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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시인선
주 민 현 朱民賢
1989년서울출생.2017년한국경제신문신춘문예로등단.시집『킬트,그리고퀼트』 『멀리가는느낌이좋아』등이있음.
1003jmh@naver.com
붓과 날
잠든 아이를 안고 달렸지
바람은 차고 내 몸은 드라이아이스 같았어
이럴 때 나는 하나야? 둘이야
무한히 쪼개어지는 돌이야
쇠로 된 자루를 조심해 거기엔 빛이
녹아 있거든
녹이 있거든
힘은 안에서 발견하는 것
나는 단숨에 내리치고 동시에 쪼개어지고
휴일 공터 머리 위를 나는 연
평화로운 웃음이 울려퍼지고
이럴 땐 영원이 영원할 것만 같다
조용히 몸집을 불려나가는 육식 곰팡이가
균사체에 독을 뿌리고 있다 잡아먹을 준비를 하고 있다
포자가 조용히 번져가고 있다
점점 높아지는 노랫소리
울려퍼지는 나팔 소리 펼쳐지는 치맛자락
자락자락 파도 소리 장면의 전환
영화적으로 펼쳐지는 마음 안쪽의 소리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고 있으므로 자유로운 여자
스스로를 잡아먹는 여자
여자 아닌 여자가 되어
먹고 먹히며 몸집을 키우면서
완전히 다른 장면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과 그럴 수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나아간다 자꾸자꾸 다음 국면 다음 장면으로
조심해 그 붓과 날엔 독이
녹아 있거든
녹이 있거든
깊은 밤이야, 속을 알 수도 밤의 껍질처럼 까낼 수도 없는
여기 앉지 말라구, 어둠이 내게 말하고
젖은 풀밭에 앉아
갑자기 여행에서 본 장면들을 말하고 싶어졌어
한때 젊었던 부부가 백발이 될 때까지 엉덩이를 부딪히며 수프를 끓이고
누군가 정성껏 가꾼 꽃과 풀이 도시정비에 따라 숭덩숭덩 잘려나가고
항구에서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되고
태어나고 재생되고 죽고 반복되고 사라지고 생겨나고
...
..............
......
세상엔 말할 수 없는 게 너무나 많고
잠시 홀로인 여름
많은 피를 흘려보냈다
사유를 계속하면 죽은 다음에도 피가 차고
죽었으나 죽을 수 없는 몸으로 생각을 계속해 파도타기를 계속해
풀이 자라듯 다음 사유가 다른 사유가 머리에서 머리로 옮겨가며 자라는 거야
머리 한쪽을 열자
거기엔 오래전의 웃음소리가 모여 있어 다소 쓸쓸했고
우리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고
모든 지나간 시절은 지나면 옛날얘기가 돼
거의 귀신 이야기가 돼
거의 귀신? 거의 사람?
그게 무엇이든
그게 무엇이라 해도
거기 속삭이는 것
거기 돌고 돌며 영원히 반복되는 것
우리는 서로를 꽂고 있으며
서로에게 꽂혀 있어
안는다는 건 그런 거잖아
잠든 아이는 조용하고 따뜻해서 내 몸이 무덤 같았어
균은 사방으로 조용히 퍼져나가고
나는 공터에 서서 잠시 조용히 입을 다물었어
이것을 녹차라 부르면1
*
처음 구두를 신던 날
모텔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애처럼 걸었지
까진 뒤꿈치에서 진물이 새어나왔어
은하수는 어떤 모양으로 흐르는 줄 알아?
알지도 못하면서 네 등을 안았지
티셔츠의 홀로그램 문양이
오로라 같다고 생각하면서
구두를 신고 해변까지 걸었을 때
해파리에 물린 사람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어
*
어느 밤 차를 몰고 무작정 떠나
고장 난 자동차 보닛을 열어두고
헤어진 연인에 대하여
그랬던 우리들의 시간에 대하여
*
차의 좋은 점은
우리는 잠시 동안 딴청 피울 수 있다는 점
부동산에서 미용실에서 까페에서
별달리 할 말이 없을 때에도 홀짝거릴 수 있다는 점
우리가 마지막으로 갔던
자동차극장엔 볼품없이 들썩이는 차가 몇대
어두운 공터로
귀신과 사람은 모여들었지
어디선가부터 잘못된 뜨개질은 모두 긴 꿈과 같다고
네가 그랬어 사실 잘못된 거라곤 없을 텐데도
*
창밖에 학교가 있었다 교회가 있었다 까페가 있었다 그중에 몇은 사라졌다
코에 점이 있었다 네 어깨에 작은 사마귀가 있었다
헤어지고 나면 꼭 그런 장면이 생각난다
*
하나의 공간을 구성하는 건 식기류와 웅성이는 말소리 발소리
공간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다 의자와 책상 정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까페를 나간 연인이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 아이가 커서 부모와 절연을 하고 히말라야 등반을 꿈꾸고 돌아오기까지 그보다 더 긴 시간만큼
흐르고 나면
*
이곳에 녹차가 있었다 종류별로 있었다 호지차 어린잎차 말차 세작차
마른 잎을 만지작거리며 떠올리곤 했지 아플 때 좋을 때 기쁠 때
우리 입을 적시거나 스쳐간 것을
혹은 그런 사람을
차를 마시는 동안엔
눈물이나 잡담, 어쩌면 혼잣말을 쏟아내기에도 좋고
특수청소업체가 다녀간 뒤
누군가 감당해야 했던
시간의 더미와 고독을 들으며
나란히 앉아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렸다
어떤 말이 없고 고요한
연한 초록빛의 액체를
시간이 몸을 통과해 흐르고 있다는 실감을
-
- 지금은 사라진 서촌의 베어카페에서 마지막 낭독회가 열렸다. 그때 나는 다른 시를 써 갔지만, 지금은 이 시가 손에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