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2026 여름] 통권 212호
작가 인터뷰

 

삼천번의 고백

 

 

조대한 趙大韓

문학평론가. 평론집 『세계의 되풀이』 등이 있음.

blackdooly16@naver.com

 

 

 

감정 번역 능력 테스트

 

시와 더 가깝게 여겨지는 문장을 고르세요.

(A와 B를 각각 몇개 골랐는지 확인하면서 테스트에 임하세요.)

 

A. 햇살에 타 죽은 지렁이

B. 눅눅해진 상처에서 단내가 난다

 

A. 캉캉스커트를 처음 입은 날

B. 뾰족한 풍선

 

(…)

 

A. 샤워젤과 소다수

B.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이 테스트를 직접 해보았다. 고선경의 세번째 시집 『러브 온 더 락』(창비 2026)에 실린 「예쁜 단어만 나열해놓고 왜 사랑이라고 우기지?」는 이런 문항들로 이루어진 심리테스트 형식의 시다. A와 B 중에 “시와 더 가깝게 여겨지는 문장”을 고르고 점수를 합산하면 결과가 나온다. 340점을 기록한 나에 대한 진단은 이렇다. “도합 300점 이상: 당신은 사랑을 대단히 소중히 여깁니다.” 만점을 받은 이에게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준비되어 있다. “도합 500점: 사랑은 결코 점수로 환산될 수 없습니다. 부디 자신의 오만함과 경솔함을 성찰하고 겸허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시와 닮은 문장을 골랐더니 답은 사랑이다. 어떤 점수를 받든 이 시집에서 사랑과 시는 결국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

이 시가 쓰인 경위가 흥미롭다. 어느 독자 리뷰에서 시인은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고 한다. ‘예쁜 단어만 나열해놓고 왜 시라고 우기지?’ 시인은 그 말에 ‘긁혔다’고 했다. 그런 적 없는데,라고 생각하면서 시인은 그 묘한 ‘긁힘’을 그냥 두지 않았다. 해당 문장을 가져와 그 비판을 시집에 통째로 흡수해버렸다. 악플을 시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고선경식 사랑의 방식이 여기서도 작동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집에서 비판과 사랑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누군가 나를 긁어놓으면, 나는 그것을 시로 만든다. 긁힌 자국이 언어가 되고, 언어가 사랑이 되는 과정. 『러브 온 더 락』은 그 과정의 기록이다.

시집을 관통하는 정서를 이해하려면 한가지 고백을 먼저 들어야 한다. “너에게 구체적인 사랑을 돌려주고 싶다”. 시집의 첫 시 「고백」은 바로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기에는 긴 사연이 있다. 두권의 시집을 출간하면서 고선경은 무척이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름이 붙었고, 독자들이 블로그를 찾아와 댓글을 달았고, 모르는 이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것은 무척 달콤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달콤함이 언젠가 다 휘발되고 자신만 홀로 남겨질까봐, 시인은 그보다 더 큰 초조함을 맛보아야만 했다. 아직 맞닥뜨리지도 않은 상실을 미리 상상하면서.

 

ⓒ엄기태

 ⓒ엄기태

 

상실을 상상하는 건 왜 실제로 상실을 맞닥뜨리는 것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질까 생각해봤어요. 저의 상상이나 염려와 상관없이 상실은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잖아요. 사랑에 대한 집착, 의존, 기대가 저를 그토록 절망하게 만드는 순간에도 스스로 일말의 용기를 낼 수 있다면 ‘내가 받은 사랑을 꼭 돌려주고 싶다’는 다짐을 했어요. 이런 다짐이 어쩌면 이번 시집을 묶게 된 계기인 것 같기도 해요.

 

받는 사랑에서 돌려주는 사랑으로의 전환이 고선경의 세번째 시집을 전과 다르게 만든 요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돌려주는 사랑이란 것이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고백」의 화자인 ‘나’는 “캐러멜” 하나를 건네며 “이거 내 전부야”라고 ‘너’에게 속삭인다. 전부를 줘버리고도 수치를 느끼고, 전부를 건네받고도 질투를 느낀다. 생각해보면 이 감정들은 그리 낯설지 않다. 전부를 내어준 자리에는 언제나 자기노출의 민망함이 남는다. 캐러멜 하나가 전부라고 고백하는 순간 “나의 달고 끈적한 취향”이 어떠한 것인지, 나의 전부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모두 고스란히 드러나버리기 때문이다. 한편, 전부를 건네받았을 때의 질투는 더 기묘하다. 상대의 전부를 받았음에도, 그 전부 안에 내가 차지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불안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그러한 복잡함을 시인은 시집 첫 장부터 숨기지 않는다.

시인은 돌려주는 사랑의 어려움을 몸소 겪었다. 이번 시집 출간을 앞두고 시인은 독자 이벤트를 위해 도서 면지 삼천장에 서명을 해달라는 출판사의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엔 서명 문구 몇가지를 정해 번갈아 적다가, 어느새 한문장만을 반복해 적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너에게 구체적인 사랑을, 너에게 구체적인 사랑을, 너에게 구체적인 사랑을 돌려주고 싶다…… 그런데 왜 하필 삼천번일까. 삼천배를 올리듯 마음속의 번뇌를 다스리라는 뜻일까, 아니면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 속 토니 스타크의 딸이 남긴 “3000만큼 사랑해”라는 유명한 사랑고백처럼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숫자였기 때문일까. 삼천의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시인은 그저 어떤 문장을 수없이 반복해 쓰다보면 그것이 손끝에서 한없이 미끄러지기만 할 뿐 더이상 아무런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급기야 사랑에 관한 모든 문장은 오히려 정확히 그 사랑만이 부재하는 껍데기처럼 느껴진다는 것도.

서명작업 중간의 쉬는 시간에 시인은 편집자를 붙잡고 물었다. 사랑이 뭘까요, 선생님?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좀 지겹고 무의미하게 느껴져도 계속 반복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오늘 하신 것처럼요.” 지친 시인에게 건네진 그 말은 우연하게도 이 시집 전체의 비밀을 가장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고선경에게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다. 감정은 휘발되지만 태도는 지속된다. 삼천장을 다 채우지 못하더라도, 아니 그 미완성이야말로 계속해서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사랑이 태도라면, 그것은 설레는 마음으로 펜을 드는 일보다는 써내려가는 문장이 텅 빈 껍데기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손을 멈추지 않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의미가 바닥난 자리에서도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것, 손끝의 감각이 마음보다도 앞서는 것. 그것은 결국 완성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의 문제일 테니까 말이다.

지겨운 반복 속에서 시인은 서명본이 누구의 책상 위에 놓이게 될지 상상해봤다고 한다.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고, 한번도 만난 적 없는 누군가일 수도 있는 그 사람이 이 한줄의 고백을 어떤 마음으로 읽어낼까 곰곰이 떠올렸다고 한다. 어쩌면 대부분은 아무런 감흥 없이 심상한 표정으로 페이지를 넘길지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시인은 말한다. 서명작업을 하는 이 좁은 방 안에서도 한줄의 고백을 부지런히 실어나를 수 있다면, 이 사랑이 금세 소진될 감정보다는 끈질긴 몸의 태도에 가깝다면, 사소한 되풀이 끝에 만들어질 한문장에는 격렬한 감정보다 지루하고도 집요한 의지가 담겨 있을 테니까. 삼천번의 토로와 삼천번의 실패가 담긴 그의 고백은 과연 독자들에게 가닿았을까.

 

 

달콤한 것들의 속살

 

『러브 온 더 락』에는 달콤한 것들이 넘쳐난다. 캐러멜, 복숭아 통조림, 마시멜로, 테킬라 선라이즈, 미도리 사워, 크리스피 크림 도넛 등 읽다보면 입안에 조금씩 침이 고이는 감미로운 음식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달콤한 것들의 세부를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설탕에 꼬인 개미들, 과일 속을 파먹은 벌레들처럼 무언가가 잔뜩 드글거리고 있다. 시인에게 “욕망이란” “복숭아 통조림 속 찰랑거리는 설탕물 같은 것”(「러브 온 더 락」)이다. 썩지 않도록 과육을 더욱 달콤하게 농축해 절여두듯, 욕망을 희석하거나 은폐하는 대신 처음보다 더 짙은 농도로 보존해두는 것이 곧 시인의 방식이다. 달큰하고 끈적하고 약간은 과하게 익은 내음, 그러나 자꾸만 손이 가는 중독적인 향기. 시인은 그 달콤함 속에 욕망, 질투, 기억, 사랑 그 모든 것을 절이고 보존해둔다. 때로 압도적인 당도는 방부제보다 더욱 강하게 부패를 막는다. 이 시집의 농축된 사랑이 꼭 그렇다.

「늦여름 동거」에서 ‘나’는 자신을 미워하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제 얼마나 좋은 시를 쓰게 될지 기대를 한가득 품는다. 그러나 죽은 할머니는 애인과 함께 여전히 나의 일상 안에 머문다. 사랑하던 것과 증오하던 것이 같은 공간에서 뒤섞이고, 그들에게서는 무르고 짓이겨진 딸기 냄새가 난다. 그 뒤엉킨 사랑의 풍경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빨래를 털어 널 때는 우리가 충분히 함께인 것 같았다/가끔 티셔츠 안쪽에서 이름 모를 곤충이 튀어 올랐고 나는//사랑해!/외치고서 책으로 때려 죽였다.” 사랑한다는 말과 때려 죽이는 행위가 한곳에 포개져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필사적으로/행복”해지려 했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더 불행해지는 그 감각을 고선경의 시는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콤한 사랑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뒤틀린 감정들,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랑의 모순된 양면성이 그의 시의 중핵을 이룬다.

평론가 인아영이 해설(「감정의 교육학」)에서 잘 짚어낸 것처럼, 표제의 ‘온 더 락’(on the rocks)에는 두가지의 함의가 있다. 하나는 얼음 위에 따른 술, 다른 하나는 다 끝나버리기 직전의 위태로운 상태. 다시 말해 고선경의 ‘러브’는 위스키나 칵테일을 부드럽게 감싸는 얼음 위에 놓여 있는 동시에, 순항 중이던 배 앞에 느닷없이 출몰한 암초에 올라타 있는 처지이기도 하다. 언제든 미끄러질 수 있다는 아슬함과 침몰을 예감하고도 멈추지 못하리라는 아득함. 생각해보면 시인의 사랑은 그러한 불안과 위태로움 때문에 오히려 더욱 깊은 달콤함을 지니는 듯도 하다. 그의 사랑은 매혹적이다. 도깨비 매(魅), 미혹할 혹(惑). 그것은 단순한 호감과는 달라서 우리를 어딘가 위험에 빠뜨릴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을 동반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사랑의 진창에 기꺼이 발을 담그는 시인처럼, 그의 시를 읽는 독자들 또한 아슬아슬한 위태로움에도 그곳에 홀리듯 빠져들게 된다. 아니, 정정하자.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시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안과 균열을 예감했기 때문에 시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엄기태

 ⓒ엄기태

 

이전까지는 제가 쓰는 사랑 시가 뭐랄까, 다소 말랑말랑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어요. 독자들에게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고 저는 느꼈어요. 하지만 저는 사랑이 여러 감정이 겹쳐 있는 상태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번 시집에선 사랑이 거느리는 더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들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가령 「잠복」이라는 시에서 사랑을 “바이러스”라고 한 건, 사랑이 얼마나 통제 불가능한 방식으로 확산되는지를 보여주고 싶어서예요. 그러니까 사랑이 때로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번식하기도 한다는 것, 서로를 감염시키기도 하고 일부를 훼손하기도 한다는 것에 대해서요.

 

분명 고선경의 첫 시집과 두번째 시집에서 사랑은 조금 더 발랄하고 통통 튀는 형체를 지녔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사랑은 달콤한 속살 뒤에 숨겨진 서늘한 위화감을 품고 있는 듯하다. 하루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어도 “내가 너의 전부인 것 같지는 않”(「고백」)은 공허함, “너에게 깨진 사탕 조각처럼 자꾸만 눈에 밟히고 싶었던”(「물거품과 면도날」) 애착 같은 기이한 심정들을 과연 사랑이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저는 의도적으로 좀 못된 화자, 위악적인 화자를 많이 등장시키는데 그 위악이 실은 방어기제라고 생각해요. 저 자신을 돌아봐도 그렇고요. 「잠복」에서 화자가 저주에 가까운 말도 하잖아요. “수치심보다 정교한 나의 사랑을” “너는 아주 오래 퍼뜨리게 될 거”라고요. 나의 사랑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너도 똑같이 겪어보라는 뜻으로 들리지만, 그 순간에 화자가 정말 원했던 것은 사랑이 돌아오는 일이었을 것 같아요. 상대를 저주하면서 사랑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모순적이지만, 우리 누구나 느끼는 감정의 일면이라고도 생각해요. 사랑이 바이러스라고 할 때도 우리를 늘 훼손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어떤 면역력이 될 수도, 나의 일부를 회복시켜줄 수도 있는 일이고요. 저는 어쩌면 사랑이라는 매개를 통해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존재들의 마음을 시로 기록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 시집에서 사랑이 거느리는 술어들을 보면 암초에 올라탄 듯 ‘난관에 싸인 사랑’이라는 의미가 거듭 떠오른다. 터지고, 뒤섞이고, 짓이겨지고, 밟아서 깨부수어지는 사랑의 파편들. 「GOTCHA」의 화자는 “부드럽고 끈적이는 마시멜로를 질겅거리”면서 파우치 안에 면도칼과 송곳을 품고 있다. 달콤함과 날카로움은 이 시집에서 언제나 같은 주머니 안에 있다. 아무리 씻어도 하얗게 씻기지 않는 탄내 나는 자신의 기억과, 맨홀처럼 가라앉고 내려앉은 깊은 슬픔 앞에서도 사랑을 그리는 시인의 미감은 언제나 “달콤하고 부드러”(「흰 우유에 빠뜨린 오레오 쿠키를 수저로 건져 먹을 때」)운 종류의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사랑의 양가성, “바닐라”의 달콤함이 “알레르기”가 되는 역설을 의도적으로 쌓아왔다고 말한다. 시집의 마지막에 놓인 시편을 보자.

 

한쪽만 남은 분홍 털장갑 같은

혹은 도넛의 구멍 같은 첫 키스였어

 

그날 이후

나는 네가 던진 공을 받지 않고 바라만 봤는데

참나무 아래 툭 떨어져버린 그 공 말이야

너는 아무렇지 않게 주워 다시 던지고는 했지

 

비 내리는 날이면 어디로 떠내려가야 좋을지

몰랐지만

욕실 청소와 샤워를 같이 했다

새로 개봉한 락스에서는 플로럴 향기가 났어

플로럴 향기 맡으니까

 

네 생각이 나더라고

락스를 물로 헹구는 사이 머릿속에 거품이 끼고

언젠가 나도 너처럼 산뜻해질 수 있을까

―「싱싱한 바닐라 한 송이와 알레르기」 부분

 

이 시에는 캐치볼을 하는 듯한 연인이 등장하고, ‘나’는 부러 ‘너’가 던진 공을 받지 않고 바라만 본다. 너는 그 공을 아무렇지 않게 다시 주워 던진다. 내가 상처받는 것은 빗나간 공이 아닌 “거절당한 공에 절망하지 않는” 너의 모습이다. 내가 느끼기에 우리의 사랑은 “한쪽만 남은 분홍 털장갑”처럼 외로 된 짝짝이의 모양이거나 “혹은 도넛의 구멍 같은” 텅 빈 형상일 뿐이다. 이리저리 어긋나고 엉겨 있는 나는 너처럼 산뜻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 같다. 마음속에는 꼬박꼬박 미안함이 가득했지만 그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아 “내가 견뎌낸 것들”을 “그래서 미워했다”고 나는 고백한다. 이처럼 시인에게 사랑이란, 너를 보며 스스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12월 블루스」)게 만드는 행복한 물듦인 동시에 자신의 참혹하고 보잘것없는 마음을 새삼 자각하게 하는 꺼림칙한 전염이기도 하다.

 

 

사랑이 발명된 그곳에서

 

그럼에도 시인은 어째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것일까? 삼천번의 고백이 손끝에서 미끄러지고, 거절당한 공이 참나무 아래로 떨어지며, 그 모든 것이 스스로를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만드는 일임에도 한없는 되풀이를 시작하는 그의 결기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시집의 마지막 4부에 그 단서가 놓여 있다. 그곳에는 시인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는 “짐작과는 다른 모양”으로 묻혀 있는 녹슨 “타임캡슐”(「바리케이드」)을 꺼내어 펼쳐 보인다. 일생의 일탈이었던 중학교 여름방학의 금발 탈색과 “아이폰을 쓰는 애”랑은 절교할 수 없었던 마음(「모터 소리, 투명한 날개」), “언젠가 너희는 남자 친구 책장에 내 책이 꽂혀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거라고”(「패션」) 읊조리던 치기 어린 목소리까지. 다소 어리숙하지만 그렇기에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선언과 꾹꾹 눌러둔 욕망으로 가득 찬 그 시절의 ‘나’가 거기에 있다.

 

예전 같았으면 앞으로 빼거나 분산시켰을 것 같아요. 이번에 특정한 시기를 밀도있게 묶으면서도 가장 뒤편으로 보낸 데에는, 어쩌면 이제야 제가 그 시기를 떠나보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혹은 떠나보낼 결심이 섰다고 해야 할까요. 이유도 없이 자주 외롭고 서글퍼지던 십대 시절을 부드러운 직물로 감싸서 단단하게 매듭지어주고 싶었어요. 잘 꺼내지 않는 물건을 보관하는 옷장 맨 위칸 같은 공간에 조심스럽게 올려두듯이요. 아주 버리지는 못하더라도 매일같이 손에 쥐고 들여다보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이제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가만히 바라보아도 더이상 서러워지지 않아요.

 

ⓒ엄기태

 ⓒ엄기태

 

시인은 부러 이 이야기들을 맨 뒤에 배치했다. 지금의 나로부터 가장 멀어진 이야기이지만, 그렇다고 가장 소중하지 않은 이야기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4부는 본편이 모두 진행된 뒤에야 공개되는 프리퀄처럼, 시집 전반의 기원과 씨앗을 담담히 밝히고 있다. 시인에 따르면 본인의 사춘기는 열살 즈음 시작되었고, 그 시절의 영향을 꽤 오랫동안 받아왔다고 한다. 세계를 이루는 모든 단위가 실제보다 훨씬 크고 무겁게 느껴지던 시절이었고, 하나하나의 사물과 감정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를 온몸으로 받아내던 날들이었다. 무엇보다 그 시절은 시인이 처음 사랑을 고안했던 시기였다. 「모터 소리, 투명한 날개」 속의 아이는 탈색한 금발을 하고 천변을 걸으며 소설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쓰곤 했다. “너무 많은 슬픔은 자랑거리가 될 거야 나는 소설을 쓰는 중학생이니까 직유보다 은유가 멋지다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

세상이 나를 상처 입히면 그 흔적을 훔쳐 문장으로 바꾸는 오래된 습관은 지금도 여전한 고선경 시의 사랑의 형식일 것이다. 시인은 어느덧 그 시절의 감정과는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했던 시절의 감정과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겁게 나를 짓눌렀던 슬픔과 비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 시간을 다시 쓰려는 고투들이 시집 곳곳에서 눈에 밟힌다. 아직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해서, 혹은 이보다 더 좋은 삶의 유서를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절망하는 모습 또한 읽힌다(「노력」). 몸은 훌쩍 커버렸는데 마음은 여전히 그 시절에 멈춰 있어 현기증을 느끼는 아이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 더이상 이전처럼 투정부릴 수도, 울분을 피할 수도 없는 이들은 이제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 걸까.

어린 시절의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것은 이곳도 망가지게 될 것이라는 애달픈 전복의 희망이었다. 세계가 끝나버리면 지금의 고통과 슬픔도 함께 끝나리라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해 질 무렵”이면 “멸망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숙제처럼 매일 새로 주어지는 슬픔”의 나날 속에서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오리를 닮은 악기를 물가에 띄우면 부리 안쪽에서 귀여운 멜로디가 저절로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며 하루하루를 지내왔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종말을 암시한 세기말의 예언이 모두 거짓이었음이 드러난 너절한 현실 위를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파국이 시시한 농담이 되어버린 시대의, 더이상 “아무도 뛰어내리지 않는 빌딩”(「멸망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에서의 생에 다름 아니다. 파국이 도래하지 않는 황혼 뒤의 황혼을 살아가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하루를 또다른 하루로 이어가는 일뿐이다. 그렇기에 멸망이 종내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린 이들에게 사랑은 찰나에 소진될 사건이 아니라 날마다 지루하도록 계속되는 일상이 된다.

 

시는 우리의 마음을 번역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마음의 이미지를 언어화하는 일. 하지만 번역은 재현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을 수가 없잖아요. 사랑도 그렇듯 모든 번역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왜 시 쓰기를 계속할까 생각을 해보면, 어쨌든 나에게 사랑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독자든 애인이든 그들에게 사랑을 구체적으로 돌려주는 것이 저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구체성을 획득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반복되는 실패에도 또 다음으로 넘어가고, 다시 해보고, 하면 할수록 흐릿해지는 것들도 있지만 잠시나마 선명해지는 것들도 있고. 그런 이상한 운동이랄까요?

 

그럼에도 시인은 다시 공을 던진다. “내가 사랑한다 말하면 너도 그렇다고 답해”(「오키나와 러브!」)라고 외치는 씩씩함과 천연덕스러움이 이 시집에는 남아 있다. 그것은 순진한 낙관이라기보다는 실패를 알면서도 계속 잘못된 번역을 시도하는 이의 집요함에 가깝다. 열살 아이의 혼잣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이제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지만, 사랑이 처음 발명된 그 자리에서부터 지금까지 시인은 줄곧 그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레오파드, 혹은 순정만화

 

시선을 다시 시집 바깥으로 옮겨보자. 『러브 온 더 락』의 표지에는 무척이나 강렬한 핑크빛의 레오파드 패턴이 자리했다. 뒤집어 보면 싱어송라이터 한로로의 애정 어린 추천사가 담겨 있다. 처음에 시인이 원했던 것은 “1990년대의 고전적인 순정만화 미소녀의 얼굴이 빡” 하고 들어간 표지였다. 그러나 동생이 이를 말렸다. 이제 귀여운 척 그만 좀 하면 좋겠다고. 시인은 다른 길을 모색했고 결국 레오파드를 골랐다. “돌고 도는 것이어서 예전에도 유행이었고 지금도 유행인, 그래서 그렇게까지 시대를 탈 것 같지 않다”는 이유였다.

시집의 표지와 관련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듣고 나서 1990년대 순정만화 주인공의 얼굴이 전면에 커다랗게 들어간 고선경의 시집을 잠시 상상해보았다. 의아하게도 그 또한 별 이질감 없이 제법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순정만화와 레오파드는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놓여 있는 듯싶다. 둘 다 시집의 표지로서는 많이 과하고, 그러나 둘 다 한없이 강렬하고, 둘 다 한때 유치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끝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시인이 그리는 사랑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낡았고 진부하고 수천번 반복되었지만, 고선경은 그것을 매번 처음인 듯 다시금 쓴다. 오랜 시간을 통과해온 레오파드 무늬처럼 이미 살아남아온 것들은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어쩌면 오늘밤은 어제와는 조금 다른 사랑의 윤곽을 그려낼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희망으로. 너에게 구체적인 사랑을, 너에게 구체적인 사랑을, 너에게 구체적인 사랑을 돌려주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