서는 혐오집회가, 건너편 5번 출구에서는 맞불 기자회견이 열렸다.

“많은 상인들이 ‘이대로는 버틸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중국동포 발언자가 극우·혐중 시위대로 인한 대림동 이주민들의 피해를 호소했다. 눈물을 닦으며 발언을 듣는 이들도 보였다. 돌아보니 온통 아는 얼굴들이었다. 용기 내 발언을 하는 사람들과 중국동포들, 지역주민들이 서로 이름을 알고, 얼굴을 아는 동지가 되어 있었다. 카메라에 한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거리가 가득 찼다. 100여개 단체와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마을을 지키러 나왔다.

박동찬 소장이 기자회견문을 낭독했다. “혐오세력은 그동안 이주민과 난민,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들을 끊임없이 공격해왔습니다. 오늘 대림동이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면 내일 또다른 동네, 또다른 집단이 그 화살을 맞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혐오의 사슬을 지금 여기서 끊어내지 않는다면, 피해는 계속 재생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연대가 혐오를 이길 것이라며 ‘만세’를 외쳤다. “만세! 만세! 만세!”

 

“거기서 일하면 무섭겠다. 밤늦게 다니지 마.” “위험하니까 큰길로 다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반박하고 싶었다. “아니야, 대림동은 괜찮아. 대림동을 위험하게 만드는 건 바로 그런 말들이야.” 2011~20년 지난 10년간 외국인 10만명당 범죄자 검거 인원지수는 내국인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외국인이 내국인보다 범죄를 많이 저지를까? [팩트체크K]」, KBS 2023.6.18). 이주민 범죄를 실제보다 과장하여 보도하는 언론과 무지로부터 비롯된 편견이 혐오를 강화해 대림동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 내가 만난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저 ‘탈대림’ 할 거예요. 여긴 답도 전망도 없어요.” 사회가 대림동에 찍은 낙인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자신의 터전을 수치스럽게 여기도록, 혐오하도록 만든다. ‘탈출’을 꿈꾸게 한다. 그렇게 만든 책임은 대림동 바깥에서 대림동의 전망을 빼앗으려 시도한 모두에게 있다. 그러니 대림동을 향한 우정의 책임 역시 모두에게 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자유를, 충분하고도 누려 마땅한 자유를, 새로운 우정에 동참할 동지들과 함께 누리고 싶다. 구조적이고 조직적인 차별과 혐오에 대항하는 길에서 우리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웃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구해내고 진정 ‘자유’로워질 것이다. 혐오의 행진이 사그라진 뒤에도 끝까지 남을 우정과 연대 안에서.

대림역 4번 출구의 아침 풍경은 눈을 감아도 생생하다. 2호선 전철에서 내려 승강장 계단을 내려가면 갓 구운 델리만쥬 냄새가 난다. 삑— 개찰구를 지나 지붕을 단 육교처럼 외부로 연결된 통로를 건넌다. 그곳을 지날 땐 흘끗 도림천을 내려다본다. 공중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열차 그림자가 도림천변에 일렁이고 산책로에서 달리기를 하거나 여럿이 광장무를 추며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 나는 그 평화로운 아침 풍경을 좋아한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아침을.

한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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