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독자의 목소리

 

 

낙엽이 물들듯 내 안에서 깊어지는 사유들

▶ 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 한반도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가을호 글들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자주 멈칫거리게 됐다. 뉴스 속 미중갈등을 비롯한 국제정세가 멀게만 느껴졌는데, 글들을 통과하며 내 삶과 직결된 문제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특히 대화 「변화하는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눈길과 사유가 오래 머물렀다. 평소에 중국을 경쟁국 혹은 경계해야 하는 나라 정도로 생각했는데, 대화를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우리가 어떤 관점과 자세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한국의 앞날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와닿았다.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에서 논단의 백영서 글 「변혁적 중도로 다시 보는 삼균주의」도 흥미롭게 읽었는데, 지금 시점에서 조소앙의 사상을 들여다보니 ‘평등·자주·평화의 원칙’이 바로 우리가 참고해야 할 가치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김현우의 「기후붕괴 시대, 더 많고 더 깊은 서사적 접근을」은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기후위기 담론은 글자 그대로 ‘담론’에만 머물지 않고 오늘의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주는 것 같다. 대화부터 논단란까지 읽어나가며 ‘나는 어떤 미래를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았다. 정치나 외교는 내가 관여하기 쉽지 않은 영역 같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태도, 목소리, 삶의 방식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평론란에서 한영인의 「‘진짜’에서 벗어나기」를 읽으며 ‘감정은 어디까지가 나의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기도 했다. 문학작품을 읽다보면 인물의 감정이 곧 나의 감정인 듯 다가올 때가 있다. 인물의 두려움이나 기쁨이 내 몸 안에서 진동처럼 울리는 그 순간 텍스트로 접한 장면들이 실제 경험처럼 느껴지며 그 경계가 흐려지기도 한다. 그때의 감정은 나의 것이면서 동시의 타인의 것이고 진짜이면서 허구이다. 바로 이 모순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문학을 끝없이 읽게 한다. 문학은 복잡한 감정의 출처와 진정성을 되묻는 정직한 거울 같다. 그리고 문학평론은 그 거울 속에 비치는 모습을 언어로 정리해 사유의 틀을 만들어준다. 올가을, 낙엽이 물들듯 책장을 넘기며 내 안에서도 다양한 사유들이 조금씩 물들어간다.

김혜지

 

합리성과 성찰의 상승작용

▶ 지금 우리가 통과하는 시간은 위기일까, 기회일까. 모를 일이지만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세상이 가을호 특집의 제목처럼 ‘새로운 한반도’여야 함은 틀림없는 것 같다. 표지와 목차를 훑어보며 새삼 눈에 박히는 단어는 ‘변혁적 중도’였다. 변혁적이면서 중도의 길을 걷는다는 것, 현기(玄機) 어린 듯하면서도 어색하고, 어색하면서도 묘하게 탁 가슴에 감기는 말이다. 내가 ‘변혁적 중도’라는 말을 처음 접한 것은 『창작과비평』 2023년 봄호 특집에서였다. 당시 특집에 실렸던 글들은 모두 그 제목부터가 마음을 울렸다. “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백낙청 「2023년에 할 일들: 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 “연대의 재건”(이태호 「‘적’을 만드는 정부와 시민사회 연대의 재건」), “사라지지 말자”(유해정 「우리, 사라지지 말자」). 어떻게 우리로, 사라지지 않고, 다르게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근본적이면서 강렬했다. 그때는 확실하게 ‘위기’였던 것이다. 이미 2023년에 『창작과비평』에서 윤석열 퇴진을 이야기했다는 것도 새삼 확인되는데, 과정이 어떻든 그 예언은 이루어졌다.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것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예언이 실현된 현재를 사는 우리는 그래서 행복한가, 미래가 기대되는가 하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뉴스에서는 입장 바뀐 사람들끼리 또다시 말을 바꾸어 싸우는 모습이 쏟아지고, 서로를 향한 조롱의 수위도 한층 심해졌다. 집권당·다수당 혹은 기득권이 어디인지를 떠나 합리성과 성찰의 상승작용을 통해 미래를 도모할 때 진정 ‘변혁적 중도의 때’에 가까워질 테다.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정말이지 더는 미룰 수 없는 위기의 시대로 접어드는 게 아닐까 우려의 마음도 든다. 그래서 ‘변혁적 중도’라는 말이 다시금 마음에 박힌다. 위기의 시대로 다시 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 그리고 동시에 내일에 대한 기대, 어떤 ‘두근두근’도 느낀다.

김상태

 

독서와 사유에 한발 더 다가서며

▶ 지난호를 받은 뒤 목차부터 살폈다. 가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하나하나 차근히 읽어나갔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고수리의 산문 「할머니의 바다, 엄마의 이불」이 기억에 남는다. 나 역시 제주에서 태어나 할머니 손에 자랐다. 글을 읽는 동안 나의 어린 날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 같았다. 바람과 바다 냄새, 할머니 손의 온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참고 애태우며 우리 세대를 키워낸 그 시절의 엄마들도 떠올려보았다. “차마 못 버리겠는 그런 마음”으로 “날마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식들을 키웠을 “엄마들”(445면). “불행한” 생활 속에서도 “묵묵하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엄마들의 뒷모습을 그리며 “글두 살다보면 살아진다”(441면)라는 말의 뜻을 비로소 알 것도 같다.

백영서의 「변혁적 중도로 다시 보는 삼균주의」도 인상깊었다. 글을 통해 만난 조소앙은 시대적 모순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명 구상의 틀을 만든 사람이다. 그의 사상은 좌우의 절충적 의미로서의 중도를 뛰어넘는 경지에 자리한다. 그는 독립 자체를 목표로 두지 않았다. 독립으로 완성되는 나라에 대한 고민이 아닌 독립 후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 사유하며, 일종의 문명론을 세우고자 했던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지금 여기에서도 실현되어야만 하는 과제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책과 글쓰기를 좋아했다. 올해는 뒤늦게나마 꿈을 이루고자 사이버대에 진학했는데, 책을 더 읽고 싶은 마음에 북클럽을 찾다가 ‘클럽창비’를 알게 되었다. 클럽창비 2기 활동을 통해 독서와 사유에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

조가현

 

처음 만난 『창작과비평』

▶ 지난 가을호부터 처음으로 『창작과비평』을 접해보게 되었다. 생각보다 두껍고, 알찬 읽을거리가 많아서 놀랐다. 특집란에서 정욱식의 「동맹의 사슬을 넘어 동아시아 평화만들기」를 읽기 시작하며 초반부터 놀란 것은 ‘중국이 2027년에 대만을 침공할까’라는 질문이었다.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위태로운 것을 느꼈지만, 러시아-우끄라이나처럼 실제 전쟁이 발발한다면 끔찍하리란 생각이 든다. 중국이 침공준비에 착수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는 객관적 서술에 얼마간 안심하긴 했지만, 여전히 긴장된 마음도 크다. 대화도 생각할 거리들을 남겼다. 중국혐오가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중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한국인들도 많은 걸 보면 아직까지 모든 이들이 중국을 혐오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다만 중국을 좋아하냐 아니냐로 정치성향을 가르려 하는 문화는 중국에 대한 자신의 진짜 생각을 표현하기 어렵게 한다고 본다. 한국과 중국의 정치외교적 관계를 풀어나가는 일이 어려운 과제이지만, 우선은 우리 안에 특정 대상을 대놓고 혐오하는 문화가 퍼지는 일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책머리에’ 마지막 부분에서 백지연은 “갈라진 사회를 통합하고 제대로 된 방향을 고민하는 길 위에서” “창조적인 사유와 실천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정성과 지혜를 모으기로 다짐한다”(8면)고 하였는데, 오래 마음에 남는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동안 『창작과비평』을 읽어나가며 세계에 대한 관심과 창조적 사유를 넓혀가고 싶다.

서재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