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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 혜 영 片惠英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아오이가든』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 구애』 『밤이 지나간다』 『소년이로』 『어쩌면 스무 번』, 장편소설 『재와 빨강』 『서쪽 숲에 갔다』 『선의 법칙』 『홀』 『죽은 자로 하여금』 등이 있음.
tebble@daum.net
속담에 의하면
남편은 사형을 찬성하는 사람이었다. 명목상 사형이 존재할 뿐 실질적으로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며 죽어 마땅한 범죄자들의 이름을 언제나 열명 정도는 읊어댈 수 있었다. 사소한 원한으로 지인을 살해하고 사지를 절단해 암매장했다거나 재산을 노려 부모를 죽인 후 범죄를 은닉하고자 집에 불을 지른 사람, 연관관계 없는 여성을 여러명 연쇄살인했다고 밝혀진 사람 등이 그들이었다. 남편이 그들이 죽어야 한다고 여기는 이유는 간단했다. 나쁜 종자이기 때문에. 남편은 한번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절대 바뀔 수 없다고 믿었다. 그에 관해서도 충분히 근거를 댔다. 출소 후 사회로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보다 더 악랄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에 대해서 말이다.
남편이 별스러워서 죽어 마땅한 사람들의 이름을 외고 다닌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한때 경찰이었던 점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재직기간이 길지 않고 현장근무 경험도 적지만 남편은 자신의 신분으로 늘 경찰을 앞세웠다. 남편은 그 직업에 더없이 자부심을 느꼈다. 더는 경찰 일을 못하게 된 후에도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자신을 경찰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한때의 영광이나 호시절을 잊지 못하는 사람은 많고 남편도 그렇다 여길 법하지만, 실은 그 때문에 문제가 생긴 적이 여럿 있었다. 남편은 경찰이라고 나서며 모르는 사람 간의 다툼에 끼어들었다. 친구가 경찰로 소개하며 사업에 끌어들이는 바람에 사칭범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그런 일을 겪은 후에야 남편은 경찰이 과거의 경력일 뿐임을 받아들였다.
재직 중 남편은 내게 어떤 상의도 없이 휴직을 했다. 당분간 쉴 거라는 말에 막연히 그가 비리에 연루되어 징계를 받았으리라 짐작했다. 은연중에 남편이 부정청탁에 휘말리거나 부패하기 쉬우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남편은 자신을 그렇게 여긴 것에 서운해하며 사정을 털어놓았다. 이제 겨우 마흔 남짓인 남편은 흔하지 않은 부위에 암을 진단받았고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어찌어찌 혼자 치료를 받아보려고 했다. 사정을 듣고 나는 안도했는데 나중에 그 마음을 여러번 곱씹게 됐다. 비리를 저지른 게 아니라 치료가 어려운 질병에 걸렸다는데 어째서 안심했는지에 대해서. 나쁜 사람보다 아픈 사람이 낫다고 여긴 걸까.
나는 여상을 나와 스무해 가까이 다니던 백화점을 관둬야 했다. 남편의 병세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입원과 퇴원, 통원을 반복하는 남편을 돌보며 회사를 다니기는 벅찼다. 처음에는 구두 매장의 판매사원으로, 퇴직할 무렵에는 인사팀의 교육 담당으로 근무한 회사였다. 신입 시절 내게 교육을 받은, 나보다 연차가 훨씬 낮은 대졸 남자 사원이 상사로 발령난 직후 사직서를 냈더니 동료들은 그게 퇴직 사유려니 여겼다.
첫 병가를 끝낸 남편은 병세가 더 나빠지지 않은 것을 회복으로 여기며 복직했다. 여러 사람의 배려로 비교적 업무량이 적은 내근직과 민원봉사실, 교통계를 전전하다가 오래지 않아 결국 자신이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건강 문제로 매번 야간근무나 외근을 동료에게 떠넘겨야 했고 그러다 한번은 후배에게 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이 무슨 경찰이냐는 말을 들었다.
유도를 하지 않았다면 남편이 경찰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지역 대표로 출전한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땄다. 선수생활을 통틀어 그가 이룬 가장 높은 성취라 할 만했다. 얼마간 지도자 수업을 받기도 했지만 공부가 영 적성에 맞지 않았던 남편은 고민 끝에 수상실적과 면접으로 임용 가능한 경찰 특채에 도전했다.
남편과는 맞선을 통해 만났다. 유도선수 출신의 신임 공무원이라기에 덩치가 크고 우락부락할 줄 알았는데, 체급에 따라 다른지 키가 작고 마른 사람이었다. 우리 둘 다 말수가 적고 낯을 가려서 처음에는 좀 힘들었다. 하는 일과 가족관계 같은 신상정보에 대해서나 겨우 얘기를 나눴다. 찻집에서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걷는데 남편이 갑자기 경찰생활을 하며 들은 갖가지 흉악범죄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세상에 죽어 마땅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면서. 나는 귀담아 듣지 않으려 애썼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려면 좁은 골목길을 지나야 하는데 아무래도 무서웠다. 내가 겁먹은 줄도 모르고 남편은 무뚝뚝한 말투로 계속 떠들어댔다. 기분이 불쾌해질 무렵, 남편이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말했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자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겼는지 제가 나쁜 놈을 잡아드릴게요, 하고 덧붙였다. 그제야 내게 환심을 사고자 긴 말을 늘어놓았다는 걸 깨달았다.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굳어 있던 표정을 조금 풀었다.
그에게 세상은 나쁜 놈과 곧 나빠질 놈으로 나뉘었다. 누구나 잠정적 범죄를 저지를 가해자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사람을 믿지 않고 의심하고 자주 공격적으로 굴었다. 자식만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 가족의 근본적인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억울해했다. 자신은 젊고 가족력도 없고 담배도 진작 끊고 술도 별로 마시지 않는데 왜 하필 암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누구나 그렇듯 질병에 인과가 있다고 여기며 그간의 삶에서 원인을 찾으려 들었다. 치료에 몰두하는 동안 남편의 삶에서 차츰 친구가 사라졌다. 딱히 그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때 우정을 나누던 이전 유도 동료들과는 이미 관심사가 달라지기도 했을 테니까. 친구들은 투병 중인 남편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 그저 연락을 삼갔는지도 모른다. 필요하다면 남편이 먼저 연락하리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남편에게는 누군가 먼저 다가와 걱정해주는 말이 필요했다. 전에는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으나 아픈 동안 단 한번도 연락해오지 않은 사람들을 그는 결코 잊지 않았다. 어렵게 투병 사실을 털어놓았는데 “곧 나을 거야” 하고 쉽게 말해버리는 사람과는 인연을 끊었다. 자기가 아는 암환자를 들먹이며 흔하디흔한 질병으로 취급하는 사람, 그간의 나쁜 습관 때문에 암에 걸렸다는 듯 말하거나 앓아본 적도 없으면서 암에 대해 잘 아는 듯 뭘 먹으라는 둥 먹지 말라는 둥 충고하는 사람과도 연락을 끊었다. 이해할 만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다가 암으로 죽은 지인 얘기를 늘어놓는 친구도 있었으니까.
남의 고통에 무감한 이들의 분류에 한동안 그와 절친했던 후배도 포함되어 있어서 놀란 기억이 난다. 함께 경찰직을 시작한 후배여서 남편은 누구 못지않게 그를 의지해왔다. 하지만 투병을 하는 동안 그 후배는 다른 사람의 연락처를 물을 겸 단 한번 안부 문자를 보내온 게 전부였다. 당시의 남편은 괜찮냐는 그 말을 혐오했다. 넘어져서 무릎이 까진 사람에게나 쓰는 말이라면서. 남편은 이후 다른 사람을 통해 간혹 후배의 소식을 듣는 정도로만 알고 지냈다. 여럿이 만나는 자리에 데면데면 동석할 때도 있었지만 그를 따로 만나거나 남편이 먼저 안부를 묻는 일은 없었다.
아프기 이전의 남편이 사람을 나쁜 놈과 곧 나빠질 놈으로 나누었다면 이제 그는 자신의 고통을 알아봐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간단히 분류했다. 남의 고통을 인지하려면 물리적인 수고가 필요했다. 아픈 남편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병세가 어떻냐고 묻거나 인사차 집으로 찾아오거나 치료 중 먹을 음식을 보내오거나 혹은 남편을 돌보는 내게 인사를 남기는 방식으로. 그는 마음으로 걱정했다는 말이나 아픈 사람 귀찮을까봐 연락하지 않았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진심을 가장한 흔한 핑계라면서. 그 엄격한 기준에는 친지들도 포함되었다. 투병기간이 길어지면서 남편은 ‘아직도’ 아프냐고 무례하게 묻는 친지들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왔고 더는 만나지 않았다.
아마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많았던 것 같다. 그는 아픈 자신을 위해 남들이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바랐고 동시에 항상 부족함을 느꼈다. 어쩌면 그건 질병을 앓는 사람들의 공통된 모습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의 문제는 자신의 통증에 골몰하느라 다른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걸 고려치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집과 병원을 오가는 동안 남들에게는 여전한 일상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 무상함을 느꼈다. 그런 마음은 점차 박탈감과 자괴감으로 번져갔다. 너무 아픈 나머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는 특권을 누린 것이다. 예컨대 그는 내가 자신을 돌보느라 이십년 넘게 근속한 백화점을 관두고 집에 틀어박혀 ‘진짜’ 일을 할 기회를 영영 잃었다는 것을 간과했다. 특진한 후배 얘기를 듣고는 그가 자신의 공을 가로챈 듯 화를 냈다. 아들이 열두살이 다 되도록 침대에 오줌 누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고 어쩌다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여겼다. 한번은 아들이 그걸 숨기려고 침대에 불을 질렀는데 다행히 집에 있던 남편이 일찍 발견해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아들은 그 일의 여파로 벽과 천장에 시커멓게 불탄 얼룩이 남은 방에서 지내야 했다. 남편은 그대로 두는 편이 교훈이 될 거라고 따끔하게 말했다. 남편 생각대로 아들은 그 일에서 무엇인가를 배운 듯했지만 남편의 바람과 다른 것을 배운 게 틀림없었다.
아무려나 시간은 흘렀고 인생은 공평함을 잃지 않겠다는 듯 호의를 건넸다. 남편의 암이 추적관찰의 시기에 접어든 것이다. 의사로부터 이대로라면 서서히 다시 일을 시작해도 좋다는 말도 들었다. 원하면 언제라도 일자리를 찾는 게 가능하다는 투였다. 남편은 다시 일상을 회복하게 될 것을 기뻐했지만, 의사의 낙관적인 진단 이후에도 병원을 전보다 덜 간다는 점 외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일자리가 생기지도 않았고 병을 앓는 동안 신체 상태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생긴 습관이며 가족에 대한 태도도 달라지지 않았다. 부쩍 자라는 아이를 대견해하기보다 아이가 성년이 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소원해진 동료들에게 느낀 서운함, 질병 때문에 사회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오히려 이전보다 짙어진 듯했다. 나라고 다르지 않았다. 남편 간병 때문에 늘 뒷전이던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여전했고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면서 관심사가 달라진 친구들과도 만나지 않게 됐다.
우리는 가진 것을 축내며 고립된 채 십여년을 보냈다. 의사로부터 이제는 일년 뒤 정기검진 때 보자는 말을 들으니 기쁘기보다는 어쩐지 허탈해졌다. 처음 마련한 아파트를 떠나 이웃동네의 연립주택으로 이사를 결정한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이삿날 남편은 그나마 까먹을 게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씁쓸하게 말했고 나 역시 그렇게 느꼈지만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검은 얼룩이 여전한 아이 방을 떠난다는 것만이 후련했다.
남편이 아플 때는 사소한 문제 속에서도 비교적 가까이 지냈던 우리는 남편이 회복되는 기미를 보이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통 공부에 관심없던 아이는 집과 거리가 먼 대학에 진학하며 자취를 시작했고 나는 여러 형태의 파트타임을 전전하다 도시가스 회사에 계약직으로 취업했다. 한달 사용량을 검침하고 요금 고지서를 송달하는 일을 했다. 시간이 걸렸지만 남편도 직장을 구했다. 한 아파트의 경비로 취업한 것이다. 이미 아파트 경비직은 노인이나 은퇴자가 아니라 용역업체에서 파견한 영민한 젊은이들로 꾸려지고 있었지만, 남편이 한창 아프던 시절 연을 끊었던 후배가 뜻밖에 일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승진이 누락되자 경찰을 그만두고 경비업체를 차렸다. 요령있게 입지를 굳혀 여러 아파트와 회사에 파견사원을 보낼 정도로 사업체를 키웠다.
남편의 근무지는 반포의 신축 아파트단지였다. 외부인 출입을 통제해서 단지가 깨끗하다고 했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다른 동네 아이들을 주민 항의로 쫓아낸 적도 있다고. 아파트 곳곳에 출입금지 안내문을 붙여도 간혹 외부인들이 쥐새끼처럼 몰래 들어와 단지를 가로질러 통행한다고 불평했지만 여느 때보다 활기차 보였다.
한번은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아들과 함께 남편의 일터에 들렀다. 교대자에게 문제가 생기면서 아들의 부대 복귀 시간이 다 되도록 남편이 집에 오지 못해서였다. 마침 아들도 고속버스를 타러 가야 해서 갈아입을 속옷을 가져다줄 겸 남편이 근무하는 곳에 같이 가보기로 했다. 정문 경비실에서 정복 차림의 보안업체 직원에게 남편의 이름을 댔더니 재활용 쓰레기를 분류하고 있을 거라며 위치를 알려주었다. 나는 남편을 놀라게 할 요량으로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고 다가가야지 생각했다. 그런 장난을 떠올린 스스로에게 조금 우쭐해하면서. 오랫동안 남편을 간병하느라 잃은 게 많았지만 가족에 대한 연민과 유머를 구사할 여유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커다란 마대에서 골판지 상자를 꺼내 납작하게 펼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느 재활용 분류함이나 다 그렇듯 종이만 들어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종이를 꺼내다가 비닐을 버리러 가고 심지어 컵라면 용기를 꺼내 종량제봉투에 담기도 했다. 대개는 각진 골판지 상자를 꺼내서 발로 힘껏 짓밟아댔다. 손으로 테이프를 뜯어 펼치는 게 더 쉬울 듯한데 남편은 우악스럽고 사나운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아들이 놀란 것은 아닐까 싶어 눈치를 살폈으나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즈음 그애의 표정은 대체로 그랬다. 간혹 짐작할 수 없는 이유로 불쑥 눈빛이 사나워졌지만 항상 지나치게 무심했다.
몰래 다가가 남편을 깜짝 놀라게 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내 발걸음 소리에 남편이 먼저 우리를 돌아본 것이다. 남편을 놀라게 하는 데 실패한 이유는 그가 우리를 알아차리기 바라며 내가 발소리를 크게 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입을 다물 테니까. 남편은 부릅뜬 눈으로 상자를 밟으며 분리배출 방법을 따르지 않은 주민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나는 괜찮았다. 남편의 욕은 자주 들었다. 남편은 오래 아팠다. 진통제로도 완화되지 않는 통증을 겪을 때면 그의 몸에서 열과 함께 욕이 튀어나왔다. 그런 상황에서 모두가 욕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살면서 크거나 작은 행운을 적지 않게 누려온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그런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아들은 남편의 욕을 듣지 말았으면 했다. 그애가 아픈 아버지에게 연민을 가졌으면 싶었다. 흘깃 살폈으나 아들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남편은 이내 민망해하며 신발 바닥무늬가 찍힌, 형체가 뭉그러진 종이상자로부터 우리를 분리하려는 듯 단지 내 유아놀이터로 데려갔다. 덩치 큰 군복 차림의 아들이 색색의 아이용 벤치에 앉고 남편과 나는 시소에 자리잡았다. 우리가 오르락내리락 시소를 타니 아들이 실없다는 듯 웃어주었다. 그애가 웃는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작은 의자에 커다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우리를 쳐다보는 모습이 참 다정해 보인다 싶었다. 아들에게 그런 마음이 든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부모로서 그애의 본성과 기질, 태생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애는 내가 먹이고 입히고 재운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그애는 종종 우리의 믿음 밖에 존재했다.
회사에서 하는 일은 크게 두가지였다. 한달간의 도시가스 사용량을 검침하고 그를 근거로 산정된 고지서를 각 가구에 배달하는 것. 처음에는 무척 고생했다. 집마다 계량기 위치가 달라서였다. 계량기를 찾다가 수상한 사람이라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 남의 집을 살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좁은 벽 사이로 들어가 장독이나 화분을 옮겨 계량기를 확인하거나 터무니없이 높이 매달린 계량기 때문에 담을 딛고 올라설 때도 있었다. 그러다 여러번 신고를 당해 경찰에게 해명해야 했다.
힘들기는 해도 집과 병원만 오갈 때보다 기분은 괜찮았다. 하루 종일 뛰어다니느라 저절로 체력단련이 된다고 좋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방광이 문제가 됐다. 원하는 때 오줌을 눌 수 없어 늘 배뇨를 참다보니 사타구니가 따끔하고 뻐근해졌다.
무엇보다 매번 ‘누가’ ‘어떤’ 상태로 문을 열어줄지 모르는 게 당혹스러웠다.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났다. 어떤 할머니는 담벼락에 올라 계량기를 들여다보는 나를 줄곧 노려보며 서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속옷만 입고 서서 집 안에 들어와서 확인하라며 잡아끄는 남자도 여럿 있었다. 처음에는 매번 치를 떨었다. 남편이 하듯 저절로 욕이 나왔다. 어쩌다 그들이 남을 의심하며 계속 노려보거나 대낮에 집구석에서 속옷 차림으로 가스계량기를 검침하는 나이든 여자나 희롱하는 남자가 되었을지 생각하다가 계속 그런 꼴로 살아가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런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올 때도 있었다. 세상에 죽여야 할 범죄자가 있다는 남편의 생각에 언제나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간혹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당하지 않은 건 알지만 나 역시 그런 일을 너그러이 넘길 수 있는 행운을 그다지 누리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한편으로는 무척 평화로웠다. 남편이나 나나 뒤늦게 시작한 일을 열심히 했고 아들도 해야 할 일을 차근히 해나가는 듯 보였다. 아들은 학교도 전공도 싫어했지만 일단 졸업은 하라는 우리의 권유에 제대 후 학교로 돌아갔다. 남편과 나는 짧은 안정에 취해 뜻을 다 이룬 노년처럼 앞으로는 건강이나 돌보며 소박하게 살자는 다짐을 나눴다. 그런 말을 하면 빠듯한 살림이나 자잘한 불화가 용인된다는 듯이.
그래서일까. 우리는 너무 늦게 알게 됐다. 자정이 지난 시각, 경찰서에서 아들의 소재를 알리는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에는 아들이 폭행을 당했으리라 생각했다. 이유 없이 그런 일을 당하기도 하니까. 나는 화들짝 놀라 경찰에게 아들은 괜찮냐고 물었다. 경찰은 괜찮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무엇인가 더 물어야 한다 싶었는데 어떤 두려움이 입을 막았다. 남편이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전화를 건네받았다. 그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전화를 끊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 울리는 소리가 났다. 택배나 지인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문을 안 열어줄 것도 아닌데 그들은 경찰이라고 크게 신분을 밝혔다. 그러고는 닫힌 현관문에 대고 수색영장 집행을 고지했다. 남편이 이웃을 의식해 바로 문을 열었지만 조금 늦었다. 이웃집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와서는 무슨 일이냐고 불안해하며 물었다.
집으로 들어선 경찰에게 우리도 똑같은 질문을 했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서인지, 우리까지 의심할 만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실제로 아들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그때까지 우리는 거의 몰랐다. 증거를 찾는다고 했지만 경찰도 찾아야 할 증거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경찰은 그저 방을 죄다 뒤졌다. 자취를 시작한 후 아들은 명절 때나 잠깐 들렀으니 집 안엔 별게 없었지만 아들의 낡은 노트북과 책상 서랍에 있던 중학교 시절의 수첩까지 챙겼다. 베개보를 뜯어보는 경찰도 있었다. 아들이 한 일의 일부가 거기 숨어 있다는 듯 우악스럽게. 나도 한때 그랬던 적이 있었다. 아들을 알려고 아들의 방을, 서랍과 노트 같은 것을 고집스럽게 뒤졌다. 예전엔 흘깃 쳐다보기만 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 수 있었던 아들은 일기를 몰래 훔쳐 읽어야 겨우 속내를 아는 시기를 거쳐, 이제는 훔쳐 읽을 일기도 전혀 없게 되었다. 경찰이 그것을 알 리 없었다.
남편은 한때 경찰이었고 나는 경찰에 신고를 당해본 적 있었다. 경찰이 모조리 나가고 나서 나는 우리 가족이 경찰과 인연은 있지만 경찰에 잡혀간 사람은 처음이라고 억지로 농담했다. 남편의 표정이 하도 심각해서였다. 남편은 웃지 않았다. 나는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므로 언제든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려 했는데, 남편은 애당초 그렇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뭔가 알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황망한 기분 속에서 나는 그날 아침 하기로 되어 있던 일을 했다. 김밥을 쌌다. 회사 단합대회가 있는 날이었고 내가 음식 일부를 맡았다. 일전에 회사에 냉이를 넣은 김밥을 도시락으로 싸 간 적이 있는데, 동료들이 먹어보고는 하도 맛있다고 칭찬을 해줘서 자청한 일이었다. 나는 푸른 냉이를 잔뜩 데치고 눌어붙지 않게 약불에 지단을 노랗게 부치는 일을 착실히 해냈다.
갑자기 단합대회에 불참하거나 가더라도 약속한 김밥을 싸 가지 않는 것은 그간의 내 방식과는 달랐다. 해야 할 일을 하고 하기로 된 일을 그저 하는 것. 그게 내가 아는 삶이었고 나는 어떻게든 삶을 지키고 싶었다. 다르게 행동하면 아들의 사건이 ‘실제’로 벌어진 일이 되리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나중에 사람들이 비난한 것처럼 진실을 숨기려던 게 아니었다. 애당초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가깝다. 당시의 나는 그것 말고 달리 어떤 식으로 삶을 지키느냐고 반문했을 것이다.
준비된 행사는 죄다 시시했으나 빠진 사람이 없어 역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을 나눠 하는 게임에도 참가했다. 단어 이어말하기 게임이었는데 쉬운 말도 잘 생각이 안 나 이기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게임을 할 때는 목이 터져라 팀을 응원했다. 준비된 음식이 제법 많았지만 다들 내가 싸 간 김밥을 먼저 맛있게 먹어주었다. 여러 사람이 레시피를 물었고 그때마다 나는 별거 없다고, 그저 냉이를 끓는 물에 살짝 데쳤다가 얼음을 넣은 찬물에 잠시 담가 질기지 않게 한 다음 꽉 짜서 액젓을 넣어 무치면 끝이라 말해주었다.
남편은 아직 경찰에 남아 있는 오래전 동료를 수소문했다. 그와 별 친분이 없어서 여러 사람을 거친 후에야 통화할 수 있었다. 그는 남편을 기억하지 못하다가 유도 얘기를 꺼내자 어렴풋이 떠오른다고 유보적으로 대답했다. 그사이 진급할 법도 했건만 그러지 않았는지 그 사람 역시 별 권한은 없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그에게 매달렸고, 그가 아는 두어 사람을 거쳐 아들을 조사하고 있는 담당자와 연락이 닿았다. 담당자는 퉁명스러웠다. 그럴 만해서 잡아두는 것 아니겠냐는 말로 우리를 겁에 질리게 했다.
그후 어떻게인지 모르게 시간이 흘렀다. 남편은 어렵게 구한 경비 자리도 관두고 아들 일에 매달렸다. 남편은 경찰 시절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았다고 했다. 술김에 주먹을 휘두르거나 장난으로 친구를 밀쳐 죽게 한 사람들을. 그들 모두 원치 않게 그런 일을 벌였다. 아들도 그럴 것이고 만약 아니더라도 사정이 있었으리라고 했다. 무슨 사정? 하고 물었더니 남편도 입을 다물었다. 그도 아는 바가 없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는 뜻이지 아들을 믿는다는 의미는 아닌 듯했다.
아들이 그 사람들처럼 주먹이나 휘둘렀다면 좋았을 텐데, 칼을 썼다. 대부분의 뉴스에서 아들이 사전에 칼을 준비했다고 보도했다. 술을 마신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조차 주취감형을 고려한 의도적 행위라고 말하는 기사도 있었다. 아들이 피해자를 뒤쫓아가 다시 여러차례 흉기를 사용했다는 세세한 내용이 뉴스에 전부 보도된 이후 기사 댓글에 죽은 사람에 대한 추모와 아들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아들을 반사회적 싸이코패스라고 몰아붙였다. 그것에 대해 남편과 나는 몇시간이고 변명할 수 있었다. 그저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우리는 아들이 사소하지만 정의롭게 행동하며 자라온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든 할머니를 자진해서 돕고 구세군에 기부하고 거짓말로 책임을 모면하지 않으려 한 일들을. 그 일화들은 이 사건과 관련해 의미있게 해석되어야 했다.
회사에 갔더니 사람들이 사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그애의 엄마인 줄 모르고 꺼낸 얘기였다. 연예인의 마약 소문이나 탈세 혐의를 떠들듯 가볍게. 얘기 끝에 누군가 요새 세상 무섭지, 하고 말하기에 참지 않고 한마디 얹었다. 언제는 안 무서웠나. 사람들은 내가 갑자기 화난 투로 말하니 당황한 듯 영문도 모르고 맞아, 늘 무서웠지, 하고 대꾸했다. 내가 한창 젊었을 때는 인신매매로 떠들썩했다. 으슥한 골목길에서 봉고차로 끌려들어간 여자들 얘기가 떠돌고 일단 봉고차에 끌려가면 무조건 섬으로 가게 된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이십대였던 나는 밤늦은 귀갓길이 늘 두려웠다. 골목에서 낯선 남자가 불쑥 튀어나오기만 해도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랄 때를 다 잊어버린다. 쉽게 잊는다. 요즘 세상만 유별나다는 듯 군다.
남편은 일자리를 알아봐준 후배를 통해 변호사도 구했다. 후배는 혀를 끌끌 차며 술김에 싸우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걸 이 난리냐며 남편을 위로해줬다. 남편은 자신이 한창 암으로 고통받으며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 그가 자신을 완전히 외면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후배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다. 이제 남편의 분류에는 아들 편을 들어주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이 존재했다. 변호사는 어떤 감정적 판단도 하지 않고 이건 형량이 문제라고 단정지었다. 감형 여부가 중요하다고. 주취에 의한 충동범죄임을 주장하리라 했고 남편과 상의해 아들의 심신미약을 입증할 사례를 찾겠다고 했다.
재판을 준비하며 남편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탄원서도 받고 변호사를 도와 필요한 사례도 찾고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분노하는 피해자 가족에게 얻어맞기도 했다. 우리는 시세보다 싸게 집을 내놨다. 남편은 이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경험상 사람들은 잘 잊지 않는다고. 이웃이 지금 우리에게 그러는 것처럼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힐끔거리고 쳐다보며 수군대고 피할 거라고. 그러니까 남편은 얼마 후 아들이 돌아오리라 확신한 것이다.
그사이 나는 아들의 자취방을 치우러 다녀와야 했다. 집주인에게 화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와서였다. 아들의 방은 누가 봐도 모르는 이의 침입을 받은 상태였다. 현관 자물쇠가 뜯겨 있고 바닥에는 신발 자국이 가득했다. 경찰이 살펴본 흔적일 것이다. 일회용 배달음식 용기와 빈 과자봉지, 술병과 휴지 같은 것들도 잔뜩 버려져 있었는데, 그건 경찰의 짓일 리 없었다.
나는 너저분한 방을 둘러보다가 어쩐 일인지 냉장고부터 열어봤다. 내가 해서 보내준 김치와 반찬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순간 이 음식들을 아들이 먹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가 끔찍해졌다. 내가 아들을 두려워한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한편으로는 아들이 구치소에 있으니 적어도 더는 무슨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안도감을 느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들에게 미안했다.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내심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여긴 것 같아서.
나는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을 치우고 냉장고의 음식을 방에 가득한 쓰레기와 함께 봉투에 넣어 버렸다. 이런 끔찍한 광경은 처음이 아니었다. 검침 일을 하던 초기, 이보다 더러운 집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 거실 가득 빈 택배상자와 플라스틱 물통 같은 쓰레기, 치우지 않은 살림이 다 늘어져 있는 집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저장강박에 시달리거나 쓰레기를 방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아마도 그들 중 하나일 집주인은 삼십대 초반의 여자였다. 여자는 곧 외출할 예정인지 말끔한 베이지색 원피스에 푸른 스카프를 두르고 서 있었다. 내가 쓰레기더미를 피해 조심스럽게 계량기 있는 곳으로 가는 동안 바쁘다는 듯 시계를 쳐다보기도 했다. 집 안이 더러운 사정에 대해 일절 변명을 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히 굴어서 조금 긴장이 되었다.
빨리 그 집에서 나가고 싶었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검침기를 확인하자니 부엌 베란다에 쌓인 쓰레기와 상자를 전부 들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뭔가 들어 있거나 비어 있는 상자를 옮기는 동안 여자는 하나도 돕지 않았다. 자신이 만든 질서가 흐트러질까 의심하듯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검침을 끝내고 나오다 거실 정면에 커다랗게 걸린 그림에 눈길이 닿았다. 집 안 꼴만큼이나 정신없는 그림이어서 저절로 그리되었다. 화폭 가득 온갖 사람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한마디로 기괴했다. 그간 모르는 사람의 집에 드나들다보니 뜻하지 않게 벽에 걸린 여러 종류의 그림이나 사진을 보게 됐는데 대개는 가족사진이었다. 그림이라고 해도 산수나 꽃, 해석하기 나름인 색이 고운 추상화가 보통이었다. 이처럼 복잡하고 기괴한 그림은 처음이었다. 당황한 표정이 드러났는지 여자는 자랑하듯 유명한 그림인데 보는 눈이 있다고 칭찬했다. 나는 알아본 건 아니지만 그렇지요? 하고 맞장구쳤다. 여자와 알고 지낼 필요가 있어서였다. 이 구역을 담당한 후로 여자가 검침을 위해 문을 열어준 날은 그날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몇번을 방문해도 집주인을 만날 수 없어 애를 먹던 참이었다. 월초에 계량기 숫자라도 적어달라고 아무리 현관문에 쪽지를 남겨두어도 여자는 그간 모든 고지를 무시해왔다. 이참에 여자에게 전화번호라도 받아 가면 다음달부터 조금 수월해질 터였다.
여자에게 그런 사정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림에 시선을 두었다. 정신없는 집 안을 둘러볼 수는 없어서였다. 그림 속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비열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벽에 머리를 박은 사람, 길에서 배변을 하는 사람, 칼로 물을 자르려는 사람, 두 의자 사이에 엉거주춤 앉아 있는 사람도 보였다. 여자는 가르쳐달라는 전화번호는 알려주지 않고 내가 관심이 있다 여겼는지 그림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늘어놓았다. 하도 자부심 섞인 말투여서 중간에 끊지도 못했다. 무슨 나라 속담을 죄다 그려놓았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정신없고 속되어 보일 뿐이었다. 결국 연락처를 받지 못하고 집을 나서야 했다. 문을 닫으며 슬쩍 돌아보니 여자는 핸드백까지 메고 거실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 쓰레기더미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아들 방에 서 있자니 그 기이한 그림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여전히 그림의 제목과 의미를 모르는 것처럼 이 거대한 쓰레기더미 속에서 우리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려줄 단서 같은 것은 없었다. 어찌 보면 사방이 단서였다. 아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이런 쓰레기뿐이라는 게 가장 중요한 단서였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아들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린 시절 학대받거나 방치되지 않았다. 남편은 때로 거칠고 과감했지만 나쁜 짓에 대해서만 벌했다. 적어도 감정과 기분에 따라 판단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그의 훈육에는 원칙과 일관성이 있어 보였다. 화가 나면 갑자기 소리를 지른 적도 있지만 그가 성장기 대부분 유도로 시간을 보낸 걸 생각하면 아주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자라면서 남편은 언제나 비교를 당해왔다. 순위를 매기는 세계가 당연하고 누군가를 바닥에 내리꽂거나 깔아뭉갤 때에나 잘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나는 줄곧 이런 생각에 시달리고, 그러다보면 언젠가 아이가 잠시 방을 비운 틈에 컴퓨터 화면을 통해 게임 채팅창을 들여다본 일이 떠올랐다. 그때 이미 아이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더는 분별없는 청소년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나는 남편이 경비 일을 하며 끊임없이 욕설을 내뱉어대는 걸 봤을 때처럼 충격을 받았다. 채팅창에 쓰인 말 중 내가 정확히 기억하거나 옮길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었다. 아이가 나에게 쓰는 언어와 또래끼리 사용하는 말, 게임하며 쓰는 말이 다르리라 짐작했지만 그중 무엇이 아이의 실체와 닿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려나 나는 아들을 사랑했고 그애가 무슨 말을 하든 그럴 터였으므로 가상의 세계에서 누군가를 죽이고 죽여야만 하는 마음을 이해하려 해봤다. 그 마음은 처음 아이를 낳았을 때의 두려움을 상기시켰다. 뼈와 살이 무른 작은 아이가 상할까봐 이불을 아무리 두껍게 깔아놓아도 쉽게 바닥에 내려놓지 못해 절절매던 두려움 말이다. 나의 두려움이 결국 아이를 망쳤다는 성급하고 정당하지 못한 결론에 다다르면, 나는 누구에게라도 아들에 대해 털어놓고 싶어졌다. 모르는 게 많을 게 분명해도 다 아는 듯 얘기하고 싶어졌다. 마치 그 여자처럼. 더러운 집 한복판에 서서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을 기괴한 그림에 대해 자기가 안다 여기는 것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여자, 어디론가 가야 한다고 여기며 잘 차려입고는 너저분한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는 여자처럼.
재판을 준비하면서 남편은 아들의 주취 상태와 심신미약 상태에 확신을 가지게 됐다. 아들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심리상담을 받았던 경험은 심신미약을 입증할 근거가 됐다. 남편은 마치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는 듯 차분히 대처했다. 내가 아들에게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비해 남편은 분명한 진실로 받아들였다. 스스로 기준을 세워온 훈육을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학대로 인정하며 구치소의 아들에게 사과도 했다. 다 내 잘못이야. 남편은 아들에게 이 말을 여러번 했다. 내게도 자주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남편이 원하는 말을 돌려주지 않았다.
남편은 한때 암에 매달린 것처럼 이제는 아들을 구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식이와 치료에 집중해 암을 다스렸듯 아들의 일도 그렇게 되리라 여기면서. 그는 죽여야 할 만큼 나쁜 놈이 있다거나 당장이라도 사형 집행을 재개해야 한다는 말을 더는 하지 않게 되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어떻게 결정할 수가 있겠는가. 반대로 누군가를 살리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내가 그랬다. 지난번 검침에서 한달간 사용량이 전혀 없는 가구를 신고했다. 그런 일을 하는 게 우리들의 역할이기도 했다. 경찰이 집주인과 연락해 그 집에 들어갔고 시신을 발견했다. 내가 살린 건 한달간 가스를 사용하지 않은 그 집에 살던 사람이 아니라 집주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누구라도 살리면 되지. 누구라도 살아야 반성도 하고 원망도 하고 후회도 하는 법이니까.
그런 생각도 오늘까지만 일하라는 말을 들으면 더는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다음부터 생계를 우선에 두어야 하므로 합당한 행동과 논리를 포기하게 된다. 나는 해고를 통보하는 팀장에게 무엇 때문이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 아들 얘기가 나올 것 같아서였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동료들은 결국 알게 됐다. 어떻게 아는 건지 모르지만 다들 내가 나타나면 말수가 줄고 서로 눈짓을 나눴다. 언젠가 알게 되리라 생각하긴 했다. 자다 깨서 나온 이웃 남자가 다 보았고 회사 동료 중에는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오면 동료들이 내게 연민을 가져주기를 바랐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가 생각하는 모습과 달라지기도 한다는 걸 알 만큼 자식들을 키워본 사람들이니까. 아이를 키우는 동안 이따금 기쁨을 느끼고 이따금 슬픔을 느꼈다는 점에서 다른 많은 부모와 우리가 그리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동료들은 나를 탓하는 쪽을 택했다. 아무래도 그게 가장 쉬웠을 것이다. 잠자코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팀장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했다. 어떻게 그러고도 김밥을 싸 올 수 있느냐고. 그걸 먹은 사람들 기분이 어떻겠느냐고. 고객들도 마찬가지로 찝찝할 거라고. 다들 맛있게 먹어놓고 이제 와서 그러는 게 서운했다. 찝찝하다니. 내가 김밥에 넣은 건 고작 냉이와 계란 같은 것인데. 무엇보다 계량기를 들여다보는 동안 내가 들고 있는 거라고는 사용량을 기록할 작은 패드뿐이다.
나는 대답 대신 이 일을 하는 동안 방광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털어놓았다. 지금도 치골 위의 작열감과 압박감이 상당하다고. 어떤 때는 불타는 기분이 들면서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진다고. 바로 지금도 그렇다고. 팀장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아들에게 수치심을 느끼는 것보다 그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회사명이 인쇄된 조끼를 벗어두고 출근할 때 가져온 스카프를 천천히 목에 둘렀다. 아무도 내게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