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초점 | 이 계절에 주목할 신작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 시라는 기억이라면
황사랑
문학평론가.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비평활동 시작. 주요 평론으로 「경계를 넘는 동시(同時) 감각의 리듬: 김선오론」 등이 있음.
sarang383@naver.com
하나의 문학이 하나의 세계를 반영하듯 시는 시인의 고유한 세계를 구축하려는 열망 속에서 태어난다. 그중에서도 어떤 시들은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잊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만들어진다. 자끄 데리다( Jacques Derrida)가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타자로부터 타자에 대해, 타자 덕분에, 그리고 받아쓰기를 통해, 마음으로 배우고자 하는 어떤 것”1이라고 한 것처럼 잊지 않고 싶은 이를 위해, 잊지 않아야 할 사건을 위해 쓰이는 시들은 필연적으로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이번에 살펴볼 송진권 연정모 유병록의 시에서도 시인이 경험한 기억이 살아 숨 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 시인은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을 각자의 목소리로 기록한다. 이제부터 살펴볼 시들은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기록이기도, 읽는 이로 하여금 기억 속으로 초대하는 안내서이기도 하며, 기억과 함께 살아가려는 힘겨운 노력이기도 하다.
송진권 시집 『그림자놀이 하던 날은 가고』(창비 2026)
송진권의 네번째 시집 『그림자놀이 하던 날은 가고』는 못골과 오박골을 거쳐 옴팡골에 머무른다. 옴팡골은 “울도 담도 없이/뙤똥하니 본채만 하나 있던 집”(「옴팡골」)이 있어 “나랑 같은 성을 쓰는 누군가가”(「모란이, 그날처럼」) 살았던 곳이다.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오래된 산골짜기는 송진권의 시를 통해 푸르고 소박한 풍경을 드러낸다. 산이 깊어 사람이 오래 살 수 없던 곳, 새벽이면 가축들이 사라지는 야생성이 넘실대는 곳. 시인은 옴팡골을 기억하는 노인의 목소리를 통해 그의 혈관에 흐르던 옴팡골의 기억을 깨우며 지금 이곳에 옴팡골을 현현시킨다.
송진권의 자연과 고향에 대한 애정은 옴팡골을 원시적 생명력과 신화적 상상력이 가득한 곳으로 살아나게 한다. 옴팡골은 수평적 관계로 이루어진 장소이다. 그곳에서 물과 불, 나무와 노루 등 자연물들은 자신이 가진 역동성을 마음껏 드러내며 원초적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전작 『원근법 배우는 시간』(창비 2021)에서 물이 태초의 어머니를 상징했다면 옴팡골의 불은 아이와 같은 천진함 속에 대지를 움직이는 강한 생명력을 내포한다. 불은 “복사꽃 만발한 과수원이 되었다가/솟구쳐 불타는 한마리 새가 되었다가/태양 마차를 끌고 가는 불덩어리 말들이 되”기도 하며 대지를 질주한다. 자신의 힘을 광활하게 뻗으면서도 통제되지 못하여 대지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 부지깽이를 든 아이 손에 길들어 “순하고 착하게 한가득/아궁이에 들어앉는”(「옴팡골에 산밑 집에」)다.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며 끝없이 대지를 달리고 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도 산골 아이의 다독임에 언제 그랬냐는 듯 아궁이에 순하게 몸을 트는 불의 모습에서 우리는 원시적 자연과 사람의 화해로운 관계를 엿보게 된다. 특히 어린아이가 불을 다독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옴팡골의 불은 초목을 태우고 파괴하는 광포한 불이 아니라 약하고 어린 사람의 손길에도 순순히 따르며 인간과 공존하는 불이다. 옴팡골의 불을 통해 송진권은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고 이용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문법에서 벗어나 인간을 보듬어주는 자연에 대한 경이와 그를 존중하는 법을 깨닫게 한다.
이렇듯 자연과 인간이 연결되는 신화적 상상력이 드러나는 것은 옴팡골이 인간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일 테다. 옴팡골의 사람들은 자연의 이치에 따르며 자신을 옴팡골에 맞추어간다. 이들은 버섯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자주 오지 않아야 하는 것을 알고(“사람 발자국으로 다져져/인내가 배기면/능이가 사그라드는 법이여”, 「능이가 나는 곳」) 말이 없는 나무에게도 피가 흐르는 것을 안다(「두릅 순은 몇번 꺾나」). 자연의 흐름에 삶을 맡기며 흙을 믿고 사는 이들에게 대지 역시 자신의 몸을 내주고(「일 많이 한 손 1」) 그렇게 옴팡골은 자연과 인간이 연결되는 장소가 된다.
옴팡골의 특별한 점은 또한 그곳이 현현하는 방식에 있다. 옴팡골은 현재의 화자와 과거의 기억을 가진 노인의 대화를 통해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패랭이꽃처럼 생생”(「옴팡골」)한 숨겨져 있던 모습을 드러낸다. 즉 옴팡골은 기억이 대물림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옴팡골은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들, 그곳을 아직 기억하는 사람들로부터 전해진다.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 옴팡골과 연결된 이는 옴팡골의 기억을 이어갈 책무를 넘겨받게 된다. 송진권이 그 책무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옴팡골이 부모와 조부모를 길러냈듯, 자신 역시 그 보살핌 속에서 자라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찌 팔자 도망을 하겄냐”(「나의 어린 신」)는 말처럼 시인은 전승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잊힌 장소를 기억하는 이들과 머지않아 잊힐 이들의 말을 받아적는다. 한평생 나물 장사로 지문이 닳았으면서도 시인에게 못내 미안하다던 큰어머니(「고들빼기 꽃이」), 무녀리에 쫑마리라는 비웃음 속에도 성실한 노동을 통해 식구들을 건사한 아버지(「일 많이 한 손 2」), 뱀에게도 존중을 보내며 자연의 이치를 알려주던 할머니(「장마」)의 모습처럼 대지에 기반한 꾸밈없는 삶의 목소리는 송진권의 시를 통해 기록된다.
장소가 장소로서의 위치를 잃게 되는 것은 언제일까. 지리상의 변화나 지명의 변경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사라졌을 때일 것이다. “한 쉬흔집 살았는데/이제 두집 남았어/다 가구 무녀리뿐이여” “누가 이 골짝에 들어와 살아야 말이지”라는 푸념이나(「2024 겨울, 못골」) “가시나, 나이두 젤루 어린 것이/기중 먼저 가네” “이쁘고 고운” 데 가 있으라는 애도처럼(「노제」) 옴팡골에는 탄생의 순간을 축하할 일보다 죽음을 위로하는 제문을 읊을 날이 더 많아진다. 그렇기에 시인은 옴팡골에 대한 말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 옴팡골과 사람을 잇고자 한다. “동상, 날 봐” “살아야지 암만 살아야지” 하고 동기간에 위로하고 의지하는 모습이나(「동기간에」) “낭구해 오라고 하면 워디서 죄 옻나무만 해 와서 불 때고 나면 밤새 몸이 가려워” 못살겠다는 부부의 너스레(「부부」)와 같이 소박한 삶의 풍경을 옥천말로 채록에 가깝게 풀어내는 것은 이러한 형식이 옴팡골을 보존하는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옴팡골은 나와는 상관없이 이름만 남아 있을 뿐인 장소가 아니라 우리와 연결된 장소가 된다.
옴팡골과 같이 우리 피에 내재되어 있지만 깨닫지 못한 장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인은 자신을 길러낸 장소를 잊고 사는 “노트북” 앞에 이들에게 “훈김 오르는”(「쇠죽 안칠 때」) 옴팡골의 생명력을 전하며 말한다. 우리에겐 여전히 기억해야 하는 “촉촉하면서도 연한 감촉들”(「기억해야 하는 감각」)이 있고, 기억하고 살아야 할 장소가 있다고.
연정모 시집 『조금 깨물고 몰래 버리기』(아침달 2026)
연정모의 첫 시집 『조금 깨물고 몰래 버리기』는 따뜻한 냄새로 가득 차 있다. 유령(「오층」)이나 귀신(「분지」), 죽은 새들(「앵무」)과 죽은 친구(「유리온실 혹은 거대한 프리저브 유리병 2」) 등 시집의 곳곳에 죽음의 흔적이 보이는데도 온기가 가득하다. 어떤 한기를 지닌 기억조차도 시인이 이내 가볍고 폭신한 것들로 감싸안기 때문일 것이다. “우유를 많이 넣은 카페오레와 탕종식빵”(「오층」)이나 “아이스 라떼와 코티지 치즈”(「아열대 사랑」) “자두와 추로스”(「스토리라인」)처럼 이름만 들어도 부드럽고 달콤한 음식들로 이루어진 투명하고 잔잔한 시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가벼워진다.
그의 시는 대부분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어린 시절 인형하고만 놀다 비난받은 일이나(「유리온실 혹은 거대한 프리저브 유리병」)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슴뿔을 든 어른들의 모습(「딸과 뿔」) 등 언제나 행복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은 그 속에서도 최대한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그런 점에서 「입춘」은 시인의 시적 태도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화자는 수영장에서 어린 아빠와 헤엄을 친다. 화자는 “보송한 까까머리”를 한 아빠에게 다정하게 수영하는 법을 알려주면서 그를 닮은 자신의 습관과 표정을 발견해내며 웃음 짓고, 여동생을 태어나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감사를 표한다. 시인에게 가족은 자신과 닮은 부분을 가진 존재들로(“사람은 나를 닮은 것을 사랑하게 되는/연약한 성질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삶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마음껏 사랑해도 되는 이들이다.
나아가 시인은 세상의 많은 부분에서 자신과의 공통점을 발견하여 사랑하고자 한다. “사랑하는 마음만이 최후까지 남아 있다”(「파우더」)고 말하며 “다른 몸으로 살아본 적 없는 것처럼/열심히 사랑하기”(「댄스댄스댄스」)를 멈추지 않지만, 그는 종종 고꾸라진다. 세계의 아름다운 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자칫 그를 결핍 없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설명하기 시작하자/너는 시시해하는 눈치였다” “따분함이란/읽기 쉬운 감정이다”(「이 세계에서 만난 첫 친구」)라는 고백처럼 시인이 마주한 세계에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진부하게 받아들여진다. 불행을 섞어야만 만족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계에서(“개인적인 불행을 얇게 썰어 파는 것이 유행이다.”, 「겹겹이」) 연정모는 단순히 삶의 단면만을 본다는 말에 소외감과 “달고 깡깡한 수치심”(「유리온실 혹은 거대한 프리저브 유리병」)을 느낀다. 사실 그 수치심은 타인에겐 삶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식되면서도 삶을 버거워하는 태도에서 기인하지만, 시인은 그가 느낀 모멸감을 모두 드러내지 않고 잘게 잘라 곳곳에 숨겨둔다(“너 슬픔을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니/누가 물었고 나는/모욕당하는 일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댄스댄스댄스」).
시에 퍼져 있는 잘게 잘린 모멸과 모욕을 가지고 연정모는 ‘달콤한 잼’을 만들어낸다. 잼은 “터져 나간 과육”(「잼팟」)이나 떫어서 못 먹는 과일도 달콤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세계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시인과 닮아 있다. 손상된 기억이나 아픈 기억, 너무나 사소해서 쓸모없는 기억이라도 시인의 손을 거치면 밝은 부분과 연결되는 것처럼 연정모가 만드는 잼은 찻길에 온통 으깨어진 사과에서도 “햇빛 맛”(「소일거리 잼잼」)을 느끼게 한다. 「보육원」에서 우리는 시인이 만드는 잼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단맛도 향도 없고 전부 싱겁기만” 한 과일은 “설탕물에 푹 담가놓은 후에야/우리가 아는 복숭아다운 복숭아”가 되고, 절인 복숭아는 본래의 성격을 내려두고 온순하게 변한다. 불쾌한 감정을 떠올리게 하는 기억들까지도 달콤한 잼으로 만드는 것을 볼 때, 시인은 모든 것이 사랑의 재료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어떤 기억이라도 설탕에 절여놓으면 단단함을 잃고 물러지고 시인은 잼이 익어가는 모습을 보며 잊고 싶은 기억이나 모멸감도 조금 멀리서, 조금 오래, 조금 더 사랑스럽게 지켜볼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연정모는 현실의 거친 단면들을 달콤한 설탕으로 졸여 우리 앞에 내민다. 으스러지고 물러진 과일들이 투명한 유리병에서 빛날 때, 우리 또한 “부드럽게 으깨진 일들을”(「낭만주의자를 위한 오토시」) 사랑해보리라는 다짐을 할 수 있게 된다.
유병록 시집 『우리는 멸종하지 않는다』(창비 2026)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가 “부재는 아주 큰 집이어서/당신이 벽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고,/그림들을 허공에 걸어놓을 수 있다.//부재는, 죽었어도 내가 당신을 보게 될/그런 투명한 집”2이라고 노래한 것처럼 사랑하는 이의 부재는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을 만들고 어느 방향에서도 그 부재를 느끼게 한다. 부재가 만든 투명한 공간은 떠난 이에 대한 기억을 걸어놓고, 떠난 이의 자리임을 계속 상기시키며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이들을 하나로 잇는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기억하려는 시는 슬픔과 아픔을 껴안은 채로 만들어진다. 이번에 살펴볼 유병록의 시집 『우리는 멸종하지 않는다』 역시 상실로 인한 슬픔을 받아들이면서도 기억을 간직하고자 분투하는 시들로 가득하다.
전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창비 2020)에서 유병록은 “슬픔을/집어삼키며”(「수척 2」) 견디고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어 슬픔에 잠겨 있었다(「스위치」). 이제 세번째 시집 『우리는 멸종하지 않는다』에서 시인은 “봄을 걸어서 여름으로”(「여름 편지」) 향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슬픔을 극복했다는 말이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돌아보지 못했던 슬픔은 더욱 뚜렷해지고 고통은 여전히 시인의 몸을 관통한 상태다.
시인은 “도무지 힘이 나지 않거든/무엇이라도 돌보”(「돌봄」)라는 조언에 자그마한 돌을 가까이 두고 보살피기도 하고, 직장인으로서의 일상을 충실히 살아가기도 한다(「나의 농사」). 하지만 그는 그저 움직일 뿐이다. 온전히 마음을 내어준 너의 이름을 떠나보내고(「배웅」) 시인의 마음은 가야 할 곳을 잃었으므로. 향할 대상을 잃었는데도 마음은 계속해서 만들어져 시인을 덮는다. 거대한 슬픔 속에서 그는 떠난 ‘너’와의 거리를 상정하며 자신을 속여본다. 지금은 곁에 없지만 안 보이는 곳에 네가 있다고. 눈에 닿지 않는 곳, 쉽게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에 네가 있으니 안심할 수 있다고(“아주 먼 나라로 떠나서/어쩌면 너와 만나는 일이 어려워졌다 해도/아주 이별만 아니라면/그래도 안심이 되는데//어디까지 가능할까” “내가/나를 속일 수 있을까”, 「내 곁은 아니지만」). 그러나 시인 역시 알고 있다. 네가 떠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남겨진 이들은 네가 없는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네가 없는 현재와 네가 없을 미래를 살아가야 함에도 시인은 “선물이 비록 슬픔이어도/네가 주면 받아야지/기념품처럼 오래 간직해야지”(「우리 곁으로 슬픔이 착륙한다」)라고 다짐한다. 시인에게 닥친 슬픔은 형벌이나 저주가 아니다. 그에게 주어진 슬픔은 네가 세상에 있었다는 흔적이자 너와의 연결고리이기에 시인은 기꺼이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때 시인은 너를 마중 나가며 적극적으로 슬픔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시인에게 슬픔은 너와 우리가 겹쳐지는 지점이므로, 그리고 “견디는 일이란/그저 가만히 있는다고 되는 일은 아니”(「나에게 묻는다」)기에 기꺼이 슬픔으로 투신하는 것이다.
시인을 둘러싼 슬픔이 더욱 비극적인 것은 슬픔 가운데 있는 것이 시인 혼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복될 수 없는 슬픔은 부부의 사이에 굳게 자리잡고 있다. 서로가 갖고 있던 풋풋한 기억은 희미해지고 부부에게 남은 것은 무성해진 “슬픔과/안간힘”(「신혼」)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가장 아픈 기억의 조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얼마나 큰 힘겨움인가. 슬픔은 두 사람을 상처투성이로 만든다. 그럼에도 부부는 애써 말을 삼키고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진다(「참외」). 닮은 상처가 배어 있는 손으로.
유병록의 시는 그가 겪은 슬픔이 개인적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시인이 꺼내놓은 슬픔은 상실을 경험한 수많은 개별적인 슬픔들을 감싸안는다. 그의 시를 통해서 우리는 너무나 소중하지만 떠나보내야만 했던, 시간이 흘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들을 기억하게 되고, 슬픔이 묻은 서로의 손을 맞잡을 수 있게 된다.
바뀐 것은 없다. 시인이 있는 현실에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은 앞으로의 날들을 내내 견디게 될 것이다. 네가 남긴 기억을 소중히 손에 들고 “울면서도 멈추지 않”으며 꾸역꾸역 “나를 데리고/오늘을 건너서 내일로”(「밤의 혼잣말」) 걸어가듯이. 그러나 고통스러운 견딤 속에서 시인은 매 순간 너와 연결되고 우리는 너의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을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