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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리영희재단 기획 『나와 리영희』, 창비 2025
민주주의 위기에 전하는 리영희 정신
문예찬 文睿讚
역사교사, 서울대 역사교육과 박사과정
yechan0226@naver.com
솔직히 12월 3일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그리 춥지 않았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연말이 주는 설렘과 한해에 대한 반성, 새해에 대한 기대가 섞인 감정으로 평범하게 출근하고, 수업을 하고, 밥을 먹고 사람들과 대화했다. 밤에 ‘그’가 뉴스에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비상계엄 소식을 들은 이후 모든 상황은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국회에 들어가는 군인들, 헬기의 모습과 시민들의 저항. 그 밤의 온도, 감정, 냄새까지 모든 것이 선명하다.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두가지였다. 1980년의 광주와 리영희(李泳禧, 1929~2010). 리영희는 그런 존재다. 민주주의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자 1970~80년대의 어둠 가운데에서도 지성사를 비춘 등불. 투옥과 탄압에 맞서면서도 펜을 놓지 않고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오롯이 감당한 인물. 그런 리영희가 2024년, 그것도 90년대생인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만큼 12월 3일 밤이 이질적이었다는 것과 동시에 그가 민주주의의 위기마다 끊임없이 소환될 수밖에 없는 인물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리영희재단이 기획하고 고병권 외 30인이 참여한 『나와 리영희』는 리영희를 기억하는 사람들, 리영희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리영희를 기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 서문에서 언급하듯 인생의 후반기에 리영희는 자신의 책에 영향을 받아 젊은 시절 투옥됐던 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심정을 여러차례 밝혔다. 비단 감옥에 갔던 사람들만이 아니다. 전 대통령, 정치인, 학자, 언론인, 혹은 이름 없이 자기 삶의 자리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리영희의 책을 읽고 시대와 자신의 관계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들이 리영희를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리영희가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또 그를 재소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의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Lee McIntyre)는 ‘포스트 트루쓰’(post truth)라는 용어로 오늘날 사회를 규정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으로 와버린 사회에서 우리가 믿었던 절대적 가치와 믿음 체계마저 상대화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사조는 자명한 진실과 사실마저도 하나의 상대적 가치로 전락시켜버리고 말았다. 오늘날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소위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계엄령을 ‘계몽령’이라 칭하는 이 땅의 ‘애국보수’는 자신들만의 성에 갇혀 수많은 가짜뉴스와 거짓담론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심지어 진보진영에서조차 가짜뉴스는 힘을 얻고 있다. 거짓으로 밝혀져도 정정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큰 틀에서 전체에게 이익이 된다면 부분적인 거짓은 눈감을 수 있다는 변명은 치졸할 뿐이다. 이런 탈진실에 리영희는 단호하게 반대했을 것이다. 진실은 그가 온몸을 바쳐 지키고자 한 최후의 가치였다.
리영희는 역설적이게 자유로 인해 부자유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권력과 우상에 도전했고 혁신적인 상상을 추구했다. 미국에 대한 비판이 신성모독시되는 시절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추적했고,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끝나지 않은 착취관계, 베트남 민중의 고통과 생각을 냉전의 틀을 넘어 바라보았다. 남한-북한-미국의 관계를 균형있게 바라보며 바람직한 통일상을 구축하려 노력하기도 했다. 그는 민주주의, 통일, 언론의 자유 등 시대적 과제를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독재를 비판하는 글을 쓰고, 진리의 횃불이 꺼지지 않게, 또 다음 세대에 전해지도록 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는 사상의 제약이 없는 자유로운 지식인이었지만, 그 때문에 기본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자유를 침해당했다. 『나와 리영희』는 그럼에도 그를 따르고자 했던, 기꺼이 그의 길을 따라 걸었던 사람들이 그를 회상하고 추억하는 글들을 소개한다. 그의 일대기와 사상을 담은 평전(권태선 『진실에 복무하다』, 창비 2020)이 그의 삶을 통시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었다면, 이 책은 주변인들을 통해 리영희를 옆에서 바라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도그마를, 고정관념을, 그 시대를 지배하는 잘못된 상식을 믿지 말라”고 조언한 리영희를 통해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는 언론인(신홍범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비판한 기자」), 리영희를 ‘비판적 중국연구’의 뿌리로 삼아 학문적 성과를 이으며 리영희를 추모·계승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지식인(백영서 「내 삶의 균형추, 리영희」), 리영희의 인간적인 모습을 곁에서 살펴본 첫 주례 제자(유홍준 「리영희 선생님의 주례사」) 등 그와 동행했던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겼다. 1970년께 교도통신 서울 특파원으로 부임해 우정을 쌓았던 에구찌 히로시(江口宏)의 병환 소식을 듣고 2009년 병문안차 방일한 그에게 인터뷰를 청해 대화를 나눈 일본인 기자의 회고(히라이 히사시 「리영희 선생과 교도통신 서울 특파원들의 우정」)도 각별하다.
이는 리영희와 한 세대를 동행한 이들의 소중한 이야기이다. 그럼 이제 그를 직접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세대에게 리영희는 어떤 존재로 기억되어야 할까? 민주화가 하나의 상수로 자리잡은 이후에 태어난 나를 비롯한 90년대생들에게 리영희는 어떤 의미이며, 그의 사상은 왜 계승되지 않는지를 물어야만 한다. 이 책에서 리영희를 추억하는 사람들은 최소 40대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다음 세대에게 큰 울림을 줄 수 있는가?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은 현재 주류가 된 기성세대가 외치는 구호와 청년세대의 실제적 삶이 유리되어버려서는 아닐까? 정치계, 문화계, 경제계, 언론계, 학계 그 어느 곳에 새로운 세대를 위한 자리가 있는가?
물론 90년대생들은 축복받은 세대이다. 사상의 자유를 침해당하며 인신의 구속을 겪지도 않았고, 시위를 한다고 잡혀가지도 않았다. 물질적 풍요와 교육 기회는 역대 한반도를 살아간 세대 중 가장 넘치도록 누렸다. 그런데도 왜 우리 세대는 행복하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는 실패한 세대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치열한 경쟁을 견디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아버지 세대가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새로운 상상력과 가치를 거세당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 우상을 깨뜨리고 새로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하지 못한 채 침전한다. 불행의 이유를 남성과 여성 서로에게, 장애인에게, 사회의 소수자들에게서 찾으며, 권력이 만들어놓은 게임 속에 박제되어가고 있다. 문제의 원인을 개별적 타인에게서 찾기보다 무대 뒤편의 거대한 구조를 바라보는 것. 그 모순을 가감없이 고발하고, 사회적 책무를 짊어지고 시대 속 개인을 고민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리영희의 자세가 90년대생에게 주는 지적 교훈이 아닌가 한다. 70년대의 산업화, 80년대의 민주화가 시대의 과제였듯이 우리 세대는 우리만의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발굴하고 그 해결방안을 건강하게 모색해가야 한다. 그것이 민주화를 위해 싸운 기성세대와 오늘날 청년세대의 이격을 좁히는 방안이기도 할 것이다. 나를 비롯한 90년대생들에게 이 책은 리영희가 추구했던 가치들은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나가야 할지 고민할 계기를 제공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