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초점

 

그리움이 탄생하는 최초의 순간

 

 

남승원 南勝元

문학평론가. 평론집 『질문 들의 곁에서』 등이 있음.

epistnam@gmail.com

 

 

지연 시집 『모든 날씨들아 쉬었다 가렴』(창비 2025)

 

지연의 시집 『모든 날씨들아 쉬었다 가렴』에서 먼저 두드러지는 시인의 태도는 작은 것을 향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를 좇는 방향성과 더 연관되어 있다.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개 부분적인 정보들을 통해 맥락을 연결지어가며 전체적인 의미에 도달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정보들은 어쩔 수 없이 맥락 안으로 포섭되지 못한 채 탈락하기도 한다. ‘작은 것’에 대한 시인의 관심은 이같은 보통의 의미구성 과정을 거꾸로 밟아나가는 것을 말한다. 가령 한장의 “프로필 사진”을 소재로 한 「작아서」에서는 사진의 화소 하나가 “내가 사는 지구”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우주의 점”이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사진의 화소와 같은 “점 하나”는 전체의 관점에서 그 자체로는 어떤 의미도 갖지 않거나 아예 인식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인의 관점에서 그것은 익명의 부분이 아니며, 그 고유의 성질로 인해 “공기”에서부터 심장”에 이르기까지 투과하며 하나하나의 대상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결절점들이다. 곧 “우리를/미치게 혹은 경건하게 에워”싸는 모든 것인 셈이다.

그렇게 작은 것에 대한 지연의 관심은 시선에 포착되는 존재들을 모두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위치인 “구석을 좋아”(「지복(至福)」)하게 된다거나, 또는 “뿌리가 기어가는 속도”(「맥박」)를 자각하면서 그것에 삶의 시간을 맞추는 일들로 이어진다. 특히 밥을 짓는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는 「안수(按手)」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쌀”에 주목하고 그것을 개개인의 삶과 등가로 교차시키고 있다. 이같은 시선은 결국 “쌀 위에 손을 올”리는 단순하고도 기능적 행위를 고통과 결부된 인간적 삶에 축복을 내리는 기원의 행위로 변모시킨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반복하는 개인적 행위가 단편적 목적에서 벗어나 다수의 불특정한 존재들을 향해 새로운 관계를 열어가는 것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이 시집에서 작은 것들이나 눈에 띄지 않는 곳,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 등에 대한 지연의 관심은 결국 ‘소룡골’이라는 공간으로 나아간다. 시인의 고향인 이 공간은 ‘소룡골 시편’이라는 부제를 가진 연작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구체화되는데 분량으로도 시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다듬잇돌 위에 홑청”(「산그림자가 나를 배춧잎처럼 덮어도」)이 놓여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가동 할매 집 뒤에는 신당이 있었”(「바람은 삼베틀 앉을깨에 앉아 북을 띄우고」)던 소룡골의 모습은 자본의 흐름에서 조금은 비껴나 있는 원칙들을 삶의 태도로 간직하고 있다.

이같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내용들은 주로 ‘나’의 가족 이야기나 혈육처럼 가까이 지내던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니 여기에는 “시금자깨가 쏟아져서 비어야 하고 고추도 붉어서 따야 하고 건조기가 고장이 나서 걱정”(「그해 가을」)인 일상의 모습들이나 “곗돈을 두차례 떼인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심한 욕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가족사의 어두운 이야기(「오월」)들이 뒤섞여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삶의 터전에서 어쩌면 가장 당연한 일인 것처럼 “지상에 아버지라 부를 이름이 사라”져버리는 근친의 죽음(「여기에 계셔서」)도 발생한다.

‘소룡골 시편’의 적지 않은 시들이 살아가는 사람들마다의 행위를 나열하고, 계절이나 기일 등 특정한 시간에 포착되는 모습들을 별도의 연 구분 없이 하나의 장면처럼 서술하는 형식적인 측면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상적 모습들을 반복하면서 병렬적으로 보여주는 형식을 통해 소룡골이라는 공간은 양감을 더해가고, 결국에는 우리에게 내재된 ‘고향’이라는 신화적 의미에 다가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대로 두면 썩겠구나

늙은 호박을 머리에 이고 오다

안고 오다 에라이 굴리다

의자로 앉다 그야마로 포도시 끌려온

늙음이 흐뭇하다

 

드디어 여기 늙음이 있다는 안도

 

올해는 겨울이 길겠구나

호박이든 고구마든

산 날의 온기를 위해

견디는 일은 대견하다

—「울력」 부분

 

역시 ‘소룡골 시편’의 하나인 이 시에서 시인은 누군가의 생일이나 기일이 아니라면 이제는 한자리에 모이기도 힘들어진 가족의 모임을 통해 “늙음”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태어나 지속되는 삶을 기념하기 위한 생일에서 “죽은 것을 혀에 올리”는 행위나, 식구들이 오랜만에 모여 즐거운 자리에서도 “속으로 제각기 떠날 시간을 체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삶은 곧 그 출발의 순간부터 ‘썩어가는 것’과 함께하며,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늙음이 흐뭇하다”는 의미 역시 어렵지 않게 와닿는다. 하지만 지연의 시적 깨달음이 조금 각별한 것은 그것이 일상에서 벗어나거나 시간의 초월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족들 모두와 그리고 “마루 밑 별들”과 늙음의 시간들을 함께 견디고 겪으면서 얻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를 축하하기 위해서라면 여럿의 모임이 필수적인 것처럼, 소룡골에서의 ‘늙음’은 그조차 ‘울력’으로 다같이 달성해나가는 삶의 목표이자 축복의 순간이 되어준다.

지연이 주목해서 그리는 소룡골은 바로 이처럼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해왔던 것들로 구성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조왕신 달래주십사 달래주십사 어머니는 밥뜸물을 닦으며 산업체에 간 큰언니 이름을 문질러주고 계시고”(「집」)라는 행위는 객관적 지표로 어떤 측정도 불가하지만, 소룡골에서는 모든 가족구성원의 삶 속에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지연의 시가 만들어내는 공명은 곧 우리가 그곳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왔는지, 그리고 수치와 눈금으로만 파악되지 않는 것들이 우리 내면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가늠해보게끔 이끈다.

 

 

오산하 시집 『첨벙 다음은 파도』(창비 2025)

 

오산하의 첫 시집 『첨벙 다음은 파도』와 오은경의 세번째 시집 『둘이 거리로 나와』는 ‘관계’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공간의 사유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공통적 면모를 보인다. 두 시인이 보여주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너’와의 관계성에 대한 미묘하고도 섬세한 주목이 매력을 불러일으킨다.

먼저 오산하 시집 『첨벙 다음은 파도』에서 인상적인 것은 영화 「트루먼 쇼」(1998)에서 본 것처럼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으면서도 어딘지 인공적 요소가 느껴지는 공간의 창조이다. 가령 「거기에서 만나」의 내용은 다소 엉뚱하게도 만나기로 한 두 사람이 약속 장소인 ‘상설극장’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 집중되어 있다. “여전히 극은 상설 중이”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와 같은 약속이 여러번 반복된 듯 서로가 지나쳐 오는 길에 대해서도 익숙한 시적 주인공들은 심지어 “사실 연극을 본 적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껏 이들이 반복한 것은 만남이 아니라 상설극장을 향하는 행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산하가 만들어낸 ‘상설극장’은 만남의 배경이 아니라, 그곳을 향하는 ‘우리’에 대한 생각만을 끝없이 이어나갈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자신이 새롭게 창조한 공간 속에서 인물들의 관계 탐색에 주목하는 오산하의 특징은 「야광 인간과 손 맞잡고 걷기」나 「미로에 초대되었습니다」 「햇빛 걷어내기」 등에서도 드러나는데, 특히 「버려진 이름전(展)」에서 흥미롭다. 이 시에서 묘사한 ‘전시공간’은 매우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출구가 하나”만 있기 때문에 일단 입장을 하면 그 공간 전체를 탐색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 때문에 시 속 인물은 앞서 「거기에서 만나」와 유사한 방식으로 전시된 작품을 따라가면서도 다른 사람과의 우연한 마주침이나 전시물이 아닌 것들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에서 시인은 “이름 모를” 것들에 대해 마음껏 골몰한다.

 

동그라미

사실 이리저리 샛길이 가득한

저쪽으로 가면 지압길

저쪽으로 가면 셔틀콕

저쪽으로 가면 왜가리

 

그때 거꾸로 달려오는 작은 아이를 위해

구석으로 몸을 비킨다

공원의 모두가 그렇게 한다

 

아이를 따라 뒤를 돈다

오직 그렇게 해본다

—「공원의 모양」 부분

 

이 시에서도 “원 안의 사람을 전부 만날 수 있”는 “동그라미” 모양인 “공원의 트랙”으로 한정된 공간이 포착된다. 심지어 “어디론가 가려는 사람들을/한데 모아”두는 힘을 가진 이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다양한 삶의 형태들이다. 하지만 현실의 공원이 그렇듯 그곳에서 스쳐지나가면서 만나는 삶의 모습들은 단편적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거나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엉엉 울던 여자”를 만나도 그저 한바퀴 돌고 다시 마주치게 되었을 때 “이제는 웃고 있다”는 미지의 접점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이를 단순한 무관심이라고 이해할 수는 없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주목해보자. 갑자기 나타난 “거꾸로 달려오는 작은 아이”로 인해 모두가 “약속처럼 한 방향으로만” 다니던 공원의 트랙에는 작은 균열이 발생한다. 하지만 갑자기 발생한 이 사건은 공원 전체를 혼란으로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이를 위해/구석으로 몸을 비”켜주는 행동을 순간적으로 유발한다. 미리 정해진 행동기준에 따른 것도 아니며, 누구의 요청이나 강요도 없이 그저 ‘달리는 아이’를 위해 자연스럽게, 그리고 “오직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두가 동시에 취한 이 행동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오은경 시집 『둘이 거리로 나와』(문학과지성사 2025)

 

오산하가 자신이 만든 연극적 공간 안에서 일종의 윤리적 실험을 하고 있다면, 오은경의 『둘이 거리로 나와』는 “나는 너의 친구가 되고 싶”(「창문에 누워」)다고 말하는 직접적 고백에 가깝다. 사실 첫 시집이었던 『한 사람의 불확실』(민음사 2020)에서부터 그는 “어제와 같은 장소에 갔는데/당신이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없다는 것을/염두에 두지 않았던 내가/돌아갑니다”(「매듭」)라고 말하면서 “당신과 친해지고 싶”(「교통사고」)은 마음을 드러내왔다. 나아가 이번 시집에서는 구조적인 차원에서부터 대화의 양식을 직접 보여주고자 하는 실험이 눈에 띈다. 희곡의 방백처럼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는 ‘나’의 생각이나 또는 시적 화자가 아닌 인물의 목소리 등을 행의 오른쪽 끝으로 몰아서 배치하는 방식이 그것인데, 마치 타인과의 대화를 웹상에서 구현한 것처럼 자신의 시가 일종의 대화임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언어가 최소한 그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시적 진술 역시 언제나 ‘대화’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거기에는 타인의 목소리와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친구의 슬픔」에서 오은경의 ‘대화’는 이렇게 나타난다. 오랜 습작기간을 함께 보낸 친구는 “내 시의 변천사뿐만 아니라 시 바깥의 내 이야기, 내가 미워하던 사람과 사랑하던 사람까지 알고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친구의 갑작스러운 울음을 마주하게 될 때에도 정작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대화의 불가능을 경험하는 순간, 즉 ‘나’가 오랫동안 써왔던 시 역시 의미를 잃게 되는 그 지점에서 일종의 도약이 발생한다. “분명 내가 쓴 시인데, 친구의 이야기만 가득했다. 나는 없고, 친구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노트에는 당신과 나의 글자가 뒤섞여 있다 정확히 말하면 둘 중 한 명이 글을 쓴 다음 다른 한 명이 이어 적는다

 

이것은 규칙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겨났다 나의 경우 노트가 다 채워지면 어쩌지? 걱정할 뿐

당신의 문장을 따라 적기 바빴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나의 글은 당신의 글이었고 당신의 글만이 내가 쓴 전부였다 당신은

아직까지 나의 노트를 읽은 적이 없다

—「일기장」 부분

 

일기는 개인의 내면과 무의식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글쓰기이다.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움과 주관성으로 인해 이전에는 엄밀한 기록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의 일기는 그 자유로운 형식을 통해 역사의 엄격성이나 기록의 위계성에 도전하는 한편, 나아가 역사적 기록을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가능성으로도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일기의 형식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통일적 유토피아를 전혀 요구하지 않는 성질 그 자체이다.1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오은경이 써내려가는 ‘일기’는 “당신과 나의 글자가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건대 보통의 일기 형식과 대척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당신의 문장을 따라 적기 바빴다”는 행위가 ‘나’를 분열시키고 쓰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나’의 특권을 해체한다는 점에서 일기의 형식에 최대한 부합하고 있기도 하다. 앞서 「친구의 슬픔」에서 확인해본 것과도 유사하게, 시인은 이처럼 ‘쓰기’를 통한 도약 속에서 ‘너’와 마주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어떤 상황이나 공간 속에서 때로 길을 잃게 되는 순간도 오은경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에게 시쓰기가 언제나 ‘당신’과 겹쳐진 상태에서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홀로 존재하고 있는 곳에서도 사실 “당신은 나의 꿈속에 있었던 거라고.”(「길 찾기」) 믿기 때문이다. 오은경의 시를 따라가다보면 우리 역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갑자기 끼어든 당신”(「떠나온 숲」)을 만나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리움의 대상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움이란 곧 지나온 자신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힘이기 때문이다. 일상적 삶의 모습에 대한 주목을 통해 전통과 맞닿아 있는 고향의 모습을 복원해가는 지연의 시집이나, ‘너’를 향해 뻗어나가는 섬세한 감정들을 짚어나가며 관계성을 성찰하는 오산하와 오은경의 시집에 우리가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시적 정황들은 우리 내면의 그리움과 교차한다. 하지만 부정적인 대상이나 이름 모를 존재마저도 종종 그리움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일이 흔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리움은 과거의 한순간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간까지 적극적으로 포함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세 시인의 시집이 보여주는 역동성, 즉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의 현실에 대해 끝없이 되묻게 만드는 힘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한다. 그렇게 지금-여기는 그리움이 탄생하는 최초의 순간이 된다.

 

 

 

  1. 필립 르죈 『자서전의 규약』, 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8, 168~7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