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산문

 

내 삶을 돌본 것 ⑥

망각의 자세

 

 

백온유 白溫柔

소설가. 2019년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 시작. 장편소설 『유원』 『페퍼민트』 『경우 없는 세계』, 소설집 『약속의 세대』 등이 있음.

 

 

 

4월에 친구와 명동에 갔다. 맛있게 식사한 뒤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나는 친구에게 명동은 너무 붐비니 종로 쪽으로 가보자고 말했다. 분위기 좋은 장소를 안다고, 우연히 알게 된 까페인데 분명 너도 좋아할 거라고. 평소 같으면 길눈이 밝고 명소를 꿰고 있는 친구의 선택을 군말 없이 따랐겠지만 그날은 친구의 생일이었으므로 내가 근사한 까페로 인도하고 싶었다. 특별한 날을 맞은 친구의 행복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막상 간판도 없는, 아는 사람만 찾아올 듯한 그 까페에 도착했을 때 친구가 황당해하며 말했다.

“여기 나랑 왔던 데잖아.”

“그럴 리가. 작년에 분명 혼자 왔었어.”

하지만 나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내 기억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친구와 이런 일로 입씨름해서 이긴 적이 거의 없었다. 보통은 친구의 말이 옳기에 논쟁에 불이 붙기도 전에 내가 먼저 꼬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혼자 셀카 찍었던 기억이 있는데…… 우리가 같이 왔었다고? 그건 좀 무섭잖아. 나는 괜히 한번 더 우겨보았다.

“비슷한 분위기의 다른 까페랑 네가 착각하는 거 아니고? 일년 전에 근처 지나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란 말이야.”

“삼년 전에 왔었어. 내가 너 데려왔잖아.”

친구는 그날 함께 찍은 사진까지 찾아서 보여주었고 나는 결국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삼년 전에 친구와 같이 왔던 까페를 일년 전에 우연히 혼자 다시 왔고, 그날 처음 방문했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1970년대 다방풍의 가구와 알록달록한 조명이 레트로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말 독특하고 힙한 까페였다. 드라마 촬영을 해도 손색이 없는 그런 공간! 문을 열고 그곳에 들어섰을 때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라 일기에도 써두었는데. 그때 내가 느낀 희열은 뭐지. 어떻게 이런 장소를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지. 나는 머쓱함을 감추려 괜히 까페 곳곳을 두리번거렸다.

“전에 왔을 때랑 인테리어가 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친구는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처음 왔을 때도 엄청 좋아했었어. 넌 여기 올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느끼니까 진짜 좋겠다. 굳이 해외로 여행 갈 필요 있냐? 그냥 휴가도 여기로 와.”

조롱인가?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사실 내겐 이런 일이 꽤 자주 일어난다.

 

*

 

기억력이 좋지 않다. 그로 인한 자괴감은 내게 친밀한 감정이다. 때로는 세상이 나를 속이는 듯해 의아함을 넘어선 섬뜩함을 느끼기도 한다. 건망증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쓰고 있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그래도 아무 노력도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저런 방법을 사용해본다.

가령 새로운 관계가 생기면 명함을 반드시 챙겨두고, 어디서 만난 인연인지 그날 나눴던 대화 내용과 함께 간단히 메모해두는 식이다(정작 가장 중요한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문제지만). 중요한 날을 잊지 않기 위해 휴대폰 달력에 표시를 해두고 알람 설정도 해둔다. 여행을 가면 방문했던 장소를 구글맵에 표시해두고 하루 일과를 대강이라도 써둔다. 친구와 만난 뒤 집에 돌아오면 간단한 키워드를 정리해 일기에 정리해둔다. 말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쓰는 방법이다. 물론 이렇게 유난을 떨어도 사소한 망각과 착각은 반복되기에 시답잖은 실수쯤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편이다. 웃어넘기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날 친구와 헤어진 뒤, 나는 일기장에 ‘어떻게 그런 공간을 망각할 수 있지?’라고 썼다. 쓰고 나서 망각이라는 단어의 한자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망각(忘却)은 잊을 망과 물리칠 각을 쓴다. 이어서 챗지피티에 검색했다. 망각의 한자 뜻을 풀어서 설명해줘. 그러자 이런 답이 나온다. “망각은 단순히 기억이 사라진 상태라기보다 기억이 뒤로 밀려나 사라져버린 상태, 혹은 의식에서 완전히 물러나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그 설명을 보고도 여전히 모호함이 남았다. ‘느낌적 느낌’으로는 망각이라는 단어를 이미 알고 있지만, 나는 조금 더 ‘제대로’ 알고 싶었다.

소설을 쓸 때 한자사전을 보며 쓴다. 챗지피티로 가장 많이 검색하는 것도 한자 관련 내용이다. 단어를 사용할 때 한자 뜻을 정확히 알고 있지 않으면 비슷한 단어를 혼동하거나 맞춤법을 틀리기 일쑤라 민망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검색이 습관화되어 있다. 장편소설 『경우 없는 세계』(창비 2023)를 쓸 때, ‘패륜아’를 ‘폐륜아’로 잘못 쓴 적이 있었다. 패륜아는 거스를 패(悖)와 인륜 륜(倫)을 써서 인륜을 거스르는 아이라는 뜻인데, 나는 무너질 폐(廢)라고 착각해 인륜이 무너진 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단순한 오탈자가 아니라 내가 잘못 이해하고 쓴 단어라 교정지를 봤을 때 얼굴이 화끈거렸다.

챗지피티 다음 순서는 네이버 어학사전이다. 망각의 각은 퇴각(退却)과 똑같은 각 자를 쓴다. 각하(却下)하다의 각 자와도 같다. 즉 각 자는 ‘물리치다’ ‘돌아가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여러 검색엔진을 이용해 도출한 ‘각’의 의미를 정리하면 이러하다.

소전(진나라 때 통일된 ‘표준 글자체’)에서 글자 ‘각’은 지금의 각 ‘却’과 달리 ‘卻’으로 쓰였다. 깊은 골짜기를 그린 골 곡(谷)에 병부 절(卩)을 더한 것인데, 여기서 절 자는 몸을 굽힌 사람의 옆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훈이 병부(군대를 동원하는 표지로 쓰인 나무패)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어떤 명령이나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몸을 굽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이때 각(卻)은 ‘도저히 골짜기를 넘어갈 수 없어 포기하고 돌아간다’라는 의미가 된다. 한편 망각의 각(却)은 본래 이 각(卻) 자를 편하게 쓰는 속자(俗字)였지만, 해서(지금 우리가 쓰는 ‘정자체’의 기준)에서는 더 널리 쓰이게 되었다. 어차피 돌아간다, 물리친다라는 뜻이라면 골짜기보다는 떠난다는 뜻의 갈 거(去)를 붙이는 게 더 직관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글자는 몸을 굽히며 떠나는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이 ‘却’이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이 단단한 방패를 든 모습으로도 보여, 참 재미있는 생김새를 가진 한자라고 생각했다. 문득, 망각 뒤에 숨어서 나를 지킨 경험이 많기에 내게는 각 자가 그렇게 보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망각의 도움을 받았던 날들을 기록해보고 싶다. 그전에 기억력이 언제부터 좋지 않았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이것부터가 난관이다). 원인을 떠올려보려 해도 특별한 계기가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기억력이 좋지 않은 것은 짐작건대 유전이다. 소품가게를 운영할 때 어머니는 어제도 다녀가고 그제도 다녀갔던 단골들의 낯을 익히지 못해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나이 핑계를 댈 수 없는 건,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몇번이나 집에 데려와서 같이 놀았던 친구들, 어머니가 직접 저녁까지 해 먹인 그 친구들을 매번 처음 보는 애들처럼 대했던 것이다. “이름이 뭐야? 너는 학원 다니니? 온유랑 이번에 처음으로 같은 반 된 거야?” (이쯤 되면 어머니의 인지능력을 걱정하는 이가 있을 듯한데 어머니는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할 뿐 돈 계산은 정확했다.)

그에 반해 아버지는 이십년 전 교회에 출석했던 꼬마들의 얼굴과 이름, 사소한 습관이나 가족관계까지 세세하게 기억하는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다. 동생 역시 주변 사람들의 자질구레한 습관과 말버릇, 때로는 민망한 말실수까지 일일이 기억하는 유형인 걸 보니 나는 엄마를, 동생은 아빠를 닮은 듯하다.

 

20대 후반의 나는 첫 장편소설 『유원』(창비 2020)을 출간한 뒤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일거리가 밀려들었는데, 주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이 많았다. 그리고 그때쯤 나보다 세살 어린 동생의 우울증이 시작되었다. 동생은 코로나19가 터지기 직전, 모아둔 돈을 털어 친구와 바(bar)를 오픈했다. 벽지와 바닥, 스피커와 오브제 하나까지 동생이 직접 고를 정도로 공들인 공간이었다. 가게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방역정책으로 인해 문을 열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동생은 투잡을 뛰며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 일년을 채우지 못하고 폐업할 수밖에 없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동업자와 절연하는 상황까지 겹쳐 동생은 심리적으로 완전히 내몰리게 되었다. 같은 건물에 살고 있던 터라 나는 동생의 병증이 깊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체감했다.

동생과 나는 줄곧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았기 때문에(심리적으로도 그렇고 물리적으로도 그랬다) 동생이 아프다고 내가 옆에 붙어 있는 건 서로에게 어색한 일이었다. 그러나 곁을 지켜야만 할 때가 있었다. 일을 모두 끝내고 잠자리에 들 때쯤, 그러니까 주로 새벽녘에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언니, 집으로 좀 와줘. 가보면 동생은 당장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이거나 누군가 필요한 상태였다. 나는 위로가 필요할 때는 위로를, 간병이 필요할 때는 간병을 했다. 그러나 아주 서툴렀기에 동생에게 위로는커녕 상처를 주는 날도 많았다. 동이 틀 무렵 집에 돌아오면 나는 녹초가 됐다.

“너무 긴 하루였다.”

그런 말이 입 밖으로 저절로 터져나왔다. 걱정과 불안에 사로잡히기 직전 나는 잠으로 도피했다. 자고 일어나면 간밤에 있었던 일들은 어느정도 희미해져 있었다. 로봇이 아니기에 당연히 모든 것이 리셋된 건 아니지만 내가 잠들기 전까지 전전긍긍하던 문제는 색종이처럼 반으로 접혀 마음의 구석진 곳으로 밀려나 있었다. 나는 새날을 위해 밥을 챙겨 먹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러나 동생의 투병기간은 내 예상보다 더 길어졌다. (충분히 아프고 적당히 쉬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것이란 확신. 그건 무지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어느새 동생이 겪는 다양한 어려움들은 외면할 수 없는 나의 문제가 되어 있었다. 절망이 육박해올 때, 나는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 몸을 혹사했다. 다른 생각이 틈입할 수 없도록 나를 몰아붙인 뒤 잠으로 굴러떨어지길 반복했다.

그 시기의 나는 내가 떠안은 가장 큰 문제가 소설인 것처럼, 마감을 넘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인 것처럼, 나 자신을 속였다. 일기장에도 감당할 수 있는 문제만 기록했다. ‘전교생 대상으로 하는 특강은 너무 부담스럽다’ ‘청소년들의 질문에 좋은 대답을 돌려주고 싶은데 그게 안 돼서 고민이다’라거나 ‘이번 달까지 소설을 넘기기로 했는데 아마도 어렵겠지’ ‘연재 일정을 맞출 수 있을까. 안 될 것 같은데 걱정이다’ 하는.

일주일에 한두번 동생과의 실랑이(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호소와 절규 사이 그 무엇)로 밤을 새웠지만 그런 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일까. 정말로, 그 시기에 있었던 일들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방어기제가 발현된 탓인지 지금은 그 몇년간 우리가 참 지리멸렬하고 고단한 시간을 보냈다는 감상 정도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다. 고단했다는 표현이 너무 얄팍하다는 걸 알지만, 구체적인 표현을 찾다보면 흐릿한 기억에 해상도를 높일 것 같아 굳이 다른 단어를 붙이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기억을 완벽히 통제하는 것은 인간 능력 밖의 일이기에 불현듯 이런 날이 떠오르기도 한다. 동생 옆에서 밤을 새운 뒤 기차를 타고 강연을 갔던 기억, 기차에서 깊은 잠에 빠지는 바람에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쳤던 기억, 크나큰 민폐를 끼칠까봐 노심초사했던 날, 내가 거대한 민폐 덩어리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순간 같은 것. 무력함. 스스로 한심해서 괴로워했던 날들. 이런 기억이 부지불식간에 솟구치면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마치 물기처럼 털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인 듯 여겨진다. 이쯤 되니 내 뇌는 나의 생존과 평안을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할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요즘 들어 동생은 내게 어린 시절에 느꼈던 억울한 감정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꺼내놓곤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동생은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벌을 받았다. 아버지는 동생에게 벽을 보고 두 팔을 들고 서 있게 했다. 동생이 팔이 저리다고 칭얼대자 아버지는 더 엄하게 소리를 치면서 자신이 올 때까지 팔을 내리지 말라고, 번쩍 들지 않으면 더 큰 벌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고는 집을 비웠다. 비극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깜빡 잊고 말았던 것이다. (기억력도 좋은 양반이 도대체 왜.) 동생은 해가 질 때까지 팔을 들고 있었다. 감시하는 사람도 없으니 슬쩍 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요령 없이 묵묵히 벌을 받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동생을 보고 깜짝 놀라서 “설마 아직도 벌서고 있었어?” 할 때까지. 그날 아버지는 동생의 팔을 주물러주며 적당히 하고 내리지, 하며 미안하고 멋쩍은 마음을 에둘러 표현했다고 한다. 하지만 동생은 그날을 지금껏 곱씹고 있었다. 그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은 듯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나는 그 감정을 겨우 가늠해보며 단어들을 나열했다.

“서글픔과 야속함? 너무 가볍나.”

“비슷한데, 좀더 무거워. 여러 감정이 섞여 있어.”

“수치심을 먼저 느꼈을 것 같고, 그다음 찾아온 감정을 비통함이라고 말하면 적당할까?”

“비통이 정확히 어떤 뜻이지?”

나는 한자를 찾아봤다.

“몹시 슬퍼서 마음이 아픈 거.”

“맞아. 마음이 아팠지. 그리고 또……”

그날, 동생은 울분과 참담이라는 단어를 고르고는 조금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참담은 참혹할 정도의 고통〔慘〕이 어둡게 가라앉은 상태〔澹〕를 말한다.

 

동생의 철저하고 빈틈없는 기억력은 때로 나를 곤혹스럽게도 한다.

“언니 때문에 내가 엄마한테 엄청 혼났던 거, 정말 기억 안 나?”

중학생이던 동생이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귀었을 때, 친구에게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내가 어머니에게 일러서 동생이 종아리를 맞았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럴 리 없다고 부인하다가, 동생이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 있냐고 쏘아붙여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다고 말해버렸다. 기억인지 상상인지 혼란스러운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일렀다’는 표현이 창피하고 겸연쩍어서, 나는 “걱정되니까 말했겠지” 하고 그때의 나를 변호하기도 했다. 그러고선 혼자 생각에 잠겼다. 과거의 내 행동을 이해해보려 한 것이다. 나보다 먼저 남자친구를 사귄 동생에 대한 질투였나? 아니면 진짜 걱정이었을까? 잘 노는 동생을 미리미리 단속하고자 하는 맏이의 통제욕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더듬더듬 내 감정을 유추한 후에 뒤늦게 동생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또 이런 기억도 발굴되었다. 동생과 내가 피아노학원에 다니던 시절, 학원에서는 일년에 한번씩 발표회를 열었다. 발표회는 늘 일요일에 있었는데, 부모님은 교회 예배를 드려야 해서 우리의 발표회를 한번도 보러 오지 않았다. 동생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보니 발표회를 마치고 동생과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던 날이 갑자기 떠올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피아노학원을 그만뒀으니 무려 이십년도 더 된 기억이다. 그런데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당시의 서러움과 원망이 내 마음 어느 곳에선가 비어져나왔다. 동생의 기억을 따라가다보면 이따금 예상치 못한 모양으로 주눅들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어 흠칫 놀란다. 끝까지 모를 수 있었을 텐데. 덮어둘 수 있었던 기억을 굳이 들춰내는 동생을 야속하게 느낀 적도 여러번이다.

대화를 하며, 기억력이 지나치게 좋아 과거의 감정을 끝없이 반추해야만 하는 동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반추는 돌이킬 반(反)에 꼴·짚을 뜻하는 추(芻)를 쓴다. 소가 여물을 되새김질해서 소화하듯, 질기고 억센 기억들을 여러번 곱씹어 소화하는 시도를 동생은 한평생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경험과 그에 대한 감정은 영혼의 피와 살이 되기 마련이다. 그대로 배출되면 좋았을 감정들까지 모두 흡수되어 동생의 영혼을 살찌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걸 기억에 대한 소화율이 좋은 편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흡수율이 높다고 하는 게 좀더 정확할까.

 

*

 

최근에 동생은 일을 시작했다. 자기 생계를 책임지는 일의 슬픔과 기쁨을 감당하고 있는 동생을 보며, 장하다는 마음과 불안한 마음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망각이라는 방패 없이 세상과 맞서는 동생이 안쓰러울 때가 있지만 그 모든 감정을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한 뒤 일상에 안착한 동생이 이전보다 단단해졌음을 느낀다.

불편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어린 날의 내가 쥐고 있던 상처를 확인하는 일이 삶에서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동생을 통해 배웠다. 힘든 시기마다 내가 요긴하게 이용한 망각이라는 도구는 내 영혼을 보호하는 방패인 동시에 나를 왜소하고 빈약하게 만드는 원흉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좋았던 기억이나 슬펐던 기억을 금세 잊어버리고 마는 내가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천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오랜 시간 용서할 수 없는 나를, 미진한 나를 헤집지 않고 적당히 덮어두었다. 그러나 소설을 쓸 때만큼은 나약하고 비겁하고 불안한 나와 마주 보아야 했다. 창작을 하는 순간만큼은 고통과 슬픔을 내 안에서 발굴해야 하니까. 숨기고 싶은 악의마저도 동원해야 하니까. 심연을 경험함으로써 내 삶은 이전보다 더 찬란해질 것을 믿는다. 그럼에도 고단한 날이 오면 나는 또 망각에 기댈 것이다. 망각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신의 은총이라는 말이 있다. 신의 넘치는 배려에 황송해하며, 망각으로 도망칠 것이다. 도망친 그곳에서 다시 나 자신을 사랑할 힘을 비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