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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 이 계절에 주목할 신작
남기고 간 얼굴, 남아 있는 얼굴
민가경 閔佳璟
문학평론가.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비평활동 시작. 주요 평론으로 「지금, 여기, 회색지대, 그리고 “빨강”」 등이 있음.
mgk1008@naver.com
“How many souls on board?” 이 질문은 항공기의 비상시 구조인원을 파악할 때 사용되는 교신 용어이다. 구조해야 할 대상들을 누락 없이 세어야 하는 가장 냉정한 순간에도, 인명은 차마 숫자로만 환원되지 않는 soul, 곧 저마다의 비밀과 구체적인 사정을 싣고 있는 하나의 ‘영혼’임이 분명하다. 이 계절,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와 『약속의 세대』를 나란히 읽는 일 역시 그런 질문을 다시 던지게 한다. 이 두 소설집에는 육지를 딛고 하루하루 살아가면서도 속절없는 내면의 난류를 겪고 있는 인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를 상하게 했으나 ‘나쁜 의도는 없었다’는 타인의 말을 들은 이후에도 “계속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의 표정”(『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작가의 말’ 246면)을 안고 썼다는 손원평과 삶이 걸었던 ‘약속’을 가차없이 배반당하고도 “자신의 삶을 지키려 한 이들”(『약속의 세대』 ‘작가의 말’ 349면)을 품고 썼다는 백온유의 소설은 분명 어딘가에서 이미 만나고 있다.
빚과 빛과 볕: 손원평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창비 2026)
손원평의 전작들이 ‘집’이나 저출생·고령화의 근미래를 통해 시대의 구조적 균열을 탐색했다면, 이번 소설집은 직장, SNS 플랫폼, 소비와 취향 등을 둘러싼 신자유주의적 장면 속에서 개인이 겪는 찰나의 균열을 날카롭게 가시화한다. 그리고 이때 독해의 방점은 자본의 구조나 그에 동기화되는 인간의 개별적이고 계급적인 욕망이 아니라, 균열을 통과한 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인물들이 마지막에 보이는 표정과 몸짓에 찍힌다.
「딸과 깍 사이」의 ‘소미’는 경리팀에서 근무하며 ‘딸깍’하는 마우스 클릭 한번으로 누군가의 월급을 이체하는 일뿐 아니라, 희망퇴직 대상자에게 메일을 발송해야 하는 난감한 일마저 떠안는다. 이때 소미가 ‘딸’과 ‘깍’ 사이의 미미한 단차에서 헤아리게 되는 것은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이름’들, 그리고 “문제없이 일하려고 애쓸수록 (…) 조금씩 마모되고 있”(214면)는 ‘영혼’들이다. 「그 아이」의 ‘정민’ 역시 영하의 추위 속에서 밤새 백화점 앞에 줄을 서서 명품가방―의뢰인의 ‘그 아이’―을 대신 구매해주는 대행 시스템에 생계를 걸고 있다. 사활이 걸린 오픈런 전쟁과 브랜드에 부합하는 충성도를 연출하는 것까지가 노동의 필수조건일 때, 정민의 영혼은 기이한 형태로 ‘그 아이’에 사로잡힌다. 겨우 한번 품어본 ‘그 아이’를 의뢰인에게 떠나보낸 뒤 중고거래 앱에 웃돈이 얹혀 올라오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모든 면에서 자신과 반대 지점에”(104면) 있음을 확인하는 정민의 텅 빈 얼굴은 자본 시스템과 개인의 영혼 사이의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 간극을 방증한다.
이 간극 때문일까,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얘기”(「모자이크」 127면)와 매력적인 자기연출을 요구하는 세계에 걸맞게 자기서사를 다시 짜보려는 인물 또한 다수 발견된다. 「모자이크」의 화자가 대표적이다.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가던 그녀는 “생산적인 인간으로 거듭나”(130면)기를 결심한다. 그리고 “내용보다 중요한 건 컨셉과 치장이라는” 영상매체의 문법을 터득하고, 자신을 “레일 위 초밥 같은 인간”(133면)처럼 상품화하기 위해 온라인용 자아를 조립한다. 그러한 자아의 관건은 “특별한 데가 한군데는 있”(132면)어야 한다는 것이므로, 손의 흉터를 보정기술로 삭제하고 목소리 톤을 조정하며 자신의 누추한 현실을 ‘전직 스튜어디스’ ‘스타트업 준비 중’ 같은 스토리라인으로 덧칠하는 식이다. 이때 “마트에서 떨이로 주워 담은 방울토마토를 프리미엄 푸드코트에서 샀다”는 듯 연출하는 일은 단순한 허영이라기보다 “삶을 약간 가공”함으로써 “머잖아 맞이할 미래의 풍경을 조금 당겨”(137면)오려는 자기계발적 믿음의 수행에 가깝다.
이렇게 “성공의 방정식”(같은 면)을 착실히 수행하는 자세에 얼마간의 운이 보태어지자 화자의 삶은 “간신히 햇빛에 담긴 상태”가 된다. 그러나 그 빛도 잠시, 한 남성 구독자에 의해 그녀의 거짓들이 탄로되며 삶은 다시 “어두운 뿌리 쪽으로”(136면) 돌아서고 만다. 이때 화자는 한가지 독특한 방식으로 대응한다. 그 남성을 끝끝내 찾아 그의 인생을 교묘하고도 유사한 방식으로 파괴하면서 “도박에서 연거푸 지다가 마지막 순간에 잭팟을 터뜨리”(148면)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즉 손원평 소설의 인물들은 각종 경계 바깥으로 밀려나면서 자신이 초월할 수 없는 세계의 규칙을 깨닫지만, 서사적 위계에서만은 밀려나지 않은 채 자기 몫의 장면을 당당히 요구한다. 마지막 순간만큼은 자신에게 볕이 드는 쪽으로 몸을 한번 틀어보는 것이다. 자신을 소거하려는 세계에서 그대로 퇴장당하지 않고 비뚤어진 방식으로라도 흔적을 남기거나 당한 몫만큼의 반격을 수행하려는 이들의 일탈은 어떤 승리나 정의와는 거리가 멀지언정, 끝내 자기 몫을 되찾으려는 생존의 형태를 다시 보게 만든다.
이 맥락에서 「당신의 손끝」의 ‘효원’도 주목할 만하다. 프리미엄 문화센터의 미술강사였던 효원은 충성도 높은 수강생 ‘주영’ 덕에 정기적인 수입을 얻고 오랜 꿈이었던 개인 화실을 근근이 연다. “웅크려 있던 삶이 기지개를 켜는”(18면) 것 같고 “구겨버렸던 꿈이 두둥실 떠오르”(19면)는 기분도 잠시, 막상 새 화실에 방문한 주영이 수강을 취소하자 그녀를 자기 화실로 데려오려던 효원 안에서는 어떤 불안회로가 가동된다. 그리고 우연히 주영이 둘 사이에 누적된 시간을 무시하며 “그림을 좀 배우기는 했는데” “기본기가 꽝”(29면)이라 일축했을 뿐 아니라, 효원의 화실과 말투, 취향 전체를 얕잡아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때 비로소 효원은 주영과 자신이 애초에 “한푼의 납입이라도 채워지지 않으면 그 어떤 연결점도 없이 종료돼버리는”(35면) 계약관계에 불과했음을 확인한다. 결국 그렇게 효원은 화실을 접게 되지만, 여전히 중요한 점은 그녀가 과거 주영의 그림들과 주영이 게시판에 남긴 칭찬 댓글을 재취업을 위한 포트폴리오에 끼워넣으며 무너진 꿈의 잔해를 다시 먹고살 수 있는 동력으로 바꾸어낸다는 점이다.
「태양 아래 반짝이는」에서 남쪽 섬의 최고급 호텔 수영장에서 구조요원으로 일하는 ‘나’는 호텔의 아이콘처럼 서 있지만, 수면이 반사해내는 빛이 “내 안의 모든 구질구질한 것들”(41면), 가령 저버린 수영선수의 꿈과 대출금, 옥탑방 등을 표백해주길 헛되이 소망하는 처지에 불과하다. 그런 ‘나’는 동료 ‘시현’과 규칙을 위반하는 일이 주는 짜릿함을 경험한 이후 부유한 투숙객 여성과도 은밀한 관계를 맺는데, 그녀 역시 자기 삶의 일탈적 조건 속에서 지극한 권태와 공허를 경험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짙은 환멸을 느끼고 만다. 그때 ‘나’는 어떻게 하는가? 수영장을 검게 물들여버린다. 자신의 현실을 표백해줄 리 없는 세계의 표면을 “무엇도 반사할 수 없는 더러운 물”(63면)로 훼손해버린 것이다. 옅지만 분명한 성취를 느끼는 ‘나’의 충동과 나란한 선상에 「조망」의 ‘수하’도 서 있다. 도시 외곽과 한복판의 위계적 질서를 온몸으로 감각해온 그녀는, 비가 하염없이 쏟아져 도시 전체가 잠기는 파국 앞에서 “자신을 짓누르던 모든 것이 전부 같은 높이로 눕는”(182면) 쾌감을 느끼며 조용한 웃음을 흘린다. 물이 모든 높낮이를 지운 기이한 평형의 순간, 비로소 무언가 다시 세워질 것이라는 읊조림과 함께.
물론 이러한 장면의 반복은 인물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위해 다소 기능적으로 배치된 듯한 인상을 남기며, 몇몇 대목에서는 파열의 순간이 개연성을 앞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작위성이야말로, 더이상 공손하고 합리적인 방식만으로는 자기 몫을 확보할 수 없는 인물들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망가진 자리에서라도 인물들에게 삶의 연출권을 되돌려주려는 작가의 의도가 그 지점에 있을 터, 끝을 알면서도 파국 쪽으로 달려가는 손원평의 몇몇 인물들이 독자들의 쾌감을 대리할 수 있다면, 그건 아마 “화려한 빛 대신 질척한 빗물과 갚을 수 없는 빚”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늪에 빠진 것처럼 가망 없이 허우적”(「조망」 176면)대기보다 위악으로라도 자신을 건져보는 제스처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표정을 스스로 정하려는 인물들의 몸짓은 카타르시스만을 좇기 어려운 우리 현실에 옅은 볕처럼 드는 희미한 희망의 실체를 되묻게 한다. 이것이 바로 ‘빚’진 자들에게 ‘빛’이라는 가짜 희망 대신 ‘볕’처럼 작은 구원이라도 제공하는 손원평의 방식이다.
약속이 지나간 자리: 백온유 『약속의 세대』(문학동네 2026)
그간 청소년소설과 더불어 단편을 꾸준히 발표해온 백온유는 첫 소설집 『약속의 세대』를 통해 돌봄과 의탁 안에 자리잡은 착취, 구원의 약속과 위계적 믿음이 결합할 때 발생하는 기만과 같은 이중적 접면을 두루 경유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정교하게 밀어붙인다.
작중인물들은 대부분 돌봄과 의탁, 책임과 기대가 비대칭하게 얽힌 가족·친구·종교 공동체나 거래관계 안에서 자신의 필요를 제대로 충족받지 못했음을, 혹은 반대로 자신이 누군가의 필요에 책임을 다하지 못했음을(때로는 애초에 필요의 대상이 되지 못했음을) 깨닫고 관계 내부에 난 실금을 발견한다. 그렇기에 소설집 제목에도 자리한 ‘약속’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해지는데, 이는 단지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미래를 떠올리게 하는 것을 넘어서, 그 어긋남을 알면서도 당장 폐기할 수 없는 이들의 현재적 관계와 믿음을 우리 앞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약속의 폐허 이후에도 영혼의 실금을 섣불리 수선하거나 곧장 세계 전체에 대한 일반론으로 확장하지 않는다. 대신 그 실금이 삶에 남기는 흔적을 안고, 폐허 안에서 한동안 더 머뭇거리기로 선택하는 쪽에 가깝다.
물론 이 유예의 형태는 작품마다 다르다. 어떤 인물은 이미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면서도 그것을 외면과 변명으로 봉합하고, 어떤 인물은 모욕과 애정, 죄책감이 실제 사건의 인과와 뒤엉켜 있는 탓에 단 하나의 확정적 판단에 도달하지 못한다. 백온유는 그 차이를 면밀히 구분하며 접근하는데, 일례로 「광일」의 주인공 택시기사 ‘박광일’은 자신을 선량하고 성실한 가장으로 서사화하지만, 승객의 품위를 평가하거나 유산 경험을 아내의 실책으로 돌리는 내면은 그의 자기서사가 곧 “궁색한 변명”(118면)투성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는 결말의 산사태 속에서 떠올린 과거, 곧 자신이 울먹이는 여성 승객에게 건넨 모종의 희롱을 줄곧 “진심어린 위로”(112면)로 번역해온 광일의 실체에서 다시 드러난다.
이에 더해 「광일」과는 그 결이 다르지만, 경험 중인 난류의 인과나 선후가 지나치게 얽혀 있는 까닭에 어정쩡한 자세로 남겨진 인물들도 있다. 「회생」에서 오로지 나눔 물건을 얻기 위해 동네 커뮤니티에 ‘임신했다’는 충동적인 거짓말을 한 ‘수영’과 그녀의 과거 대학동기이자 그 물건의 주인인 ‘연지’의 관계가 그것이다. 그들의 관계는 우정이나 친밀성으로만 환원되지 않으며 동정과 시혜, 대체 욕망과 공허감, 얄팍한 계급감각 등이 팽팽히 놓여 복잡한 층위를 만든다. 그러한 까닭에 수영의 거짓말이 밝혀진 뒤, 둘의 관계는 “뭔가 달라졌는데, 그게 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답답”(229면)한 무언가로 남고, 시간이 제법 흐른 뒤에도 ‘인도 한복판에 떨어진 선물상자’(233면)같이 모호한 은유로만 남을 뿐이다.
「사망 권세 이기셨네」는 한번도 천국을 가져본 적 없는 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천국을 잃어버리며 경험하는 우울과 지나간 시간의 불가해성 자체가 지닌 위력을 잘 보여준다. 작품은 공장에서 일하는 ‘나’(‘미리’) 앞에 ‘세주’가 나타나 돈을 요구하며 시작되고, 이야기는 봉인되었던 둘의 과거를 해제하며 펼쳐진다. 과거 미리는 “총재가 주인이 될 새천국에서는 언제든 인생 역전이 가능하다는”(253면) 표어를 내건 사이비종교 공동체에서 일종의 최고 등급인 “5분위 약속 세대”(261면)라는 특권적 위치에 있었고, 세주는 아직 그 원리를 다 믿지 못하는 초심자, 즉 “불순한 종자”(251면)였다. 문제는 미리가 총재 주관의 죽은 양 부활쇼가 조작되었음을 목격한 순간에도 침묵했다는 것, 결정적으로는 진실을 추궁하는 세주에게 구체적인 증언까지 부연해가며 거짓에 동조한 일에서 시작된다. 세주는 미리를 향한 인격적인 믿음과 신도로서의 신앙이 비례한다는 듯 종교에 깊이 연루됐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선택된 자들”(249면)이라던 약속과 환상의 돌림병이 지나간 자리에서도 세주는 끈적한 원한을 안은 채 자꾸 미리에게 돌아가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경험했던 권력의 비대칭을 역전된 형태로 재현하며 미리를 괴롭혀볼지언정, 결국 그들 모두가 약속의 배신 앞에서 “짓이겨져 납작해”(262면)진 존재인 까닭에, 그 관계의 이름을 가해-피해, 혹은 채권-채무 등으로 지어보려 해도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한편 「의탁과 위탁 사이」의 ‘연수’는 자신이 한때 할머니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가 실은 부모의 방치에 가까운 ‘위탁’의 시간이었다는 뼈저린 진실 앞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연수의 영혼은 할머니를 향한 혐오와 연민, 오랜 가정폭력의 기억과 돌봄의 의무 사이에서 정처 없이 헤맬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삶의 불가해성 앞에서 서둘러 어떤 결론을 내리기보다 세계와 내면의 난마를 충분히 앓는 것이 소설의 미덕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면, 그것은 아마 「반의반의 반」에서 가장 잘 드러날 것이다. 소설은 노년의 ‘영실’이 숨겨온 오천만원이 사라진 사건을 계기로, 그의 딸 ‘윤미’와 손녀 ‘현진’까지 삼대에 걸친 모녀가 서로에 대한 묵은 감정의 실체를 마주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들 관계의 표면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간은 제공했고, 또 얼마간은 제공받았던 ‘돌봄’의 연쇄가 있지만, 사건 이후 관계의 밑바닥에서부터 고개를 드는 감정의 이름은 다름 아닌 ‘모욕감’이다. 왜 당신은 나에게 ‘반의반의 반’만큼의 애정과 성실을, 희생을 내어주지 않았는가, 즉 나는 왜 당신에게 선택받지 못했나 하는 모욕감 말이다.
그 오천만원이 영실에게는 실버타운 입소자금이었고, 윤미에게는 줄곧 자신의 곤경을 외면했던 영실의 모성을 되묻게 하는 촉매였으며, 현진에게는 자신이 서둘러 포기했던 삶의 가능성이었기에, 역설적으로 그들은 각자의 욕망이 투영된 그 돈의 진실을 더더욱 독점할 수 없다. 더하여 요양보호사 ‘수경’의 절도 여부를 둘러싼 추론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가운데 영실이 끝내 수경을 믿기로 결심하며 곤히 잠에 드는 결말은, 사건의 진실보다 누가 그 진실을 해석할 권리를 갖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이 소설의 힘은 결국 해결되지 않은 미스터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사건의 의미를 누가 결정할 수 있는지부터 붕괴된 상황,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꽤 빈번히 연출되는 세계의 아이러니를 정확히 다루는 데에서 온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의 ‘하나’ 또한 “세상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일들이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곳”이고, “인간은 무작위로 그 사건들에 꿰어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322면)라는 이모를 향한 고백 뒤에는, 사실 자신이 경험한 이모네 부부의 지극한 환대가 정말 자신을 향한 환대였는지 혹은 세상을 떠난 그들의 딸 ‘진아’의 환영을 겹쳐 본 환대였는지 끝내 알 수 없다는 먹먹함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하나는 이 잔혹한 진실의 회로 속에서 당장 어느 결론도 고르지 않은 채 머물기로 한다. 다만 이모와 함께 ‘무사’하기 위해서 말이다. 때로는 이런 머묾이야말로 차마 다 세어지지 않은 마음의 몫을 헤아려보게 만드는 방식일 것이다.
이렇듯 백온유의 인물들은 곧바로 직시할 때 삶이 무너질 수도 있는 서늘한 진실을 하나쯤 품고 있지만, 그것을 서둘러 들추거나 단죄하는 대신 조금씩 늦추고 비껴가며, “눌러두듯”(「반의반의 반」 182면) 견딘다. 이번 소설집에서 두드러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애초에 텅 비어 있는 약속의 실체와 그 약속을 담보받았다고 믿는 감각의 패러독스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그 실체를 함부로 정리하지 않는 것. 인물들로 하여금 공허와 불안 속에 아프도록 당차게 머물게 하는 것. 그리고 작가의 시선 또한 인물들에게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책임감, 모욕감, 애착의 뒤엉킴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 어떤 의미에서 인물과 작가의 이러한 버팀은 남아 있는 삶을 냉소나 환멸이라는 손쉬운 방법으로 처리하지 않기 위한 실존의 분투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본다. “How many souls on board?” 이 질문 앞에서 두 소설집은 하나의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 영혼의 구체적인 얼굴과, 단일한 의미로 포섭되지 않는 관계의 잔여를 세밀하게 주목하고 있었다. 한 소설은 서늘하게 추락하는 와중에도 스스로 마지막 표정을 정해 힘껏 지어 보인 뒤 떠나가는 영혼들에게 희미한 볕을 제공하고, 다른 한 소설은 지나가버린 시절과 곤두박질친 관계의 의미를 함부로 펼치거나 종결짓지 않고 다만 그 잔열에 손을 댄 채 남아 있는 영혼들에게 가만한 머묾의 시간을 제공한다. 분명 현실의 어디에선가 만났었고 또 어디론가 흩어져버린 영혼들이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얼굴과 ‘남아 있는’ 얼굴들은 여전히 같은 질문 앞에서, 서로 다른 무게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 같은 순간 소설은 또 어떤 다른 영혼의 얼굴을 상상해낼 수 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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