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2025년 6월 9일에 회의를 열고 김중일 양경언 이설야(이상 시 부문) 김병운 성해나 한영인(이상 소설 부문) 및 『창작과비평』 상임편집위(이상 기타 부문)를 예심위원으로, 공선옥 김해자 송종원 한기욱을 본심위원으로 위촉해 심사진을 구성했다.
예심위원들은 7월 9일까지 각 부문에서 그 성취가 인정되는 대상작을 선정하여 심사를 진행했다. 만해문학상 규정에 따라 등단 10년 이상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2년간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한 예심에서 시집 5종, 소설 5종, 기타 2종(총 12종)을 본심 진출작으로 선정했다.
이어서 4인의 본심위원들은 8월 8일 1차 본심을 열고 다음 7종을 최종심 대상작으로 선정했다. 김수열 시집 『날혼』, 장석남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이상 시), 김금희 장편 『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숨 장편 『잃어버린 사람』, 전성태 소설집 『여기는 괜찮아요』(이상 소설), 김경식 지음 『루카치 소설론 연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기획 『김대중 육성 회고록』(이상 기타).
9월 11일 열린 2차 본심(최종심)에서 더 본격적인 논의가 재개되었다. 우선 심사자들은 토론 끝에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기획 『김대중 육성 회고록』(한길사 2024)을 특별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한 인물이 삶의 역정을 거쳐 탁월한 정치지도자가 되는 개인사적 행로와, 독재와 탄압에 맞서온 민중의 역사가 촘촘하게 직조되어 있는 이 책이 민주주의와 평화, 그리고 골고루 잘 사는 삶을 이루기 위해 온몸으로 애쓴 김대중 대통령의 모습을 역동적이면서 흡인력 있게 담아낸 귀한 결실이라는 데 전원 흔쾌히 동의했다.
곧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본상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밀도있는 논의를 거쳐 심사진은 김금희 장편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창비 2024)를 본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창경궁 대온실을 고리로, 문학과 역사가 여러겹의 서사적 끈으로 묶여 놀라운 균형을 유지하는바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동시에 미래세대와 소통하는 이 작품이 개인과 공동체의 성장이란 무엇인지, 진정한 해방을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지 곡진하게 물어오는 수작이라는 데 심사위원들은 모두 뜻을 모았다.
심사평
공선옥(孔善玉) 소설가
올해 만해문학상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내게 압도적이었다. 모든 작품이 공히 단단하기가 금강석 같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완성도가 출중해서 나로서는 심사를 본다기보다 좋은 작품을 접하는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
김숨의 『잃어버린 사람』을 읽으면서 나는 로베르또 로쎌리니 감독의 영화 「독일 영년」(1948)을 떠올렸다. 이 소설이 나는 ‘한국 0년’의 기록으로 읽혔다. 조선인이었던 사람들의 한국인 되기의 현장, 부산. 그곳에 모여든 인간군상들의 처절한 고투의 생태를 김숨은 거의 인류학적 시선으로 꼼꼼히, 집요하게 기록하고 있다. 전성태의 『여기는 괜찮아요』에 실린 단편 「깡통」과 「숲으로」는 신비로웠다. 전성태 작가는 일상을 신화로 만들어내는 능력자가 아닐까.
김금희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전, 쓰는 동안 섭렵한 자료들의 목록은 그저 경이롭기만 하다. 처음에는 소설에서 이따금, 아니 자주 노출되는 ‘하이틴스러운 문투’가 거슬렸다. 과연 나는 이 소설을 다 읽어낼 수 있을까, 불안감이 들었다. 소설이 걸쳐져 있는 긴 시간대 때문에 일단 웅장하긴 한데, 만화적이거나 드라마적이라고 할까. 중첩된 이야기 구조 속에서 인물들이 작가의 의도대로 잘 연기하고 있다는, 역으로 말하자면 작가가 인물들을 잘 관리하고 있어서 그것이 이 작품의 질을 높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인물들이 어쩐지 ‘규격화’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 들어간 작가의 공력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 대한 나의 트집은 괜한 투정인 셈이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너무나 재미있다. 자서전도 아니고, 대담집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말 그대로 회고록이다.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 선생님’의 살아온 내력 이야기라고나 할까. 형식은 소박하나 그 속에는 역사의 현장에 바투 살았던 인간 김대중의 생애사를 넘어선 한국의 역사가 있다. 이것은 그러니까 회고록의 형식으로 쓰여진 역사책이다.
세상의 모든 ‘앓고 있는 곳’을 향하는 김수열의 『날혼』은 제주사람 김수열만이 쓸 수 있는 ‘몸 시’였다. 몸으로 쓴 시였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수상작으로 결정해놓고도 내가 『날혼』을 쉽게 놓지 못한 이유는 김수열의 한판 시굿에 압도당한 탓이 클 것이다.
김해자(金海慈) 시인
이명처럼 들리고 눈에 밟히고 움찔거리는 입말들의 향연이자 한바탕 해원굿을 보는 듯한 김수열의 『날혼』은 텍스트 중심주의를 넘어선 뭇 생명들의 연대기이자 다성의 목소리를 지닌 분투가다. 4·3의 비극성을 품은 채 생명과 평화의 지평선으로 나아가는 이 시집은 상주를 대신해 울어주는 대곡자의 태도 혹은 발성법으로 폭력적인 근대화와 정치적 학살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아프게 상기시키는 동시에 상처를 어루만지고 되새기면서 삶의 비의와 위엄을 증거한다. 민초들의 입말을 통해 구연적으로 재현된 상상력의 신명 속에서 역사와 현실이 만나고,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회통된다. 삶의 전영역이 자본에 포섭된 현실 한복판에서 시인이 이룩한 공동체적이고 토착적인 모더니티야말로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일 수 있다는 세계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시가 감당해야 할 정치적 혹은 민속적 지층을 넓힘으로써 리얼리즘과 민중시의 진경을 선물했다.
장석남의 『내가 사랑한 거짓말』은 탁월한 언어감각과 섬세한 감수성을 통해 서정시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를 넘어서면서, 지금 여기에서 시가 수행해야 할 몫을 숙고하게 한다. 거짓말로 자서전을 써나가는 “가면들을 순간의 빛 속에 가두고/때리는” “벼락”(「서정시를 쓰십니까?」)처럼 독한 서정시들이 태풍이 오기 전 감지되는 생명의 신운(神韻)처럼 육박해온다. 시인은 ‘마술 극장’처럼 가면과 미소와 음흉함을 숨긴 법정으로 패러디되는 폐허가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낙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 사는 땅”(「쾌청」)을 향해 “사랑이 보이는 그 긴 언덕”(「언덕」)으로 “희끗한 걸음”(「다시 언덕」)을 내딛는다. 시대와 현실을 직시하면서 해방을 성취하겠다는 내적 열망과, 서정성을 더 독하게 벼린 시의 몸으로써 수행하겠다는 의지 혹은 탐색이 어떻게 단아하고 웅숭깊은 미학을 성취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시집이다.
김숨의 장편 『잃어버린 사람』은 1947년 9월 16일 하루 동안의 부산 저잣거리 풍경을 통해 식민 경험이 남긴 몸과 마음의 상흔과 민초들의 고통과 애환을 다각적으로 보여준다. 독립된 각 장이 모두 한편의 아름답고 처절한 서사시처럼 다가온다. 바통을 이어받듯 고난을 이어가는 행렬에는 평생 곰장어 벗기느라 일그러진 손과 원자폭탄에 얼굴이 문드러진 채 죽은 아내의 시신을 업고 가는 사내의 발걸음이 있다. 고구마를 훔쳐 먹고 발가벗겨진 채 거리를 배회하는 사내아이가 있고 강제징용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있다. 이 신산한 편린들은 한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처럼, 갈등도 플롯도 인물 상호간의 연계 혹은 접점도 없이 흩뿌려놓은 이름 없는 조각들이어서, 구심력은 떨어지나 공동체적 운명 혹은 고통 혹은 신음에 더 주목하게 한다. 가장자리와 주변에 불빛을 비춤으로써 우리의 역사가, 아니 문학조차 풍족하고 안락한 실내에서 내려다보는 박제된 멧돼지의 시선에 길들여져가는 게 아닌가 성찰하게 한다.
전성태의 『여기는 괜찮아요』는 느슨한 방식으로 여러 경로를 탐색함으로써 구멍투성이의 세계 혹은 구멍 난 관계에 대해 질문하면서 함께 대안을 찾아가는 소설이다. 진위를 가리려는 대신 해답을 유예하면서 뻔한 주장이 되기 마련인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어느새 뛰어넘게 만든다. 끊어짐과 결루(缺漏) 속에서도 여기에서, 지금, 함께 숨 쉬는 구멍을 찾아내려는 강인한 의지를 확인하게 한다. 서로가 형제라 오해하는 낯선 이들의 조우를 보여주는 「상봉」이나 우리가 잃어버린 야생적 사유와 존재방식을 보여주는 「깡통」 같은 작품은 이런 점에서 특히 감동적이고 위력적이다. 언뜻 소소해 보이는 일상적 소재나 개인적 이야기도 이면에는 남북분단이나 여순사건, 세월호참사,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우리 역사의 굵직한 비극들과 뿌리가 맞닿아 있다. “여기는 괜찮아요” 고백하며 자기 시대의 상처를 안고 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구수하고 향토적인 언어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따듯해지고 넉넉해진다.
창경궁 대온실을 둘러싼 서사를 통해 백여년에 걸친 근대의 병폐와 식민지의 상흔 및 치유 과정을 보여주는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우리 현대사에 대한 소설적 은유이자 문학과 역사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힌다. 과거를 되새김질하며 미래세대와 소통하고, 여러겹의 다른 삶들이 다층적이고 섬세하게 연결되는 연기의 과정을 통해 소설은 묻는 듯하다. 개인과 공동체의 성장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해방을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더불어 곡진하게 제안하는 듯하다. 삶을 견디기 위해 장소를 지우거나 망각하는 대신 제대로 기억하자고. 미완 혹은 미성년의 아픈 과거를 마주하고, 땅 밑 혹은 무의식의 세계를 직시함으로써 진실에 이르러 가자고. 선악이나 가해와 피해라는 기계적 이분법조차 넘어서자고. 인간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가는 벌새와 꽃과 거북이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고. 하여 마주 보고 직시함으로써 뜨여가는 개안과 생성의 과정을 통해 개인과 역사는 함께 재건되며 부서진 삶도 수리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곡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경애의 마음』 이후 팬이 된 독자로서, 만해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김금희 작가께 아낌없이 경하드린다. 더불어 ‘빛의 혁명’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영감과 지혜와 감동을 선사한 『김대중 육성 회고록』이 만해문학상 특별상을 받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축하드리는 바이다.
송종원(宋鐘元) 문학평론가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알 수 없어요」). 돌부리가 된 심정으로 심사에 참여했다. 한용운의 저 시구처럼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모난 것을 다듬으며 유장하게 흘러가는 노래들이었다. 또한 거룩한 힘을 품은 문학의 언어가 어떠한 삶들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지를 목격하게 하는 현장이기도 했다.
『내가 사랑한 거짓말』은 지금까지의 장석남 시집과 다르다. 시인은 이미 스스로 구축한 완미한 시세계에서 돌연 뛰쳐나와 새롭게 시작하는 특별한 결기를 보여준다. 서정의 빛이 어두운 것들과의 투쟁 속에 빚어진 결과임을 직설적으로 밝히면서 시인은 자신의 시에 날카로운 풍자의 칼을 새겨 넣고 있었다. 장석남의 시세계가 더 멀리 가려는 운동을 시작했다.
김수열의 『날혼』은 시의 위엄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모든 것을 쉽사리 무화시키는 세월 속에서도 시의 언어가 있기에 옳은 것은 옳은 것이 되고 그른 것은 마땅히 그른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시집에는 서로를 향해 울어주고 서로를 향해 약속해주는 사람들의 얼굴이 있다. 서로의 영혼을 지켜주기 위한 약속이 인간이 만든 공동체의 초석임을 그 얼굴들에서 읽었다.
전성태의 『여기는 괜찮아요』는 지나가지 않은 시간들을 다룬다. 지나갔다고 여겼으나 아직 통과 중인 사건들, 기억들, 상처들이 모여 이야기를 이룬다. 게다가 과거를 잘 돌본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지혜의 조각들이 그의 소설에는 풍성하다. 평범한 삶 속에 스며들어 있어 가볍게 스쳐지나갔던 의례와 양식 그리고 목소리들이 우리의 존재양식에 균형감을 선사할 비밀처럼 담겨 있어 읽는 내내 책을 쥔 손이 따뜻했다.
김금희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우리가 쫓는 허상이 무엇임을 밝혀주는 이야기이다. 더 대도시 같고, 더 서구 같은 것을 뒤쫓았던 삶의 방향성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는가 질문하며 자신의 삶의 자리를 결여로서 파악하는 식민화된 정신성에 대해 떳떳하게 맞서는 서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 이런 식으로 읽는 일은 이 소설이 쌓아올린 작은 서사들의 건축이 발하는 견고한 빛을 말하기에 크게 부족하다. 남녀노소, 동식물, 그리고 건축물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의 복잡한 흐름 속에 방치된 존재들까지도 골고루 모두 다 말하게 발언권을 주는 듯한 이 작은 서사의 구조는 치밀하게 아름답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이 특별상을 받아 기쁘다. 이 땅의 민주주의와 평화 그리고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삶을 이루기 위해 온몸으로 애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역동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회고록 중간에 대통령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올 때 나도 모르게 전율했다. 간곡한 뜻을 지닌 자만이 목격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 땅의 만인을 위한 책이다.
한기욱(韓基煜) 문학평론가
올해 만해문학상 심사에 임하는 마음은 특별하다. 지난 한해 한국의 시민들은 얼토당토않은 계엄을 당했으나 내란세력을 제압하는 ‘빛의 혁명’에 나섰기 때문이다. 투쟁 구호와 연설, 춤과 노래가 어우러지는 ‘빛의 광장’에 문학—한강의 『소년이 온다』—도 함께했다. 약육강식의 문명적 위기에 처한 오늘날의 세계체제에서 새 세상을 향한 희망의 불빛을 가장 또렷이 발신하는 곳은 한국이며, 그 불빛의 연원과 성격,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저마다의 독특한 방식으로 들려주는 것이 K문학이 아닐까 싶다.
최종심 대상작 가운데 비창작물인 김경식의 『루카치 소설론 연구』와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기획 『김대중 육성 회고록』도 K문학다운 품격과 열정을 지니고 있다. 김경식의 저서는 수십년에 걸친 자신의 루카치 연구를 집대성한 역작으로, 소설론 연구에 긴요한 참조가 된다. 다만 촛불-빛의 혁명에 적극 동참한 한국문학의 현재를 루카치의 소설론과 미학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빛의 혁명이 진행 중인 지금 더없이 생생하게 읽힌다. 이 회고록은 지역의 한 인물이 험난한 삶의 역정을 거쳐 탁월한 정치지도자가 되는 개인사적 행로와, 일제해방기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국민들이 결정적인 고비마다 거리로 나와 기득권의 독재와 탄압에 맞서는 굴곡진 한국사의 흐름을 씨줄과 날줄처럼 직조한다. 정치외교 중심의 회고록이 흥미진진한 장편소설처럼 읽히는 것은 회고자의 뛰어난 화술 덕분만은 아니다. 4·19와 5·18, 6월혁명과 6·15남북정상회담을 포함해서 분단체제를 뒤흔드는 역대급 사건들의 내밀한 이야기가 소상히 제시되면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향한 한국 민중의 뜨거운 열망을 곳곳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빛의 혁명 이래의 ‘변혁적 중도’의 길을 미리 보여주는 듯한 『김대중 육성 회고록』에 만해문학상 특별상을 주는 데 흔쾌히 동의했다.
본상 최종심에 두권의 시집과 세권의 소설이 올랐다. 김수열의 『날혼』과 장석남의 『내가 사랑한 거짓말』은 서로 다른 성향과 스타일의 시집이지만, 언어구사와 시적 사유의 깊이에서 한국시가 도달한 높은 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날혼』에서는 때론 제주도 방언을 구사하며 솔직담백하게 서술되는 노년의 일상적 삶 곳곳에 4·3의 깊은 상흔이 점점이 박혀 잔잔하게 번지는 듯하다. 『내가 사랑한 거짓말』은 깊은 성찰과 미묘한 마음의 움직임을 격조 있고 정교한 언어로 담아낸다. 시적 주체의 사유와 마음가짐, 깨달음에 따라 언어의 호흡과 리듬이 달라지는데, 개벽적 각성의 순간을 포착하는 구절이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소설 부문의 경쟁도 치열했다. 전성태의 『여기는 괜찮아요』는 범상한 듯 정교한 언어와 은근히 밀도 높은 짜임새가 돋보인다. 한국전쟁, 여순사건, 세월호참사, 남북이산가족 상봉 등 역사적 사건들을 문학 텍스트 깊숙이 끌어들여 유연하게 풀어가는 리얼리즘 서사는 여전한 감탄을 자아낸다. 김숨의 『잃어버린 사람』과 김금희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모두 방대한 스케일로 역사와 문학을 결합하지만, 두 장편의 직조방식은 판이하다. 전자는 광복 후 부산 일대에 거주하거나 몰려든 민중 하나하나의 생애와 사연을 지역 사투리로 실감나게 기록한다. 인물 각각의 생애를 당자나 동행인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 이 서사들은 근대 장편소설이라기보다 근대 이전의 서사시나 소설로 쓴 ‘만인보(萬人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파격적 실험은 장편소설의 극적 장치를 과감하게 삭제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주는 한편, 장편소설이 문학과 역사의 결합 관계에서 역사 쪽으로 기울면서 생애구술사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에 반해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문학과 역사가 여러개의 서사적 끈으로 묶인 채로 팽팽한 균형을 유지한다. 얼핏 전형적인 장편소설처럼 보이지만, 서사적 끈들과 마음의 동선들이 교차하거나 층위를 이루며 자아내는 교향악적 효과에서 만만찮은 혁신을 감지할 수 있다. 소설의 중심에 주인공 영두와 문자 할머니, 창경궁 대온실이 큰 나무처럼 의연히 서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이야기 가지들을 감당하는 듯한 형국이다. 대온실 수리 작업에 참여하는 영두의 현재 이야기와 기억 속 문자 할머니의 낙원하숙 이야기가 교직되고, 여기에 문자 할머니의 어린 시절과 대온실에 얽힌 사연이 또다른 서사층위를 이룬다. 다양한 인물과 동식물, 건축물과 자연을 섬세하게 그려낸 것, 그리고 영두와 리사의 트라우마적 관계와 산하와 스미의 치유적 관계를 대비하듯 형상화한 것도 눈길을 끈다. 창경궁 대온실을 고리로 전개되는 역사적 서사들에서 ‘잔류 일본인’인 문자 할머니의 굴곡진 생애를 따뜻한 시선으로 따라가는 동선이 특기할 만하다. 친일/반일의 경직된 구도에서 벗어나 구체적 개인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주요 인물들의 마음가짐과 지향점, 실사구시의 열린 세계관이 빛의 혁명을 주도한 젊은이들에게 걸맞은 장편이라는 생각이다. 심사위원들은 허심탄회한 토론 끝에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만해문학상 본상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수상소감
당신은 돌아오는 사람
김금희(金錦姬)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대온실 수리 보고서』 『첫 여름, 완주』, 중편소설 『나의 사랑, 매기』, 연작소설 『크리스마스 타일』, 짧은 소설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등이 있음. 신동엽문학상, 젊은작가상, 현대문학상, 우현예술상, 김승옥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수상.
만해문학상 수상 소식은 카카오톡 메시지에 남아 있었다. 비행 중이라 통화가 되지 않았고 숙소에 도착해 침대에 완전히 뻗은 뒤에야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제 막 체류지에 도착했을 뿐인데도 나는 여정을 완료한 듯한 안도감을 잠시 느꼈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이 큰 영예의 주인공으로 호명해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과 문학상 주관사 창비에 감사드린다.
최근 나의 아버지는 자신의 학력에 대해 처음으로 고백했다. 우리는 고깃집에 단둘이 앉아 이제 막 나올 등심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때는 월사금을 학교에 내지 않으면 선생이 불러서 아이들을 때렸단다. 나도 불려나가 돈을 가져오지 못했다며 손바닥을 맞았고 그길로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지. 국민학교 2학년 때 일이었다. 한문을 잘 알고 평생 신문을 구독해 읽은 나의 아버지는 그러니까 세간의 기준으로는 ‘무학’이었으며, 내가 ‘가정환경조사서’에 뭐라 써야 하냐고 물을 때마다 때론 고등학교, 때론 전문대학으로 매번 다르게 말해준 건 그래서였던 것이다.
수상소감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만약 아버지가 학교로 돌아갔다면?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다.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어떻게든 돈을 구해 월사금을 내주었다면 아홉살짜리 소년이 아홉살에 맞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면 모든 건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그건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일이고 절대 보지 못할 장면이기에 지금 내 모습이 학교로 돌아가지 않은 그 아이의 결과가 되었다. 그 시간을 감당해주신 아버지에게 존경을 전한다. 늘 나라는 현재를 감당해주고 있는 다른 가족들에게도 다사로운 감사를 전한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과 그럼에도 돌아갈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 관한 소설이다. 혹은 어리석게도 또는 가엾게도 돌아가고 싶은 지향조차 가지지 못한 이들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나는 소설의 모두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며 썼다. 내가 리사일 수도, 이창충일 수도, 혹은 그 시대 제국주의자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썼다. 맹렬한 반감이 들면 그 반감과 싸우며 썼다. 책을 내고 나서 잔류 일본인 여성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는 독자를 만날 때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싶은 고마움을 느꼈다. 창경궁 대온실을 직접 가보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내가 마치 그 여정의 안내자인 것처럼 기뻤다.
나는 용서하는 자가 가장 강한 자라고 믿고 약자를 품을 줄 아는 공동체만이 미래를 그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마음의 도약이 만해 한용운의 문학이 우리에게 남긴 불씨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사는 누군가의 말처럼 불씨를 지켜 새롭게 밝히는 것이지 잿더미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어렵더라도 ‘인간’이기를 선택해온, 그리고 선택할 모든 이들에게 깊은 사랑과 응원을 전한다. 당신이 그렇게 매번 인간으로 돌아오는 과정이야말로 내가 평생을 두고 써내고 싶은 소설이다.
수상소감
만해문학상 특별상 수상에 부쳐
박명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장)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기획한 『김대중 육성 회고록』이 만해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하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3년 제7회 만해대상 평화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데 이어, 김대중도서관의 작업이 만해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한 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나 싶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소 한용운 선생을 위대한 선각자로 존경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용운 선생을 “우리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라면서 「나룻배와 행인」이라는 시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나는 썩어 가는 나뭇배가 되겠다”라는 부분을 직접인용합니다(「4·19혁명과 민족통일」, 동국대 강연, 1980.4.18). 범상치 않은 각오와 일체감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만해를 대표적인 광복투쟁의 지도자로 여길 뿐만 아니라(「역사를 바로 조명해야 한다」, 동아일보 광복 48주년 특별기고, 1993.8.15), 한용운 선생의 시 구절을 언급하며 국민과 조국과 민족을 자신과 우리의 ‘사랑하는 님’으로 부릅니다(한국인권문제연구소 창립 10주년 회고, 미국 로스앤젤레스, 1993.10.10).
그리하여 만해대상 수상소감에서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이고 문인이었으며, 불교개혁의 선도자였던 한용운 선생을 한없이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또한 한용운 선생은 자유·평등사상, 생명사상, 그리고 사랑의 철학 등 심오한 정신적 경지에 이른 대사상가였습니다”라고 무한한 존경을 표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인류의 보편가치인 자유·평등·민주주의·인권·복지·평화를 위해 헌신한 세계적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동시에 수많은 주옥같은 글을 남긴 저술가이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삶과 사상, 정치와 업적을 세상과 미래에 바르게 남기는 데 있어, 저희는 김대중 대통령의 방대한 저술 전체를 정리하여 출간하는 일 못지않게—김대중도서관이 간행한 『김대중 전집』 전30권—구술채록도 매우 중요시하였습니다.
김대중도서관이 처음에 구술채록을 기획한 것은 한국에서 정부와 민간을 통틀어 아직 구술사 채록을 통한 역사기록 작업이 본격화되기 이전이었습니다. 오랜 자료수집과 연구의 과정에서 한국전쟁과 같은 세계적 사건은 물론 역대 대통령들의 국정운영조차 체계적인 구술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저희는, 미국의 여러 대통령도서관을 수차 직접 방문하여 방대한 구술기록의 채록과정과 체제를 확인한 뒤, 정교한 채록계획을 수립하여 진행을 하였습니다. 민간 학술기관으로서는 최초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김대중도서관은 130명의 구술자로부터 324건, 총 603시간에 달하는 구술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해문학상 특별상은 김대중 대통령의 구술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의 기획에 대해 동시에 수여하는 것이 아닌가 그 이중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김대중도서관이 김대중 대통령 퇴임 이후인 2006년 7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총 41차례에 걸쳐 42시간여 동안 이뤄진 구술 동영상의 녹취문을 정리·압축·윤문 및 편집하여 출간한 책으로서 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자서전입니다. 이 책은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된 그의 유일한 자서전이며, 내용의 깊이와 객관성을 위해 질문지 작성 및 진행을 전문 연구기관인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담당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는 다른 자서전과 구별되는 독자적 위상을 갖게 하는 요인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구술작업을 마치고 난 뒤에 “김대중도서관 연구진이 여러 자료를 철저하게 연구한 후에 질문지를 작성하여 그동안 부정확하게 알려졌던 내용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며, 평소에 내가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던 내용에 대해서도 가감없이 질문을 하여 이번에 새롭게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이 많아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소회를 밝힌 바 있습니다. 실제로 이 책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많은 중요한 결단을 할 때의 심경과 동기에 관해 상세히 밝혔으며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개인사, 일화, 주요 인물들과의 관계 등에 관해서도 많은 증언을 남겼습니다.
한국의 정치인 중에서 책을 정말 좋아했고, 또 책에 관한 일화가 가장 많은 인물은 김대중 대통령입니다. 한국을 문화강국이 되도록 하고 오늘날의 한류를 낳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문화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의 문화인으로서의 소양과 가치관이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그러한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의 삶과 철학을 진솔하게 표현한 구술기록의 보고로서 오래도록 귀중한 저작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