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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시인선

 

 

장 혜 령 張慧玲

1984년서울출생.2017년문학동네신인상으로등단.시집『발이없는나의여인은 노래한다』등이있음.

jaineyre0@gmail.com

 

 

침묵의 스도쿠

 

 

1

 

침묵을 말하려면, 침묵이 있음을 말하려면 말이 있어야만 한다고, 마르그리뜨 뒤라스는 말했다. 여기서 말이란 무엇일까? 말하자면, 앙꼬 없는 찐빵. 앙꼬가 입장해야 찐빵은 완성되니까. 별이 입장해야 밤하늘이 완성되듯. 이것이 말의 입장이다.

 

그러나 앙꼬가 입장을 하거나 말거나 찐빵은 있고, 별이 입장을 하거나 말거나 밤하늘은 있는 법. 이것이 침묵의 입장이고, 한국에서 침묵이란 무엇일까? 말하자면, 중국집에서 잘못 주문한 왕 큰 꽃빵. 왕 큰 음성지원으로 야설 청취 중인 아저씨. 그 아저씨 손에 든 통닭구이 좋다고 꼬리 치는 왕 큰 강아지. 발만 보며 기어가는 지렁이떼 같은 왕 큰 신도림역 환승통로에서, 참다못한 왕 큰 지구별의 지령처럼 침묵이 외친다. 거, 눈 좀 뜨고 다닙시다!

 

2

 

우리가 보거나 말거나 세상이 있듯이, 얼음이 입장을 하거나 말거나 냉동실엔 아이스큐브가 있고, 언제 다 빼 먹었는지 모르겠는 여름의 텅 빈 아이스큐브는 영안실의 텅 빈 관처럼 있다. 한국의 어떤 침묵은 그렇게 생겼고, 다름이 아니오라 한국의 남영동에서 어떤 침묵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대공분실의 입장이다.

 

말이 보거나 말거나 침묵은 생겨났고, 말은 이미 생겨난 것을 본 것이었으므로, 생겨남을 본 것으로 말이 있고, 말은 본 것이 아직까지 생겨난다고 한다. 여기 생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의문하면서.

 

이상하다. 그것은 한때 새의 죽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는데, 누가 허락도 없이 검은 비닐봉지에 싸서 훔쳐가버렸는데. 윙, 윙, 그 피가 아직 돌고 있다. 살리려는 냉동고의 헛된 모터처럼, 윙. 우리가 바로 그 냉동고 속인 것처럼.

 

춥다. 여기가 바로 그 침묵 속이고, 말은 휩싸여 있다. 침묵에 휩싸이다니, 침묵이 안개라도 된단 말일까? 휩싸고 있던 말이 떨면서 침묵에 잠긴다. 침묵이 깊은 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은 돌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속에 잠긴 말이 숨을 참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참고 있는 말이 참 많기도 하구나. 여기는 침묵의 수영장일까? 아니면 침묵의 셰어하우스?

 

3

 

침묵을 말하려면, 침묵이 있음을 말하려면 말이 있어야만 한다고, 말한 사람은 일찍이 죽고, 오직 말이 남았다. 이 세상에 혼자 남은 말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연고도 연금도 없이, 혼자 남은 미망의 말은 혼자 남은 사람보다 무서운지 모르겠다.

 

빈집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세입자처럼, 수술 대기실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보호자처럼, 대합실에서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는 여행자처럼, 『남영동』1에 혼자 남은 말이 시간을 때우고 있다. 네가 보거나 말거나, 시간의 구멍을 때우며 스도쿠를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수레바퀴밑에서 한잔 기울이는 중인데, 헤르만 헤세는 이 사실을 알려나. 한국에서 밑과 아래는 다르고, 수레바퀴밑은 한국의 밑에 놓인 방석 같은, 어느 방석집에서 왔다는 것. 텍사스에 미아리는 없지만 미아리에 텍사스는 있고. 방석 같은, 레이스 먼지 방석 같은 텍사스는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아직도 나는 누가 내 꿈에 텍사스를 놓고 가는 꿈을 꾼다. 붉은 비닐 커튼으로 포장한 텍사스를 유기하는 꿈. 버리고 또 버려도 자꾸 돌아오는 유기동물 같은 꿈. 그래서 언제부턴가 내 꿈이 텍사스로 가득한 쓰레기장이 된 건가.

 

돌아보면 내 밑에 텍사스, 내 밑이 다 텍사스다. 텍사스 정육점의 창백한 고기처럼, 창백한 여자들이 놓여 있는 창백한 여름의 텍사스. 텍사스에서 시간은 부채를 부치며 파리를 쫓고, 상한 여름이 나의 꿈을 알처럼 낳고 있다.

 

그 어떤 지도에도 없는 방석집과 방석집, 다시 방석집과 방석집을 통과하면 나의 잃어버린 방석 같은 텍사스 한복판, 불 탄 구멍 같은 갤러리가 하나 있었는데. 네가 믿기 어렵겠지만 갤러리 이름도 텍사스였는데. 텍사스의 텍사스에 대체 누가 작품 같은 걸 놓는다고 했나.

 

대공분실처럼 폐쇄된 작은 방과 화장실, 다시 방, 화장실, 방, 화장실. 언젠가 불타서 숯이 된 방. 누군가의 엉킨 기억 같은, 비통함의 고치 같은 방. 한때 누구나의 방이었던 방, 화장실이었던 화장실. 방이었던 방, 화장실이었던 화장실. 빛을 빨아들이는 흑점처럼, 밑이 빠져버린 어둠의 수챗구멍처럼, 우는 여자의 구멍을 까뒤집으면 나오는 우물처럼 텍사스는 있었나.

 

불 탄 계단과 불 탄 복도를 통과하면 옥상에는 평상이 하나 있고, 내 친구라고 하는 귀신이 이불 바느질을 하며 거기 놓여 있었는데.2 검은 하늘엔 흰 달이 야구장 조명처럼 환하고, 너도 와서 함께 기억을 수놓자고 귀신이 내게 손짓했는데. 그런 걸 작가라고 하나? 그리하여 우리는 한국의 저녁 밑에 저녁의 작품처럼 놓여 있었고, 오늘도 소란한 그 저녁의 밑에서 귀를 기울이는 중인데, 저녁은 이 사실을 알려나.

 

 

-

  1. 김근태 『남영동』, 중원문화 1988.
  2. 허나영 ‘이름 없는 퍼포먼스’, 「더 텍사스 프로젝트: 황홀경」,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