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신예시인선

 

 

박 지 일 朴志逸

1992년 경남 창원 출생.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립싱크 하이웨이』『물보라』 등이 있음.

paziilpaziil@gmail.com

 

 

조금도 어지럽지 않을 소풍

 

 

지겨울 방식으로 나를 나는 다시 반복한(된)다: “일기가 나를 쓴다―쓰일 수 있는 나만 내게 있다면.”

하나. 내가 인간임을 긍정한다.

하나. 나는 내가 인간임을 긍정할 수 없다.

하나. 더이상 특이할 것 없는 나의 매 순간 매 상황을 ‘난국’이라고 여기기 위해 노력한다.

 

(332번째) 사는 연습.

―타임라인은 퇴고시 삭제할 것

00:17 “고라니가 두른 은가면은 비와도 같은 달빛을 때려 맞는다”

03:47 “은가면을 두른 고라니는 달빛과도 같은 비를 때려 맞는다”

착란을 부정한 것이라고만 여기기 위해 노력한다. 가능성을 쓰면 다른 가능성은 사라진다. 오늘은 달빛이 더 큰 소리를 낸다.

 

일기는 나를 쓴다―“쓰일 수 있는 나만 내게 있다면.”

지겨울 방식으로 나는 나를 다시 반복한(된)다.

나는 이것 말고 쓰고픈 것이 있었다. 나는 이것 말고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는 이것 말고 시험할 것이 있었다. 나는 이것 말고 살아야 할 것이 있었다.

그러나.

 

강제되는 (427번째) 연습.

자기를 일년 동안 나무조롱 안에 감금했다는 셰 더칭(謝德慶)에 대한 문장을 표절한다. 자기를 반복해오던 셰 더칭은 어느 순간 일체의 예술행위를 하지 않고 침묵하다 십삼년 지나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살아 있다.”

 

나를 나는 다시 반복한(된)다.

06:11 “바람이 떠밀면 다음과 같이 행동된(한)다.

1) 어디로도 갈 수 없다.

1)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나는 없다.

단지 등을 보이며 앞을 걸어가는 내게 부여된 (212번) 번호만이 나의 흰 동공을 호박벌과도 같이 떠다닌다.

며칠 전 212자에 맞춰 쓴 글 「19」가 나의 위치를 대신한다.

 

19

비단잉어 눈에 구름 모여드니 나의 할머니 힘줄을 ‘심줄’로 발음하길 멈추지 않는다 나는 끊어도 끊어지지 않을 짚단과도 같은 버들가지를 갈비뼈마다 보관하고 있다 어릴 나는 상대의 눈만 보면 가려움을 앓는다―거기 내가 있으니 여기도 내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을 게라고 그것이 핏줄로 이어진 너의 내력이라고 할머니는 알려준다 동생의 혼을 달래고자 나를 때릴 때마다 그 심줄과도 같은 흰 바람을 굴리는 할머니의 눈엔 내가 없어 나는 오직 그 눈만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없으므로 나는 있을 수 있다.

 

다시 사는 연습.

10:28 “나는 ‘현대인’이라는 상태를 목적한다.”

나는 이해에 실패한다. 복기는 이해가 실패할 때만 이루어진다. 이해는 매번 실패한다. 나를 반복되(하)는 나.

15:54 “답신 없을 카톡을 자시·진시·미시·유시에 걸쳐 여덟통씩 보낸다.”

실패해도 나는 실패될 수 없다.

 

17:28 “우풍과 웃풍의 관계는 존재한다.” 19:36 “반려(返戾)와 반려(伴侶)의 관계 또한 존재한다.” 어디든지 눈이 내린다. 나는 나의 아침 수련을 방해하는 물까치이다. 나는 내가 사는 모든 나의 평화를 훼방 놓는 잡상인이다. 그러니 7612번 버스에 올라 한자 한자 소리 내다:

스티로폼.

스타이로폼.

발포 스타이렌.

발포 스타이렌 수지.

발포 스타이롤.

발포 스티렌.

발포 스티렌 수지.

발포 스티롤.

21:17 “쥐의 이빨은 ‘바람은 끌 수 없는 촛불’과도 같다”

 

(427번째) 연습은 다시 강제된다.

“나는 표절을 통해 잃어버릴 ‘나’라도 내가 가진 것인지 시험하고 싶어요.”

 

반복되는 나.

―퇴고시 ‘반복하는 나’ 따위는 삭제해버릴 것.

내가 나임을 긍정할 수 없다.

내가 끝마디통통집게벌레임을 긍정할 수 없다.

나는 내가 그 무엇임을 긍정할 수 없다.

 

23:59 “태어나서도 태어나지 않을 나, 죽어서도 죽지 않을 나.”

(신원미상 변사사건?)

24:57 “내가 살아 있기를 실패해도 나는 죽을 수 없다.”

긍정할 수 없는 나는 있다.

 

 

 

조금도 어지럽지 않은 소풍

 

 

어디든지 눈은 내려. 스티로폼은 씹고 있어.

하지만 쥐는 아닌 것 같아. 갉아 먹히는 나는 쥐와 닮았어.

그럼 쥐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일까?

‘스티로폼’이라고 쓰지 말래. ‘스타이로폼’이라고 써달래.

꼭 그렇게 쓸 필요는 없대. 나는 쓰기가 싫어. 쓰는 내가 그래서 재밌어.

‘발포 스타이렌 수지’가 갉아먹는 나. 안 돼.

그것도 안 된대.

발포 스타이렌. 발포 스타이롤. 발포 스티렌. 발포 스티렌 수지. 발포 스티롤. 그만.

안 된대. 그런데 안 되는 건 없대. 조금 어지러워.

그전까진 매우 어지러웠어. 쓰기는 정말 싫어.

그래서 피할 수 없어. 벚나무는 꽃을 떨쳐내고 있어.

나는 나와 쥐 사이에 펼쳐진 길을 반복해.

착란을 부정한 것이라고만 여겨왔어. 사특한 것이라고.

매번 귀를 씻었거든. 오이비누가 남아나지 않았는데. 이젠 그러지 않을래.

쥐와 스티로폼. 나와 스타이로폼. 스타이로폼과 발포스타이렌수지. 발포 스타이렌과 발포 스타이롤.

나는 두 눈을 꾹꾹 참았어. 생각을 끊어냈어.

그런다고 끊어지면 생각이 아니겠지.

발포 스타이렌. 발포 스타이롤. 반복해서 흥얼거리면 꼭 노래와도 같이 들려.

하지만 노래는 아니야. 다시 나열해선 안 된대.

될 것도 안 된대. 나는 조금 우울해졌어.

그전까진 매우 우울했거든.

스티로폼.

스타이로폼.

발포 스타이렌.

발포 스타이렌 수지.

발포 스타이롤.

발포 스티렌.

발포 스티렌 수지.

발포 스티롤.

발포 스티렌 수지.

발포 스티렌.

발포 스타이롤.

발포 스타이렌 수지.

발포 스타이렌.

이렇게 썼다고 가정하면……

조금 끔찍한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