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D. H. 로런스 『무지개』(전2권), 창비 2025
온순하지 않은 사랑, 사유의 모험
손영주 孫瑛珠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yjson@snu.ac.kr
D. H. 로런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의 『무지개』(The Rainbow, 1915, 강미숙 옮김)는 1840년에서 1905년에 이르는 영국 미들랜즈의 코세테이와 일크스턴 지역을 배경으로 브랭귄 집안 3대의 삶과 사랑을 그린 가족연대기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이 1928년 출간 직후 외설 논란으로 판금 조치를 받고, 작가 사후 30년이 지나서야 합법적으로 출간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이전인 『무지개』 또한 1915년 출간 후 불과 3주 만에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으며, 1926년 미국에서 재출간된 뒤 1935년에 이르러서야 영국에서 정식으로 복간되었다. 동성애적 장면과 노골적인 성 묘사가 당시 도덕규범을 해친다는 이유에서였다. 2022년 넷플릭스 영화 「채털리 부인의 연인」 감상평을 보면, 많은 이들이 원작이 단지 육체적 사랑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육체와 관능, 몸과 자연에 대한 로런스의 강조가 당대의 억압적인 성규범, 계급제도, 산업화와 근대화에 대한 비판이라는 익숙한 해석 속에 박제되어, 로런스 특유의 비판적 활력과 현재성이 오히려 희미해진 감이 있다.
로런스는 도발적인 작가다. 그러나 그의 도발은 단순히 보수적인 성규범을 넘어 훨씬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정치적·윤리적·존재론적 문제들을 겨냥한다. 그의 발언은 다양한 독자의 심기를 건드리며, 때로는 내적으로 상충되거나 모순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의 인물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보수적 여론 속에서도 반전·반국가·반제국주의 정서를 숨기지 않으며 결혼제도와 계급질서, 때로는 이성애적 규범에 반하는 사랑을 탐색하기도 한다. 에세이 「자기 집의 주인」(Master in His Own House)에서 로런스는 당시 여성운동을 이끄는 여성들이 대장 노릇을 한다며 분노하는 남성들의 생명력 상실을 지적함으로써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자극적인 발언을 던지기도 하고(Phoenix II, Viking Press 1968, 546면), 『무지개』에서 어슐라의 성장과 독립의 과정이 남성 세계에 대한 원한과 정복욕망과 뒤얽혀 있다는 이유로 일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로부터 여성혐오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무지개』는 로런스의 때로는 모순적이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도발이 근대화가 인간의 내면과 외적 삶에 가한 균열과 도전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그 너머의 가능성을 모색한 치열한 사유의 실험이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랑에 빠진 여인들』(Women in Love, 1920, 손영주 옮김)이나 『채털리 부인의 연인』 등으로 이어지는 로런스 사유의 궤적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흔히 ‘서곡’이라 불리는 이 소설의 첫머리는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브랭귄 일가의 풍경으로 시작되지만, 이내 균열과 변화의 조짐이 드러난다. 브랭귄 남성들은 땅과의 맹목적 결속과 “피의 친밀한 교감”(「무지개」 1권, 11면) 속에서 충만함을 느끼는 반면, 여성들은 저 너머, 남성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미지의 세계를 꿈꾼다. 이러한 여성들의 욕망은 주어진 삶의 조건을 넘어서려는 근대의 창조적 에너지이자, 1840년대 본격화되기 시작한 페미니즘의 조짐을 포착하며 이후 남녀관계의 변화를 예고한다.
톰 브랭귄과 폴란드 출신 리디아의 결혼을 중심으로 한 1세대의 유기적 전통사회는 운하와 광산, 철도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해체된다. 농장과 마을은 단절되고 사람들은 자기 땅에서조차 이방인이 된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 땅과 교감하며 살아가던 인간은 노동에서 소외된다. 그러나 이 시대는 아직 인간이 자연과 타자와의 조화를 이룰 수 있었던 시기이며, 리디아와 톰은 각자의 내적 생명력과 역량을 지닌 인물로서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개인을 넘어선 무한한 우주적 질서 속에서 합일의 희열을 누린다.
반면 2세대 윌과 애나의 관계는 훨씬 팽팽하고 격렬한 갈등 끝에 톰과 리디아의 관계에는 미치지 못하는 불안한 안정을 찾는다. 이들의 결혼은 근대화의 진전에 따라 외부세계와 자아, 그리고 내면의 감수성이 극단적으로 분열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윌은 육체와 절대미를 향한 폐쇄적 감각의 탐닉에 빠지고, 애나는 그 속에서 남성중심적 권력의지를 간파하며 강하게 반발한다. 윌은 기교와 기계적 지식을 전수하는 공교육자로 변모하고, 애나는 어머니라는 허위의식 아래 안주한다. 갈등은 표면상 애나의 승리로 봉합되지만, 실상 이긴 것은 윌도 애나도 아닌, 정신과 감각, 여성과 남성, 자아와 세계를 분열시키는 근대의 작동원리일지도 모른다.
3세대 어슐라와 스크리벤스키에 이르면 근대성은 일상뿐 아니라 의식의 더욱 깊은 곳까지 침투한다. 잿빛 도시와 경직된 세상, 유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공포를 느끼는 대영제국의 공병대 장교 스크리벤스키, 그리고 방향 없이 질주하는 기차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어슐라의 모습은 이들이 공유하는 시대의 감각, 즉 근대의 맹목적 질주 앞에 선 주체의 불안과 상실을 드러낸다. 브랭귄 여성들이 동경하던 남성의 세계는 점차 착취와 정복의 세계임이 드러나며, 그러한 세계에 대한 열망은 창조적 자기극복의 동력이 되지 못한 채 남성적 권력의지의 위태로운 모방으로 변질된다. 스크리벤스키를 향한 어슐라의 정복욕망은 작가의 여성혐오를 드러낸다기보다는 위험한 근대적 충동이 내면화된 양상을 가시화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스크리벤스키는 내적 죽음에 머무르는 반면, 어슐라는 존재이든 사랑이든 미지로 나아가길 거부하는 모든 것들과 결별을 선언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어슐라가 바라보는 무지개는 하늘에 걸린 것이 아니라 땅 위에 선 무지개다. 그녀의 자아실현과 해방은 초월적 도피나 현실과의 단절이 아니라, 현실을 내부로부터 비판적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어렵고도 막중한 과제인 것이다.
로런스가 그리는 사랑은 결코 온순하거나 낭만적이지 않다. 그의 인물들은 격렬한 감정과 갈등 속에서 종종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기도 한다. 로런스의 도발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가장 내밀하고 신성한 영역인 사랑을 가차 없이 해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로런스에게 사랑은 근대화 속에서 인간이 직면한 존재의 조건과 방식의 문제이며, 존재의 자유로운 생명활동을 억압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규율하려는 서구 근대문명의 사고와 언어, 사회체제 전반에 맞서는 투쟁이었다. 따라서 사랑에 대한 그의 집요하고 치열한 탐구는 강렬한 인지적·정동적·존재론적 진동을 불러일으킨다. 로런스는 누구도 시대적 조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정직하게 직시하며, 자기 자신조차 비판의 예외로 두지 않는 철저한 성찰과 과감한 사유의 실험을 감행한 작가였다. 이번에 강미숙 교수의 번역으로 『무지개』가 출간되어 반갑다. 앞으로 로런스의 다른 작품들도 한층 활발히 번역되어 더 많은 독자와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