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평론

 

 

최선재

곽준서 郭晙瑞

서울대 사회학과 1학년. 2006년생.

gwagjunseo32@gmail.com

 

 

 

감금과 죽음 사이의 틈

정보라식 읽고 쓰기

 

 

1. 펜과 칼

 

펜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비유는 아마도 칼일 것이다. 샌드라 길버트(Sandra Gilbert)와 수전 구바(Susan Gubar)는 앨버트 겔피(Albert Gelpi)의 글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예술가는 경험을 죽여서 예술로 만든다. 일시적인 경험이 죽음을 피할 유일한 길은 예술 형식의 ‘불멸성’ 속으로 죽어서 들어가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1 이때 예술이 불멸한다는 것은 잊히지 않는다는 것이며, 경험이 죽어서 들어간다는 것은 더는 변화하지 않는 상태로 고정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길버트와 구바는 “펜은 칼보다 더 강할 뿐 만 아니라 죽이는 힘(그 필요성)도 칼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2 펜을 쥔 사람이 포착하고자 한 특정한 사건은 사냥감처럼 사로잡히고 낱낱이 해부되는 과정을 거쳐 본래의 역동성을 잃어버리며, 가죽처럼 남겨진 이야기는 전리품이 된다. 글쓰기가 칼을 휘두르는 것만큼이나 폭력적인 행위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들의 저서에서 펜과 칼의 비유가 가부장적인 시학에 대한 비판적 이해로 이어진 것은 놀랍지 않다.

그런데 재현의 대상이 되는 게 공포의 경험이라면 위의 공식은 통하지 않는다. 공포는 미지와 불가해의 전유물이기 때문이다. 안전한 일상 밖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생존본능이 울리는 경고의 감정이 바로 공포이다. 따라서 잘 알지 못하는 존재, 혹은 알더라도 통제할 수 없는 존재만이 효과적으로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공포는 활자보다도 행간에 서식한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를 잘 죽여서 전시한다면 무엇이 무섭겠는가. 야생에서는 지극히 위협적으로 느껴질 짐승들도 박물관에 박제된 모습으로는 어린아이들조차 겁주지 못한다. 사건을 규명하고 고정하는 도구로서의 펜은 공포소설에 적합한 도구가 아니다. 미처 이해하지 못한 무언가를 그 미지의 상태 그대로 종이 위로 옮겨오기 위해서, 펜은 사건과 맺은 관계의 양식을 바꾸어야 한다. 이 변화의 필요성에서는 글쓰기의 폭력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힘이 엿보인다.

그렇다면 여성 환상문학 작가로서 정보라는 어떻게 펜으로 공포를 포착하는가? 정보라는 직접 몇몇 작품을 번역하기도 한 동유럽권 문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적 정서를 형상화한다. 그래서 그의 독특한 소설은 누구에게나 익숙하고도 낯설게 다가온다. 2022년 『저주토끼』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2023년에 같은 책으로 전미도서상 번역 부문 최종 후보에, 그리고 2025년 『너의 유토피아』로 필립K.딕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그런 정보라의 단편소설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갇힘’의 이미지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3 작중 인물들은 “창고 구석의 우리 속에 쇠사슬로 묶”(「덫」164면)여 있거나, “정신병원에 감금당”(「금」 131면)하거나, “이미 사라져버린 수용소를 평생 두려워하면서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수용소 안에서 살고 있”(「재회」 339면)다. 이처럼 폐쇄적이고 으스스한 정보라의 이야기세계는 억압당하는 자들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유롭고 개방된 공간 대신 사방이 막힌 미로 같은 공간으로 나타난다. 독자 역시 이야기를 훤히 들여다보는 대신, 스티븐 킹(Stephen King)의 표현을 차용하자면 잠긴 문을 사이에 두고 죽어가는 자와 춤을 출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갇힌 인물이 ‘죽은 자’가 아닌 ‘죽어가는자’여야만 한다는 점이다. 감금이라는 행위는 반드시 밖으로 나오고자 하는 의지의 반작용을 그 조건으로 하기에, 삶으로부터 유리된 것처럼 보이는 갇힌 자는 역설적으로 언제나 살아 있다. 그리고 펜이 칼과 유사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소설 내부에서 한 인물이 감금행위를 매개로 다른 인물과 맺은 관계는 작가와 소설 사이 관계로 치환될 수 있다. 칼-사냥감-가죽의 구조를 뒤흔들었기 때문에 펜-사건-이야기의 비유 역시 변신하는 것이다. 그동안 죽은 짐승의 가죽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던 이야기는 정보라의 단편소설들 속에서 새로운 형태와 생명력을 얻는다.

 

 

2. 착취와 구원

 

갇혀 있다는 감각은 정보라의 소설 속에서만 드러나는 특수한 설정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현대적 정서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자신이 속한 세계를 온전히 조망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갑갑함은 시스템이 불투명해지고 차별이 교묘해질수록 심해진다. 고도로 복잡해진 사회의 전체 모습을 조망할 능력을 박탈당한 현대인에게 현대사회는 그 자체로 작동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블랙박스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자신의 사생활이 일련의 올가미에 걸려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는다.”4 물론 그들이 반드시 이 사실을 자각하거나 변혁을 꾀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덫에 걸린 자신의 처지를 완전히 내면화한 경우 사방을 막은 벽의 붕괴를 두려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여전히 그들의 내면에는 변화에 대한 막연한 갈망이 있다. 이는 언뜻 이질적이고 난해한 정보라식 공포가 대중에게 호소력을 갖는 가장 큰 이유이다. 정보라의 소설은 노골적인 언급 없이도 현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있다.

「덫」(『저주토끼』)에는 그 제목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듯이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감금당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남자는 설산에서 덫에 끼인 채 “피가 아니라 황금과 같은, 황금처럼 보이는 것”(161면)을 흘리는 여우를 발견하고 덫째로 가둔 뒤 삼년간 금을 뽑는다. 여우가 죽은 후 남자는 자식으로 쌍둥이 남매를 얻는데, 곧 이들에게도 죽은 여우와 비슷한 신묘한 특징이 있어 딸의 피를 먹은 아들이 상처에서 황금을 흘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남자가 아버지로서, “가계를 위해서라면 자식들도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만”(168면) 한다는 명목으로 여우를 가뒀듯 딸을 가두고 제 자식들에게 상처를 내기 시작한 순간부터 남매는 자식이기 이전에 소유물로 취급된다. 이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착취이다. “아들의 몸에서 계속 금을 얻으려면 딸의 피가 필요”하고, 그래서 남자는 남매를, 특히 딸을 통제한다. 그들이 “황금의 원천”(170면)이라는 묘사는 쌍둥이에 대한 남자의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집에 와서 남자는 여우를 헛간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여우에게 물과 먹을 것을 주고 죽지 않게 보살폈다. 그러나 덫에 걸린 발목은 풀어주지 않았다. 풀어주기는커녕 남자는 덫에 끼인 여우의 발목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도록 가끔 덫을 흔들고 뾰족한 것으로 상처를 쑤셨다. 여우는 그때마다 원망스러운 듯이 캥캥거리거나 신음했다. 그러나 사람같이 말을 한 것은 남자가 처음 발견했을 때 한 번뿐이었다.(162면)

 

가둬놓은 여우에게 남자가 가한 폭력이 압축되어 드러난 이 장면을 통해 사냥감을 죽이지 않는다는 결정이 얼마나 무자비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덫에 걸린 여우는 죽어서는 안 된다. 즉, 칼을 겨누되 찔러서는 안 된다. 이는 단지 여우가 살아 있어야 여우를 계속 착취할 수 있다는 계산에 따른 남자의 탐욕스러운 결정이다. 갇힌 여우가 말을 잃은 것은 여우가 펜을 쥔 남자에 의해 포착된 대상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죽이지 않고 살려둔다고 해서 칼과 사냥감 사이 관계가 달라지지는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살아 있는 존재에게만 주어지는 발화의 가능성은 이후 여우의 환생과도 같은 딸을 통해 실현된다. 여우와 마찬가지로 “안쪽 깊숙한 곳”(171면)에 갇힌 채 “아무와도 말하지 않고”(174면) 살아가던 딸은 죽음을 앞둔 순간 여우가 언어를 잃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과 똑같은 날카로운 외침으로 자신의 의지를 표명한다. “나를 풀어주시오.”(176면) 이후 결말에서 딸(혹은 여우)은 숨을 거두고 유령으로 나타나지만, 「덫」이 공포소설인 만큼 소설에 계속 등장하는 이상 죽어도 죽은 게 아니며 단지 삶의 형태를 바꾼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결국 남자는 자신의 오만과 욕심에 발목 잡혀 사냥감의 숨통을 끊는 데에 실패했고, 딸의 유령에 의해 “뼈와 가죽만 남은 채로 침대에 누워 어쨌든 여전히 살아”(180면) 있는 상태가 되어 딸과 여우가 느끼던 공포를 고스란히 체감하게 된다. 종합해보면 「덫」을 감금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독해함으로써 두가지 인지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하나는 죽음이 비가역적 종결인 것과는 달리 감금의 대상은 언젠가 풀려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때 감금으로부터의 해방이 역설적으로 죽음의 이미지를 환기한다는 것이다. 착취자는 피착취자가 살기를 바라는데 피착취자는 차라리 죽음을 원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한 피착취자에게는 복수할 힘이 있고, 차라리 그를 죽이는 것이 착취자에게 더 안전한 선택이다. 착취는 이렇게 구성된다. 이때 덫에서는 희미하게 암시될 뿐인 죽음에 대한 갈망과 감옥으로서의 삶은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죽음이 무엇인지, 죽음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 이렇게 오래 죽은 채로 지냈지만 나도 그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알도록 허용된 일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아는 것은, 죽음은 우리와 오래 함께하며 오래 이야기를 들어주고 오래 곁을 지켜준다는 사실뿐이다. (…) 첫 번째 남자는 죽지 않는다. 죽음은 첫 번째 남자와 함께하지 않는다. 남자의 외침을 들어주지 않고 남자의 비명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죽음은 남자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첫 번째 남자는 남은 삶을 혼자서 헤쳐가야 한다. 잠긴 문과 함께, 감시의 눈초리와 함께, 두 구의 시신과 함께, 자신을 따라다니는 세 개의 원혼과 함께.(31~32면)

 

죽음의 세례를 받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죗값을 치르기 위한 징역살이나 다름없다. 이때 갇힌 인물들을 지배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가 아닌 죽지 못하는 공포이다. 죽음이야말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에게 외면당한다는 것은 말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죽어 어떠한 형태로도 존재하지 않게 된 인물 역시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기에, 발화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만 이루어진다. 혹은 그러한 틈을 비집어내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사각지대에 사는 사람이 있다. 죽음의 곁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손에 쥘 수 없다면 이들의 해방은 요원하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에서 죽음은 사각지대 속에서 이루어진 범죄의 피해자를 구원하고 가해자를 심판하여,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법 혹은 그 이상의 권력을 대체한다. 그리하여 “신은 없다. 있는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다.”(17면)

 

 

3. 시간과 신체

 

‘갇힘’의 이미지는 현대사회의 반영으로서 기이한 공포를 자아내는 정보라 문학의 핵심요소이다. 누군가를 가두는 것은 죽이는 것과 명백히 다른, 살려두는 것이 핵심인 행위라는 점에서 서로 상반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둘 모두 대상의 입을 막는 폭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때 입이 막힌 사람은 차라리 죽음을 갈망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감금과 죽음 사이 어딘가에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상처 입히기’에서 ‘위협하기’로 주목적을 바꾼 칼이 사냥감과 맺은 새로운 관계, 또 그로부터 파생된 새로운 가능성을 펜과 사건 사이에서도 찾을 수 있을까? 정보라의 다른 단편들을 통해 더욱 은유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덫을 좇다보면 칼의 역할이 펜으로 전이되는 과정이 보인다. 만약 작가가 작품에 조금이라도 반영될 수밖에 없다면 모든 픽션은 조금씩은 읽고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메타픽션이다.

그래서 소설의 내부와 외부가, 등장인물과 작가가, 현실과 허구가 뒤얽히는 부분이 생기고,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또 더 섬세한 서사를 쌓기

위해 이를 이용할 수 있다.

「금」(『아무도 모를 것이다』)에는 “미래에 다녀와서 신세를 망친 한 남자”(131면)가 등장한다. 남자는 자발적으로 시간여행에 지원하지만 미래에 도착한 직후 정신병원에 감금당하며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기약 없이 낯선 곳에 갇힌 신세가 된다. 이때 그를 가둔 것은 물리적인 병원 건물을 넘어 미래라는 시공간 자체이다. “과거에 두고 온 자신의 삶과 가족과 친구들”(135면)을 그리워하던 남자는 병원에서 손목에 금 같은 흉터를 지닌 여자를 만나고, 남자가 떠나온 시공간에 대해 아는 듯 보이는 여자는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게 될 거예요”(138면)라는 말로 그에게 희망을 준다. 그런데 남자가 시간여행을 택한 순간부터 그의 세계는 미래와 과거로 양분되었고, ‘현재’ 즉 ‘집’과 같은 단어는 어디에 붙여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미래에서 꼬박 팔년을 보낸 후 여자의 말대로 과거로 돌아온 뒤에도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었다.”(146면) 더는 과거조차도 그의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는 미래에서 자신이 갇혀 있던 정신병원을 그리워했다. 자신이 그곳을 그리워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이 그리웠다.

그리웠지만, 갈 수 없었다. 그곳에 있을 때 다시는 과거로 돌아올 수 없으리라 생각하며 그리워했다. 이제 그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미래를 갈망하며 괴로워했다.(161면)

 

남자는 미래에도 과거에도 속하지 못하는 두 시공간 사이 실금같이 얇은 틈에 갇힌 존재이다. 「금」에서는 서사 내부에 덫이 명시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서사 자체가 구조적으로 주인공을 옥죄고 있다. 이 사실이 그가 한 때 정신병원에 갇혔다는 것보다 중요하다. 미래와 과거 사이에 갇혀 현재를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남자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 전반부에서도, 과거가 배경인 후반부에서도 ‘흰 벽’에만 마음을 의지한다. 차라리 자신을 가두는 벽에 몸을 기대어버릴 때 남자는 사무치게 외로워 보인다. 그래서 소설이 “주어진 육신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는 언제 어디서나 다른 곳을 그리워하며 살아갈 것”(173면)이라고 단언하고 있음에도 결말에서 남자는 벽에 난 금 사이에서 뻗어나온 여자의 손을 잡고 다시 한번 미래로 떠날 수밖에 없다. 그의 현재는 어디에도 없다는 점에서 이 선택은 언뜻 무의미해 보이지만 남자에게는 손목에 금이 간 이 여자가 감금과 죽음 사이에 생긴 틈이자 가능성인 것이다. 이처럼 「금」은 공존이 상황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한편 「물」(같은 책)에서는 인간 신체가 감옥처럼 기능한다. 작중에 등장하는 여자의 신체 역시 “양손을 뒤로 돌려 수갑을 찬”(178면) 상태로 호송되는 중이지만 중요한 것은 신체 안에 깃들어 있는 외계에서 온 존재로, 인간의 언어로는 ‘물’이다. 원래는 인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물은 인간의 신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신체는 흥미로워요. 하지만 이런 형태의 신체는 구—속이고 제—약이에요. 고—통이에요.”(208면) 이때 물을 가둔 감옥은 전통적으로 정신과 대립하는 물리적인 것으로서의 신체가 아니라 의식을 포함한 인간의 존재방식이다. “3차원의 공간에 고체로 존재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혀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생명체”(194면)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와 언어 역시 물에게는 신체만큼이나 낯선 것이다. 여자의 몸에 들어간 물이 여자의 입을 빌려 처음으로 말을 하자마자 그를 감시하던 남자가 여자의 정신이상을 의심하는 장면은 물의 이질성을 부각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남자에게 물은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적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물과 물이 보여주는 것에 대해 “인간인 그가 표현할 수 있는 언어에는 한계가 있었다.”(196면) 「크툴루의 부름」이나 「우주에서 온 색채」 같은 러브크래프트의 대표적인 단편에서 드러나는 모순이 여기서도 보이는데, 작가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온갖 수사법을 동원하지만 이러한 표현들은 필연적으로 대상의 본질에서 빗나가고, 결국 그것은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와 같은 동어반복으로만 포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방법은 ‘말할 수 없다’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뿐이다. 언어는 광기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미쳤다는 것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 비전문적인 정의는 ‘A인 것이 A가 아닌 B라고 생각하고, A를 A가 아닌 B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와 광기의 상관관계에 대해 푸꼬(M. Foucault)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말을 하는 모든 인간은, 적어도 비밀리에는, 미칠 수 있다는 절대적 자유를 사용합니다. 반대로, 이미 미쳐 버린 모든 인간. 따라서 인간의 언어에 대해 절대적 이방인처럼 보이는 모든 인간 역시, 당연히, 언어작용이라는 닫힌 우주의 죄수라고 나는 믿습니다.”5 이처럼 사실 「물」에서 물을 가두고 있는 덫은 어쩌면 존재하는 가장 굳건한 감옥인 ‘언어’이다.

「금」과 「물」에서는 덫이라는 테마를 탁월하게 변주하는 정보라의 작가적 역량이 돋보인다. 「금」의 경우 소설 구성의 3요소 중 하나로서 이야기의 골조를 이루는 ‘배경’인 시공간이 감옥으로 변한다. 「금」이 결말에서 제시한 공존의 가능성은 이후 정보라의 다른 단편들에서 확대된다. 한편 「물」에서 무엇이 등장인물을 가두고 있는지 파헤치다보면 그 정체가 언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야기를 탐구하기 위해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 언어에 대한 탐구가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금」과 「물」에서는 이야기의 기둥인 플롯과 벽돌인 언어가 등장인물을 가두고 있다. 단순히 사냥감으로서의 사건이 남긴 가죽이었던 이야기는 「금」과 「물」에 이르러 덫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았다.

 

 

4. 끝과 시작

 

「덫」은 소설 내부에서 감금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금」과 「물」은 칼의 새 역할이 펜으로 전이되는 과도기에 탄생한 하이브리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공포의 경험을 포착하려면 정보라의 덫은 한층 더 복잡해질 필요가 있다. 등장인물을 가두기 위해 이야기의 구성요소가 서사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야기가 자신이 다루고자하는 사건 자체를 가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서 경험의 죽음이란 더는 변화하지 않는 상태로 고정되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런데 기승전결의 구조를 따르며 한번 쓰이면 몇번을 다시 읽어도 내용을 바꿀 수 없는 소설은 고정되기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의 결말은 생명체의 죽음과 같다. 그래서 끝나지 않는, 구조적으로 끝을 거부하는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펜은 칼을 다시 한번 성공적으로 계승한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의 서두에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 중 먼저 언급되는 남자는 “세 번째 남자”로, 다음 남자는 “두 번째 남자”(9면)로 지칭된다. “첫 번째 남자”(25면)는 두 남자가 죽은 다음에야 그들의 시체를 찾으러 온 경찰들에 의해 용의자로 발견된다. 이 이야기는 중간에서 시작하고 끝나지 않는다. 이때 과거의 업보로 인해 죽음에게 심판당하는 남자들을 이름이나 직책으로 부르는 대신 번호 매겨 부르는 데에는 이야기의 시간과 앞뒤를 꼬아놓는 효과 외에도 그들의 인간성을 빼앗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첫번째 남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온 경찰관이 과거 남자들과 한패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네 번째 남자”(29면)로 격하되는 것이 그 증거이다. 네 번째 남자 역시 두번째와 세번째 남자와 마찬가지로 복수를 당하는데, 그의 최후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네 번째 남자의 잘린 머리통이 창밖을 떠돈다. 허공에는 길이 없다. 그러므로 출구도 없다. 네 번째 남자의 잘린 머리통은 버려진 몸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그 캄캄한 허공을 떠나지 못 할 것이다.”(31면)

해방으로서의 죽음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감금과 죽음 사이 발화의 기회 역시 놓친 채 죽은 상태로 영원히 갇힌 네번째 남자는 정보라의 문학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처리당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앞서 살펴보았듯 “첫 번째 남자는 죽지 않는다.”(같은 면) 그래서 이 이야기 역시 마지막 장에서도 죽음이라는 결말의 구원을 맞지 못한다. 즉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에서 정보라는 글을 쓰되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그러나 사건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라는 명백한 목표를 설정하여 차별점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열린 결말’이 그 자체로 새로운 기법은 아니며, 소설이 첫번째 남자의 끝을 보여주지 않고 끝나기는 해도 “남자들에게는 평화도 안식도 없을 것”(32면)이라고 못 박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일반적인 열린 결말로 해석할 수 있는지도 미지수이다. 한편 「차가운 손가락」의 경우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같은 목표를 달성하고 있다.

「차가운 손가락」(『저주토끼』)에서 여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그저 자신을 친근하게 인도하는 목소리에만 의지한 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푹푹 꺼지는 땅을 한 걸음씩 밟으며 알 수 없는 곳으로”(75면) 나아간다. 목소리는 여자가 잃어버린 반지를 찾아주고, 여자의 손을 잡아주고, 함께 이곳에서 나가자며 여자를 이끈다. 역시 여자는 갇혀 있는 상태로, 기억과 인지조차 흐릿해진 상태로 혼란에 빠져 있다. 그러나 목소리는 자신들이 왜 이곳에 갇히게 되었는지에 대해, 함께 일하던 최선생님이 결혼 후 “신랑 따라 지방으로 내려가셔서, 집들이에 초대받아서”(78면) 다녀오는 길이었다, 최선생님이 “이혼하고 혼자 지방 내려가버려서, 자취방 집들이 겸 위로하려고”(82면) 찾아간 것이었다, 최선생님이 “고작 짝사랑하던 남자 때문에 자살해”(84면)버려서 장례식에 다녀왔다 등 말을 바꾸며 여자의 혼란을 가중한다. 목소리의 조롱에 가까운 말의 번복은 그밖에는 믿을 것이 없었던 여자에게 “짧지만 두꺼웠던 신뢰감이 쭉 찢어지는 통증과 그만큼의 공포감”(85면)을 준다.

 

그녀는 안간힘을 쓴다. 오른팔은 바퀴 아래 눌렸다. 간신히 왼손이 빠져나 온다. 차의 범퍼를 잡는다. 차 아래 깔린 몸을 빼내기 위해 그녀는 왼팔에 온 힘을 싣는다.

갑자기 왼손에 차가운 손가락이 닿는다. 그녀는 손을 움츠린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차가운 손가락은 그녀의 왼손 넷째 손가락에서 둥글고 딱딱하고 매끄러운 반지, 그녀의 반지를 빼낸다.(88~89면)

 

목소리로부터 도망치려던 여자는 물컹한 땅속으로 잠기고, 시공간이 접히며 소설의 전반부에서 과거의 자신이 목소리와 나누던 대화를 듣는다. 목소리는 죽어가는 여자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에게 돌려주고, 반지를 매개로 결말이 시작을 물어 원을 만든다. 이를 통해 갇힌 여자가 반지를 받고, 목소리를 신뢰하고, 배신당하고, 죽어가며 반지를 빼앗기는 일련의 흐름이 계속 이어지리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은 소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저는 두 번 읽어서 결말 부분이 앞으로 밀려와 다시 서사가 한 바퀴 돌아가기 전에는 이야기를 다 읽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6 그러나 「차가운 손가락」의 경우 결말이 앞으로 밀려오는 형식을 내부에 이미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차가운 손가락」에서 이야기는 고정되기를 성공적으로 피한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의 시공간을 뒤틀어 시작과 끝이 손을 잡도록 하는 것은 마치 결말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효과적인 눈속임이다. “잘못 들으셨을 거예요. 여긴 우리 둘뿐이에요”(74, 89면)라는 대사는 작중에 두번 등장하지만, 이 대사를 말한 횟수는 한번이라고도, 두번이라고도 할 수 없다. 이때 이야기는 입자로 박제되어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파동으로 매개되는 것 같다. 감금당한 사건은 생명력을 부여받고 기승전결의 규칙에 예외를 만들어 밖으로 나오고자 한다. 정보라는 스스로 움직이고, 적어도 읽는 사람의 의식 안에서는 변하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5. 사람과 사건: 읽고 쓰기의 새로운 가능성

 

「덫」에서 착취자가 피착취자를 다루는 방법, 즉 감금은 정보라가 경험을 가두기 위해 선택한 작법이다. 「덫」을 통해 ‘갇힘’의 이미지와 현대의 사회 문제를 은유적으로 연결한 정보라는 「금」에서 한층 더 정교한 감옥을 만들어내고, 다른 사람이 갇힌 사람을 꺼내줄 수도 있다는 단서를 달아놓는다. 「물」에서는 언어의 섬세하게 계산된 사용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언어작용의 닫힌 우주’가 돋보인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부터는 이야기의 질서를 파괴하고 갇힌 사건에 혼을 불어넣고자 하는 실험정신이 느껴지며, 이 새로운 문학적 시도는 「차가운 손가락」의 독특한 원형구조도 빼어난 성과를 보인다. 정보라의 소설은 죽지 못하고 갇힌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그 이야기 역시 죽이지 않고 가두고 있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한다. 뛰어난 기교를 통해 효과적으로 공포심을 자아내고 있는 정보라의 단편들은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에 직면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재회」(『저주 토끼』)는 그 의미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노인은 내 왼쪽에서 나타나서 내 오른쪽을 향해 걸었다. 다리를 절름거리며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여서 오른쪽의 큰길을 건너 골목 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내 왼쪽의 정확히 똑같은 위치에서 다시 나타나서 내 오른쪽을 향해 걸었다. 다리를 절름거리며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직선으로 움직여서 오른쪽의 큰길을 건너 골목 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노인은 다시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내 왼쪽의 정확히 똑같은 위치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 광장은 넓었다. 노인의 불편한 다리와 불안정한 걸음으로 내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광장의 남쪽 면을 가로지르는 데 15분에서 20분은 걸렸다. 내가 모르는 뒷골목을 통해 질러갔다고 해도 어쨌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가는 데 20분이 걸렸다면 원점으로 돌아오는 데도 20분이 걸려야 했다. 그런데 노인은 내 앞에서 직선으로 움직여 사라졌다가 5분이 되지 않아 똑같은 장소에서 또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다리를 절름거리며 무서운 속도로 또다시 똑같은 구간을 걸어가는 것이다. 한 방향으로, 되풀이해서.(326~27면)

 

「재회」는 트라우마에 관한 소설이다. 작중인물들은 유령 노인처럼 자신의 트라우마에 갇혀 똑같은 행동 혹은 생각을 ‘한 방향으로 되풀이’한다. ‘나’가 유학길에 만난 폴란드 남자는 나치 강제노동 수용소 생존자였던 자신의 할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며, 수용소의 트라우마로 생긴 그의 강박적인 생활습관을 이렇게 설명한다. “할아버지는 이미 지나간 전쟁을, 이미 사라져버린 수용소를 평생 두려워하면서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수용소 안에서 살고 있었던 거야. 할아버지는 죽고 난 뒤에야 정말로 자유롭게 자기 도시의 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됐어.”(339~40면) 폴란드 남자 역시 유년기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나’도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앞에서는 정보라의 소설 속 반복해서 등장하는 감금의 테마를 현대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은유로 이해했지만, 이는 동시에 지극히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고통의 표상일 수도 있다. 사회와 개인이 연결되어 있는 한 두 문제는 떼어놓을 수 없다.

그래서 재난문학에 관한 이론을 「재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 오까 마리(岡真理)는 재난문학이 충족해야 하는 윤리적 기준의 일환으로 “인간이 결코 길들일 수도, 영유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 그 기억을 말함으로써 ‘사건’을 사건의 표상 불가능한 잉여, 암흑의 심연과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7 인간이 서사를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층위로 끌어내려 함부로 영유하는 것이 어떤 말로도 다 포착할 수 없는 고통에의 기만이라면, 이야기는 더더욱 정식화된 시작과 끝을 거부하며, 하지만 산산이 흩어져 잊히는 것 역시 피하며 차선책으로 죽지 않고 갇혀 있기를 택할 수밖에 없다. 정보라는 죽지 않기 위해 갇힌 사람들, 또 그러한 방식으로밖에는 말해질 수 없는 사건들을 다룬다. 그리고 이때 요청되는 것이 갇힌 자를 꺼내줄 틈으로서의 독자다.

모든 픽션이 조금씩은 읽고 쓰는 것에 대한 메타픽션이라면, 이야기에는 작가뿐 아니라 독자를 위한 자리도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앞서 「금」은 감옥 안으로 손을 뻗은 타인이 감금의 상황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재회」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이제 내가 기다릴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 욕실에 서 있었다. 누군가 기적처럼 찾아와서 이 삶에 묶인 나를 풀어주기를 기다리며.”(353면) 이때 ‘누군가’라는 부정칭은 분명 독자를 위한 빈칸이고, 정보라는 독자가 등장인물을 풀어줄 수 있다고 말하는 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 반대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방식을 통해서,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 제각각 고군분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저주 토끼』, 초판 ‘작가의 말’, 326면)는 말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정보라 소설의 핵심가치는 환상문학으로서의 공포나 실험적 구조를 통한 신선함이 아니다. 전부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쓰기를 통해 죽이지 않고 포착하고, 갇혀 있는 사건을 읽기를 통해 외면하지 않고 풀어줄 수 있다는 읽고 쓰기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심사평

 

올해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에는 총 48편의 작품이 응모되었다. 지난해에 비해 응모작이 두배 이상 증가하였다. 근래 한국문학과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적인 주목과 더불어 비평과 창작에 대한 글쓰기의 관심과 열기도 뜨거워졌음을 실감했다. 이번에는 생태, 포스트휴먼과 퀴어 담론 등 최근 비평에서 주목하는 이론들을 참고하여 동시대의 첨예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글들이 많았다. 특히 ‘죽음’ ‘멸종’ ‘멸망’을 다룬 작품들에 대한 비평적 주목이 눈에 띄었다. 이는 인류세를 사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행성적 감각이자 가속화된 자본주의의 욕망이 가닿을 곳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가왔다.

「사랑의 용불용설: 함께 멸망하는 우리에게—성해나, 김기태, 공현진의 소설을 중심으로」는 최근 소설들에 나타난 파국과 종말에 대한 시대감각을 짚은 글이다. 멸망, 책임, 사랑이라는 삼각구도를 통해 작품들을 일관된 논리 속에 아우르려는 비평적 의욕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비평이 텍스트에서 부분들을 모으고 누비기 위해서는 작품들의 차이를 자상하게 감식하고 분별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글에서는 공멸을 전제한 시대 논의가 작품에 선행하여 과도한 틀로 놓여 있는 점이 무엇보다도 아쉬웠다.

「자본주의적 소비의 (불)가능성: 성해나와 성혜령의 작품을 통해서」는 최근 소설들에 나타난 죽음과 모럴의 형상화를 통해 자본주의적 욕망의 구조가 어떻게 주체의 정체성에 관계되는가를 살피는 시도가 주목된다. 그러나 소비주체의 욕망이라는 틀을 다소 도식적으로 설정하고 작품 해석에 대입하다보니 두 작품이 품은 풍부한 개성과 상징 역시 단정적인 결론 속에 수렴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멸하며 탄생한 사랑의 언어: 유선혜의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읽기」는 작품에 대한 섬세한 읽기가 돋보이는 글이다. 시에 드러난 ‘구멍’의 형상이 도약을 위한 일종의 웜홀임을 읽어내면서, 멸종과 사랑을 바꿔서 읽는 사유의 전환이 지니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밝히고 있다. 비평문이면서도 곳곳에 시적 장치를 설치해놓은 아름다운 글로 읽혔다. 아쉬운 것은 비평이 작품의 설계와 상징을 맴돌면서, 비약과 멸종, 사랑이라는 정해진 논의의 구도에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이다.평론을 읽는 즐거움은 비평가가 구사하는 논리의 도약과 활강, 비약과 분산과 집중, 착지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감금과 죽음 사이의 틈: 정보라식 읽고 쓰기」는 정보라 소설이 지닌 ‘여성 환상문학’의 특성과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비판이라는 주제를 의식하면서 개별 작품의 특징에 섬세하게 착목하고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다가왔다.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감금과 죽음을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은유로 읽는 논의구도도 인상적인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펜’과 ‘칼’을 유비하는 서두의 장치 덕분이다. ‘펜과 칼, 착취와 구원, 시간과 신체, 끝과 시작, 사람과 사건’이라는 소제목들도 정보라 소설의 역설적 장치와 세계관을 요령있게 요약한다. 그동안 장르소설이라는 범주가 정보라의 소설세계를 온전히 보지 못하게 하는 맹점을 품고 있었는데, 이 글은 작품의 실상에 주목하여 논의를 진행한 점이 돋보였다. 각 장의 키워드를 이정표 삼아 글을 맺고 푸는 솜씨도 좋다. 덕분에 차분한 이 비평에 입체적인 리듬감이 생겼다. 당선자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전하며 좋은 글을 계속 쓸 수 있기를 바란다. 비평에 관심을 갖고 소중한 글을 보내주신 응모자들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백지연 양윤의

 

 

당선소감

 

감사하게도 큰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미숙한 열정을 잃지 말고 앞으로 더 열심히 읽고 쓰라는 당부의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진심을 담아 쓴 글일수록 오히려 내가 말이 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없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비평이 창작과 분석 사이 회색지대에 놓여 있는 만큼 이 글을 쓰면서는 더욱 내 글이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지 끝없이 고민했습니다. 제가 계속 읽고 쓰는 이상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불안이겠지만, 정상적인 궤도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지 않도록 도와주는 이정표이자 매듭이 하나 생긴 듯해 그 사실이 무엇보다도 기쁩니다.

지난 학기에 들은 문학 수업에서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작품은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이고 작가는 건축물을 설계하듯이 소설의 구조를 만들기 때문에, 작품의 한 대목을 갖고 소설 자체를 뒤집으려고 하는 것은 작가가 문 하나를 열면 건물이 무너지도록 설계해놓았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의 문을 열면 건물이 무너져내리는 그 이미지에 매료되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사랑한 모든 글에 대해 각각을 무너뜨리는 열쇠를 찾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빚어주신 가족, 친구, 선생님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이야기에 대한 애정을 불어넣어 주신 부모님, 즐거운 대화로 제 세계를 넓혀준 친구들, 항상 응원해주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강아지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곽준서

 

 

  1. Albert Gelpi, “Emily Dickinson and the Deerslayer,” Sandra Gilbert and Susan Gubar eds.,Shakespeare’s sisters, Indiana University Press 1979, 122~34면;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다락방의 미친 여자』, 북하우스 2022, 90면에서 재인용.
  2. 같은 면
  3. 이 글은 정보라 소설집 『저주토끼』(아작 2017, 개정판 래빗홀 2023)에 수록된 「차가운 손가락」 「덫」 「재회」, 『아무도 모를 것이다』(퍼플레인 2023)에 수록된 「금」 「물」,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퍼플레인 2023)에 수록된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를 다룬다. 이하 각 책에서 인용시 본문에 면수만 표기한다(『저주토끼』 인용은 개정판 기준).
  4. 찰스 라이트 밀즈 『사회학적 상상력』, 강희경·이해찬 옮김, 돌베개 2004, 15면.
  5. 미셸 푸코 『거대한 낯섦』, 허경 옮김, 그린비 2023, 94면.
  6.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홍한별 옮김, 다산책방 2023, 128면.
  7. 오카 마리 『기억·서사』, 김병구 옮김, 교유서가 2024, 123면.

곽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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