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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서영인 徐榮裀
문학평론가. 평론집 『충돌 하는 차이들의 심층』 『타인 을 읽는 슬픔』 『문학의 불 안』 등이 있음.
sinpodo12@hanmail.net
1. 사건과 문장
지난 10월 29일 이태원참사 3주년 추도식이 열렸다. 아침저녁 출퇴근길에 라디오를 통해 추도식 뉴스와 유가족 대표의 인터뷰를 들었다.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서 추도식에 참석한 외국인 희생자 유가족의 소식도 전해졌는데, 3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유가족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를 차마 헤아릴 수가 없었다. 딸의 유해가 테이프에 감겨 짐뭉치처럼 도착했다고, 그럼에도 딸이 왜 죽었는지 알 수 없어 너무 답답했다고, 애써 담담히 말하는 부모의 인터뷰를 들으면서 이 사회적 참사가 한국사회의 경계를 넘어선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유가족 대표는 인터뷰에서 외국인 희생자 가족을 대할 때 가장 마음 아프고 또 면목이 없었다고 밝혔다. 외국에서 온 희생자 유가족을 만나 설명하고 나아가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언어의 장벽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유례없는 초연결사회를 살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로 연결된 사회에서 SNS로 만들어진 소통망은 이미 국경을 넘은 지 오래고, 금융과 투자, 노동과 산업 역시 세계적 연결망으로 이어져 있다. 화제가 되고 있는 K컬처의 위력 역시 이러한 초연결사회의 대표적 현상이다. 넷플릭스・유튜브로 대표되는 문화 향유는 종전의 대중문화의 기반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딸이 죽은 장소를 3년 만에야 겨우 찾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의 연대와 공감을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당황하는 또다른 선량한 사람들이 있다. 초연결이라기보다는 과잉연결의 사회에서 우리는 오히려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에 무디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초연결의 촘촘한 네트워크 속에서 휘발되어버린 감각, 진짜로 연결되어 있다는 실감에 대한 천착이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실감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어느 시대에나 그랬지만, 지난 10년 동안 우리 작가들은 여러 사회적 참사나 사건들 앞에서 함께 애도하고 행동하는 사회적 실천을 이어왔다. 용산, 세월호, 강남역, 코로나19 팬데믹, 그리고 최근의 내란과 탄핵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예술가로서 그들의 발언은 사건의 내막과 영향을 살피고 충격과 고통을 공유하며, 공감과 연대를 이끌어오기도 했다. 그 발언과 행동이 문학으로 어떻게 발화되는가는 별개의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 문학이 대답을 들려주기 전에 이미 사건들이 휘발되어 사라지거나 잊혀져가는 것은 아닌가라는 조급한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초연결의 속도를 버티면서 기억하고 이해하면서 더 깊이 연결되어 소통하는 과정을 문학이 천천히 겪어왔다고도 말할 수도 있다. 사건들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반추되고 연결되고 다듬어지는 소설의 문장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사건의 흔적들과 함께 연대와 공감을 말하는 소설들, 전성태 소설집 『여기는 괜찮아요』(창비 2024)와 강보라 소설집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문학동네 2025)을 읽는다.
2. 지평선을 밟듯이 연결되어 있다
『두번의 자화상』(창비 2015) 이후 10여년 만에 펴낸 전성태의 『여기는 괜찮아요』에는 지난 10년간의 한국사회가 압축되어 있다. 세월호참사가 있고 팬데믹 시대의 일상이 있다. 한국전쟁과 이산가족, 여순사건 같은 역사적 사건들도 조용히 품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자칫 역사적 사건들과 사회적 환경의 형상화 수준에서 이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오해에 대해서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한국전쟁과 이산가족을 다룬 「상봉」, 여순사건에서 실종된 인물이 등장하는 「조용한 생활」은 이 소재를 다룬다고 할 때 예상할 수 있는 익숙한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상봉」에서 이산가족은 만나지 ‘못한다’. 「조용한 생활」에서 여순사건의 피해자 찾기는 ‘실패한다’. 이 실패는 의도적인 것이며 그래서 민족의 비극이나 국가폭력의 희생자 등의 익숙한 지시어로부터 벗어나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말하고 있다.
무엇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일까? 이 연결을 정의하기 위해 소설을 오래 읽어야 한다. 소설은 단순히 겪은 사람과 겪지 않은 사람의 연결이라든가, 무관한 타인들끼리 어떤 사회적 연관으로 이어져 있다든가 하는 것 이상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역사와 현재의 연결이 섬세하다. 「조용한 생활」의 김교수(김준모)는 팬데믹 시기의 격리된 생활이 오히려 편하다.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하는 일상이 불편하지 않다. 직장을 따라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면서 가족과의 유대도 점점 느슨해졌고, 그렇다고 해서 직장이 있는 지역의 이웃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도 아니다. 셋집의 주인인 허노인이 여순사건의 피해자로 짐작되는 인물의 학적부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을 때에도 번거롭다는 생각뿐이었다. 허노인이 내막을 상세히 알려주지 않았기도 했지만, 이름자도 정확하지 않은 사람의 학적부를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도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노인이 세탁소 노인의 얘기를 듣고 ‘이철호(혹은 이철환)’씨를 찾는 이유는 단지 피해보상 신고 때문이 아니었다. 남편을 잃고 개가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알려준 가족사에 세탁소 노인이 아버지 함자라도 알고자 나선 것이다. “그거이 그렇게 에러운 세상도 있다는 게 참 거시기해이”(195면)라는 허노인의 말처럼 이들의 사연은 어쩌면 여순사건의 진상규명을 넘어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편을 여순사건으로 잃고 개가하여 살아가면서 자식들에게 해가 될지도 몰라 함구하고 살았던 어머니의 삶이 있고, 있는 줄도 몰랐던 친부의 존재를 알게 된 노인의 삶이 있다. 그리고 어렵게 사람 찾기의 용건을 꺼내놓은 김교수에게 힘닿는 대로 찾아보겠다고, 직업적 성실성을 차분히 발휘하는 학적 담당직원이 있다. 김교수가 그 직원과 이름자가 같았던 친구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 이야기 속의 연결성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바람난 아버지를 증오해서 칼을 품고 다녔던 그 친구 양태민이 버거워 김교수는 그의 치부를 건드렸고, 결국 양태민은 학교를 떠났다. 그는 “이 도시에 아직 끝내지 못한 자신의 시간이 남아 있는 걸 깨달았다.”(192면)
여순사건의 피해자 찾기로 시작된 이야기는 세탁소 노인의 아버지 찾기로, 그리고 사무적으로 거절해도 될 의뢰를 기꺼이 자기 일로 껴안는 직원에게로, 그리고 가족에 대한 증오로 주변에까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친구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졌다가, 마침내 거리두기가 일상이 된 ‘조용한 생활’의 김교수에게로 연결된다. 그것은 곧 팬데믹 시대의 거리두기로 타인과의 연결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거부했던 우리들의 일상으로 조용히 되돌아온다. 도무지 이어질 것 같지 않았던 역사와 현재가, 아니 과거사와 일상사가 아주 먼 길을 돌아 물결처럼 퍼지고 이어져 스며든다.
‘상봉’에 실패한 이야기인 「상봉」의 연결도 예사롭지 않다. 한국전쟁 통에 어머니와 헤어져 피난한 아버지는 남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어릴 적 기억도 분명치 않은 장시곤은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통해 동생을 만났다. 북에 남아 있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으므로 동생 장시춘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았다. 장시곤과 장시춘은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서로가 찾던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다. “지금 와서 뭐가 궁금하겠소. 오늘 생각하니 65년 세월이 우리 시간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161면) 형의 말이다. “래일도 보시자요. 여기 올 기회가 또 있갔습니까. 자식들 근심이라도 놔주어야디요.”(162면) 동생의 말이다. 「조용한 생활」이 역사 속 여순사건으로부터 김교수와 이웃들의 일상으로 연결되었다면, 「상봉」은 형제의 일상으로부터 축적된 역사적 시간 속으로 나아간다. 그들이 가족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가족간 생이별을 하게 했던 분단의 역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헤어져 살아서 함께했던 기억이 없는 가족이지만 ‘상봉’이 일생의 한이 되는 이유는 분단이 가족을 넘어서 공동체의 삶을 제한하고 억압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봉」에서의 ‘상봉’은 가족 차원의 만남과 회포를 넘어서는 주제가 된다. 그렇다면 장시곤과 장시춘이 형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들의 만남은 역시 꿈에도 바라던 ‘상봉’일 수밖에 없다. 이산가족 찾기의 가족적 애환을 넘어서서 분단의 비극과 해원으로까지 이 소설이 확장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소설은 오해와 해프닝이 될 수도 있는 사연을 진중하고 사려깊게 다듬는다. 오해나 착오로 상봉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이들의 삶이 분단의 역사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그 누구의 삶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짚어두고 싶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여기는 괜찮아요』에서 가장 압권인 ‘연결’은 역시 「깡통」이다. 한몽사전 편찬 연구팀의 ‘네르귀’는 몽골 쪽의 단어를 고르는 역할을 맡은 연구원이다. 그들은 ㄱ부터 ㅎ까지, 한국어로 나열된 단어들에서 사전에 들어갈 표제어를 고른다. 예컨대 ‘깡통’, 몽골어로 ‘라아즈’라는 단어는 어떨까. 몽골의 초원에는 없는 ‘깡통’이라는 말. 네르귀는 부모님이 한국으로 일자리를 구해 떠나자 할아버지와 함께 초원에서 살았다. 여행자들이 선물로 준 코카콜라는 놀라운 맛이었다. 빈 깡통을 보다 한밤중에 울음을 터뜨리던 네르귀는 그것을 그가 달릴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쌓아둔 돌무지에 버렸다. “지평선으로 가면 지평선이 아득히 물러났다. 그건 절망스러우면서도 그리움을 키우는 체험이었다.”(17면) 초원과 콜라의 맛 사이에는 지평선처럼 아득한 거리가 있다. 네르귀가 할아버지와 함께 초원의 삶을 사는 동안 부모님은 이혼을 했고, 네르귀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죽어 공항에 유골로 도착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된 할아버지가 네르귀를 울란바토르로 보낸다. 네르귀가 마신 콜라 깡통이 썩지를 않고, “썩지 않는 걸 함부로 대지에 묻을 순 없”(29면)으니 깡통을 버리러 먼 곳으로 떠나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할아버지는 차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네르귀가 더이상 초원에서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도 할아버지는 알았을 것이다. 깡통을 버리기 위해 먼 길을 떠난 네르귀는 울란바토르에서 아버지와 이혼하고 고물상의 안주인이 된 어머니를 만난다. 거기에는 깡통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네르귀는 아마도 그곳에서 깡통을 버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 한국어와 몽골어를 함께 연구하는 연구원이 되었을 것이다.
소설은 다시 ‘깡통’과 ‘라아즈’라는 단어로 돌아온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펄펄 살아 있는 ‘깡통’이라는 말, 그리고 초원에서는 썩지 않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없었던 ‘라아즈’라는 말. 네르귀는 ‘깡통’과 ‘라아즈’를 함께 안고 살아간다. 할아버지의 삶과 초원은, 썩지 않는 것들을 숱하게 자연에 버리며 살아가는 울란바토르와 서울은 연결되어 있다. 암담한 지구의 미래와, 그럼에도 거기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네르귀들의 삶으로, 그리고 한국에서 외국인노동자로 살다가 죽어 돌아온 아버지의 삶까지. 이 쓸쓸한 연결이 우리의 삶이라고, 그래도 네르귀는 단어를 만지며 여기서 살아가고 있다고 소설은 말한다. 아마도 초원에서 삶을 마쳤을 할아버지의 삶이 신비화되지 않는 까닭은 한국의 네르귀에게 할아버지의 생이 얼마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네르귀의 삶이 궁핍이나 초라함으로 판단되지 않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함께 존엄한 삶들의 공존과 연결성을 생각하면, 썩지 않는 지구에서 우리가 운명공동체로 살아가고 있다는 거창한 이야기에도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몽골의 초원과 서울의 연구실(「깡통」), 아버지에 대한 친구 양태민의 원한과 80여년 만에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 세탁소 노인의 그리움(「조용한 생활」), 재혼가정을 이루며 모녀가 된 ‘금이’와 ‘수아’, 그리고 증조할머니의 새남편이었던 강씨의 무덤(「숲으로」), 좀처럼 섞이기 힘든 공간과 시간이, 인물들의 삶이 소설 속에서 함께 얽힌다. 덕분에 우리는 역사와 일상을, 국가의 경계 안과 밖을 넘나들며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3. 뱀과 양배추처럼 연결되어 있다
맥락이 닿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들을 통해 ‘연결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강보라 소설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연결의 감각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결을 거스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강보라 소설을 두텁게 감싸고 있는, 이른바 부르주아 교양 취미라 할 수 있는 세태의 결을 일단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의 표제작에서 요가 같은 것이 그렇다. 애인의 권유로 예술 입문자들을 위한 책을 쓰고 있던 ‘나’는 요가 인플루언서인 ‘애나 패서디나’가 발리 우붓에서 워크숍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발리로 훌쩍 떠난다. 문화재단의 직장인이었던 ‘나’에게 책 집필을 권한 ‘현오’는 미술상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예술서적 전문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다. 그가 사는 세계는 “세속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창조성을 생계와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삶. 그런 삶이 세상에 그렇듯 흔하다는 걸 나는 현오와 만나며 알게 되었다”(48면)라는 말로 간명히 요약된다. ‘움직임을 동반한 동적 명상’, 요가매트를 넣기에 좋은 캐리어 브랜드 ‘리모와’, ‘반클리프 아펠’ 팔찌 같은 것들로 대표되는 일상이 소설에는 솜씨 좋게 배치되어 있으며, 실상 이렇게 구축되는 취향은 이 취향을 누리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명확하게 구별 짓는다. 취향을 향유하는 쪽에 속한 인물들은 그러한 삶을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게 과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의식적으로 비아냥댄다. 취향으로 결정지어지는 계급의 위선과 공허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그럼에도 그것이 자기 삶의 스타일 자체가 되어버린 세대에 대한 묘사라고 하면 이야기는 쉽다. 그러나 여기서 한겹 더 들어가볼 필요가 있다.
예의 그 취향에서 여행은 필수적 요소이다. 언제든 일상을 훌쩍 떠나고, 여행에서 만난 인연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브랜드와 트렌드를 따르는 인물들의 취향은 이렇게 완성된다. 그러니 여행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설의 배경이 된다. 「티니안에서」의 티니안,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의 우붓, 「빙점을 만지다」의 샌프란시스코처럼, 소설집에는 여행지에서의 에피소드를 엮은 소설들이 여럿 있다.
사이판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작은 섬 ‘티니안’은 태평양전쟁의 격전지이자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기지가 되었던 곳이다(「티니안에서」). 9년 만에 만난 ‘나’와 ‘수혜’가 왜 티니안을 여행지로 택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여행지에서 만난 미국인 남자들은 자신들을 ‘팻맨과 리틀보이’라고 칭하며 낄낄거린다. 팻맨과 리틀보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별칭이다. 이 미국인들은 동양인 여자들을 노골적으로 희롱하고, ‘나’는 그런 남자들이 불편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어울린다. “두 남자의 장난기어린 눈빛에서 한계에 다다른 육식동물의 허기가 느껴졌다.”(9면) 그리고 자신보다 훨씬 스스럼없이 그들과 어울리며 누드비치에서 가슴을 드러내는 수혜가 자꾸만 불편하다.
이 불편함을 뚫고 ‘나’의 기억 속으로 출몰하는 중학 시절의 음악실로 들어가보자. 학교폭력과 따돌림의 피해자였던 ‘나’와 수혜와 그리고 소식이 끊긴 또다른 친구 ‘연선’은 학생들이 드나들지 않는 음악실에 자주 모였다. 거기에서 도시락을 먹고 수다를 떨고 교환일기장을 주고받았다. “걸레 삼총사.”(18면) 아이들은 그녀들을 그렇게 불렀다. 당시 성욕으로 충만했던 그녀들이 각자의 경험담을 남몰래 공유했던 것은 지금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이다. 누군가 그녀들의 별명을 휘갈겨놓은 음악실 낙서사건 이후로 친구들은 만나지 못했다. 먼저 떠난 것은 ‘민지’, 소설의 화자인 ‘나’였다. “앞으로 음악실에는 가지 않으려 해”(34면)라고 교환일기장에 썼다. ‘나’와 중학 시절의 친구들에 대한 기억은 ‘티니안’의 해변에서, 섬에 있는 신사에서, 팻맨과 리틀보이와 어울리는 동안에 조금씩 출몰하며 ‘나’의 주변에 맴돈다. 중학생에게 금지된 성적 관심을 드러냈다고 해서, 혹은 행실이 나빴다고 하더라도 공개적인 낙서로 그들을 모욕하고 따돌리는 학교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시절 ‘나’와 잤던 남자들, 그리고 ‘나’를 따돌리고 괴롭혔던 아이들은 소문을 근거로 폭력을 정당화한다. ‘너희들은 당해도 싸!’라는 것처럼.
“일본 놈들은 당해도 싸지.”(15면) 팻맨과 리틀보이의 말이 겹쳐진다. 일본이 이웃나라들을 침략하고 폭력적인 지배로 피식민지인들을 괴롭혔다 하더라도,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평화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는 있어도 처참한 학살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승전국의 용사들처럼 티니안을 관광하며 폭탄 적하장을 둘러보면서 키득거리는 미국 남자들이 불편한 까닭이다. 물론 2차대전과 원폭 투하와 학교폭력이 동일선상에 놓일 수는 없다. 그러나 「티니안에서」는 동일선상에 놓일 수 없는 사건들을 과감하게 병치하면서 ‘나’가 과거에 당했던 폭력과, 그 폭력 때문에 친구들에게 등을 돌렸던 시간을 되돌아본다. 그러니까 티니안으로의 여행은 ‘나’에게 있어서 자신에게 행해졌던 폭력을 주시하기 위한 여정이었던 셈이다. 어린 나이에 겪었던 소외와 폭력을 생각하며, 그로 인해 빚어진 오해와 결별을 거슬러, ‘나’와 수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만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폭력에 대한 숙고는 과거의 역사를 한낱 우월감으로 거들먹거리는 팻맨과 리틀보이에 대한 거부감으로 확장된다. 연약한 청소년 시절 폭력을 경험한 장소와 역사적 폭력을 전시하는 현재의 관광지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살면서 여성으로서 겪은 상처를 독백 연기의 형태로 들려주세요”(「바우어의 정원」 143면)와 같은, 잘 기획되었으나 실상은 개인의 상처를 예술의 형태로 포장하는 상술, “양식 있는 이웃끼리 목인사를 주고받는 서울의 평범한 아파트”(「직사각형의 찬미」 224면)를 정상적인 삶이라 믿는 시선이 경제적 부와 그에 적합한 취향의 벽을 이룬다면 소설은 그 벽을 뚫고 타인과 연결되는 삶의 경로를 찾는다. 「바우어의 정원」에서도 폭력에의 탐구는 계속된다. 세번의 자연유산으로 몸과 마음이 허물어진 ‘은화’는 연극 오디션 제의를 받고 오디션장으로 향한다. 제법 유명한 배우였던 은화는 유산으로 인한 공백기를 끝내고 이번 연극으로 무대에 복귀할 계획이다. 기획자는 정해진 대본 없이 배우의 경험을 고백하는 자전적 형식으로 연극을 구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유산의 경험을 연극의 내용으로 풀어놓는 것은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하더라도 폭력적이다. 아직 몸도 마음도 회복되지 못한 은화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런 은화를 괴롭히는 것은 아역배우 시절 학교폭력의 기억이다. 입구가 벌어진 오래된 우유팩을 서랍에 집어넣는 친구들 앞에서 은화는 보란 듯이 구더기가 기어나오는 상한 우유를 마셨다. 그 이후 우유는 물론이고 유제품도 입에 대지 않았지만, 은화는 오디션장에서 “황당한 생각”이지만 “어렸을 때 마신 상한 우유가, 그 조그만 벌레들이 제 몸 어딘가를 돌이킬 수 없게 망가뜨려버린 건 아닐까”(162면)라고 고백한다. 마음 깊은 곳에 남은 상처까지 드러낸 고백이 그녀의 복귀작이 되어주는 것은 정당한가. 그녀와 함께 오디션을 본 후배 ‘정림’이 출산 직전에 아이를 사산했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 정림의 이야기도 설정에 넣겠다는 연출자의 말을 듣고 은화는 끝내 연극 출연을 거절한다. 은화는 그 폭력을 거절하는 대신 같은 고통을 겪은 정림을 응원하기로 한다. 새로운 경향의 예술과 세련된 기획의 이면을 뚫고, 폭력의 기억을 이겨내고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는 동료를 만난다.
「직사각형의 찬미」에서 ‘나’는 갑자기 수도권 외곽으로 근무지가 변경된 남편과 함께 낡고 비좁은 빌라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곧 서울 중심가로 돌아갈 것이므로 회사 지원금에 딱 맞는 빌라를 월세로 계약한 것이다.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다. 나는 여기에 살 사람이 아니다’라는 다짐을 뚫고 들어오는 것은 이웃한 집의 좁고 기다란 창과 그 창을 통해 비쳐 보이는 여자의 실루엣이다. 이웃집의 창은 액자처럼 보였고, 그 창을 통해 들여다보는 거실은 그림 같았다. 거실은 조금씩 인테리어를 바꾸면서 늘 정물화처럼 단정했으나 어느날 얼굴을 내비친 여자는 온통 화상으로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갤러리의 그림을 보듯 빌라촌의 일상을 구경하던 ‘나’가 더이상 관람객의 위치에 머물 수 없게 된 것은, 오래전 이 동네에서 일어난 화재사건을 알고 나서였다. 병설유치원에서 일어난 화재사건으로 38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이웃집 여자의 화상 흉터와 주인집 여자의 화상 흉터가 화재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사건을 알고 난 후 이들과 무관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거주하는 이방인이 될 수 없었다. “다친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245면)
부르주아적 일상과 세련된 취향의 디테일은 정교하고, 그 취향을 누리는 삶은 함부로 폄하되거나 비판받지 않는다. 그것도 하나의 삶이다. 그러나 소설은 기어이 그 취향의 외장을 뚫고 만날 수 없어 보였던 타인들을 발견하고, 일상에 가해지는 폭력을 오랜 시간에 걸쳐 응시한다. 뱀과 양배추처럼, 연결되기 어려운 관계를 뚫고, 돌연한 사건들과 우연히 마주치며, 신기한 연결이 계속된다.
4. 천의무봉(天衣無縫)은 아니더라도
강보라의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에서 천재로 불리는 화가 ‘이재’는 소설의 진실을 의심하며 말한다. “영원불멸의 진실을 논하기엔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인간이란 본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인데, “작가가 인물과 사건을 임의로 선택해서 인과에 맞게 착착 배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277면). 소설가인 ‘나’의 대답은 이렇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지 모르나, 내가 만든 세계에서는 그것이 진실이었다.”(295면)
큐레이션 뉴스를 만들던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썼다가 실패한 ‘나’는 사촌언니의 죽음을 소재로 쓴 소설로 당선한다. ‘나’의 경험에서 ‘타인’에 대한 짐작으로 소설쓰기의 관심이 옮겨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나’는 고심 끝에 사촌언니가 아니라 사촌언니 방의 사물들을 화자로 택했다. 나는 사촌언니를 이해할 수 없었고, 남겨진 것은 그 사물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물들의 이야기를 따라 사촌언니의 죽음과, 사촌언니의 꿈을 찾아나간다. 사물을 통해서라도 알 수 없는 타인과 연결되기 위한 안간힘, ‘나’가 말한 소설의 진실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의 삶이 소설처럼 순조롭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연결되지 않는 삶과 성립되지 않는 인과들을 오래 생각한 끝에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만들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널리 알려진 사회적 사건들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들을 인물의 일상 속으로 끌어와 개별적 추억과 생활 안에서 연결을 찾아나가는 소설 속 진실은 소중하다. 이태원참사의 유가족들과, 그 가족들이 참사의 현장에 도달하기까지를, 어렵더라도 상상해야 하는 이유다.
삶이 문학에 앞선다고 오래 믿었지만, 요즘은 소설이 삶을 이끌고 가기도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 않은가. 여순사건과 팬데믹이, 학교폭력과 원자폭탄이 이렇게 연결의 실감이 되는 일은 소설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연결을 감각한 이후 우리의 삶은 조금쯤 달라져 있을 것이다.
초연결사회의 빈틈없는 속도가 오히려 우리 삶의 연속성을 끊어놓는다는 생각이 들 때, 오래 생각하고 이해한 끝에 만들어진 연결의 감각을 믿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진실을 만들어나가려는 문장들이 실제를 착각하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진실의 문장들을 믿고 조금 용기를 내고, 조금 더 앞으로 나가볼 수 있을 뿐. 나는 그것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