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정수일 『문명교류학』, 창비 2025
유작으로 남은 문명교류학 체계
차병직 車炳直
변호사, 법률신문 편집인
chabyungjik@gmail.com
윌 듀런트(Will Durant)는 “문명이란 문화 창조를 촉진하는 사회적 질서”라고 말했다.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는 원동력을 의미하겠지만, 거꾸로 창조된 문화의 체계도 문명일 것이다. 문명은 “혼란과 불안정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고도 한다(『문명이야기 1-1』, 민음사 2011). 두려움을 극복할 때, 호기심과 건설정신이 자유롭게 발산되고 나아가 타고난 본능적 충동을 넘어 삶을 이해하고 멋지게 가꾸려 노력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또한 반대로 이해가 가능하다. 인간은 불안과 혼란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가운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렇듯 문명이란 복합적이고 복잡하며, 우리는 그 결과만 알고 과정은 추측할 뿐이다. 불확실한 과정을 추측하는 데 동원하는 상상력도 문명의 본질적 에너지임이 분명하다.
정수일(鄭守一, 1934~2025)은 문명을 “인간의 육체적 및 정신적 노력을 통해 창출된 (…) 개화적 결과물의 총체”라고 새롭게 정의한다(85면). 언뜻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이나 문화가 빠진 듯한 느낌을 주지만, 다시 새겨보면 그렇지 않다. 문명이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개화적 결과물, 즉 인간의 지혜가 만들어내는 발전적인 사상과 풍속 그리고 물질의 체계라는 의미다. 그가 이렇게 문명의 정의를 새로 시도한 까닭은 문명교류학을 새 분과학문으로 확립하겠다는 목표 때문이었다.
한때 정수일은 특이한 경력으로 인해 호기심과 경탄의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실크로드학 또는 문명교류학의 대가로서 우리에게 다가선다. 과거의 이름과 숱한 일화는 부수적이고, 학자로서의 이미지가 압도한다. 한두권의 책을 내고 단국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할 때는 제도권 학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으나, 1996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면서 경력은 단절됐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단절의 기간은 한달이 채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밝히고 과거를 정리함과 동시에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롭게 출발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좁은 감옥에서 공부와 번역과 저술을 하며 자기 학문의 실천목표를 세웠다.
정수일은 자신의 학문 안에서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꾀했다. 문명교류론 구축, 고대·중세·근현대를 잇는 세계와 한국의 문명교류사 연구가 이론적 작업이라면, 그 이론의 실행 궤적을 넓은 의미의 ‘실크로드’로 확인했다. 실크로드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실천적 현장연구가 이어진 것이다. 그 결과 『실크로드 사전』(창비 2013), 『실크로드 도록』(육로편·해로편·초원로편 전3권, 창비 2014~19), 대륙별 문명탐험기 등이 탄생했다. 『이븐 바투타 여행기』(전2권, 창비 2001)를 비롯해 옛 탐험가들의 대표적 여행기 번역까지 곁들였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총괄하는 최종완결판으로 기획한 것이 바로 이 책 『문명교류학』이다.
그는 그 자신의 체계를 ‘연구총람도’라는 제목의 도표로 작성했는데, 모두 29종의 책으로 요약된다. 이후 그중 고려교류사, 조선교류사 등을 제외하고 23종을 차례로 출간했다. 번역서 『중국으로 가는 길』(헨리 율·앙리 꼬르디에 지음, 사계절 2002)과 대표 저서 『실크로드학』(창비 2001)은 감옥에서 탈고했으며, 나머지는 출소한 2000년 8월 15일 다음날부터 써나갔다. 박사학위와 교수직을 박탈당한 채, 주변의 도움으로 설립한 한국문명교류연구소를 이끌며 재야학자로서 강연과 집필을 계속했다. 연구총람도에 없는 책들도 몇권 더 출간했다. 답사여행도 매년 한두차례 다녔다. 그러나 강철 같던 그의 체력도 아흔에 가까워지며 확연히 달라졌다. 병원에 입원하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무언가 예감이 들었던지 서너권의 숙제와 집필 중이던 원고를 제쳐놓고 마지막 목표였던 『문명교류학』 집필에 착수했다.
어떤 조건에서도 원고마감 약속을 어기는 법은 없었다. 적게 자고 많이 쓰는 철칙에 따라 2024년 1월에 수천매의 원고를 출판사 창비에 넘겼다. 애당초 『문명교류학』도 총론과 각론으로 나누어 벽돌책 두권 분량이었으나, 편집자들과 의견을 주고받은 끝에 기존 저서와의 중복 등을 피하여 한권으로 정리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정을 한 뒤, 마치 모든 것을 마쳤다는 듯 지난 2월 24일 밤 영면했다. 정수일 연구총람도의 정점에 위치한 이 책은 유작이 되었다.
책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문명이라는 세계 인류의 공유성을 바탕으로 문명의 개념을 이해한 다음, 개별 문명의 상이성을 계기로 서로 교류하는 관계를 설명한다. 문명과 문명의 차이를 동과 서로 나누어 분석을 시도하는데 동과 서는 교류의 대전제가 되는 문명의 바탕이자 주체로, 그 지정학적 차이와 가치관의 차이를 비교한다. 이어서 저자 자신의 문명 개념에 따라 근대적 문명담론(진화론·이동론·순환론)과 현대적 문명담론(오리엔탈리즘·문명충돌론·문명공존론)을 해설한다.
문명론 다음은 교류론이다. 문명교류의 역사적 배경을 정치사적·군사사적・경제사적·민족사적·교통사적으로 나누어 살핀다. 군사적 사정을 정치적 배경과 분리한 것과 비행기 출현 이전의 육로와 해로의 경로를 파헤친 면이 이채롭다. 문명교류 전개과정을 개관하고 문명권을 정리한 데 이어 구체적 통로로서 실크로드가 등장한다. 좁은 의미의 실크로드가 그의 해석을 거쳐 탐험가들에 의한 환지구적 해로로 확장된다. 지구의 모든 공간이 결국 넓은 의미의 실크로드가 되는 입구까지 안내한다. 그리고 저자의 민족의식을 통해 논의는 실크로드와 한반도의 관계에까지 이르는데, 이는 세계 문명교류사에서 한민족의 위상을 확인하고 드높이는 것을 문명교류학의 목표로 삼는다고 밝힌 ‘서문’의 포부와 상통한다. 마지막은 보편문명론과 문명교류학 정립의 필요성 강조다. 결국 문명교류학을 체계화하는 일은 학문적 정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노력이다. 이상적 미래사회 건설을 위해 그가 내세우는 도구가 문명대안론인데, 문명교류론이 세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가 문명의 보편성이다. 그래서 저자는 필요성을 ‘절박성’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한다.
그가 문명교류에 관심을 가진 것은 베이징대 동방학부 아랍어과에 입학한 대학시절부터였다. 학문적 열정이 그를 어학에만 머물 수 없게 했다. 여러 다양한 교양과목을 수강하고 국제관계론 수업을 듣던 중 세계교류의 양상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스쳤다. 그뒤로 그는 어느 곳 어떤 상황에서도 생애의 목표를 놓치지 않았다. 아프리카 주재 중국외교관, 북한의 대학교수, 해외를 전전하는 비밀정보원 내지는 위장간첩, 감옥 안의 수형자 등의 지위에서도, 그리고 석방된 이후에도 한결같이 자신의 학문설계도에 그려진 길을 걸었다. 5개 언어에 능통하고 7개 정도의 언어를 더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은 문명교류학자로서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자격이었다. 그동안의 저술 양만 해도 경이로운데, 총괄편으로 나온 이 책까지 보태면 할 말을 잃는다. 『중국인 이야기』(한길사 2012)의 저자 김명호는 정수일을 ‘20세기 그 자체’라고 했다. 그의 삶의 행로가 20세기 역사나 다름없다는 의미다.
그가 마지막까지 직접 정리하지 못한 초고를 토대로 낸 책이다보니 아쉬운 점이 없을 리 없다. 우선 저자의 다른 저서와 중복된 기술이 여전히 남았다.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삼아 한반도와 실크로드의 관계를 조명한 것은 좋으나, 문명교류학을 독립한 분과학문으로 정착시키고 싶다는 의도에 충실하게 보자면 혜초(慧超)와 고선지(高仙芝)를 별개의 장(제13장)으로 내세워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 부분은 객관성이나 보편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대결론에 해당하는 문명대안론은 논리적으로 명쾌하지 못하다. 필요 이상의 어려운 한자어 사용 빈도가 높아 독자들로 하여금 쉽게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가 하면, 몇군데 감정에 치우친 표현은 학술서에 어울리지 않는다.
대학자를 향한 초보 독자의 투정 같은 독후감이다. 그러나 유장한 인류의 역사를 문명의 교류라는 특별한 장면을 통해 인내심을 가지고 감상하는 일은 웬만한 인기 장편영화를 보는 것보다 나은 점도 있다. 어쩌면 그는 이 유작을 최종결정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의 제자들과 지지자들이 나머지를 완결해주리라고 지금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문명교류학은 그가 세운 체계로도 대학의 커리큘럼 하나로는 가능하고도 넘친다. 다만 보편적 학문으로서 지위를 얻으려면 외국의 학자와 학생과 일반 독자까지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이 지구상 생물 전체의 목록을 작성하는 ‘생명의 백과사전’(EoL.org) 프로젝트를 진행하듯 백과사전적 성격이 강한 정수일의 담론도 대중적 온라인 공론장에서 갈무리되고 논의된다면 어떨까. 그가 마무리하지 못한 책을 선물할 기회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문명이 교류하는 실크로드 위에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