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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용휘 『평민철학자 해월 최시형』, 모시는사람들 2025
해월 철학, 어떻게 읽을 것인가
박맹수 朴孟洙
순천생태칼리지 설립준비위원장, 원광대 명예교수
mspark5511@hanmail.net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98)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64)의 뒤를 이어 동학을 지켜냈다. 해월 없이 동학을 논할 수 없다. 해월이 지켜낸 동학이 지금 다시 주목받고 있다. ‘문명의 대전환’ 또는 ‘변혁적 중도’의 힘을 모은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가 화두가 된 지금, 오늘의 길을 묻고자 다시 동학을 찾게 된다.
해월은 1861년 동학 입도 이래 1898년에 순교하기까지 38년간 관(官)의 탄압 속에서 잠행과 도망을 거듭하면서 삼남 지방은 물론이고 남한 일대에 250여군데에 이르는 비밀포교지를 건설했으며, 이것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수운 문집 편찬을 필두로 경전 집성, 의례 제정, 직제 확립, 정기 수련제도 수립 등을 통해 동학을 제도종교로 완성했다. 그리고 72세(1898)에 체포되어 좌도난정지율(左道亂正之律,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죄)로 순교하기 직전 갇혀 있던 죄수들에게 떡을 해서 배불리 먹게 하고는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탄생 200주년을 2년 앞둔 현재까지도 해월의 생애와 사상, 그 사회적 실천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미해명 상태에 놓여 있다. 평자는 이에 안타까움을 느껴, 지난 40여년간 합법적 청원운동이었던 교조신원운동과 비합법적 무장투쟁의 형태로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을 전후한 시기 해월이 남긴 사료 찾기와 구체적 행적 해명에 집중했고 1차 사료들을 다수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런데 특히 철학적 관점에서 해월을 조명한 연구는 드물다. 일찍이 시인 김지하(金芝河)가 『남녘땅 뱃노래』(초판 두레 1985) 등의 산문집에서 해월 사상에 주목한 것, 한살림운동의 큰 스승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이 1990년 4월 강원 원주시 호저면 송골에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을 기리며’라는 글이 새겨진 기림비를 세우고 해월의 삶과 실천이야말로 우리 겨레와 세계 인류의 ‘거룩한 모범’이라고 강조한 것, 그리고 이규성의 『최시형의 철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정도가 전부이다.
해월에 관한 철학적 조명이 부족한 상황을 타개하려는 듯 ‘공경과 살림’을 키워드로 해월 사상과 그 실천 전반을 다룬 수준 높은 교양서가 나왔다. 김용휘의 『평민철학자 해월 최시형』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몇 안 되는 한국철학 전공자이자 동학을 철학적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는 대표적 연구자이다. 바로 그런 그가 『우리 학문으로서의 동학』(초판 책세상 2007, 개정판 모시는사람들 2021), 『최제우의 철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12)에 이어 이번에 『평민철학자 해월 최시형』을 출간했다. 이 책은 그의 동학 3부작 가운데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역저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부록을 제외하고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월의 우주관 즉 천관(天觀)을 다룬 제1장 「천지가 곧 부모다」부터 제9장에 해당하는 맺음말 「해월 생명철학의 특징과 의의」에 이르기까지 해월의 사유와 실천, 삶의 궤적 전반을 다루고 있는 가운데 가장 큰 미덕은 해월이 스승 수운 최제우의 동학을 계승하되, 그것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했다고 평가하는 점이다. 즉, 해월이 수운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계승하되 다시 그것을 ‘사인여천(事人如天)’과 ‘경물(敬物)’ 사상으로 확대 재해석함으로써 사람과 만물에 대한 ‘공경’을 새로운 삶의 원리로 제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 김용휘는 해월의 천지부모(天地父母), 양천주(養天主, 사람의 몸에 한울님을 기른다), 이천식천(以天食天, 하늘로써 하늘을 먹여 키운다. 곧 만물이 한울님이다), 향아설위(向我設位) 법설 등에 주목하여 그 독창성과 사상적 의미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예를 들면 ‘천지부모’라는 용어는 수운에게는 보이지 않는 해월만의 고유한 용어로서 여기서 ‘천지’는 “물리적 자연이 아니라 영적 활력으로 가득 찬 우주생명이자, 그 생명의 마당”이고, 그것은 “단순히 자연을 소중히 여겨서 보호해야 한다는 환경론자의 논리나 지구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봐야 한다는 생태론자의 이론과도 구분될 뿐 아니라, (…) 성리학자들의 인식과도 구분된다”(35면)고 설명함으로써 해월의 천관이 수운의 그것을 계승하되 하늘이 모든 존재에 내재한다는 범천론(汎天論)으로 확대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향아설위’(나를 향해 제사상을 차림)에 대해서도 “가히 새로운 문명의 전환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191면)으로서 “지금 여기의 삶을 중심으로 삶을 재편하라는”(212면) 해월의 독특한 시간관이 드러나고 있다고 강조한다.
한편 독자들은 해월을 ‘평민철학자’라고 호명하는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그에 대한 답이 부록 「해월 최시형의 생애」에 담겨 있다. 평민의 아들로 태어난 해월은 수운과는 달리 학문적 기반이 거의 없었다. 해월은 오랜 잠행과 도망의 엄혹한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수련하고 실천하면서 수운의 가르침을 평민의 언어로 풀어냄으로써 민중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비참한 삶에 희망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끝으로 저자의 해월 연구가 더욱 심화되기를 기대하면서 해월 법설 외에 통문(通文, 동학교단 내에 내린 공식적인 글·공문)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환기하고자 한다. 예컨대 해월 통문 안에 “우리 도중의 도유들은 통양 갓과 서양 비단, 당목, 채단 등의 물건은 일절 엄금하고 단지 거친 베옷과 거친 무명을 입을 것”(『한국사상선 16: 최제우 최시형 강일순』, 박맹수 편저, 창비 2024, 198면)이라는 내용이 있다. 1876년 개항 이래 조선사회는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강제적으로 편입되어 전통적인 경제가 파탄의 위기에 직면하는데, 그때 조선경제를 위협했던 서양 상품 가운데 비단과 당목 등이 있었다. 해월이 1892년에 서양 비단과 당목 사용을 금지하고 조선 전래의 거친 베옷만을 입을 것을 강조한 것은 ‘우리 겨레가 자주적으로 사는 길’, 즉 ‘비서구적 근대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증거라 할 수 있다. 요컨대, 해월과 동학은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치열하게 대결하고 있었다. 간디가 물레를 돌리며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듯이. 앞으로 통문 분석을 통해 해월이 자본주의사회가 아닌 조선 독자의 대안적 사회를 어떻게 구상하고 실현하려 했는지, 해월의 사회철학 또는 정치철학이 구체적으로 해명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