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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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반은지

반은지 潘恩智

서울예대 극작전공 2학년. 1995년생.

naneunjee@gmail.com

 

 

 

당신이 영영 모를 주문

 

등장인물

모진(30대)

사장(50대)

규온(30대)

페이(20대)

남자(50대)

여자(50대)

손님 1, 2와 경찰 1, 2는 연출에 따라 2인의 배우가 다양하게 맡을 수 있다.

 

2024년 12월 13일

 

여의도 일대의 작은 까페. 무대는 파티션으로 가려진 백룸, 포스기가 있는 바(bar), 손님용 좌석 공간인 홀(hall)로 나뉜다.

 

 

 

1장

 

모진과 페이가 일사불란하게 상자를 정리 중이다.

 

모진 찹쌀떡은 차은우.

페이 김밥은 김민주.

모진 담요는 아이린.

페이 추로스는 위플래시.

모진 뜨아 이십잔, 뜨라 이십잔, 유자차 열잔.

페이 언니, 만약에 손님이 아아를 시키면요?

 

사장, 휴대폰을 보며 들어온다.

 

모진 (사장에게) 뜨거운 것만 주문받으셨죠? 선결제요.

페이 (사장에게) 사장님.

사장 망했네, 망했어.

모진 사장님!

사장 (뒤늦게) 응?

모진 선결제 건 아아로 바꿔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구요.

페이 뜨아는 이천원, 아아는 이천오백원이잖아요.

사장 (휴대폰 보고) 그 결제 건 암호가 뭐지?

페이 (노트를 읽으며)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사장 뭐?

페이 ‘아기다리고기다리던’이요. 사장님 글씨가 알아보기 힘들어요.

사장 네가 못 알아본 건 아니고?

모진 (노트를 함께 보며) 글씨보다는 그림 같긴 한데요?

사장 대충 바꿔줘. 어차피 전부 소진되지도 않을 텐데. 다른 집은 백잔씩 선결제한다더니 우리는 고작 오십잔이냐. 왜 떡상은 늘 남의 이야기일까. (휴대폰을 집어넣고) 아이, 안 해! 안 해!

모진 그래도 챌린지처럼 퍼져서 아마 내일까지는 더 들어오겠던데요?

사장 모르지.

모진 (찹쌀떡 한팩을 들고) 떡은 응원이 아니라 방해 아니에요? 겨울엔 금방 딱딱해지고, 목 막히지 않나. 난 솔직히 생리대도 좀 너무 갔다고 생각해.

페이 사람이 너무 많아서 화장실을 못 쓴대요.

모진 그런 용도?

페이 홍콩에서 선배들한테 들었어요.

사장 찹쌀떡이 뭐로 만들어졌냐.

모진 찹쌀?

사장 장시간 동안 화장실을 갈 수 없을 때! 사람이 찹쌀떡 같은 걸 먹어두면 말이지. 위장 안에서 떡이 수분을 꽉 잡는단 말이야. 그러면 물을 마셔도 몸이 몰라. 왜? 떡이 물을 다 먹었으니까.

모진 소변 방어용이구나.

페이 먹는 생리대네요.

모진 그건 좀…… 생리대보단 탐폰에 가깝지. 넣는 거니까.

사장 아무리 우리끼리라지만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페이 사장님은 어떻게 아세요?

사장 유튜브.

페이 아하.

모진 역시.

사장 너희는 오늘 처음 본 건가? 둘이 합이 잘 맞네.

모진 페이 첫 출근날 같이 근무했어요.

페이 세시간 정도 일했었죠, 아마?

사장 제빙기 또 고장나면 골치 아프니까 웬만하면 핫으로 줘라.

 

세 사람, 함께 영업준비를 마무리한다.

사장, 자리를 옮겨 모진을 손짓으로 부른다.

 

사장 레시피 까먹은 거 없지? 너 없는 새에 가격 바뀐 것도 있는데.

모진 오자마자 포스기 가격 먼저 체크했어요.

사장 역시 모진이 너답다.

모진 모카는 없어졌던데요?

사장 원두도 원두인데 초콜릿 단가가 너무 올랐어. 테슬라도 아니고 세배나 뛰었어. 참, 가게 이름 어때? 작명소에서 얻어왔어. 홀로커피. 갑작스러울 홀, 일 로. 일복 터지라는 의미래.

모진 음……

사장 별론가?

모진 그런 건 아니고요.

사장 (민망한 듯) 연락받기 쉽지 않았을 텐데…… 오늘 일 나와줘서 고맙고.

모진 아시잖아요. 저 뒤끝 없는 거.

사장 페이는 계엄이 뭔지 탄핵이 뭔지 잘 몰라. 외국인이니까. 사실 페이는 내가 사정이 안 좋아서 1월에 합쳐서 주기로 해가지고…… 오늘은 모진이 너만. 너만.

 

모진과 사장, 페이를 돌아본다.

페이,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 듯 청소에 집중하고 있다.

 

모진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제 약속만 지켜주세요. 저도 다른 일 안 가고 나온 거라서요.

사장 그래, 이번엔 섭섭하지 않게 챙겨줄게. 그리고……

모진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사장 보니까 페이가 우선순위를 잘 모르더라고.

모진 우선순위요?

사장 아니, 왜 있잖아. 애가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타입이라고 해야 하나? 우수 교환학생으로 뽑혔다는데 영……

모진 그래도 지금은 최고참이잖아요.

사장 노력 없이도 흐르는 게 시간이잖니. 기다리면 다 오더라. 누가 저점에서 기다리는가지. 알아서 잘하겠지만 선결제는 이미 받은 돈이니까 네가 웬만하면 다른 손님들 주문 먼저 받게 해주고.

 

페이, 쌓인 종이박스들을 들고 모진과 사장에게로 다가간다.

 

페이 사장님, 이것들 버리고 올까요?

사장 어어, 그래그래.

 

페이, 나간다.

 

 

2장

 

가게 문 종소리.

손님 1, 들어온다. 모진, 포스기 앞으로 간다.

사장은 의자에 앉아 휴대폰에 열중이다.

다시 가게 종소리.

페이, 들어와 황급히 포스기 앞에 선다.

 

모진 주문하시겠어요?

페이 (모진의 옆으로 다가서며) 저, 제가 할게요!

 

페이 차은우, 아이린, 김민주, 위플래시?

손님 1 네?

페이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손님 1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모진 (페이를 밀어내며) 아, 아니에요. 주문하시겠어요?

손님 1 샤인머스캣 히비스커스 에이드 한잔이요.

페이 (작게) 아니구나……

모진 네. 사천구백원입니다. 드시고 가세요?

손님 1 (카드를 건네며) 테이크아웃이요.

모진 (결제하고) 네, 번호표로 불러드릴게요.

사장 (휴대폰을 보며 혼잣말로) 고점에 못 팔았네. 또.

 

손님 1, 카운터 앞 대기석에 앉아 헤드폰을 쓴다.

사장, 헛기침을 두번 반복한다.

모진, 사장의 눈치를 살피며 음료를 만드는 페이에게 간다.

사장, 강하게 헛기침을 하며 나간다.

 

모진 페이씨, 나눔 물품 암호는 먼저 알려주면 안 돼. 알고 있는 사람들만 받게.

페이 죄송해요. 써보고 싶어서……

사장(소리) 가게 앞에 이 쓰레기들 뭐야. 누가 남의 영업장에!

모진 같은 편인 사람한테만 잘 주는 게 우리 일인 거야. 이렇게 귀한 마음을 아무나 줄 수 없잖아요?

페이 (손님에게) 백일번 손님, 음료 나왔습니다.

사장(소리) 페이야! 거기 빗자루랑 쓰레받기 좀 가지고 나와봐라.

페이 (모진에게) 주의할게요.

 

손님 1, 음료를 받아 나간다.

 

페이 (빗자루 챙겨 들고) 네네!

 

페이, 나간다.

 

 

3장

 

모진, 백룸에서 우유박스를 정리하려다가 말고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모진 (전화받으며) 네, 힙스, 아, 아니 홀로커피 여의도점입니다.

목소리 혹시 선결제될까요?

모진 선결제요? 네네. 말씀하세요.

목소리 따듯한 아메리카노 백잔 하려고요.

모진 네, 그리고요?

목소리 따듯한 아메리카노만요.

모진 네, 수령 암호는 어떻게 할까요?

목소리 ‘모두를 위한 결혼’이요.

모진 ……

목소리 여보세요?

모진 ……

목소리 여보세요?

모진 결제는 어떻게 하세요?

목소리 내일 집회 때 나눔 가능하신 거죠? 안 된다는 곳도 많아서 확인차 문의 먼저 드렸는데요.

모진 가능하세요.

목소리 계좌이체도 되나요?

모진 네, 불러드릴게요. (포스기에 붙은 메모를 보고) 일일팔 오사구칠……

목소리 아, 지금 한다는 게 아니라요. 그럼 카드랑 이체 둘 다 되는 거죠?

모진 ……

목소리 여보세요?

모진 아이스 찾으시는 분들도 꽤 많아요.

목소리 네?

모진 커피 못 드시는 분들은 허브티 찾기도 하고요.

목소리 아……

모진 그리고 집회 때는 화장실을 잘 못 가니까, 커피보다는 다른 음료가 낫다고 하더라구요.

목소리 아, 그러면요.

모진 바닐라라떼도 있고, 헤이즐넛라떼도 있고, 연유라떼도 있는데요. 연유라떼는 배 아플 수도 있으니까 안 될 것 같고, 콜드브루도 있는데요. 저희 까페가 콜드브루는 일반 음료컵 말고 따로 페트병에 담아드리거든요. 그러면 시민분들이 마시다가 가방에 넣어두거나 세워둬도 쓰러지지 않고 하지 않을까요?

목소리 이렇게까지 제안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모진 사람들이요. 응원봉 흔들고, 피켓 들고 있으니까 다 똑같아 보이는데요. 생각보다 엄청 다양해요. 원하는 게 전부 달라요. 그래서 그런지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요. 와서 막 이거 없냐, 저거 없냐 물어봐요. 아메리카노만 있다고 하면 선택권이 없다면서 아쉬워하지도 않고 바로 자리를 뜬다니까요. 웃겨요, 다들. 가만 보면 꼭 중요한 걸 잊은 사람들 같다니까요.

(사이.)

목소리 그럼 모카 있어요?

모진 ……

목소리 모카요.

모진 (웃는다) 그게……

목소리 왜 웃으세요?

모진 그건 단종됐어요.

목소리 아……

모진 결제자님. 아니면……

목소리 그럼 됐어요.

 

통화 종료음이 들리자 모진은 잠시 숨을 고른다.

페이, 쿠키박스를 들고 모진에게 간다.

 

페이 무슨 전화예요?

모진 선결제. 가능한지 확인만 해본다네.

페이 언니, 좀 전에 학생들이 준 쿠키인데요. 내일 여기서 나눌 수 있죠?

모진 (짧은 사이) 글쎄. 사장님한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4장

 

모진, 손님 2를 응대 중이다.

사장은 쿠키박스를 든 페이와 함께 물품 앞에 있다.

 

손님 2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모진 (웃으며) 네, 음료는 어떤 거로 하시겠어요?

손님 2 유자차로 주세요.

모진 (페이와 사장 쪽을 보며) 네, 준비해드릴게요.

사장 쯧쯧. 아니지, 페이야.

페이 담요랑 떡 사이에 두고 가져가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사장 아니지, 봐라. 우리가 파는 쿠키는 어쩌고? 저 문밖은 뭘 해도 되는 곳일지 몰라도 여기는 영업장이에요. 담요랑 핫팩 좀 받아놨다고 쿠키까지 나눠주면 우리 쿠키는 누가 사 먹어. 우리 쿠키는 돈 주고 누가 사 먹냐고!

페이 내일은 예외라고 생각했어요.

사장 예외는 무슨. 연중무휴 영업장에 예외가 어딨어. 난 밥이나 먹고 올란다.

 

모진 (사장에게) 앞에 국밥집 어떠세요? 해장국집 선결제해둬서 공짜래요.

사장 김사장은 광화문 가서 태극기 흔든 걸 여의도에서 받는구나.

 

사장, 나간다.

 

사장(소리) 페이야! 여기 앞에 좀 쓸어라.

페이 네! (모진에게) 언니는 식사 언제 가세요?

모진 난 아직 배가 안 고파서. 마지막에 먹을게.

사장(소리) 페이야!

페이 아까 쓸었는데……

 

페이, 청소도구를 챙겨 나간다.

모진이 음료를 건네면 손님 2가 나간다.

페이가 폐지박스를 들고 들어온다. 박스에는 재활용과 일반쓰레기가 뒤섞여 있다.

 

모진 (놀라서) 그걸 왜 들고 들어와!

페이 가게 앞이 더러워 죽겠어요.

모진 거기다 두지.

페이 내버려두면요. 이래도 되는 줄 알고 쌓이고 또 쌓일 거예요. 눈앞에서 치워버려야죠. 안 보여야 안 되는 줄 알아요.

모진 거리에 쓰레기통이 없어서 그래.

페이 그러게요. 한국은 왜 길거리에 쓰레기통이 없을까요.

모진 쓰레기통을 두면 쓰레기가 더 많아질까봐.

페이 좋은 일로 모여도 쓰레기는 생기는데요?

모진 (박스에서 꽁초를 주워 들고) 누가 개념 없이……

페이 그건 사장님 거예요. 방금 버린……

모진 (던지며) 더러워!

 

모진과 페이, 마주 보며 웃는다. 이내 정리한 폐지박스를 한쪽 구석에 놓아둔다.

페이, 컵에 음료를 따른다.

 

페이 언니, 이거 눈 감고 마셔보실래요? 홍콩 홍차로 우린 밀크티예요.

모진 (맛보고) 맛이 꼭 모카 같다.

페이 여기에서 팔던 거랑 똑같진 않지만 비슷하죠? 종종 사장님 몰래 해 먹어요. 홍차 우리면 컵 까매진다고 싫어하시거든요.

모진 페이씨 전공이 뭐라고?

페이 통번역학과예요.

모진 난 또. 식품영양학과나 절대미각과인 줄 알았잖아.

페이 (웃는다) 그래도 됐겠어요.

(사이.)

모진 사장님 까다롭지?

페이 언니도 그래서 그만두신 거죠?

모진 어?

페이 선물 때문이죠?

모진 응.

페이 놀랐어요. 다른 직원한테 들었는데 그때 언니 친구분이 와서…… 뭐라고 하더라, 깡, 낑? 뭐더라? 그걸 쳤다고……

모진 아아, 깽판?

페이 맞아요! 깽판!

모진 제대로 쳤지, 걔가. 신고하기 전에 밀린 돈 다 주라고. 고발한다고 난리였어.

페이 사장님이 엄청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모진 사랑하는 사람?

페이 우리 줄 돈으로 무슨 대단한 선물을 하셨나 싶어서요.

모진 (짧은 사이) 그게…… 사람끼리 주고받는 선물이 아니라 코인. 비트코인 선물.

페이 아, 비트코인.

모진 계엄 때도 패닉셀 온 거 보고 가진 현금 다 털어서 사셨다고 했나.

페이 알아요. 매번 휴대폰 들여다보고 있잖아요.

모진 그땐 피치 못해서 그러셨다고 하더라. 다행히 지금은 이렇게 알바생 두명 쓰실 정도로 여유가 생기셨잖아. 매사에 뾰족해 보여도 사장님은 그 불안을 이긴 사람이야. 대한민국이 회복될 거라 믿는 저 믿음. 어떻게 보면 진짜 애국자지. 난 겁이 많아서 그런가. 미래를 담보하는 그런 통 큰 투자 같은 거 못하거든. 그러니까 사장님도 이번 알바비는 밀린 것까지 쭉 주실 수 있을 거고.

(사이.)

페이 그럼 전 깽판 칠 기회를 놓치는 거네요.

(사이.)

모진 깽판 치고 싶었어?

페이 언니는요?

모진 나?

페이 언니라면 칠 수 있어요?

(사이.)

모진 있잖아. 나 저번주에 짝꿍이랑 헤어졌는데.

페이 짝꿍?

모진 음…… 짝꿍. 애인. 파트너. 여자친구.

페이 그렇게도 부르는구나. 짝꿍.

모진 걔는 내가 망설이지 않아서 싫대. 바로 대답해버리고 모든 걸 그러려니 해서. (민망한 듯) 내가 오늘 페이 너한테 별 이야기를 다 한다.

(사이.)

페이 그래도 깽판 칠 수 있죠.

모진 그런가.

페이 모르겠어요. 그랬으면 사장님이 월급 다음달로 미뤘을 때 무슨 말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못했으니까 저도 언니랑 비슷하네요.

모진 난 이번에 월세 못 내면 진짜 나가야 돼. 자존심 챙기다 나앉긴 싫어. 페이도 그런 건 홍콩에 돌아가서 해. 기댈 수 있는 곳에서.

페이 어려울 거예요.

모진 응?

페이 여기서도 어려운 깽판은 아마 홍콩에서도 어려울 거예요. 홍콩은요. 이제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이 까페 밖에서 그렇게 생생한 목소리가요. 홍콩에서는 들린다는 이유만으로 수백명이 체포되었으니까요. 그런데요. 여기 와서 보니까 참는 사람이 없어요. 단 하나를 말하는데 그게 다 다르게 들려요. 한국은요. 박물관 같아요. 듣던 것들이 눈앞에 있어요.

모진 ……

페이 나도 저 밖의 사람들처럼 뛰쳐나가고 싶어요.

모진 ……

페이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 말해지고 싶다고 생각해요.

(사이.)

페이 생각만요. 생각만.

모진 ……

페이 사실 정치외교학과에 가고 싶었거든요.

 

 

5장

 

모진, 포스기를 보며 매출을 확인 중이다.

문 종소리 들리고 모자를 눌러쓰고 목도리와 마스크를 착용한 규온이 들어온다.

 

모진 어서 오세요. 주문 도와드릴게요.

규온 어? (마스크를 벗으며) 유모진?

모진 (규온을 보고) 장규온?

(사이.)

규온 갈게. 다음에 보자.

모진 가지 마. 그냥 주문해. 밖에 춥잖아.

규온 그럼 그럴까.

모진 응.

규온 어떻게 이렇게 만나지……

모진 그러게.

규온 (가게를 둘러보며) 여기 거기네. 어쩐지 낯이 익더라.

모진 가게 이름 바뀌어서 몰랐나봐. 뭐 마실래? 뜨아, 뜨라, 뜨유. 선결제되어 있어.

규온 뜨유?

모진 뜨거운 유자차.

규온 별걸 다 줄인다.

 

규온, 메뉴판을 유심히 올려다본다.

 

모진 아, 모카는 단종이야.

규온 또?

모진 원재료값이 폭등했대.

규온 (작게) 없어지는 것만 고르는 이 탁월한 취향을 어쩌면 좋아.

 

규온, 나눔 물품들을 살핀다.

 

규온 이렇게 좋은 마음들이 하필이면 왜 이곳에 있을까. 블랙리스트라도 만들까봐. 이 까페에 선결제하는 사람들은 여기 사장이 얼마나 양심이 없는지 알까? 핏덩이 같은 대학생들 근로계약서도 안 쓰고, 알바비 못 준다고 한 거 알까? (눈치 보고) 아, 혼자 일하면 바쁘겠다. 요즘 집회 때문에 여의도 난리잖아.

모진 나 말고 한명 더 있어. 지금은 식사 갔고.

규온 푸드트럭 온 거 알고 그거 먹으러 갔나.

모진 글쎄. 박물관 같다고 하더라.

규온 박물관? 트럭들 음식 기다리려면 기본 삼십분이라 하나 받아먹으면 금세 배 꺼져.

모진 차가워서 맛도 없겠네.

규온 맛으로 먹는 건 아니니까.

모진 그렇지. 맛이 중요한 게 아니지.

규온 맛도 중요할 수 있으면 더 좋긴 하지.

모진 (규온의 티셔츠를 가리키며) 그거 나왔구나.

규온 (티셔츠를 늘려 보이고) 응? 아, 어. 맞다. 나왔어. 이번 후원 티셔츠.

모진 잘 나왔다.

규온 잠옷으로도 입고, 운동할 때도 입고 해.

(사이.)

규온 아까 전화받은 게 너야?

모진 너구나.

규온 너였어.

모진 규온아.

규온 응.

모진 다른 데 해. 주문. 여기 말고.

규온 그래야지.

모진 ……

규온 너도. 다른 데 해. 여기 말고.

 

규온, 나눔 물품들을 살펴본다.

 

규온 가져가도 돼? 매출 올려주긴 싫고 살림살이나 챙겨 갈까봐.

 

규온, 물품을 한가득 챙기고 모진은 그런 규온만 바라보고 있다.

가게 문 종소리.

페이, 들어온다.

 

페이 저 교대 준비하고 올게요.

 

페이, 외투를 벗으며 나간다.

규온, 가방을 챙겨 든다.

 

규온 갈게.

모진 미안해.

규온 뭐가?

모진 인터뷰 못 가서.

(사이.)

모진 너만 혼자서 언론 인터뷰 한 거 봤거든. 다른 사람들은 다 둘씩이더라.

규온 괜찮아. 댓글에서 짝부터 만들고 말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난리들이길래 욱할 뻔한 것만 빼면.

모진 ……

규온 농담이야.

모진 ……

규온 이번엔 고민은 했다는 거네. 올까 말까, 할까 말까.

모진 (짧은 사이) 했지. 당연히 했지.

규온 그거면 됐어. 갈게.

모진 규온아! 잠깐만.

 

모진, 음료를 만들어 규온에게 건넨다.

 

규온 (잔을 받아 확인하며) 넌 이 상황에서 이런 걸 주냐. 모카도 아니고.

모진 모카는 아닌데 맛이 꽤 비슷해.

규온 (맛보고) 그러네. (짧은 사이) 진짜 갈게.

 

규온, 물품을 한가득 담은 가방을 챙겨 나간다.

모진, 일회용 컵을 매만지다 놓치고 무대 위로 구르는 컵들을 황급히 줍는다.

페이, 앞치마를 두르고 나온다.

 

페이 저 손님은 차은우, 아이린, 김민주, 위플래시 다 한 거예요?

모진 응. 계획적이더라.

 

페이, 모진과 함께 컵들을 정리한다.

 

모진 사실은 내가 줬어.

페이 그래도 돼요?

모진 몰라.

페이 되는구나.

모진 밥 먹고 올게. 아무래도 사장님은 또 마음대로 퇴근하시려나보다.

 

모진, 앞치마를 벗고 나간다.

 

페이 다녀오세요!

 

페이, 정리한 컵들을 무너뜨린다.

우두커니 무대 위로 나뒹구는 컵들을 응시하다 이내 다시 주워 정리한다.

 

 

6장

 

모진, 양치질 중이다.

가게 문 종소리.

남자와 여자가 들어오자, 모진은 황급히 입을 헹구고 포스기 앞에 선다.

 

남자 여기가 고윤이가 차린 까페잖아.

여자 이렇게 불시에 방문해도 되나.

남자 이왕 쓸 돈이면 고윤이한테 쓰는 게 좋지 않냐.

여자 그건 그렇지.

모진 주문하시겠어요?

남자 따듯한 거로. 아메리카노 두잔 줘요.

 

모진, 음료를 만든다.

 

여자 그래, 연락도 안 하고 왔는데 괜히 얼굴 보면 서로 껄끄럽고 그렇지.

남자 (가게를 둘러보며) 근데 인테리어가 참……

여자 원래 촌스러웠잖아. 주먹만 한 안경 쓰고 다니고.

모진 (남자와 여자에게) 사장님 안 계세요. 지금.

남자 네?

모진 찾으시는 고윤 사장님이요.

남자 아, 그래요. 그래요. 들리는구나.

여자 거봐. 내가 너 목소리 크다 했지.

남자 그래서 내가 노래를 잘 부르잖냐.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모진 비비람이 몰아친대도.*

여자 야야, 시끄러워.

남자 미안. 아유, 아가씨. 미안요.

 

모진, 다시 음료 만들기에 집중한다.

 

남자 이야, 잘 살고 있네.

여자 응?

남자 여기 나눔 물품들 비치해둔 거 봐. 열 맞춰서. 딱 고윤이 스타일.

여자 걔가 줄은 진짜 잘 세웠지.

남자 이 상황에 무슨 질서냐고 따지고 들면 상대가 불통일수록 지키면서 하는 게 운동이라고 목 터져라 외쳤잖아.

여자 그래서 다 끌려갔잖아.

남자 결과는 늘 좋지 않았지. 암.

여자 난 그때 맞은 쇄골이 아직도 욱신거려.

남자 내가 소개해준 마사지 클리닉 별로였냐?

여자 안 갔어. 아픈 데를 지압하면 더 아픈 거 모르냐.

남자 거기 운동선수 재활 클리닉 있다니까.

여자 우리가 무슨 운동선수야.

모진 (음료를 내오며) 음료 두잔 드릴게요.

여자 고마워요. 아니지, 운동선수는 맞지. 그 운동이 아닐 뿐.

남자 거리가 얼마나 밝냐. 저 많은 운동선수들 봐라. 눈부시다. 눈부셔!

 

남자와 여자, 나간다.

가게 종소리.

모진, 매장을 정리하며 콧노래를 부른다.

 

모진 (흥얼거린다) 바이처럼 살아가보자, 모진 비비람이 몰아친대도.**

 

 

7장

 

사장 원두는 이만하면 됐고.

모진 얼마나 들어왔대요?

사장 (들뜬 목소리로) 삼백잔. 이야, 삼백잔이라니. 김사장이 페북에 우리 가게 글 올라왔다고 바로 알려줬어. 오늘 선결제도 얼마 안 나갔지?

모진 네, 스무잔이요.

사장 내일도 끽해야 백잔이겠구만.

모진 내일 일은 내일이 되어야 알겠죠. 뭐든 까봐야 아니까.

사장 그래, 장도 까봐야 알아. 그게 선물의 맛이지.

모진 ……

사장 (휴대폰을 확인하고) 모진아, 아까 선결제 전화받은 게 너니?

모진 네?

사장 아까 매장으로 온 선결제 한번 거절했다며.

모진 아, 그 건은요.

사장 얘기 안 했으면 말도 안 해줬을 심산이네. 참, 모진이 넌 내일까지 해줄 수 있다고 했지? 근데 페이 얘는 어딜 가서 아직도 안 와?

모진 쓰레기 버리러 갔어요.

사장 판 것도 없는데 쓰레기는.

모진 그리고요. 페이가 뭐라고 전달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건은 거절이 아니라, 가게를 착각했대요. 남은 가게들이 몇 없어서 정신들이 없나봐요.

사장 (짧은 사이) 네가 일부러 거절한 건 아니지? 일하기 싫어서?

모진 네?

사장 아니, 너도 알잖아. 요즘 알바들은 제 월급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는 거. 매출이랑은 상관없다는 듯이 건성으로 시간만 때우고, 툭하면 관두고, 연락도 안 받고, 몰래 핸드폰질이나 하고. 근데 넌 아니잖아. 나이도 있고,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이라는 걸 아니까 잘못 걸려와도 어필할 수 있었잖아. 내가 널 모르니. 모진이 너. 전에는 그랬잖아.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조금만 더 신경 써달라는 거야. 나도 가게 이름 바꾼 값은 나와야 할 거 아니야. 넌 할 수 있는 애가, 그렇지?

모진 ……

사장 혹시 아직도 그런 거니? 내가 얼굴 붉히지 말자고 깔끔하게 사과도 했고, 전부 지난 일이잖아. 보니까 너도 놀고 있었다며. 그럼 잘된 거잖아.

모진 그렇죠. 저도 감정 남아 있었으면 사장님 연락 안 받았을 거예요.

사장 그래, 우리 잘해보자. (휴대폰 알림 확인하고) 암호가 ‘좋은곳에’라는데. 맞아? 입금 건도 없는데?

모진 ……

사장 이상하네.

(긴 사이.)

사장 어디 갔니? 페이.

모진 쓰레기 버리러 간다고……

사장 전화해봐.

모진 전 모르죠.

사장 몰라?

모진 연락처 교환한 적이 없으니까요.

사장 됐다. 내가 할게. (휴대폰 보며) 아이, 나도 카톡밖에 없네.

 

보이스톡 신호음이 들리지만 이내 응답이 없어 끊긴다.

 

사장 튀었네.

모진 설마요. 아닐 거예요.

사장 아니긴. 촉이 왔어. 아, 이래서 쓰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모진아, 내가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말이 안 되지 않니? 그럼 페이가 본인 계좌로 돈을 받았다는 거야? 주문자도 이상하네. 외국인인 걸 계좌명으로 알았을 거 아냐. 의심이 안 드나? 한국인이 아니잖아. 이런 사람들이 보이스피싱에 제 돈 가져다 바치는 거 아니야?

(사이.)

사장 페이 말투가 어눌해서 외국인인 걸 알았을 텐데?

모진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겠죠.

사장 페이 통장 이름 보고 중국인인 걸 알았을 텐데?

모진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겠죠.

사장 그런 것도 따지지 않고 페이한테 칠십오만원을 바로 줬다고?

모진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겠죠.

사장 걔 중국인이잖아.

모진 홍콩 사람이에요.

사장 그게 그거지.

모진 (작게) 잘 쓰셔놓고 꼭 그러시더라.

사장 뭐?

모진 아니, 그날도 그러셨잖아요. 매출도 안 나오는데 괜히 알바생을 세명이나 썼다고 하셨잖아요. 차라리 그 돈으로 선물을 샀으면 떼돈을 벌었겠다구요.

사장 맞구나. 나한테 억하심정 있는 거.

모진 다 써놓고, 다 출근시켜놓고 그렇게 말하면서 다음에 주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저는 주고, 페이는 또 안 주겠다고 하시고요.

사장 (짧은 사이) 그건 내 사정 봐서 너도 이해한다며.

모진 그러려고 했죠. 저도 뭐 하러 사장님을 돕냐고 말리는 거 무릅쓰고 나온 거예요. 저도 고민하다가 어렵게 나온 거라고요.

(사이.)

사장 그만 퇴근해. 돈은 바로 보내줄 테니까.

 

모진, 유니폼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긴다.

 

사장 말리긴 누가 말려? 지난번 네 친구가? 그 여자친구?

모진 ……

사장 아아, 맞지?

(사이.)

사장 깽판 쳤던 걔 저기서 깃발 들고 있더라. 뭐, 뭔 결혼? 혼인 평등? 난 노조일 줄 알았는데 그쪽은 아니었고. 참 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그런 거 할 때니.

모진 ……역시 잘 아시네요.

사장 알긴 내가 뭘 알아?

모진 아까 사장님 친구분들 다녀가셨어요.

사장 김사장?

모진 아뇨, 아주 돈독하셨던 분들이던데요. 줄도 세우시고, 같이 잡혀서 들어가시기도 하고요. 아, 찹쌀떡도 나눠 드셨나. 뭐, 사장님이 잘 지내서 다행이래요. 애들 돈 떼어먹는 게 잘 지내는 건진 모르겠지만.

(사이.)

모진 가볼게요. 약속은 지켜주세요.

 

전화벨 울린다. 사장, 우왕좌왕하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는다.

 

사장 (밝게) 네, 여의도 홀로커피입니다. 선결제요? 오백잔이요? 그럼 되죠. 그럼요. 결제는 현금으로 하신다구요! 가능합니다. 아유, 민주주의 파이팅. 탄핵될 겁니다. 되어야죠. 국민이 부르는데요.

 

사장, 전화를 받은 채로 신이 나서 매출들을 정리한다.

 

 

8장

 

가게 문 종소리.

규온,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다.

 

규온 퇴근해?

모진 응.

규온 다행이다. (티셔츠를 꺼내고) 네 거. 꼭 주고 싶었어. 연락할게.

 

규온, 나간다.

모진, 티셔츠를 한참동안 바라보다 입는다. 이어서 물품들을 가방에 눌러 담는다.

넘치는 물품들이 바닥으로 떨어지지만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담는다.

가게 문 종소리.

경찰 1, 2 들어온다.

 

경찰 1 (모진에게) 점주님 되시나요?

모진 선결제세요?

경찰 2 홀로커피 맞죠?

모진 잠시만요. (사장에게) 사장님, 주문이요.

 

사장, 나온다.

 

사장 주문하시나요?

경찰 1 황고윤님?

사장 예, 그런데요.

경찰 2 고용노동부로 저희가 인계는 할 예정이긴 한데, 저희 쪽으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직원들에게 임금 미지급하셨다고요.

사장 아이, 무슨 소리세요. 걔는 본인이 남의 돈 훔쳐놓고 신고까지 했어요?

경찰 1 예?

사장 아무리 신고가 들어왔어도 그렇지. 중국인이 한 신고를 뭘 믿고……

경찰 2 단기 근무까지 여섯분인데 여기가 오인 미만 사업장이라 정확한 건 고용노동부에서 조사할 겁니다.

사장 아니, 저도 오늘 횡령당했다구요.

경찰 1 오늘이랑 내일은 잘 아시다시피 집회 때문에 처리가 어렵다보니 당장은 아니고 조만간 고용노동부 쪽에서 연락 오면 출석하시면 되고요.

사장 제 돈을 들고 튀었다니까요? 제 말부터 들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경찰 2 뭐, 지금 행정처리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경찰 1 저희가 관할하는 건은 아닌데, 신고가 여럿 들어와서 확인차 매장에 온 거니까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간단한 거 몇가지만 여쭤볼게요.

사장 그 말씀은 그 안에 제가 합의를 하면 노동부에 이력까지는 안 남는 건가요?

경찰 1 예, 뭐. 진정은 될 겁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경찰 2 아시다시피 나라가 난리도 아니잖습니까.

모진 그런 게 어딨어요.

사장 그러면 해결할 수 있는 시일이 좀 있다는 거죠?

모진 그런 게 어딨냐구요.

경찰 1 (사장에게) 당장은 저희가 대답해드리기 어렵고요.

모진 잠시만요. 저도 피해자예요. 제가 가서 진술하면 되잖아요.

사장 모진이 너는 챙길 거 다 챙겼으면 이만 가도 될 것 같은데?

모진 계엄이라고 해서 출근 안 하는 거 아니잖아요. 제가 갈게요.

사장 가긴 뭘 가. 요즘 애들이 이래요. 어떻게 얻은 민주주의인 줄도 모르고!

모진 제가 간다니까요. 저기요. 제 말 안 들리세요?

경찰 1 두분 우선 진정하시고요. (경찰 2에게) 어떻게 할까요?

모진 온 국민이 전부 거리에 나가서 탄핵 구호 외치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처럼 일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럼 저희는요. 저희는 중요한 날이니까 선결제니 뭐니 해서 배로 일해도 돼요? 다들 대의로 뭉쳐서 정신없으니까 그사이의 일들은 없던 일로 여겨도 돼요?

(사이.)

모진 그래서 되면요?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가면요? 정상적으로 다시 돌아가면요. 그때는요? 그때는요. 그럼 다 말해질 수 있어요? 모두 해결할 수 있어요?

(사이.)

모진 정말 그럴 수 있어요? 도대체 언제 들어줄 건데요. 그때도 지금도 매번 똑같이 얘기하고 있는데. 지금은 이래서 안 되고, 그때는 저래서 안 됐고. 다들 몇십년째 똑같은 소리만 되풀이한다고, 돌림노래 아니냐고, 지겹다고 하죠. 근데요. 반복하는 거요. 진짜 피 말리는 일이에요. 그렇게 뒤로 밀리고, 밀리고, 밀리고, 밀려나면요. 지쳐요.

(사이.)

모진 전부 사람이 외치는 거잖아요.

 

무전기에서 신호가 불안정한 잡음이 난다.

 

모진 그냥 보통날처럼 들어줘요. 나도 평소처럼 말할 준비 됐으니까.

경찰 1 (경찰 2에게) 일단 같이 가자.

경찰 2 (모진에게) 동행하시죠.

 

모진, 경찰 1, 2와 함께 나간다.

가게 문 종소리.

사장, 난처해하며 뒤따라 나간다.

가게 문 종소리.

아무도 남지 않은 무대에서 울리는 전화 벨소리.

서서히 조명이 어두워진다.

전화 벨소리가 계속해서 울린다.

 

막.

 

 

 

심사평

 

2025년 대산대학문학상 희곡 부문에는 총 96편의 작품이 응모됐다. 심사위원들은 논의를 거쳐 「당신이 영영 모를 주문」 「플란타시아」 「예초」 「창백한 푸른 점」 「스물 네 시간의 하나」 「야호」를 본심에 올렸다.

「당신이 영영 모를 주문」은 2024년 겨울, 집회 중인 여의도를 배경으로 작은 까페에서 일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정된 공간에서 시간순으로 이야기가 진전되는 비교적 전형적인 구조를 갖고 있지만, 그 안에서 다뤄지는 소재가 동시대의 한국을 핍진하게 구현하며, 인물 군상의 면면이 흥미로워 단번에 눈길이 갔다.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투쟁과 한 개인의 삶에서 경험하는 부조리의 대비가 인상적이었다.

「플란타시아」는 1세기 뒤 미래를 배경으로 반려식물, AI식물과 같은 ‘식물지능’의 존재를 작품에 구체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낸다. 지문, 대사의 문학성이 뛰어나고 작가가 시간을 들여 이 세계를 직조했음을 알 수 있는 공들여 쓴 희곡이었다. 무대화의 단계에서 연출적인 상상력이 더해져 작품이 더 풍성해지기를 기대한다.

「예초」는 어머니의 무덤가에 앉은 중년의 자매가 등장하는 2인극이다. 대사의 말맛이 좋아 큰 사건 없이도 한번에 쭉 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창백한 푸른 점」은 작가의 감각이 돋보이나 향후 더 옹골찬 희곡으로 여물 때를 기다리게 된다. 「스물 네 시간의 하나」는 산부인과, 비뇨기과의 명확한 대비가 흥미로우나 다소 교훈적인 결말이라는 인상이 있었다. 「야호」는 화장실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세 인물의 상황이 아이러니를 선사한다. 희곡이라는 장르를 이해하고 쓰는 작가의 구력이 느껴졌다. 다만 다소 익숙한 전개가 아쉬움을 남겼다.

심사위원들은 논의 끝에 「당신이 영영 모를 주문」을 수상작으로 최종 선정하였다. 희곡 부문에 응모한 모든 작가들을 응원한다. 희곡쓰기가 외로울 때에, 누군가는 당신의 글을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길 바란다.

이오진 최원종

 

 

당선소감

 

올겨울은 유난히 춥다. 내가 겪어온 겨울을 세다가 폭설이 잦았던 지난겨울을 생각하면 엉덩이 밑이 차가워진다. 코끝과 손끝은 물론 엉덩이마저 추운 겨울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좀처럼 엉덩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차갑고 이상한 기운에서 시작됐다. 느낄 필요 없는 감각을 느끼는 데에서 오는 이질감. 그 기운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내 삶에 있었다. 어떤 회복은 선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디며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폭력적인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안전하다는 모순이 버겁고, 나에게 다정한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무정하다는 사실이 아프다. 그 자명한 기울기를 느낄 때마다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일을 주저하게 된다. ‘안녕하세요.’ 서로에게 안녕하냐고 묻는 일. 우리가 안녕할 수 있을까. 어쩌면 끊임없이 발생하는 삶의 사건 속에서 우린 안녕할 수 없기에 상대에게 묻는 ‘안녕하세요’는 물음이 아니라 바람일 수 있겠다고 깨닫는다. 여태 안녕하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당신의 앞으로가 안녕하길 바라는 마음이겠다고.

마주 지낸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대산대학문학상과 심사위원분들 그리고 독자와 만나는 경험을 만들어준 출판사 창비에 감사하다. 떠오르는 얼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나 누구보다 당신의 이름을 호명하고 싶어 하는 나라는 걸 알고 있을 인물들에게는 개별적 인사로 찾아가려 한다. 또한 배움의 길을 열어준 서울예술대학교 극작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희곡과 함께하는 삶에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장성희 교수님, 극작법의 세계를 열어주신 성기웅 교수님, ‘무엇을 목격하게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목격의 자리에 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들어주신 박해성 교수님, 연극을 향한 존중의 태도를 알려주신 연극과 조경향 교수님, 희곡쓰기의 첫 용기를 불어넣어주신 박찬규 작가님께도 인사를 드려본다. 마지막으로 극작과 24학번 동료들! 여러분을 만나 나의 쓰기가 외롭지 않다고 고백할 수 있어 기쁘다.

앞으로도 내가 알고 모르는 얼굴들이 부디 각자의 삶에서 안녕하길 빈다. 더 열심히 배우고, 마음껏 쓰며 나의 불확실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싶다.

반은지

반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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