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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최경봉 『한글 연대기』, 돌베개 2025
한글에 새겨진 우리의 말글살이
오연경 吳姸鏡
문학평론가
korin2@hanmail.net
‘한글’이라는 단어가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사연에는 우리 민족의 상처와 질곡의 역사가 응축되어 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반포되어 언문(諺文)으로 통용되다 바야흐로 근대국가의 국문(國文)으로 자리잡을 시기에 한일합병으로 인해 ‘국어’의 지위를 빼앗겼던 한글은, 동시에 문자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한국어 공동체의 응전과 투쟁을 동반해왔다. 국어학자 최경봉의 『한글 연대기: 훈민에서 계몽으로, 계몽에서 민주로』는 이러한 한글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기술하되 “‘역사적 사실로서 한글의 모습’이라는 표면구조와 ‘역사적 맥락 속 한글의 의미’라는 내면구조”(6면)를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풍부한 사료에 기반한 고증, 전문적인 국어학 지식을 쉽게 풀어쓴 분석, 연대기적 구성과 주제별 구성의 절묘한 조화 등 이 책이 지닌 미덕이 여럿인데,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공동체의 말글살이를 가꾸는 데 너나없이 뛰어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는 점이다.
한글의 창제와 보급, 한글 신문 창간과 한글 문장 만들기, 외래어표기법과 한글맞춤법 제정, 숙원이었던 국어사전 편찬, 한글 기계화를 위한 노력으로 이어진 ‘한글 연대기’에 참여한 주체는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뉜다. 우선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한 조선왕조, 일제강점기 조선어정책을 주도한 조선총독부, 해방 이후 민간학회의 역할을 통합하여 한글정책을 추진한 대한민국 정부를 포함한 제도적 권력기관이 있다. 다음으로 근대국가 만들기의 일념으로 민족어 표준화에 매달린 민족주의자들과 각계각층의 민간지식인들이 있다. 이들의 이름 및 활동단체와 그 성과는 책 뒤편의 ‘찾아보기’에 빼곡한 숲을 이루고 있다. 다만 마지막 그룹에 속한 이들은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조선시대 부패한 관리를 비난하는 한글 벽보를 붙인 백성, 신문에 한글 기사를 투고하며 공론장에 참여한 독자들, 표기법 논쟁의 고비마다 쉽고 자연스러운 글쓰기 감각을 요구하고 관철시킨 대중이 바로 그들이다.
이 책의 부제에서 드러나듯 문자 주권을 실현해온 주도권은 ‘훈민(訓民)’의 국가권력에서 ‘계몽(啓蒙)’의 지식권력으로, 마침내 ‘주인된 민〔民主〕’의 권리와 책임으로 이동해왔다. 그러나 한글의 연대기가 그러한 권력 이양의 궤적을 단선적으로 따라온 것은 아니다. 저자는 어문규범 제정의 역사에서 세 주체의 갈등과 협력이 얼마나 복잡한 이념투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어왔는지를 펼쳐 보인다. 형태주의 표기법 대 음소주의 표기법, 한글전용론 대 한자혼용론, 단수 표준어 원칙 대 복수 표준어 인정, 모아쓰기 대 풀어쓰기 등을 놓고 벌어진 논쟁은 단순한 문법적 입장을 넘어 이상론과 현실론, 원칙주의와 관습주의, 여성과 남성, 민족과 계급, 역사적 정통성과 법적 공신력 등의 이념대립과 연동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꼼꼼한 추적 끝에 저자가 도달한 결론은 “혼란은 결국 대중들의 언어 선택에 따라 자연스럽게 어느 하나로 귀결되면서 안정된다는 것”(177면)이다.
저자는 한글 연대기가 이토록 역동적이고 치열할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의 운명이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믿음”(10면), 즉 어문민족주의적 신념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책에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방대하고 다채로운 자료들이 가득한데, 그중 꽤 깊은 울림을 주었던 세가지 자료를 꼽아 이야기해보려 한다. 첫번째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남아 있는 녹음 자료(343면)로, 1928년 당시 베를린대학 유학생이었던 이극로가 소르본대학 인류학 팀과 한글 창제의 내력 및 조선어 자모음을 녹음한 것이다. 책에는 이를 직접 들어볼 수 있는 QR코드가 삽입되어 있는데, 백년 가까운 시간을 뛰어넘은 그의 목소리에는 조선어와 한글을 세계에 알려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하고자 했던 피식민지 지식인의 열망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두번째는 1932년 세차례 진행된 조선어학회와 조선어학연구회 간의 철자법 토론회 사진과 기사(216면)다. 이 사진 속 쌍서, 겹받침, ㅎ받침, 어미 활용 문제를 논하는 토론회장에 가득 들어찬 청중은 어문규범의 통일을 바라는 뜨거운 민심을 보여준다. 마지막 자료는 1929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957년에 완간된 『큰 사전』의 원고 사진(316~17면)이다. 서로 다른 글씨체로 빽빽하게 첨삭 내용이 적힌 원고지가 3천 5백여장에 달한다고 하는데, 긴 시간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여 광범위한 수정을 통해 완성도를 높인 분투의 과정이 고스란히 확인된다.
저자의 말처럼 이 자료들에는 나라 잃은 시기에 민족어의 근대화를 열망하며 한글에 쏟아부었던 우리 민족의 ‘특별한 마음’이 담겨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어문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언어민주주의의 씨앗이었다. 독립국의 국민으로서 표준 어문규범과 모어 사전을 갖고 싶다는 열망은 그 열망을 지닌 모든 이들로 하여금 익숙한 말과 글을 객관적 대상으로 삼아 분석하고 성찰하도록 독려했다. 민족어에 대한 애정과 집착을 동력으로 삼은 어문 정리과정은 민족어를 오히려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성찰하고 저마다의 말글살이를 보편 규범과 견주어 분석하며 서로의 언어감각의 차이를 조율할 객관화의 기회를 제공했다. 한글 연대기는 언어공동체의 주인으로서의 시민이 집단지성의 공론장에 참여해 민주적 역량을 갈고닦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말글살이를 ‘사용’으로부터 떼어낸 어문규범의 권위와 제정절차의 공고화는 오늘날 언어현실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저자는 외국어의 다양화 추세에 여전히 영어 편향적 표기를 고집하는 외래어표기법, 언어다양성을 훼손하고 어휘의 우열을 조장하는 단수 표준어 원칙, 낯설고 어색한 표기를 강요하는 사이시옷 규정 등 언어현실과의 괴리가 깊어진 「한글 맞춤법」의 개정이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현실을 꼬집는다. 디지털 시대의 문해력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는 와중에 문장 생성과 맞춤법 교정까지 자동으로 처리해주는 생성형 AI의 등장은 말글살이의 본질 및 어문규범의 역할에 복합적인 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일제의 핍박 속에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한글이 노벨문학상 수상과 K팝 열풍을 이끌며 세계인의 문화자산이 된 지금, 민족적·국가적 차원을 넘어 다원주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말글살이를 위한 집단지성의 공론장을 다시 마련해야 할 때에 긴요하게 참조해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