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신예시인선
김 진 선 金珍先
1991년 부산 출생. 2024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kjsunn0@hanmail.net
가업
시집도 집이다
이런 말장난을 들으면 웃음이 나다가도
어떻게 지어볼까 골몰하게 된다
엄마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목수였는데
자신이 평생 살 집을 짓다가
남의 집을 지어주러 전국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공사를 끝낸 남의 집이 한채 두채 늘 때마다
자식도 한명 두명 늘고
두고두고 살 집은 조금 더 넓어야겠지
남향으로 통창을 내야겠지
문고리가 크면 잘 잡히지 않겠지
쇳대는 수에 맞게 나누어 가져야겠지
밤새 고민하면서
그렇게 또 남의 집을 지으러 갔다고
한날은 술에 잔뜩 취해
문을 대신해 임시로 달아둔 담요를 걷어차며
그럴듯한 집이 너무 많은 거 같다고
어린 엄마를 붙잡아두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남의 집을 지으면서
남의 집 주인이 현관에 들어서서야 내려두는 노곤함에 대해
남의 집 사람이 부엌에서 분주하게 차려낸 저녁 식탁에 대해
남의 집 아이가 자기 방 책상에 앉아 펜을 쥐고 푸는 문제에 대해
한마디라도 거둘 심산으로 서성일 때
그 집은 내 집 같기도 하여
내쫓아버리고 싶었다고
머물고 싶었다고
엄마의 아버지 외에 다른 가족들은
그 집의 근처에도 가본 적 없다
살뜰히 고른 단열재와 타일들이 남아돌면
몰래 가져와 이어붙이고는
얼추 비슷해 보이지 않냐며
다 되어간다 다 되어가
내 집이라는 게 이렇게 생기는 거다
흡족해하셨다고 한다
엄마와 엄마의 아버지는
한 지붕 아래서 살았던 시간이
남의 집에 세 들어 살던 시간보다 적었다는데
살면서 고칠 게 계속 생겼으니까
그대로 둘 순 없었으니까
누수를 머금은 채로 세워지는 마음을
균열을 안은 그대로 칠해지는 생활을
허무는 방법까지는 도면에 표시되지 않는다고 한다
햇볕 잘 드는 공터를 보면
무엇도 쉽게 버릴 수 없게 짓고 싶어진다
시집도 집이라면
로켓과 깃털 1
급식을 기다리는 학생들처럼
전세버스부터 경차까지 갓길에 줄지어 서 있어요
하루 새 삼백원이 넘게 오른 휘발유 가격
미리 넣어두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알뜰주유소를 지나칩니다
그날 뉴스에는 멀리서 기름을 넣으러 왔다는 시민들의 인터뷰와 유가 전망이 보도되었습니다
지도 앱으로 최저가를 검색했어요 처음 오는 동네인데 이 기회에 오게 됐네요
아, 생활의 반경은 이렇게도 넓어지는구나
어떤 몸은 얇고 부드러운 캐시미어 카디건을 걸치고
어떤 몸은 맞지 않는 여벌조차 필요한 것처럼
어떤 영혼에게는 더 올라갈 곳이 있는지 아직 더 내려갈 곳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몇달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없는데
좌회전 차선에서 갑작스레 시동이 꺼진 차 한대
얼마나 남았을까 끝까지 가보려고 했을까
모두 경적을 울리고 한 손으로 잡은 주유 건도
총이긴 총이어서 쏘려고 마음만 먹으면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주연배우처럼 다 명중시킬 수 있다는 거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는 것도
밤중 무더기로 포탄이 쏟아지면 잠깐 형태를 드러내는 빛의 윤곽처럼
웃는 얼굴에 푹 파이는 보조개를 습격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멀리서 발행된 신문 일면에는 아이들의 사진이 실려 있고요
일부러 소리 내어 말을 걸어보았어요
내가 모르는 학교 복도 강당
열린 가방 속 색이 덜 칠해진
그림 속 새는 깃털이 한움큼 빠진 것처럼 보이고
불타오른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불이 된다는 뜻2
한 손에는 꼭 저울을 올려둔 거 같았어요
제대로 다루지 못해도
입술의 무게를 잴 때는 원치 않는 방향을 무게추처럼 달아두었어요 그럼에도
재고나 대란 품절 같은 말 듣게 되면
생활은 무모해지는 것인지 위험해지는 것인지 분간되지 않고
허름해집니다 점점 덧나기만 합니다
안간힘을 다해 떨어지는 깃털도 있겠지요
이렇게도 넓어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