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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과거가 오늘을 묻는 방식

 

기억을 돌보는 소설

 

 

한영인 韓永仁

문학평론가. 평론집 『갈라지는 욕망들』 등이 있음.

jwhyi@naver.com

 

 

1. 과거의 활용

 

세계를 ‘정글’로 인식하며 생존을 위한 모든 행동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생존주의1는 식민지배와 분단, 전쟁과 독재,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을 차례로 통과한 한국인의 심성구조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런 만큼 여러 문학작품에서 생존주의자의 초상을 만나는 일은 낯설지 않다. 정이현의 단편소설 「실패담 크루」(『노 피플 존』, 문학동네 2025)의 주인공 ‘나’에게도 그러한 면모가 어른거린다. 소설에는 초대받은 이들만 참여할 수 있는 사적 모임 ‘실패담 크루’ 안에서 ‘나’를 중심으로 길항하는 두개의 대립축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첫번째 대립축은 “누구나 선망할 만한”(25면) 부유한 삶을 사는 모임의 핵심멤버 ‘성지연’과 힘겹게 변호사가 되었으나 대형 로펌 취업에 실패하고 “소형 사무소”(21면)에서 일하는 ‘나’ 사이에 놓여 있다. 같은 모임 구성원이지만 성지연과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격차가 자리한다는 점에서 이 대립축은 수직적이다. 두번째 대립축은 ‘나’와 유튜브 크리에이터 ‘제리’ 사이에 놓이는데, 제리는 ‘나’와 마찬가지로 성지연의 추천으로 크루에 영입된 멤버이며 공교롭게 나이도 똑같다. 모임 내에서 막내의 입지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 대립축은 수평적이다.

소설의 매력은 수직적 대립축과 수평적 대립축을 능란하게 교차하면서 계층적 격차를 다룰 때 빠져들기 쉬운 상투적 구도에서 벗어나, 제시된 상황을 다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하는 데서 온다. 이 과정에서 강렬한 정동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은 단연 수평적 대립축이다. 수직적 대립축의 경우 권력의 차이가 압도적이어서 주인공이 대결의지를 품을 여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고 여기는 제리에게는 이례적일 정도로 공격적인 정동을 투사한다. 그를 보자마자 “이 작고 안온한 곳의 평화로운 질서와 균형을 산산이” 깨뜨리러 온 “상상도 못해본 종류의 포식자”(39면)로 의심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나’가 휩싸이는 본능적인 불안감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죽도록 노력”(44면)하며 살아온 생존주의자의 내면에 아로새겨진 깊은 상흔을 읽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이제껏 익숙했던 생존주의의 문법과 구별되는 흥미로운 지점이 존재한다. 생존투쟁의 성패를 가름하는 잣대가 “나라는 사람을 각인시킬 수 있는 서사”(33면)의 유무에 달려 있다는 설정이 그것이다. 돈이나 지식, 명예나 취향처럼 사회적 위계를 구분할 때 으레 동원되는 잣대가 아니라 과거의 삶을 재구성해 내놓는 이야기의 서사적 매력도에 따라 승패가 나뉘는 설정에 담긴 함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때 ‘실패담 크루’를 개인이 자신의 삶을 콘텐츠로 가공해 자원의 획득을 꾀하는 오늘날 현실을 은유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읽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실패담 크루’에서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자신의 실패담을 나눈다. 언뜻 그 모임의 외양은 자조(自助)모임과 유사해 보이지만, ‘실패담 크루’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성취를 내세울 만한 사람들 사이의 닫힌 모임이며, 거기서 이야기를 나누는 행위는 실패의 극복이나 회복 같은 실질적인 목표에 종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행위는 자신과 비슷한 계급적 위치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이는 지위경쟁에 더 가까운 면이 있다. 다른 멤버들에 비해 “사회적 자산, 경제적 능력, 문화적 자본”(25면) 모두 떨어지는 ‘나’가 그 격차를 만회하기 위해 압도적으로 매력적인 서사를 제공해야 한다는 부담에 사로잡히는 건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오늘날 이와 같은 ‘나’의 부담을 평범한 사람들도 공유하며 살아간다는 데 있다. 현대인은 평범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콘텐츠로 만들어 유통함으로써 성공을 거머쥘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새로운 시장의 위력을 마주하고 있다. ‘개인서사 시장’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 새로운 시장2에서 개인이 살아낸 삶의 시간은 그저 흘러간 죽은 시간이 아니라 채굴해서 가공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자원으로 간주된다. 「실패담 크루」에 등장하는 ‘나’의 정체 모를 불안과 초조감도 개인서사 시장의 위력을 간과하고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첫 실패담 발표 이후 ‘나’가 겪는 초조감은 시장에서 화폐와의 교환을 기다리는 상품이 품는 물신화된 불안과 정확하게 조응하는 듯하다.

개인서사 시장이 활성화되면 개인의 삶에도 크고 작은 압력이 가해진다. 이 시장은 각종 장치들을 동원하여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진실을 생산하고 그 진실을 사적 자원화하도록 조형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단지 자신의 진실을 고백하고 스스로 이야기해야 하는 의무만 지는 것만이 아니라 그 고백된 진실을 상징적·금전적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크리에이터’”3로 변모할 것을 요구받게 된다. 물론 개인서사 시장도 주식시장이나 부동산시장과 같은 시장의 하나라면 거기 뛰어들 것인지 여부는 온전히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선택의 자유가 그 시장의 위력으로부터의 자유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주식시장이 불타오르면 그간 성실하게 저축만 해왔던 사람들의 입맛이 써지고 부동산시장이 폭등하면 부동산 투기에 관심없이 살아온 사람일수록 졸지에 ‘벼락거지’가 되어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개인서사 시장은 거기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사람을 포함하며 배제할 수 있듯이 거기에 눈을 감고 거리를 두며 살아가려는 사람을 배제하며 포함시킬 수 있다. 이같은 시장에 의해 나날이 식민화되는 우리의 생활세계와 그에 비례해 커져만 가는 개인적 성공의 환상을 고려한다면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도 그리 많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개인서사 시장도 시장인 한 경쟁에 따른 승자와 패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는 냉혹함을 품고 있다는 것이 「실패담 크루」의 전언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그 시장에서 패배하고 ‘실패담 크루’로부터도 배제된다. 그런데 제리의 직업이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소개된 순간 ‘나’의 패배는 일찍부터 예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가 개인서사 시장에 처음 뛰어든 순진한 아마추어라면 제리는 그 바닥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한 프로이기 때문이다. 그런 제리에게 자신이 겪은 실패의 경험은 “역사, 심리, 예술 같은 주제”(40면)와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콘텐츠 자원에 불과할 것이다. 과거의 실패 경험이 여전히 유령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는(“실패한 미아답게 나는 길 잃어버리기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45면) ‘나’와 달리 제리에게는 지난 실패가 현재의 삶에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그 사실을 제리가 ‘실패담 크루’를 소재로 업로드한 유튜브 영상을 본 뒤에야 깨닫게 되었고 그 즉시 무언가 질려버린 기분으로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하게 된다.

 

 

2. 재현의 윤리에서 재현의 경제로

 

이처럼 「실패담 크루」의 현실비판적 면모는 개인의 내밀한 자기고백을 유무형의 경제적 이익과 연루시키는 오늘날의 세태가 개인에게 미치는 압력을 의식할 때 더욱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런데 개인서사 시장이라는 용어는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거기서는 개인이 일상에서 취한 사소하고 작은 이야기들이 민족이나 국가, 계급과 같은 이야기보다 더 큰 교환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오해 말이다. 하지만 역사적 시공간으로부터 탈각된 개인의 서사는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가능하다 해도 맥락 없는 독백에 불과할 것이기에 시장에서 상품으로서 매력을 갖기 어렵다. 따라서 개인서사 시장은 단지 개인이 살아온 삶의 경험을 단독적으로 승인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경험을 공동체의 역사적 경험과 접속시킬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이는 이 시장에서 정체성이 갖는 경제적 위상의 문제와도 밀접하다.

R. F. 쿠앙(Rebecca F. Kuang)의 『옐로페이스』(신혜연 옮김, 문학사상 2024)는 미국 출판계를 배경으로 다양성이라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구호 아래 작가의 인종적 정체성이 상품화되는 메커니즘을 스릴러와 블랙코미디를 혼합한 형식으로 몰입감 있게 풀어낸 장편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준 헤이워드’는 필라델피아 출신 백인 여성으로 예일대를 졸업한 소설가다. 어렸을 때부터 작가를 꿈꿨던 준은 마침내 첫 소설을 발표하며 꿈을 이루지만 평단과 시장의 차가운 반응 앞에 좌절하고 만다. 반면 준의 예일대 동창이자 중국계 미국인 소설가인 ‘아테나’는 출판계의 스타로 군림하고 있다. 준은 아테나의 뛰어난 글솜씨를 인정하지만 “아테나의 인기몰이는 명백히 그녀의 글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녀 자체’로 인한 것이”(12면)며 그녀의 성공 역시 업계의 실세들이 “묘한 매력을 가진 유색인종 여성 아테나를 선택”한 결과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자기처럼 “그저 갈색 눈,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평범한 필라델피아 출신 여자애”는, 인종적 정체성이 곧 문학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듯 하나의 브랜드 자본이 되는 출판계에서 “아무리 열심히 쓰고 아무리 잘 써도” “결코 아테나 리우가 될 수 없”(13~14면)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준에게 커다란 인기와 성공을 거머쥘 수 있는 기회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찾아온다. 아테나의 넷플릭스 계약을 축하하며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중 팬케이크가 기도에 걸린 아테나가 그만 질식사하고 만 것이다. 준은 정신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아테나의 책상에서 봐두었던 소설 초고를 훔쳐 집으로 돌아왔고 몇달에 걸쳐 정성스레 개고한 뒤 『최후의 전선』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에 의해 모집되어 연합군 전선에 보내졌던 14만 중국인 노동자 부대의 알려지지 않은 공헌과 경험을 다룬 그 소설은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큰 성공을 거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백인 여성인 준이 알려지지 않은 중국인의 역사를 소재로 글을 썼다며 공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느 독립서점에서 열린 역사소설 발표회에 참석한 준은 그곳에서 한 소녀로부터 다음과 같은 힐난 섞인 질문을 받는다. “저는 중국계 미국인입니다. 『최후의 전선』을 읽었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음, 아주 고통스러운 역사를 많이 알게 됐어요. 그래서 묻고 싶었습니다. 왜 백인 작가가, 그러니까 중국인이 아닌 작가가 이런 얘기를 써서, 그걸로 이익을 얻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지를요.”(150면) 소설은 이 대목 뒤에 “고통을 쓸 권리는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153면)라는 질문과 함께 아테나가 한국전쟁 관련 전시를 관람하다가 만난 노인에게서 참전 경험담을 게걸스럽게 캐냈던 일화를 덧붙인다. 나중에 아테나는 그날 전시회에서 보고 들은 얘기로 「압록강의 속삭임」이라는 작품을 써서 상을 받게 되는데, 이를 두고 준은 “고통은 그저 그녀를 부자로 만들어주는 수단에 불과했다”(158면)고 꼬집는다.

아테나에 대한 준의 비난과 준에 대한 중국계 미국인 소녀의 비난은 역사적 상흔을 재현하는 사람의 윤리와 그것으로 돈을 버는 행태의 윤리를 동일선상에 자연스럽게 포개어놓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대상을 대하는 재현 주체의 입장과 태도를 심문하는 일은 ‘재현의 윤리’에 관한 고전적인 탐구의 세목을 이루지만, 재현의 윤리를 논하는 과정에서 재현 주체가 벌어들인 유무형의 이익을 함께 언급하는 일은 개인서사 시장이 보편화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현상처럼 보인다. 가령 영화와 소설, 신문기사와 TV 다큐멘터리를 비롯해 다양한 서사물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재현의 윤리를 심문하는 오까 마리(岡真理)의 『기억·서사』(김병구 옮김, 교유서가 2024)에는 ‘돈’이나 ‘경제적 이익’에 대한 언급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1993)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를 집요하게 분석하고 비판할 때조차, 스필버그가 그 영화로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을 언급하는 것은 재현의 윤리를 탐구하는 글에 대한 모독이라도 된다는 듯 그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 (상징자본을 포함한) 경제적 이익의 수취 여부는 재현의 윤리에 관한 핵심적인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서사의 내재적 흠결보다 그 서사를 통해 작가가 경제적 이익과 상징자본을 수취했다는 사실이 더욱 강한 도덕적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개인서사 시장이 지배력을 강화해나갈수록 재현의 윤리는 ‘재현의 정의’와 포개지며 그때 경제적 이익은 정의와 부정의를 가늠하는 유력한 기준이 된다. 이렇듯 내적으로 완결된 서사에 대한 분석보다 그 서사를 창작한 사람의 개인적 정체성이 중요해지는 곳에서는 준이 말하듯 “이제 내 글이 아니라, 내가 상품이 된다.”(352면)

이 과정에서 정체성은 ‘차이의 정치’를 넘어 ‘차이의 경제’의 핵심적인 요소로 등극한다. 준은 자신이 멘토를 맡은 한국계 미국인 소녀 ‘에미’가 쓴 “1990년대 미국 중서부에서 성장한 한국계 미국인 동성애자 소녀의 성장소설”을 읽고 어딘지 의기소침해 보이는 에미를 격려하며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지금은 오히려 아시아계인 게 더 좋아.” “다양성이야말로 지금 제일 잘 팔리는 주제야. 편집자들은 소외된 목소리를 몹시 갈망하고 있거든. 남과 다르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기회를 얻게 될 거야. 에미, 무슨 뜻이냐면, 동성애자인 아시아계 여성? 그건 출판계가 원하는 모든 조건에 들어맞는다는 거야. 다들 네 원고를 보면 군침을 흘릴걸.”(137면)4 개인서사 시장에서 개인은 구체적인 정체성의 표상으로 존재하기에 개인의 상품화는 정체성의 상품화와 맞물린다. 이때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생산하고 보증하는 배후의 공동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개인서사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개인의 정체성과 맞닿은 공동체의 역사적 기억을 자신의 내부로 끌어오려는 유혹은 이와 같은 조건에서 발생한다. 그 유혹은 이따금 공동체가 겪은 사건과 상흔을 개인의 성공을 위해 착취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곤 한다.

이미상의 소설 『셀붕이의 도』(위즈덤하우스 2025)에 등장하는 ‘미히’는 개인서사 시장에 뛰어든 주체가 성공을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공동체의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착취하려 드는지를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미히는 소설의 주인공 ‘중수’의 사촌누나로 미국에서 공부하다 돌아와 현재 중수와 함께 할머니 ‘활녀’를 돌보고 있다. 지극한 효심 때문은 아니고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살던 활녀가 월 450만원을 들여 중년의 남자를 요양보호사로 들이자, 유산이 축나는 게 아까웠던 활녀의 두 딸이 요양보호사를 내쫓기 위해 각자의 자녀들을 활녀에게 붙여버린 것이다. 애초에 할머니를 돌볼 마음이 크지 않았던 두 사람이 하는 일이라곤 할아버지가 남긴 양주를 야금야금 훔쳐 먹으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다. 그러던 중 중수는 미히에게 몇년 전 갑자기 할아버지를 돌보겠다며 귀국했다가 사흘 만에 할아버지에게 의절당하게 된 이유를 묻고, 미히는 한탄 섞인 긴 이야기를 쏟아놓기 시작한다.

미히의 이야기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어느 한국인 설치미술가의 작품에서 출발한다. 그건 「Only Koreans, 침을 놓으세요, 당신의 조상께」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한의원에서 사용하는 경혈도 인체모형을 아주 크게 확대해놓고 침자리마다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비극을 상기하는 연도와 지명을 적어넣었다고 한다. 그 옆에 놓인 침통엔 사람 다리 길이만 한 침이 들어 있어서 관람객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그 침을 직접 꽂을 수 있는데, 이는 오직 한국인 관람객에게만 허락된 특전이다. 미히에 따르면 그 작가는 한국에 사는 친척들에게, 심지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시골의 큰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서 역사적 상흔 좀 달라고” 졸라서 그 수많은 침자리를 완성했다고 한다. “다음 중 겪으신 것이 있으실까요? 분단과 전쟁과 학살과 항쟁과 참전 중에서. 6·25, 있으세요? 4·19, 있으세요? 이산가족 상봉, 있으실까요? 베트남전쟁, 있으세요?”(53면) 작가는 이런 매뉴얼을 만들어 일가친척을 집요하게 추궁한 끝에 존재조차 몰랐던 큰할아버지로부터 마침내 전쟁포로 때 겪었던 일을 떠올리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댓가로 작가의 큰할아버지는 “나일론 끈으로 머리통을 꽉 죄곤 목구멍으로 뇌를 토해낼 때까지 잡아당기는 것 같”(55면)은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미히는 무명의 작가가 한국의 “친척들에게 연락을 돌려 얻은 역사적 상흔”(56면)을 총동원해서 만든 작품이 큰 성공을 거두자 미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인생을 역전하려고” 소설을 쓰는 일이 대유행이 되었다고 말한다. “비극적인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소설이 잠시 잠깐 진하게 유행이라”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참신한 고통의 세부를 건지”기 위해 “다들 한국에 있는 친척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바쁘다는 것이다(57면). 미히는 자신도 바로 그 루트를 타려 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미히가 할아버지로부터 의절당한 이유도 할아버지의 월남전 무공담을 시도 때도 없이 집요하게 캐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히는 월남전에 대한 구체적인 디테일을 들려주지 않고 사망한 할아버지가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왜 안 주고 가셨을까. 그 많은 희소한 이야기를 할아버지는 왜 사랑하는 손녀에게 마지막 선물로 주고 가지 않으셨을까. (…) 자신이 쓸 것도 아니면서 (…) 어차피 곧 돌아가실 텐데.”(60면) 소설은 미히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중얼대는 장면으로 끝난다. “아니요, 아니요, 그거 말고요, 그것으로는 부족해요, 더 옛날이야기를 해주세요, 더 아픈 이야기를 해주세요, 특수를 거쳐 보편으로 가주세요.”(87면)

이 중얼거림은 개인서사 시장이 개인을 넘어 공동체의 역사를 착취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그런데 왜 ‘보편’일까? 개인서사 시장을 추동하는 ‘개인서사’가 보편을 자임하는 거대서사에 대항해 나타났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미히가 품는 보편을 향한 욕망은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히가 공동체의 역사적 기억을 개인적 이익을 위해 서사적으로 가공한 뒤 판매하려 든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그 보편에의 욕망은 어느정도 수긍이 가기도 한다. 개인서사 시장에서 역사와 기억은 먼저 특수한 정체성을 드러냄으로써 매력을 어필해야 하지만 그보다 큰 교환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보편성을 지닌 일반적 등가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3. 기억의 돌봄

 

『옐로페이스』와 『셀붕이의 도』를 나란히 놓고 읽으면 오늘날 개인서사 시장에서 서사 윤리가 처한 파탄의 위기가 분명하게 드러난다.5 『셀붕이의 도』의 미히는 조부모를 돌볼 마음이 전혀 없으면서도 돌봄을 빙자해 그들이 살아낸 삶의 기억을 착취하려 든다. 하지만 그건 조부모에 대한 돌봄이 아닌 것을 넘어 그들이 품고 있는 기억에 대한 돌봄도 아니다. 흔히 돌봄 하면 취약한 육체와 정신에 대한 보살핌을 떠올리지만, 개인과 공동체가 간직해온 과거에 대한 기억 또한 돌봄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와 연루된 타인의 기억을 돌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며 소설은 그 돌봄을 어떤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을까? 박솔뫼의 단편소설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영릉에서』, 민음사 2025)는 독자를 멈춰 세워 이런 물음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궁리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액자형식을 취하고 있다. 액자 안 이야기는 중학교 1학년 학생인 ‘원준’과 ‘정목’ 그리고 정목의 아버지가 함께 계곡으로 낚시를 떠난 어느 초여름날의 하루를 그리고 있다. 원준은 정목과 함께 정목의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계곡으로 낚시를 떠난다. 하지만 원준과 정목이 잠시 계곡에서 노는 동안 정목의 아버지가 차를 몰고 돌아가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알고 보니 “듣는 것과 말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11면)던 정목의 아버지는 이따금 “급한 일이나 할 일이 생각날 때면” “사람들을 붙잡고 종이에 쓰거나 수화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 전에”(17면) 먼저 가버리곤 했던 것이다. 둘은 계곡을 나와 영릉까지 가는 차를 히치하이킹으로 잡아탔지만 정목은 가는 도중에 차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간다. 원준은 영릉에 도착해 조금 더 걷다 해장국집 앞에 앉아 잠깐 졸고, 해장국집 아주머니가 가게 안으로 불러들여 건넨 시원한 물을 얻어 마신 뒤 집으로 돌아간다.

그날 원준과 정목을 감싸고 있던 풀과 물, 햇살과 바람 같은 것들이 감각적이고 환상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이 이야기 안에 특별히 ‘소설적’이라고 할 만한 서사적 요소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거기서는 구름과 햇빛, 개미와 벌레는 물론이고 원준과 정목마저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은 모두 서사적 갈등과 무관하며 자연화된 풍경의 조각을 이룰 뿐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감싸는 액자가 등장하는 순간 ‘소설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이제까지 독자가 따라 읽은 어느 초여름날 하루의 무심한 풍경과도 같은 이야기가, 이십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 원준으로부터 그날의 이야기를 듣게 된 화자가 재구성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액자 안의 이야기는 원준의 것도 정목의 것도 아니며 전지적 서술자의 것도 아닌 셈이다. 그렇다고 관찰자의 것이라고 보기도 어려운데, 왜냐하면 그 이야기의 서술자는 원준에게 들은 이야기를 단순히 글로 옮겨 적은 게 아니라 그 기억을 자신의 상상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계곡을 향해 걷는 원준이와 정목이 정목이 아버지. 정목이 아버지가 먼저 성큼성큼 계곡을 향해 걸었다. 그 뒤를 정목이와 원준이가 따라 올라가고 나는 그 뒤를 따라서 천천히 쏟아지는 녹색 속으로 물소리, 나무와 바람 속으로 걸었다. 풀 냄새와 나무 냄새가 나는 그것이 정말 좋았다. 나는 그곳을 여러 번 따라 올라간다. 물소리와 나무 냄새로 가득하고 나는 바위 위에 누워서 그것을 듣다가 눈을 감고 나를 따라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려 하지만 물소리는 쏟아지고 감은 눈으로도 선명한 햇볕은 알아차릴 수 있고(34~35면)

 

이 이야기 속에는 ‘나’라는 화자가 등장하지만 이십여년 전 계곡에 ‘나’는 당연히 함께하지 않았다. 원준과 정목의 기억 어느 곳에도 ‘나’의 자리와 흔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는 ‘나’가 되짚는 기억의 회상 속에서만 원준과 정목이 함께 나누었던 그날의 풍경을 감각할 수 있다. 그 풍경에는 풀 냄새와 나무 냄새, 물소리, 선명한 햇볕이 싱그럽게 찬란하다. 초여름이라는 계절과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소년이 지니는 생명력이 자연스럽게 결합하면서 그날의 기억을 상쾌하게 물들인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찬란하고 해맑은 동시에 몹시 슬픈 것은 정목이 고등학생 때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이 액자 밖에서 암시되기 때문이다. 정목의 죽음을 암시하는 대목은 단 한문장뿐이지만 그 한 문장이 앞선 이야기의 무구한 찬란함과 대비되면서 삶과 기억 안에 깊은 음영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독자는 의아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어떤 식으로든 정목의 죽음을 대면할 수밖에 없는 그날의 기억을 화자는 왜 원준에게 거듭 청해 듣는 걸까? “풀 냄새와 나무 냄새가 나는 그것이 정말 좋았다”라는 설명이 제시되어 있지만 그것만으로 화자가 그 이야기로 자꾸 되돌아가는 이유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화자는 짐짓 모르는 척하지만 그 푸르고 맑은 이야기 뒤에 어른거리는 정목의 죽음은 화자가 반복해서 각인시키는 선명하고 맑은 색채와 무구하고 평온한 풍경을 중력처럼 떠받치고 있다. 풀 냄새와 나무 냄새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고 어쩌면 화자는 정목의 죽음을 독자에게 대면시키기 위해 그날의 기억으로 자꾸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만약 이 소설에서 정목의 죽음을 애도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화자라기보다는 원준일 것이다. 하지만 원준의 태도에서 정목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색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원준에게 정목은 평생 기억에 남을 만큼 친한 친구는 아니었으며 그나마도 정목이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인천으로 이사를 가면서 소원해진 관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심상한 태도는 화자에게도 발견된다. 언뜻 화자는 자신이 만든 상쾌한 풍경을 그저 탐닉할 뿐인 것 같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이 애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소설 밖 독자까지 애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면밀하게 계산된 무관심 속에서 독자는 그날 계곡을 감싸던 선명한 햇볕만큼이나 죽은 정목과 아들을 잃고 어떤 말로도 슬픔을 표현하지 못했을 정목 아버지의 남겨진 뒷모습을 오래 상상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독자가 수행하는 애도는 화자가 계속해서 그날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자신을 그 기억 안에 나란히 세움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 과정에서 개인서사 시장이 창출한 새로운 소유권 개념인 ‘자기서사 편집권’의 권리 주장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화자가 건네는 액자 안 이야기의 소유권을 따지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 이야기는 화자에게 자신의 경험을 말해준 원준의 것인가, 아니면 지금은 죽고 없지만 그날 함께 계곡에 놀러 간 정목의 것인가? 굳이 그 기억의 소유권을 따지자면 화자보다는 원준과 정목의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기억의 소유권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것인 양 마음껏 부풀린다. 이는 개인서사 시장에서 왕왕 일어나는 타인의 기억을 제멋대로 채굴하거나 착취하는 행위와 다르다. 착취된 기억은 재현 주체를 부풀리고 대상을 삭제하지만 여기서 화자는 스스로 창발한 새로운 기억 속에 풍경처럼 조용히 서서 불어오는 바람 너머로 흔들리듯 사라지며, 죽은 정목의 뒷모습을 오래 남겨놓는다.

 

 

4. 연루와 개방

 

개인서사 시장이 우리 앞에 훌쩍 도래한 오늘날 소설을 쓰고 읽는 일은 개인과 집단의 체험과 기억을 상품화하는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모두 상품화시켜 유통할 수 있을 만큼 개인서사 시장이 전능한 것은 아니며,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개인서사 시장 안에서 생산하고 유통한다고 해서 그 가치가 모두 변색되는 것도 아니다. 개인서사 시장의 동학과 그 안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는 글의 가치를 구별해서 알아보는 섬세한 노력이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가설적 개념인 ‘개인서사 시장’이라는 용어를 이 글에서 지속적으로 사용한 건 그 시장의 흐름을 타고 유통되는 글을 도매금으로 격하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늘날 개인의 발화와 글쓰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물질적 조건을 상기하기 위해서다. 개인서사 시장이 나날이 포섭력을 강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통과한 과거의 경험과 기억은 일종의 ‘공유지의 비극’을 초래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주권적 자기 너머의 연루됨 자체로 우리를 데려”가는,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잠재성의 지대”6를 소설 안에 마련하고 그 잠재성을 역동적으로 독해하는 경험의 소중함은 더욱 커진다.

앞서 살펴본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뿐 아니라, 같은 소설집에 엮인 연작소설 「극동의 여자 친구들」과 「투 오브 어스」에 등장하는 ‘움직임 연구회’에서 수행되는 신체활동을 그 “잠재성의 지대”의 하나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에서 기억의 소유권은 교란되며 여름날 계곡 낚시의 경험은 그 경험과 전혀 무관한 화자에게까지 확장된다. 경험의 소유권은 과거의 어떤 일을 직접 겪은 신체를 전제한다. 하지만 ‘움직임 연구회’에서 강주가 보훈과 애리 등 다른 이와 몸을 맞대고 체험하는 다양한 몸짓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체의 움직임조차 개인이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며 그 이질성 속에서 개인의 신체는 타인의 몸짓과 한데 얽힐 수 있는 잠재성의 지대로 열리게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신체는 온전히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조작할 수 있는 ‘주권적 소유’의 영역처럼 여겨지지만 강주는 ‘움직임 연구회’에서 팔을 흔드는 작은 몸짓조차 “다른 사람의 팔이 함께 움직일 때 더욱 편해”(「투 오브 어스」 248면)지고 자연스러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강주는 낯선 사람과 신체적으로 얽히면서 끊임없이 연루되는데 이런 연루의 감각은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에서 화자가 원준의 기억을 기꺼이 자기 것으로 삼아 연루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타인과 연루되어 있다는 감각을 미시적인 신체의 차원에서 일깨우는 박솔뫼의 소설은 개인서사 시장의 파괴적 힘에 맞서 경험의 자기소유가 아닌 개방과 얽힘이 문학적 공동영역7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지켜갈 수 있는 작은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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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러한 생존주의의 원리에 대해서는 김홍중 「성찰적 노스탤지어」, 『사회와이론』 27집, 2015, 57면 참조.
  2. 이 글에서는 ‘개인서사 시장’을 잠정적으로 ‘한 개인의 고유한 생애 경험을 원료로 삼아 교환가치를 지닌 서사적 콘텐츠로 가공해내고 이를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유통함으로써 상징자본을 포함한 유무형의 자산을 축적하려는 새로운 가치경제체제’로 정의하고자 한다.
  3. 졸고 「자아 생산 장치로서의 에세이」,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217면.
  4. 물론 준의 말은 현실에 존재하는 경향의 일부를 과장하고 있을 뿐이다. 준이 말하고 있지 않은 ‘차이의 경제’의 실제 작동원리는 『최후의 전선』 보조편집자였다가 편집과정에서 준과 마찰을 빚어 해고된 뒤, SNS에 준이 아테나의 소설을 훔쳤다는 사실을 폭로하며 준을 협박한 한국계 미국인 ‘캔디스’의 분노에 찬 항변에서 신랄하게 드러난다. “기껏 책을 내놨는데 아시아인 작가는 이미 있다는 말을 듣는 게 어떤 건지 알아? 한 시즌에 두 개의 소수집단 이야기는 내놓을 수 없다는 말을 듣는 게 어떤 건지 아냐고. (…) 하지만 당신 말도 맞아. 가끔은 업계의 누군가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백인이 아닌 작가에게도 기회를 주지. 그런 다음 세상에 없던 유일한 다양성 작품인 양 그 책을 중심으로 온갖 축제를 벌여. 난 그 맞은편에 있으면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봤어.”(421~22면)
  5. 『옐로페이스』가 작가와 독자, 출판사와 편집자를 비롯한 다양한 행위 주체들을 통해 미국 출판계 내에 존재하는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면모를 사실주의적으로 부각하는 데 성공한 반면 『셀붕이의 도』에 등장하는 미히는 오늘날 세태를 투박하게 알레고리화한 인물에 가깝다. 그로 인해 작가가 겨냥하는 비판의 과녁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점은 있으나 공동체의 역사를 한 개인이 자신의 작업 안으로 들여오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논제를 다층적으로 살피기 어려워지는 한계가 존재한다.
  6. 김미정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318면.
  7. ‘문학적 공동영역’에 관해서는 황정아의 글 「문학성과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참조. 이 글에서 황정아는 소유권을 직접 겨냥하진 않지만 “‘인간적 세계’에서 무언가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근본적으로 질문하게 만드는 리비스(F. R. Reavis)의 커먼즈론을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재산에 대한 당당한 소유권”이 아니며, 반대로 우리가 그에 속해 있다는 “근본적이며 살아 있는 경의”를 의미한다. 이때 문학은 “협동적 창조를 통해 생성되며 그것을 통해 지속되고 또 ‘소유’”된다는 의미에서 커먼즈로서의 성격을 띠며, “문학에서 이런 ‘재-창조적인 반응’과 ‘만남’은 곧 비평적 판단 과정 그 자체”임을 강조한다(21~22면). 문학은 서로 연루하고 촉발하는 만남이 이룩하는 의미의 구축이자 가치의 창조일 때 성립하며, 그 창조의 성과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협동적 창조라는 존재방식을 통해 주체와 대상에 대한 통념을 어떻게 바꾸는지”(29면)를 제대로 살펴야 한다는 황정아의 논의는 배타적 소유권을 강화하고 나아가 신성화하는 오늘날 경향에 맞서 문학이 커먼즈임을 주장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과 한계를 돌아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