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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과거가 오늘을 묻는 방식

 

역사적 폭력 너머

허수경과 조정의 시에 나타난 생태 공동체

 

 

윤은성 尹銀晟

시인. 2017년 『문학과사회』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주소를 쥐고』 『유리 광장에서』 등이 있음.

yescjdms@naver.com

 

 

죽음들, 혹은 일상을 옥죄는 압력들을 떠올리다보면 여러 생각이 밀려온다. 타자의 죽음과 단절한 채 그저 나의 삶에만 몰두하며 살아갈 때가 있는가 하면, 세상의 기술은 끝을 모르게 발전해가는데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상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상황을 알리는 활동을 이어온 평화운동가 미니(안영민)님과 모임을 함께하며 중동 소식을 접할 기회가 자주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한국이 안전한 나라라고 느끼게 된다고, 한국으로 온 팔레스타인 친구들도 이 점에 놀란다고 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일상이 늘 죽음에 노출되어 있으니까. 긴장하며 생존하는 게 일상이니까. 적어도 한국에 그런 종류의 긴장은 없다. 물론 그것이 한국사회가 모순 없는 유토피아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저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이 전혀 다른 세계에 도착한 듯한 안전감을 느꼈으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잔존한 공동의 슬픔이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은 채 이어져온 폭력과 그에 따른 새로운 죽음의 소식들을 매일 듣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늘을 살아간다는 일의 기본조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애도의 마음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박탈감이 오래 남는다. 세상의 시간은 계속 흐른다. 주류적인 힘은 죽음들에 아랑곳없이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고, 이 흐름 속 개인들은 도태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지금 우리가 통과하는 시간에 관하여, 기이한 안전감 속에서 다시 묻게 된다.

 

 

슬픔 이후

 

죽음에 관하여 헤아리는 일은 우리가 남겨진 자들이라는 생각에 닿게 한다. 한국 근현대사를 내밀하게 또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 위해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를 때 생각난 시인이 허수경(1964~2018)이다. 허수경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그러나 자신의 시절까지 영향을 미쳐온 역사적 폭력을 읽어내고 타자의 고통에 연결되는 방식을 깊이있게 보여준 시인이다. 여섯권의 시집을 상재한 시인은 타자의 고통으로부터 흘러드는 슬픔을 받아들인 서정적 발화로서 역사 속 상흔에 대한 사유의 자리를 작품 속에 마련했다.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 모를 흔들 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허수경 「탈상(脫喪)」 전문

 

그의 첫 시집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초판 실천문학사 1988; 3판 실천문학사 2010)에서는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 속 고통의 시기들을 유독 구체적으로 다룬다. 이 시 「탈상」에는 “남녘땅 고추밭”이라는 시어가 쓰인다. 고인이 누구인지,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으나 이들이 실향민 가족은 아닐지 짐작해보는 일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 시에서 죽음은 일상 속 농사일의 풍경과 함께하니 전쟁은 이미 지나간 일이겠으나, 실향한 고인의 여한을 떠올릴 때 남겨진 이의 슬픔은 더욱 클 것 같다. 그런데 이 시에서 감정은 인물을 통해 토로되지 않는다. “슬픔”이 인물과 분리되어 “편편이 몸을 누”이며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될 때, 이 슬픔은 가두어지지 않고 풀려나간다. 감정을 느낄 주체와는 거리를 둔 채 범람하는 이 슬픔은, 동시에 남은 삶을 결속력 있게 단단히 묶어준다. 슬픔은 “거름”으로, 슬픔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되는 쪽으로 속성이 바뀐다.

당시의 슬픔이 거름이 되었다면, 지금 이곳에는 얼마나 많은 슬픔이 틈마다 누워 있는 것일까. 그 죽음이, 지금의 성장주의 사회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돌아보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 그러나 돌아보는 순간 그 슬픔의 내력에 우리가 연결되어 생존해 있음을 알아채게 하는, 그런 거름이다. 하지만 교차하는 공통의 아픔을 이해하고,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성이 현실적으로 발현되는 일은 쉽지 않다. 역시 첫 시집에 수록된 「우리들은 지방도시 근교에서 살고」가 제기하는 장소성에 관한 문제는 지금까지도 의미심장하다.

 

지방도시 근교에는 비닐 하우스마다 한 개씩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황화철로 삭아내리는 강과 공장과 사람은 살지 않으나 도시를 먹여살리느라 죽어가는 도시 근교가 있습니다

 

수은납과 생물학적 산소요구량이 공존하는 곳

선거관리위원회가 있고 예비군 본부가 있고 주민등록을 옮겨간 사람들의 빈집이 있는 곳

 

여기는 가야터였고 난생(卵生)인 우리들은 불임인 채 행정구역 안에서 아버지는 수시로 도로교통법을 어기며 나는 수시로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해명되지 않는 식물들과 곤충들이 자라고

아버지와 나는

살고 있습니다

―허수경 「우리들은 지방도시 근교에서 살고」 전문

 

이 시는 경제개발과 도시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던 1960~80년대를 암시하면서, 지역의 위치성이라는 사회적 속성을 드러낸다. 주로 도시 사람들이 먹을 농산물을 생산하는, 생산량을 극대화하기 위한 비닐하우스들이 세워진 “지방도시 근교”. 이곳에 흐르는 강은 공장에서 나온 중금속으로 오염되어 있으며 이곳은 “도시를 먹여살리느라 죽어”간다.

이 시의 배경은 시인의 고향이자 “난생”의 시조 설화를 지닌 진주 인근일 것이다. 여기서 “지방도시 근교”는 중층적으로 소외된 곳이다. 수도권으로부터도 먼 지방인데, 지방에서도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있다.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농촌이 식량생산이라는 과업에 집중하는 특수한 생산지에 해당한다면, 근교는 도시의 각종 필요를 채워야 하는 부담이 전가되기 쉬운 곳이다. 이 시에서 지방도시 근교는 소속감 없이 살아가는 생명들의 공간이다. “아버지는 수시로 도로교통법을 어기며 나는 수시로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인간사회와 위태롭게 불화하는 이곳의 존재들은 오염과 착취의 흔적 속에서 발화해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그 신호는 쉽게 해석되지 못하고 “해명되지 않는” 것으로 남는다. 치명적인 환경오염에 대한 부담을 떠안은 채 이 근교의 풍경은 정치적으로 관리되나(“선거관리위원회가 있고”) 이곳에 거주했던 이들은 이곳에 애정이 크지 않으며(“주민등록을 옮겨간 사람들의 빈집이 있는 곳”), 따라서 공동체를 이루기는 어려워 보인다. 남아 있는 이들은 위태로움에 잠식되며 온전한 안정을 얻는 일은 유예된다.

이 시가 포착하는 풍경을 기후부정의가 초래한 원형적 장면 중 하나로 이해해볼 법하다. 대도시의 편리와 풍요가 누군가의 생존조건을 훼손하고, 그 불균형이 은폐된 채 일상화된 모습이 이곳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허수경의 시는 여성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발화한다거나 민중적인 한을 그려낸다고 평가되어왔지만, 기후부정의가 초래하는 생태의 문제와 자본주의 문명의 폭력성에 대한 날선 시선도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가 출간된 뒤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2026년 현재, 이 시는 당시와 상황이 그리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가령 이 시에서와 동일한 현안은 아니나, 그간 도시 위주로 돌아가는 산업구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지역에 핵발전소를 짓고 경과지마다 고압전류가 흐르는 송전망을 건설하면서 피해를 낳아온 예를 떠올릴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지역공동체는 보상금을 중심으로 갈등하거나 공권력에 의해 와해되는 수순을 밟기도 한다. 한편 그렇게 건설된 핵발전소의 명칭에 지역명을 쓰지 않는다는 점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예를 들어 ‘한빛원자력발전소’는 전남 영광과 고창의 경계지역에 있지만, 이름만 듣고는 이 핵발전소가 어디에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 일상적인 방사능 노출 위험은 물론이고 수십만년이라는 처리기간을 감수해야 하는 고준위 핵폐기물의 보관에 대한 부담은 핵발전소 인근 지역이 고스란히 지게 되지만, 그러한 상황은 손쉽게 비가시화된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좀더 하자면, 도시-지역 간 위계는 향후 기후정의의 관점에서 더 첨예한 문제가 될 것이다. 탄소 감축이라는 전세계적 과제를 앞세울 때 화석연료 외의 에너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발전설비를 어디에 건설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끊임없이 대두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간 위계가 문제인 것은 비단 파괴력이 큰 핵발전소만이 아니다. 신재생에너지를 안정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양수발전소를 지어 산림과 마을을 파괴하고 수몰시키는 예라든가 논밭과 갯벌간척지가 태양광 패널에 자리를 내어주는 일 또한 우려스럽다. 친환경이라는 이름이 붙지만, 실제로는 중심-주변의 위계 속에서 특정 지역과 삶이 희생을 강요받는다. 그렇게 볼 때, 「우리들은 지방도시 근교에서 살고」가 드러낸 근교의 풍경은 지금까지 반복되는 개발정책의 구조적 패턴에 대한 상징적인 한 장면처럼 보인다.

 

 

도시와 폭력, 정주하지 않는 삶

 

산성(山城)에의 신실한 믿음이 만들어낸 논밭

정주하는 것들의 하릴없는 믿음보다

싸전 푸줏간 주막 사당들의 정주하지 못함

그 노역으로 마을의 인가를 덥히지 못하고

노역의 원한됨이 시방세계를 헤맬 때

천한 마음의 자궁 속에라도 들어가

인가 밖의 반찬 되지 못하는 들풀로 흔들려도

산성의 이름으로 나 살육하지 않음

산성의 보호 아래 정주하지 않음

그것이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오래된 길이라

나 믿는 혼자 있는 불빛

여관의 불빛

―허수경 「산성 아래」 전문

 

허수경의 시적 주체는 정주하지 않고 이동하는 삶을 택한다. 인류가 꾸려온 문명을 조망하는 자리를 그렇게 중심 아닌 곳에서, 또 떠나간 곳에서 사유한다. 「산성 아래」(『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에서 화자는 산성의 내력을 투시하며, 산성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평화와 안정을 위해 누군가가 “원한”을 느낄 정도로 고되게 치렀을 은폐된 댓가를 본다. 어느 먼 옛날 전쟁을 치르며 힘없는 존재들의 “노역”을 동원해 지어졌을 산성 앞에서 화자는 그것의 보호에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이한 안전감’을 누리기보다 “혼자” 임시로 머무는 “여관의 불빛”을, 그 흔들거림을 믿기를 택한다. 이때의 산성은 시인이 향후 보여줄 인간문명에 관한 사유 전반과 이어지는 상징성을 띤다.

문명 수립에 전제되는 폭력성을 사유하는 시인의 시선을 생각하건대 그의 시에서 정주하지 않는 방식으로 중심을 해체하는 시적 주체의 탄생은 필연적으로 보인다. 다만 허수경 시의 주체가 농생태적인 삶으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보게 된다. 이 지점에서는 오늘날 기후위기 대응의 차원에서, 생산량 확대를 위해 토지와 생태계를 끊임없이 소진해온 산업농체제를 넘어 자급과 돌봄 중심의 농생태적 전환이 절실하다는 점도 떠올려봄직하다. 그러나 허수경의 시는 특정한 삶의 양식을 이상화하는 일에 몰두하지 않는다. 이 시에서 읽히는 건 인간이 안정적인 삶의 필요하에 구축해온 정주의 질서가 폭력을 기반으로 유지되어왔음을 파악하는 태도이다. 허수경은 불안정적인 “불빛” 속에서, 문명이 지워버린 존재들의 삶과 기억을 다시 길어올린다.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서울 사천 함양 뉴올리언스 사이공 파리 베를린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우울한 가수들 시엔엔 거꾸로 돌리며 돌아와, 내 군대여, 물에 잠긴 내 도시 구해달라고 울고

 

그러나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마치 남경 동경 바빌론 아수르 알렉산드리아처럼 울고

도서관에서는 물에 잠긴 책들 침묵하고 전신주에서는 이런 삶이 끝날 것처럼 전기를 송신하던 철마도 이쑤시개처럼 젖어 울고

 

나의 도시 안에서 가엾은 미래를 건설하던 시인들 울고 그 안에서

직접 간접으로 도시를 사랑했던 무용수들도 울고 울고 울고

 

(…)

 

유전인자 관리하던 실험실도 잠기고 그 안에서 태어나던 늑대들도 잠기고

나의 도시 나의 도시 울고 그 안에서 그렇게 많은 전병이나 만두를 빚어내던 이 방의 식당도 젖고

 

(…)

 

학살이 이루어지던 마당도 폭탄에 소스라치던 몸을 쟁이고 있던 옛 통조림 공장 병원도 젖고

죄 없이 병에 걸린 아이들도 잠기고

정치여, 정치여, 살기 좋은 세상이여, 라고 말하던 사람들 산으로 올라가다 잠기고

 

물 위에 뜬 건 무의식뿐, 무의식뿐,

건덩거리는 입술을 위로 올리고 죽은 무의식뿐

―허수경 「나의 도시」 부분

 

인간문명의 폭력성에 관한 허수경의 일관된 사유는, 지구의 거주 가능조건에 관한 파악으로도 나아간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몰’에 관한 이미지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에 엮인 이 시는 묵시록적으로 과거와 먼 미래를 함께 투시하며 생과 폭력의 문제를 재인식하게 한다. 성서에 등장하는, 타락한 인류를 신이 벌하는 대홍수 사건이 연상되는 이 시에서 인간의 생활사는 모두 물에 잠긴다. 시인이 고향 진주에서 지냈을 때 눈여겨보았을 거대한 인공호수 진양호나 발굴지에서 본 또다른 인공호수로부터 받았을 영향이 짐작된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대규모의 수몰을 연상해볼 수도 있겠다. 젖어가는 과정이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기후재난으로 인한 폭우 피해를 연상하기에도 어색하지 않은 시다.

이 시에서는 모든 것이 잠긴다. “울고”의 주체는 “가수들” “시인들” “무용수들”만이 아니다. “나의 도시” 또한 ‘울고 있는’ 주체로 읽힌다. “나의 도시”들의 ‘울음’으로 인해 지구가 물에 잠긴다고 생각하면, 이 시에서 재난을 야기한 행위 주체는 인간이 문명을 이뤄 살아온 거주지역들, 다시 말해 지구 그 자체가 된다. 신이 벌하듯 지구가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이 과정이 인간에게는 재난인 것이다.

모든 것이 잠기고 나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은 “무의식”뿐이다. 훗날 지구상의 인류가 멸절에 이른다고 할 때도 인간이 남긴 데이터는 지구에 부유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데이터라는 건 어쩌면 단순한 정보값을 넘어 인간이 추구해온 욕망을 읽어낼 수 있는 인간의 무의식, 내지는 데이터 처리기술이 편향적으로 취급하는 기계적 무의식의 더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이 스스로 이해한다고 믿어왔던 의식이 아닌, 끝내 통제하거나 해명하지 못한 채 축적해온 무의식의 잔해들 말이다. 「나의 도시」는 인간이 구축해온 합리적 이성과 과학의 의식적 세계가 어떻게 스스로를 침식시키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이 끝내 남는지를 허무와 슬픔 속에서 응시한다. 이 시는 종말 이후를 상상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종말을 예견하게 하는 현재의 삶과 문명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잊혀가는 지역어로 복원해낸 애도의 공동체

 

한편 조정의 두번째 시집인 『그라시재라』(이소노미아 2022)에서도 시인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역사적 비극이 다뤄진다. 『그라시재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남 전라도 지역어로만 쓰여, 수도권 도시를 중심으로 일원화된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던 목소리를 드러낸다. 이 시집은 손녀와 할머니의 대화로 구성된 시 「달 같은 할머니」로 시작한다. 손녀에게 선조 여성으로서의 사랑과 지혜를 담뿍 전하던 ‘달같이 예쁜’ 할머니는 1900년대 어간에 태어나 한국의 근대사를 통과한 여성일 것이다. 이 시집은 이렇듯 더 먼 과거와 바로 지금 이곳의 현재를 잇는다.

시집의 배경은 “육요”(‘6·25’, 「분통 같은 방에 새각시」) 상실을 겪은, 그것도 이웃이 이웃을 죽인 참상을 겪은 이후의 마을이다. 그곳에 남아 있는 여성 이웃들이 서로의 필요를 채워준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풀릴 길 없는 한을 알아주면서, 서로의 바느질 품앗이 동무가 되어 정갈하게 다독이기도 하면서. 그렇게 여성들의 공동체가 노래처럼 흐른다. 서남 전라도 지역어 대화를 따라 생명을 보듬고 나무처럼 일상을 지키는, 그런 기막히게 다정하고 아름다운 서사가 시집을 이룬다.

 

뒤안 대삽으로 바람 넘어가는 소리 나먼 가심에 눈물 괼세 바람소리 땀시 인기척 못 들었으까미 무단히 봉창 열어본당께 죽은 이가 인기척 내고 오꺼싱가

간이 녹는 말이시

서방이 그리우먼 서방 얻어 가것다만, 다 큰 자석 땅밥으로 줘불고 낭께 배람빡 없는 방에 눴는 것 같네

우리는 모다 새가 되것네 사람 그리워 보대끼다 죽으먼 새가 된다네

그래잉 사잿상 흰쌀에 개 발태죽 새 발태죽 나는 것 보먼 자네 말도 일리가 있네야

 

(…)

 

속이 까깝항께 청천하날에 까마구 나는 것도 시언허게 보이데

자네가 날고 싶은갑네 그래도 나넌 까마구거치 물짠 새는 안될라네

아먼 시종떡 자네는 창가 잘 한께 꾀꼬리 되꺼시네잉

워메 함바트먼 그람 자네는 머시 될랑가?

쭉쭉쭉쭉 우는 멧비둘구가 되끄나 유자밭 가생이 쭈밋쭈밋 도요새가 되끄나 눈꾸녁에 불 쓴 ”像隔? 되끄나 청천하날에 솔개미가 되끄나 더퉈봉께 그도저도 다 슬코 암수가 자별헌 꿩 되고잡네

장끼여 까토리여

에나 까토리재 장끼까이

―조정 「치술신모, 그리움의 신들」 부분

 

「치술신모, 그리움의 신들」은 여성 이웃들이 모여 빨래를 밟거나 다듬질하는 동안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구성된다. 마치 허수경이 독일로 이주한 후 진주에서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쓴 「내 마을 저자에는 주단집, 포목집, 바느질집이 있고」(『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창비 2001)에서처럼, 지역은 다르지만 전후에 여성들이 일상과 경제생활을 꾸려가며 구체적으로 했을 법한 대화가 지금 여기의 여성시인 조정의 시에서도 확인되는 듯하다. 이 시에서 한 여인은 장성한 자식을 잃은 어머니다. 서사의 흐름에 따라 그 죽음의 원인은 동족상잔의 전쟁에 있다고 가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웃은 그녀를 위로하며 우리는 모두 새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 그리워 보대끼다 죽으먼 새가 된다네”라는, 설화적인 말로 위로를 나눈다. 자신 또한 죽어서 새가 될 “우리”에 포함되어 있다는 듯 상실의 공동체성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이웃을 위로한다.

새가 되리라는 말은 자연적 순환의 힘에 기댄 말이기는 하지만, 죽음을 무상하게 하는 말은 아니다. 하늘을 나는 새라는 생명체의 특성에 기대어,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그 상실 이후를 살아가는 이의 한을 풀어주는 기원(祈願)의 말이다. 이 위로는 사려깊고 흥겹다. “까마구” “꾀꼬리” “멧비둘구” “꿩” 등 어떤 새가 될지 상상하며 구사하는 재담이 한바탕 구성지게 쏟아진다. 일시적인 환기에 불과하더라도 이같은 완충지대가 있기에 불가해한 고통을 안고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해원(解冤)에는 어떤 거창한 의식이 필요치 않은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아픔을 알아주고 위로하는 공동체성을 놓지 않는 것. 커다란 비극 속에서 살아갈 힘은 그렇게 소생되는 게 아닐까. 허수경의 시가 시간이 지나도 역사적 폭력이 누군가에게 여전히 지속적인 고통을 주고 있다는 점에 관심을 두어 슬픔의 보존과 순환을 통해 폭력을 기억하게 한다면, 조정의 시는 구체적인 공동체의 일원들이 무참한 비극 속에서 타자에 대한 존엄을 잃지 않고 서로를 돌보는 방식을, 잊혀져가는 생래적 고향말로 발굴해낸다.

 

 

“오래오래 싸우는 중”: 아직 사라지지 않은 미래

 

조정 시인은 생태운동과 평화운동에 힘써왔다. 그런 시인의 시에서는 운동 현장에서 보낸 이의 시간을 살필 수 있다. 그의 세번째 시집 『마법사의 제자들아 껍질을 깨고 나오라』(이소노미아 2023)에는 고양시 산황산 골프장 개발에 대응하는 자리에서의 고민과 사유가 비중있게 담겨 있다. 오랜 시간이 쌓인 산이 파괴되는 것을 바라보는 시집의 서정적인 시선은 곧 투쟁으로 연결되는 시선이기도 하다. 지키고자 한 것은 공동체 차원의 것이다. 이때 공동체는 지구생태계 내에서 생명을 공유하는 관계이자 서로에게 응답하며 생래적인 시간 속에서 어우러지는 서정적 공동체로 이해된다.

사건은 이러하다. 산황산은 이미 2010년 전체 면적 49만 9000제곱미터 가운데 북쪽 절반인 24만 4000제곱미터가 깎여 9홀 규모의 골프장이 건설된 바 있다. 현재 나머지 절반을 마저 파괴해 총 18홀 규모로 골프장을 증설하려는 상황이다. 고양시에는 이미 여러개의 골프장이 있다. 그럼에도 골프장의 공급을 더 늘려야 한다고 한다. 서울 한복판에는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골프장을 쉽게 들이지 않으면서 도심 외곽의 산에는 끊임없이 개발의 명분이 덧씌워진다. 이 과정에서 이미 ‘훼손된 산’이라는, 산을 없애도 된다는 억지 논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골프장 부지 선정 과정은 지역의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외부의 수요와 논리에 의해 추진된다는 점에서, 앞서 살핀 지역간 위계와 전가(轉嫁)의 구조를 반복한다.

 

청설모는 나보다 높다

어둡고 빠르고 부드럽다

 

공기 너머 이편으로 누군가 건너오고 꿈속의 분홍 고래처럼 건너갔다

광적사거미가 그물 친 공중에

한숨 흐릿한 체온

어린 아내 손잡고 이 길을 걷고 고개 너머 절에서 밥을 빌던 왕의 이름이 공양이다

(…)

 

개오동나무 꽃 피어 도마뱀 달리는 자취를 내려다본다

죽은 산책자들의 신발이 이 나무 저 나무에서 떨어져 내린다

새벽 열무 싣고 나귀가 풋풋 입김을 불며 지나간

마찻길은 잘려 골프장이 되었다

(…)

 

울새가 산신제터 표지석에서 깡총거린다

편히 앉아 놀기 좋은 터가 명당이다

새야, 사람에게 뺏기지 말고

네가 놀아라

―조정 「마차길」 부분

 

「마차길」에서는 산황산에 서린 깊고 오랜 시간이 그려진다. “나보다 높”은 청설모가 대를 이어 살아온 시간, “어린 아내”와 함께 이 산을 지났을 공양왕의 비극적인 시간, “개오동나무 꽃”과 “도마뱀” 그리고 “죽은 산책자들”의 시간이 산황산에는 켜켜이 쌓여 있다. 산황산은 새들이 우열을 가리지 않고 노래해온 산이며, 깊이 흐르는 물이 생명의 움을 틔워온 산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은 어느날 갑자기 “잘려 골프장이 되었다”.

해외에서는 넓고 평탄한 지형의 부지를 활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 반면, 한국에서는 대개 산림을 훼손해 골프장을 건설해왔다. 개발의 논리 속에서 효용이 낮다고 간주되는 산. 크지도 않은 이 땅에서 산이 골프장 건설에 적합한 부지로 여겨지고, 산에 기대어 살던 인간과 비인간이 지워지는 이유다. 「마차길」의 화자는 자연의 오랜 시간과 개발의 폭력적인 시간을 선명하게 대비시키며, 파괴가 얼마나 일방적이고 비가역적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드러낸다.

 

진수 할머니네 측간 문에 붓글씨로 ‘측간’이라 써있어요

칠월이 오면

측간 앞 작은 꽃밭에

나리꽃 세 송이가 청초해요

 

(…)

 

측간은 골프장 예정지 경계에 있어요

공사 중장비가 밀고 내려오면 맥없이 무너져요

내 동무들과 나는

진수 할머니네 측간 지키려고 오래오래 싸우는 중이에요

―조정 「측간을 위하여」 부분

 

「측간을 위하여」에는 산황동 마을주민들의 일상이 그려진다. 산황산을 지키기 위해 그곳에 걸음하던 화자의 시선에 “진수 할머니네” 집 앞 “나리꽃 세 송이”가 담기고, 몇년간 지속된 지난한 투쟁의 와중에도 그 꽃은 매년 피어나 화자의 마음속에서 어느새 고유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 것 같다.

측간에조차 거동하기 어려운 진수네 할머니는 그만큼 마을에 오래 뿌리내리고 살아온 선주민일 듯하다. 자신만 쓰기 위해서라면 굳이 측간의 존재를 글씨로 써서 알려두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 글씨의 의미를 알아본 화자의 눈에, 글씨의 주인인 진수 할머니의 마음이 귀하게 여겨지지 않았을까. 측간은 비록 냄새나고 오래되었어도 긴 세월 함께해온 집의 일부이다. 「측간을 위하여」에서 산을 지키는 이유는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 진수 할머니와 같은 삶과 그 자취를 지키는 데 있다. 이는 생태적 실천이 곧 타자의 존엄을 보존하는 일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또다른 시 「산황산」에서 화자는 “떡갈나무잎 방석”이며 “고라니”를 보고, 따뜻한 땅속으로 길을 낸 “두더지들이/털에 묻은 황토 터는 소리”를 듣는다. 앞서 인용한 「마차길」과 함께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이 위계 없이 공존하는 감각이 두드러진다. 이때 공동체는 인간 중심의 결속이 아니라, 고라니와 두더지, 나무와 바람, 그리고 이미 죽어간 존재들까지를 포함하는 관계망으로 확장된다. 이는 허수경 시에서 드러난 생태적 순환의 감각 그리고 역사적 폭력이라는 지층 위를 떠도는 정주하지 않는 삶들에 대한 성찰적인 감각과도 맞닿는 것일 듯하다. 조정의 시에서 관계는 현장에 가까운 실천적 윤리로 구체화된다.

도시와 대비되는 산황동은 “슬픔의 조끼를 여며주는 마을”(「단추」)이라고 표현되는데, 여기에서 조정 시가 지향하는 공동체의 성격이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이 공동체는 상처를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함께 입고 견디며 서로의 몸에 맞게 조정해주는 관계 속에서 유지된다. 쉽게 배제되고 지워지는 존재를 드러내는 일은 결국 정치적인 일이다. 관계를 그리는 조정의 시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존재들의 존엄을 함께 사유하려는 민주주의적 감각을 읽을 수 있는 까닭이다.

 

이 글을 쓰던 중 2025년 대규모 산불이 났던 안동의 숲을 72홀 규모의 파크 골프장으로 개발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불이 난 김에 개발한다는 식이다. 불에 탄 숲은 생태계의 회복을 기다려야 할 장소인데, 필요한 회복의 시간은 무시된 채 ‘이용 가능한 빈 땅’으로 규정된 것이다. 그렇게 사라지고 파괴되는 것은 그곳에 축적되어온 생명의 시간과 관계들, 그리고 다시 살아날 가능성 자체다. 개발 소식 앞에서 그래도 반가웠던 건 되돌릴 수 없는 파괴의 위력을 아는 이들이 개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여서였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슬픔 이후의 시간은 이어져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끝없는 속도전과 쟁탈전, 그리고 반복되는 폭력과 죽음들을 오늘의 문명이 맞이한 깊은 위기의 징후로 이해할 수 있다면, 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을 것이다. 허수경과 조정의 시가 그랬듯, 시는 밀려난 존재들의 시간과 죽음을, 생명을 다시 헤아리게 하기 때문이다. 시는 상처에 노출되기 쉬운 자리에서 함께 기대어 살아갈 수 있는 관계의 감각을 환기하며, 넉넉하게 자신이 품을 수 있는 슬픔을 택하고, 고통을 다시 힘으로 바꾸는 법을 배우도록 이끈다.

이는 언어화되기 쉽지 않은 장면들을 조심스레 또 힘껏 문장으로 눌러 담아온 많은 우리 시들이 줄곧 펼쳐 보여준, 사랑의 방식일 것이다. 고요한 위로와 싸워나갈 힘과 생명력을 나누면서, 시의 빛은 흘러왔다. 지나온 시간을 기억하며 앞으로 올 시간을 다시 상상하게 만드는 일, 파괴와 단절의 세계 속에서 흔들리는 서로를 돌보는 빛을 붙들어 보이는 일. 시의 중요한 역할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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