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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느끼고 아는 존재들
권영빈 權寧斌
문학평론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초빙교수. 주요 평론으로 「인간적 인 것을 향한 (부)적절한 인카운 터」 「포스트 한일 관계 서사를 향 한 마음의 지리학」 등이 있음.
outthem@naver.com
박솔뫼 소설집 『영릉에서』(민음사 2025)
언젠가부터 박솔뫼라는 이름은 새로운 산책의 형식을 발명하는 자와 동의어로 인식되고 있다. 박솔뫼 소설 속 걷기는 인물이 발 딛는 장소와 그의 감각기관이 상호작용하면서 수많은 ‘느낌’을 만들어내는 신체 행위인 동시에, 오르막과 내리막, 교차로와 해안선을 반복해 가로지르는 순환적인 움직임을 담은 행위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러한 ‘걷는 사람’과 그 시선에서 펼쳐지는 경관들은 사람과 사건, 지역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둘러싼 독특한 시간관과 기억의 형식을 드러내곤 한다. 소설집 『영릉에서』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 특징들이다.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는 걷기와 연결된 기억의 다중성을 조명하는 소설로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은 중학생 ‘원준’이 동급생 ‘정목’과 함께 정목 아버지를 따라 낚시를 갔다가 집에 돌아온 어느 하루의 여정을 담고 있다. 그런데 원준이 화자 ‘나’에게 전하는 그날의 풍경은 누구에게도 온전히 속해 있지 않은 이상한 기억이다. 정목 아버지, 정목, 원준이 계곡을 향해 걷는 모습, 넓은 바위에 누워 물소리를 듣는 소년들과 이들을 차에 태워준 아저씨가 한 여자와 만나 영릉을 거닐며 나누는 대화. 이모네로 간 정목은 곯아떨어지고, 다음 날 원준이 자전거를 타고 영릉에 가는 장면까지. 소설은 일면 회상의 형식을 보여주면서도 이러한 기억-경험의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이들의 여정은 매순간 주변을 선명하게 의식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쏟아지는 물소리, 햇빛의 냄새, 하늘과 구름의 모양, 개미가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말들과 같은 공감각적 풍경을, 소설은 누군가의 “뒤를 따르는 것”(17면) “따르고 이어지던 것”(34면)의 연쇄로 표현한다. 그래서 ‘나’는 타인의 기억에 아련하게 공명할 수 있다. 영릉이 자아내는 고요한 설렘의 느낌이 ‘나’에게도 뒤따르면서, 누구도 차지하지 않은 그날 속으로 접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산책자가 눈앞에 주어진 경로보다 전후좌우로 자신에게 스미면서 스쳐지나가는 것들을 감각적으로 의식하는 것은 지나간 시간과 고정된 장소 이미지를 매걸음 새롭게 불러오게 하는 박솔뫼 특유의 기억술이다. 전작들에서도 꾸준히 시도되었던 시간-공간을 바라보는 이러한 조망권의 발굴에서 핵심은 반복성과 탈중심성이다.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극동의 여자 친구들」 「스칸디나비아 클럽에서」 「투 오브 어스」는 ‘움직임 연구회’라는 모임을 중심에 둔 연작으로, 사람과 장소, 시간을 ‘안다’는 것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어 흥미롭다.
세 소설은 어느 것을 먼저 읽어도 무방하게 저마다의 개성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것이 인물들의 구체적 관계성이기보다 이들이 궁리하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움직임 연구회의 정기 워크숍은 누군가가 걷거나 앉는 모습, 일상 행위를 보여주면 다른 구성원들이 그 동작과 연결된 움직임을 취해보는 형식이다. 이곳에서 ‘강주’는 자신과 등과 팔을 맞댄 ‘보훈’의 동작을 따라 누군가와 함께 움직일 때 느낄 수 있는 몸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이 “흐르는 움직임”(「극동의 여자 친구들」 119면)이라는 새로운 앎은 움직임 연구회 건물에 인접한 서울 을지로, 동대문의 여러 역사적 장소를 이해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특히 주한미군 극동공병단 부지와 중부시장, 국립중앙의료원이 지시하는 1950년대라는 시간은 점령지의 공포와 쓸쓸함, 미군 물자의 유통과 상인들의 생존경쟁, 잔류 유럽 의료인들의 희미한 자취가 뒤섞인 느낌들의 터미널이다. 인물들이 이 일대를 반복해 걸으며 체화하는 ‘흐르는 움직임’은 사람과 장소, 시간이 서로를 끌어당기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며지게 한다.
“스스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나면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같은 글 105면)는 강주의 말처럼, 이들 소설에서 움직임 연구는 결국 어딘가를, 무언가를 잘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한 리듬을 익히는 것이다. 이같은 타자화된 시간-공간을 향한 느낌과 앎은 고정된 사회적 기억에 운동성을 부여하면서도, 각각의 신체에 깃든 삶의 반경, 인식의 범위로 인해 인물들이 그것을 다시금 부여잡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박솔뫼의 인물들이 견고한 자기성과 강한 확장성을 동시에 지닌 것으로 비쳐지는 이유일 것이다.
이밖에도 『영릉에서』 속 인물들은 부산국제여객터미널과 아오모리의 공원들, 명동성당과 토오꾜오 게이오플라자호텔 등 다양한 지역과 장소를 거닐면서 그곳에서의 기억-경험을 패치워크의 형태로 자기 안에 (되)새긴다. 망각을 자연화하는 질서에 반하면서, 기억의 주연보다는 뒤따르는 것들을 의식하면 말이다. 박솔뫼 소설 속 느끼고 아는 존재들은 그렇게 탄생한다.
김초엽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래빗홀 2025)
김초엽의 새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는 ‘나’라는 통합적 자아를 가질 수 없는 존재들의 보고이면서, 이들이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어딘가 ‘맞지 않는’ 느낌이 삶의 오류가 아닌 세계감을 표현하는 또다른 앎의 형태일 수 있다는 점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표제작 「양면의 조개껍데기」는 루피너스 행성계의 한 종족인 셀븐인 ‘샐리’가 겪는 곤경을 다룬다. 대부분의 셀븐인은 하나의 신체 안에 복수의 자아를 갖고 태어나 서로 다른 자아들이 지각과 의식을 주관하는 자리를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전환’을 익히며 양자의 조화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샐리는 지구로 입양된 탓에 이러한 자아 간의 관계를 정립하는 적절한 교육이나 사회문화적 수용이 부재한 상태로 유년을 보내야 했다. 샐리 안에는 ‘샐리(라임)’ 외에도 샐리가 인식하는 타자아 ‘레몬’이 있고, 더욱이 레몬은 샐리의 드러난 몸으로 표상되는 여성 젠더를 자기 정체성으로 인식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젠더 디스포리아를 겪고 있다.
소설은 이들이 ‘샐리’라는 젠더화된 몸을 두고 각축하거나 지구인 ‘류경아’와의 폴리아모리 연애에서 갈등을 빚는 장면을 통해 그러한 존재양태와 삶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실은 자아가 분열된 탓이 아니라 ‘손상되지 않은 자아’를 향한 욕망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두 자아의 영구 분리술이라는 ‘지구적’ 처치를 택한 샐리가 이내 위험에 처하게 됨으로써 우리가 아는 독립적 개체로서의 ‘나’가 환상일 뿐이라는 점이 밝혀지는 것이다. 빛이 닿지 않는 심해에서만 자신의 ‘있음’을 희미하게 감각했던 레몬은 소설 말미에 이르면 더이상 라임에게 ‘타자아’라 불리지 않으며, 레몬의 고독과 자유를 진정으로 받아들인 라임은, 즉 샐리는 자신의 신체를 비독점적인 방식으로, 두개의 자아를 의존적인 형태로 운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주체적이고 통합적인 자아라는 환상은 이 세계와 현실에 ‘맞지 않는’ 느낌을 지닌 이들의 지각·의식·신체를 상실과 훼손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게 한다. 이 때문에 삶은 현존감을 찾기 위한 혹독한 여정이 되지만, 자신의 비/존재성에 대한 절실하고도 깊은 사유는 느낌을 앎으로 확장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소금물 주파수」는 스스로의 개체적·종적 자아를 확신할 수 없는 한마리의 고래가 자기를 탐구해가는 도정을 동화처럼 보여준다. 고래도시 울산을 배경으로 평생 고래연구에 몰두했던 외할머니와 귀향한 손녀, 그리고 고래 ‘해몽’의 연대를 그린 소설이다. 생태탐사로봇인 해몽이 자기 존재성에 의문을 품을 정도로 인지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의 사랑과 돌봄이 그의 현존을 진화 가능한 것으로 구성했기 때문이다. 「고요와 소란」은 인간이 사물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의 ‘있음’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느끼게 된 세상을 배경으로 하는데, 중심인물인 ‘서해겸’과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기에 인류의 새로운 집단기억에서 배제된 채다. 소설은 대상화와 타자화의 기제 없이 누군가를, 무언가를 느끼고 안다는 것의 불/가능성을 탐구하면서, 서로 다른 존재들이 고요한 기척만으로도 소란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섬세하게 다룬다.
결국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 속에 이해된 존재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자아를 고립시키는 질서를, 승인과 배제의 구조를 내파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브다니의 여름휴가」에서 화자 ‘나’가 일하는 커스텀 인공피부관리숍은 자신을 다른 종이라 믿는 일명 ‘아더킨’이 신체변형을 통해 본성을 지키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곳이다. 이들은 비뚤어진 욕망을 가진 존재로 사회에서 터부시되지만 나는 그러한 편견보다 “진짜 내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란 대체 뭘까”(18면)라는 질문에 사로잡힌다.
어느날 손님으로 찾아온 ‘수브다니’는 자신의 피부를 물이나 산성물질에 취약한 금속으로 교체해달라는 주문을 하고, 나는 ‘녹슬고 싶다’는 수브다니의 욕망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서게 된다. 한때 ‘수안 최’라 불린 그는 안드로이드로 태어나 인간화시술을 받은 인물로 과거에 연인인 ‘남상아’와 2인조 아티스트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견주는 대중의 차별적 시선이 둘 사이에 균열을 가져왔고, 그것은 수브다니가 인간의 신체성을 얻은 후에도 봉합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이 때문에 남상아의 유작을 해체해 끝내 피부에 부착해버린 수브다니의 행위는 자신을 부속품 취급했던 세상과 연인을 향한 복수 행위처럼 세간에 인식되어버린다.
그러나 수브다니의 신체변형은 죽은 연인을 제대로 애도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밝혀진다. 완전한 안드로이드로도 인간으로도 살지 못하게 하는 형해화된 예술 이전의,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 사랑했던 두 사람의 한 시절을 온당하게 기억하려면 종적 포함과 배제의 질서에 틈을 내야 한다. 그렇게 안드로이드와 인간종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 했던 수브다니의 갈망은 자신의 ‘있음’을 향한 존재론적 선언이 된다.
김초엽 소설의 미덕은 과학적 상상을 기초로 하면서도 언제나 본격적 삶의 문제를 다루고, 현실에 엄존하는 차별과 폭력에 주목하면서도 세계를 냉소하지 않는 것에 있다. 이러한 장점들은 소위 정상성에서 벗어난 자들, 지배 이데올로기가 골칫덩이 취급하는 자들을 우리 곁으로 불러오는 역할을 하는데, 때로는 단지 매력으로 인식될 수 없는, 이들의 고유한 에너지와 활력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양면의 조개껍데기』는 존재의 ‘있음’을 보장하는 지각과 의식, 신체의 접촉면을 다채롭게 발굴하면서, 유일무이한 답이 아닌 창조적 질문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의 SF문학의 강점을 잘 보여준다. 그의 소설이 계속해서 탐색해나갈 느낌과 앎의 해안에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희주 소설집 『크리미(널) 러브』(문학동네 2025)
이희주는 최근 크게 주목받는 작가다. 연이은 화제작들과 주요 문학상 수상소식, 장편 『성소년』(문학동네 2021)의 해외 진출은 그의 존재감을 더욱 확고히 드러내는 중이다. 여성서사의 약진이 더이상 우리 문학에 대한 새로운 진단도 아닌 시점에서 그의 소설이 강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아이돌과 팬덤문화와 같은 특별한 소재나 서브컬처의 정서를 가감 없이 다루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통 좋을 것이 없는 세계에서 사랑을 느끼는 것의 위대함, 그러나 사랑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은 물론 사랑의 대상이 자기 것임을 간취할 수 없는 아이러니, 그리고 그 혼란을 돌파하는 방법으로서의 파국적 상상이 시대적 감수성으로 다가오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도 사랑받는 것도 불가능한, 사랑의 ‘주인(공)됨’에 실패한 인물이 실패를 지연시키고자 통제 불가의 상황에 빠지는 장면은 이희주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설정으로, 소설집 『크리미(널) 러브』는 이러한 비의지적·비합리적 욕망과 결단이 현실의 불행을 끌어안은 채 나아갈 수밖에 없는 사랑의 합리적 형태임을 역설한다.
「최애의 아이」는 아이돌의 정자를 공공재로 삼아 이를 원하는 가임여성에게 제공하는 가상의 한국을 배경으로 ‘우미’가 자신의 ‘최애’인 ‘유리’의 아이를 낳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저출생 대책으로 재생산 미래주의를 극단적으로 제도화하는 한국사회의 병리적 상태와 아이돌 산업이 강화하는 루키즘 및 외모자본주의를 정면에서 다루는 문제작이지만, 우미의 욕망은 이러한 지적 담론에 선행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소설을 즐기기에 결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여성이나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적대가 가득한 현실에서 출산과 양육은 ‘아이’라는 상상적 기쁨과 구체적 희생 사이를 가늠해서 내리는 결정일 수밖에 없지만, ‘최애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소설 속 가정은 인물로 하여금 임신・출산에 관한 전혀 다른 정동을 조성하게 한다.
이쯤에서 이희주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돌 산업, 온라인 (팬덤)문화라는 단골소재와 사랑의 형상화 방식이 자주 임신・출산과 관련된다는 점을 거론해야 한다. 모멸과 수치가 사회적 감정의 기본항이 된 사회에서 우리 삶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의로 깎여나간 욕동의 적합한 투자처를 찾을 수밖에 없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일도 같은 맥락이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아이돌과 팬덤이 ‘사랑’을 통해 서로를 (재)생산하는 정동경제로 끈끈히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이돌의 성공에는 팬덤의 사랑이라는 감정의 지분이 있고, 팬덤의 삶에는 아이돌이 주는 쾌락의 지분이 있다. 그런데 팬덤이 아이돌을 사랑하는 것은 수치로도 증명되지만 아이돌이 팬덤을 사랑하는지는 해석을 요하고, 최애를 갖는다는 것은 욕동의 독보적 투자처를 확정하는 것이지만 최애의 에너지가 향하는 곳은 불특정 다수이다. 이희주는 말하자면 이러한 정동경제의 비효율성의 수정 내지는 비대칭적 사랑의 진화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최애의 아이, 또는 사랑하는 이를 그대로 낳는다는 소설의 상상은 사랑의 주체와 대상을 피와 살로 결속시켜 사랑함과 사랑받지 못함이 교차하는 쾌-불쾌의 회로를 끊는다.
소설에서 대상을 향한 앎이 사랑이나 성애만큼 강조되어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아이돌의 정자 공여를 통해 임신하는 것은 “미친년들”(「최애의 아이」 78면)만 하는 일로 여겨지지만 우미에게 유리는 “최고의 수컷” (「천사와 황새」 278면)이기에 그런 유리를 닮은 아이들이 증식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 본다. 그의 기쁨과 슬픔, 한계와 가능성까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은 상대를 계속 사랑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임신과 출산은 ‘앎’으로써 확고부동해진 사랑의 대상을 자기와 영구히 결속시키고 그의 독점을 가능하게 하는 합리적 전략인 것이다.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은 남편을 오롯이 갖기 위해 그와 똑 닮은 존재를 낳으려 했던 엄마의 불가능한 바람과, 그런 엄마를 위해 아버지의 몸에 들어가 그를 제거해버리는 딸의 이야기인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도 유사하게 읽힌다.
나와 생물학적으로 연결된 최애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주체이자 대상인 자신을 창조적으로 갱신하는 일이므로 도파민이 분출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크리미’한 상태는 그 성질대로 견고하지 않기에 외부의 압력에 노출된다. 내가 탄생시키고 먹이고 돌보는 존재가 사실은 나의 최애가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이 가장 심각한 위험요소이다. 예컨대 버튜버 팬덤문화가 등장하는 「마유미」는 “나를 숨쉬게 하는 마유미. 내가 기른 마유미. 나의 마유미”(138면)가 사실은 버튜버 방송을 함께 기획하고 운영해온 친구 ‘현주’가 자신의 엄마를 모델로 삼아 만든 존재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파국적 결말을 맞게 된다. 인물들의 잔혹한 행위는 누군가를 향한 비뚤어진 욕망과 사랑이 불러온 비의지적·비합리적 충동의 소산일까, 아니면 내가 탄생시키고 먹이고 돌보는 존재를 내가 숭배하면서 사랑의 방해요소를 과감하게 없애는 합리적 행동일까? 그러한 도발적인 질문이 독자에게 남는다는 것 자체가 이희주 소설의 힘일 것이다.
한편 『크리미(널) 러브』의 수록작들은 ‘우미’와 ‘유리’라는 이름을 사랑하는 자(팬)와 사랑받는 자(아이돌)의 페르소나로 자주 활용하기에, 각기 다른 현실과 사랑의 방식을 보여주는 소설임에도 유사한 것처럼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0302♡」는 그의 소설이 또다른 사랑의 형태들을 찾아가기 위한 길목일 수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희주’라는 캐릭터는 사랑하는 자를 데리고 문학적 재현의 세계로 발을 내디디며 일종의 출사표를 던지는데, 그것은 이른바 ‘이희주 월드’의 프리퀄만이 아닌 등단 후 10년간을 기념하고 그로부터 도약하려는 작가 자신의 예고편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크리미(널) 러브』는 이희주의 첫 소설집이다. 그는 “인생의 어느 한순간이라도 자기 자신이 아니었길 바란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작가의 말’ 414면)고 썼다. 그의 소설은 외모지상주의나 정상성 이데올로기, 가부장제와 같은 지배질서하에서 부적응자로 일컬어지는 미약한 존재들의 꿋꿋함을 저항적 주체성이나 프라이드로 강변하지 않는다. 『크리미(널) 러브』가 우리에게 헌정하는 것은 단지 달고 끈적이며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의 속성들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오래 들러붙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