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제27회 백석문학상 예심위원으로 오연경 최지인 2인을, 본심위원으로 김승희 나희덕 황규관 3인을 위촉하고 심사를 진행하였다. 심사규정에 따라 최근 2년간 출간된 시집들을 예심에서 검토한 결과와 본심위원의 추천을 통해 아래 총 8권의 시집이 본심에 올랐다.
김근 『에게서 에게로』, 김선향 『어쩌자고 너의 뺨에 손을 댔을까』, 김언희 『호랑말코』, 박소란 『수옥』, 손택수 『눈물이 움직인다』, 신해욱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안현미 『미래의 하양』, 장석남 『내가 사랑한 거짓말』(가나다순).
본심은 10월 29일에 진행되었는데, 모든 후보작이 저마다의 개성과 어법으로 뛰어난 시적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심사진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숙고와 토론이 있었으나 수상작을 꼽는 데에는 이견 없이 한목소리를 모아 장석남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창비 2025)로 결정했다.
『내가 사랑한 거짓말』은 유려한 언어감각과 냉철하고도 숙연한 응시로 서정적 아름다움과 윤리적 깊이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자연에 대한 통찰, 일상과 인생에 대한 발견, 시대에 대한 신랄한 통렬함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사유의 진폭과 역사성, 그리고 혁명성을 두루 드러낸다. 원숙함으로 다다른 이 미학적 갱신이 최고의 성취로 이어졌기에, 이 시집을 올해의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심사평
김승희(金勝熙) 시인
요즈음 한국 시단에는 좋은 시집이 많이 나오고 좋은 문학의 기운이 가득한 것 같다. 좋은 문학의 기운이란 다양성과 독창성이 분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 기운은 삶을 변화시키고 사랑도 그렇다. 김언희 박소란 손택수 안현미 장석남 시인의 시집을 집중 검토하였고 대상 작품들을 정독한 후 서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었다.
김언희의 『호랑말코』는 무의식의 극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시적 언어로 쓰인 리비도의 전기에 손을 델 것만 같다. 그로테스크와 외설을 던지고 섹슈얼리티의 해방을 쓰며 금기를 넘어서서 판도라의 상자를 활짝 열어젖히는 시원함이 있다. 비유나 상징 등을 가급적 배제하고 사실적인 것과 연관시키기 때문에 더 기묘하고 혐오스러운 느낌을 준다. 음란한 유쾌함과 추한 불쾌함을 섞고 무의식의 틈새를 열며 독창적인 시적 에너지를 발산한다.
박소란의 『수옥』은 ‘고갈과 물의 시’라고 할 수 있다. 불안, 상실, 피로, 소진 등의 시대에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는 피곤한 여자는 계속 물을 찾는다. 텀블러를 들고 물을 뜨러 가는 시적 화자의 행동은 “한 사람을 입원실에 옮겨두고/저는 서울로 갑니다”(「기차를 타고」)처럼 반복된다. 세상은 위험하고 물은 불안하고 인간도 “컵을 들고 헤매다/쏟아버린 물”(「수」)처럼 불안한 존재일 수 있다. 그렇게 시집은 고갈과 물, 소진과 회복(텀블러)의 언어로 가득하다.
안현미의 『미래의 하양』도 생활의 시이자 반복의 시이다. 아침에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또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는 시적 화자는 반복이 고통스럽고, ‘노동의 미래’도 죽음의 반복일 뿐이다. 그런데 ‘탁구공’은 미래로 날아가는 하얀 공이며, “미래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밖에 없어도 그러하듯이”(「탁구」)처럼 지루한 반복을 깨는 미래의 하양인 것이다.
손택수의 『눈물이 움직인다』는 ‘체온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자연 속의 유년, 밥 벌러 가는 노인들의 노동과 가난, 기억과 가족, 예술가의 슬픔 등이 담겨 있다. “멸하는 것 가운데 뜨신 공깃밥을 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이 지상의 습관처럼 지극한 것도 없지/공깃밥이라는 말 좋지/무한을 식량으로/온 세상에 그득한 공기로 짓는 밥”(「저녁을 짓다」) 같은 놀라운 시편이 좋다. 「첼로」에서 시적 화자는 “아가, 할미 어릴 적/이화중선이는/갈비뼈 하나가 없었단다/그 소리/없는 갈비뼈가 내는/소리였단다”라는 말을 듣고 육체의 아픔과 상처에서 ‘갈비뼈 풍금’(소리 풍금) 같은 명창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통스러운 ‘갈비뼈 풍금’이 울리는 것이 바로 ‘눈물이 움직인다’는 것이고 그런 눈물의 역동성이 한을 만들고 절창을 만든다.
장석남의 시세계는 서정적 아름다움과 윤리적 깊이를 갖추고 있다. 새로운 자연의 아름다움과 기교의 완벽성, 일상과 인생에 대한 발견, 시대에 대한 신랄한 통렬함으로 개혁과 혁명을 노래한다. 또한 목도장, 아버지의 옷, 시 창작수업, 근조화환을 배달하러 가는 트럭 등 재미있는 일상성을 보여주는 시도 있다. 「대기실」에서 김수영은 혁명을 기다리고 시인은 “당뇨 혈압의/진단서”를 기다린다는 대목에서 정말 웃음이 터져나왔다. “한 혁명이 있으니 장마 큰물에 드러나 발굴되는 피 묻은 무지개, 더러운 무지개들/씻어 거는 일//길가의 뭇 사람들 무거운 등짐 내려놓고 안타깝게 바라보네”(「어느 장마」), “소나기 지나간 후/빨랫줄에”(「한 혁명의 방문」) 속옷을 빨아서 걸어놓는 일, “성삼문이나 조광조의 집 뜰에도/(…)/서둘러 지는 꽃 또 아파라”(「꽃밭에서」) 등에서도 실패한 개혁의 아픔을 노래한다. 시집을 몰입해서 다 읽었을 때 본심위원들은 장석남 시인을 백석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하기로 흔쾌하게 뜻을 모았다. 장석남 시인의 수상을 축하한다.
나희덕(羅喜德) 시인
백석문학상 본심에 추천된 여덟권의 시집은 저마다 만만치 않은 내공과 개성을 지니고 있어 어느 한권도 소홀히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다. 이 중에서 다수의 추천을 받은 김언희 박소란 손택수 안현미 장석남의 시집을 두고 차례로 논의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우열을 가리기는 어려웠고, 백석의 시세계와 친연성을 가지면서 이전 시집들보다 진전된 성취를 보여주었느냐를 선택의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김언희의 『호랑말코』는 “블랙홀의 중력을 가진 마침표 하나”(‘시인의 말’)처럼 읽는 이를 강력한 힘으로 빨아들이는 시집이다. 시인은 이 냄새나고 피 흘리는 치욕의 말들을 어떻게 견디며 시를 썼을까. 읽는 동안 몇번이나 진저리를 치면서도 결국 그 세상의 살풍경 속으로 시인이 극단까지 밀고 나간 길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살해와 폭력을 드러내기 위해 시인이 왜 미학적 자살과 자해의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도무지 늙음을 모르는 김언희 시인의 치열하고 정직한 언어에 경의를 표한다.
박소란의 『수옥』은 시집 제목이 그러하듯 시 한편 한편이 ‘물로 빚은 구슬’ 또는 ‘물의 집’이라고 할 만하다. 깊은 슬픔을 통과하는 화자들은 간신히 숨을 쉬며 침묵 속에서 오래 되새김질한 말을 건넨다. 그 문장들은 느리고 고요하지만 마음에 일으키는 파문은 멀리 퍼진다. 이 시집을 내내 적시고 있는 “어두운 물기”는 “살아 있음의 적나라한 신호”(산문 「병과 함께」)이자 “느닷없이 찾아들 어떤 물음”(「물음들」)을 품고 있다. 얼핏 내향적인 독백체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출렁거리는 고통과 사랑은 때로 격렬하고 눈부시다.
손택수의 『눈물이 움직인다』는 간결하고 담백한 시어들을 통해 삶의 태도와 사물의 본성에 대한 남다른 통찰을 들려준다. 이화중선의 “없는 갈비뼈가 내는/소리”(「첼로」)처럼, 시인이 귀 기울이는 대상은 낡고 사라져가는 존재들이나 허허롭게 비어 있는 공간들이다. 근대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지우고 내쫓아버린 존재들과 풍경들이 그의 시에는 정다운 식솔처럼 돌아와 도란도란 숨 쉬고 있다. 시적 대상에 대한 높은 감응력과 어떤 소재든 맛깔스럽게 빚어내는 솜씨가 강점인 것은 분명하지만, 자기완결성을 허물 때 오히려 새로운 활로가 열리는 듯하다.
안현미의 『미래의 하양』은 “고장 난 심장 어두운 미래 허튼 그림자”(「사월」) 속에서도 자존을 잃지 않는 시인의 근기가 느껴지는 시집이다. 출퇴근과 시쓰기 또는 ‘생활’의 무게와 ‘노동’의 미래가 서로 길항하면서 만들어내는 아이러니가 인상적이다. 신랄한 자기풍자와 세태에 대한 비판을 들려주면서도 “돌아와 라켓을 잡듯/사랑을 붙잡겠다고”(「(나의)/탁구론」) 선언하는 ‘탁구론’은 일종의 시론이자 세상에 던지는 출사표이기도 하다. 그것은 ‘울음’과 ‘물음’ 사이, 또는 ‘더이상’과 ‘끝끝내’ 사이에서 부르는 지난한 사랑 노래이다.
장석남의 『내가 사랑한 거짓말』은 ‘서정시’와 ‘벼락같은 서정시’의 변주를 풍부하게 담아낸 시집이다. 1부와 2부의 시들이 서정시인으로서 유려한 언어감각이 여전히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면, 3부와 4부의 시들에서는 안온한 서정시를 넘어 현실과 정치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의지를 뚜렷하게 읽을 수 있다. “나는 언덕을 넘어오는 한 사람으로부터만/나였”(「언덕」)다는 인식은 마침내 “장마 큰물에 드러나 발굴되는 피 묻은 무지개, 더러운 무지개들/씻어 거는 일”(「어느 장마」)에서 ‘혁명’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서정시’와 ‘정치시’로 분리해서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양자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연스러운 회통(回通)을 이루어낸 이 시집이 시인에게도 중요한 분기점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사유의 진폭과 미학적 갱신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장석남의 『내가 사랑한 거짓말』을 제27회 백석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 본심위원들은 흔쾌히 의견을 모았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황규관(黃圭官) 시인
예심위원의 눈을 거쳐 올라온 시집 중에서 다섯권의 시집을 집중 검토작으로 삼은 다음 한권씩 토론하는 시간을 거친 본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장석남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을 올해 백석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장석남의 시는 더욱 원숙해진 느낌이다. 도리어 시에서 ‘원숙함’이란 무엇인가 고민을 하게 할 정도지만 존재하는 사물에게서 의미 이전의 노래를 발견하는 장점만은 장석남 시인을 따라갈 이도 드물 것이다. 가령 「노래를 청하다」에서 “난로 위 주전자에게 노래를 청하니/끓고/커다란 벽 담쟁이에게도 노래를 청하니/느리게 느리게/푸르렀다” 같은 표현이 그것을 보증한다. 노래(음악)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상상력은 누가 뭐래도 시의 근원인바, 다음 문제는 그것이 세계의 어느 지점까지 뻗어 있는가,일 것이다. 여기에 대해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는 점을 밝혀놔야 피차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2부에 실린 몇몇 작품들이 시인이 현재 이룬 어떤 경지가 아니겠는가 싶었다. 「목도장」 「콩」 「아버지 옷」 등은 가계(家系)를 다룬 소품으로 보이나 그 안에 웅크린 역사의 폭풍이 만만치 않다. 특히 「목도장」의 마지막 행인 “그림은 비어 있네”는 ‘아버지의 역사’에 대한 시인 나름의 냉철하고 숙연한 응시이며, 할머니로 표상되는 여성의 삶이 “제 구르는 소리들을 들으며” 그리고 “창문 밖 눈의 소리들도 새겨들”으며 꾸려진 것이라는 내적 온축을 보여준 「콩」에서는 4부의 남성적인 정치시와는 다른 의미를 득한 것으로 보인다.
손택수의 『눈물이 움직인다』는 빼어난 형상화 능력에 비해 ‘편안한’ 안정감으로 수렴되는 느낌을 준다. 예를 들면 시집의 마지막에 배치된 「소혹성」에서 “딱 들어맞는 그곳”이 독자에게 주는 안도감은, 시집을 덮고 나면 마냥 편안하지 않은 역설을 남긴다.
안현미의 『미래의 하양』은 자아의 실존이 두드러져 특유의 생동감이 있다. 하지만 그 생동감은 “지옥 속에 지옥을 사주하”(「생계」)는 어떤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기 전인 듯싶다. 미래는 탁구공처럼 ‘하양’이 아니라 “하루 종일 미쳐 날뛰던 피”(「복잡한 피」)를 혹 다시, 다르게 사는 것은 아닐까?
안현미 시와 반대로 박소란의 『수옥』을 읽으면서는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는 희미한 물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가늘고 길다. 그래서 어떤 형상을 이루려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독백 같은 시인의 자기진술 앞에서, 솔직히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만일 이게 우리 자신이 알지 못한 채 앓고 있는 병을 시인이 예각화하는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읽을수록 독특한 느낌과 의미로 다가온 시집은 김언희의 『호랑말코』였다. 김언희는 과연 비참과 비루를 먹고 싼 똥을 금강석으로 만드는 탁월한 연금술사이다. 위트와 촌철살인과 자학을 위장한 선적(禪的) 진술은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자기희화화와 자기속화라는 함정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단 한 사람에게 영예를 몰아줘야 하는 심사의 맹점이 본심에 소개된 다른 시인들의 노고가 이룬 ‘빛남’을 가리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장석남 시인에게 특히 축하를 드린다.
수상소감
사랑을 앓는 자의 자세로
장석남(張錫南)
1965년 인천에서 태어나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뺨에 서쪽을 빛내다』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내가 사랑한 거짓말』, 산문집 『물의 정거장』 『물 긷는 소리』 『시의 정거장』 『사랑하는 것은 모두 멀리 있다』 등이 있음. 김수영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이미 오래전에 제게서 사라진 감탄사를 아주 오랜만에 불러와야겠습니다. “백석, 백기행!” 이분의 이름은 반드시 한문으로도 병기해야만 합니다. 흰 백(白), 돌 석(石). 그리고 기행이라는 이름! 참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획이 몇 안 되는 필명, 흰 돌이라는 의미, 그러나 획이 조밀한 ‘기(夔)’라는 글자와 ‘갈 행(行)’ 자. 상상 속 동물의 이름이라는 ‘기’라는 글자를 어쩌자고 이름에 붙였을까 궁금했습니다.
저녁으로 접어드는 시간 수상소식을 접했습니다. 저편 성벽에 노을이 비치는 시간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런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듣기에는 아주 어울리는 시간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적인 소식에 비스듬한 자세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맨 먼저 떠오르는 장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뜻밖의 생각입니다.
언젠가 통영에 갔을 때입니다. 어림어림 그 장군 사당이 있는 명정골이라는 데입니다. 그 ‘우물’을 거쳐 충무공의 사당을 둘러보고 앞 계단에 앉았습니다. 쓸쓸하니 이 어림에서 서성였을 백석을 떠올려보고 그가 앉았을지도 모를 한 계단에 나도 앉아본 거였습니다. 앓는 자, 사랑을 앓는 자의 자세로 앉아보고자 했으나 그렇게는 되지 않았을 겁니다. 이 고장과는 가장 먼 데, 평안북도 정주와 경상남도 갯가 통영의 거리를 짐작했습니다. 가장 먼 데서 가장 가까운 사람, 아니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러 온 사람. 그러나 끝내 만나지 못하고 이 계단에 앉아 있었을 거라 짐작하며 앉아 있었습니다. 무지개의 여러 색 중에 하나씩을 골라 지어 입은 처녀들의 물 긷는 모습들(백석 「통영」), 부끄럼 새긴 눈길들도 바라봤습니다. 백석도 그러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