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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하승우 『무궁화호를 위하여』, 한티재 2026
변경의 방식, 관계로서의 세계를 감각하기
안승택 安勝澤
인류학자,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lacuna@knu.ac.kr
정확히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들을 맞닥뜨릴 때가 있다. 이거라고 얘기하려니 저것 같고, 저거라고 말하자니 딱 그렇게만 보이지 않는 것들. 수도권을 떠나 충북 옥천으로 이주한 풀뿌리 정치학자이자 활동가 하승우의 『무궁화호를 위하여』도 그런 편이다. 부제는 ‘변경의 현실과 정치’인데, 책에는 변경(邊境)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문명 전체 혹은 요샛말로 ‘행성적’ 문제를 다룬 글도 많고, 국가적으로 전개되는 정치·경제·사회·노동 이슈도 짚어나간다. 읽다보면 ‘이 글이 책 제목에 맞아?’ ‘이런 거야 옥천 사람 아니라 누구라도 하는 말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종종 든다. 즉, 이 책은 어떤 로컬리티 감성이나 로컬 이슈를 논하려는 기획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기획한 것일까?
물론 이 책의 부제가 내세운 ‘변경’의 주제의식이나 현실인식이 약한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또 거기서 드러나는바, 지방 대도시나 중소도시도 아닌 읍 단위에서 마주하는 삶의 양상은 처절하기조차 하다. 저녁이면 대중교통이 없으니 캄캄한 밤길에 위험해도 전동 킥보드를 타는 아이들. 그러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아이들 소식에 가슴이 내려앉는 부모들. 자신들은 면 단위 이하에 살지도 않으면서 주민들에게 물으면 될 일을 비싼 돈 주고 외부 컨설팅회사에 묻고, 마을 복지시설을 만들겠다는 주민에게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요구하는 지방 공무원들. 그리고 이 살풍경 속에서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무궁화호’의 문제가 윤곽을 드러낸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는 교통·의료·교육 같은 공공재를 표준화하고 보편적 접근을 허용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든다는 이념이 지배한 시대였다(18~20면). 반면 오늘날 이른바 ‘지방소멸 위기’는 이런 근대적 공공성의 이념을 포기한 중앙권력이 경기장을 설치하고 생존 경주를 시켜서 차례로 지방을 삭제하는 장치이다. 그들에게는 애초에 지방을 살릴 뜻 같은 것이 없었다. 이 지적, 살벌하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우선 확인할 것은, 이 책에서 ‘변경’은 대상이나 소재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제도 아니다. 그것은 관점이고 지평이며, 살아 움직이는 행위자이고 (인기는 없지만) 주인공이다. 저자는 그 녀석을 독자들에게 투척하고, 그가 생각하고 움직이는 법을 감각하게 한다. 요컨대 변경은 큰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워서 큰 욕망도 없는 곳, 그래서 괴물이 될 수조차 없는 곳, 미디어에서 본 것을 바로 실행할 수 없어서 뭐든 느려지는 곳이다. 그러니 역으로 변경 특유의 힘이 생겨난다. 이름하여 “하고 싶은 게 없음의 힘”(32면)이다. 지방을 빨아들이고 집어삼켜 덩치를 키워가는 중앙권력의 포식행위에 맞설 바탕도 거기에 있다. 예컨대 지방의 청소년들이 자기 삶을 관찰하면서 욕망을 삭제하는 대신 갖게 되는 무엇이 더 올바른지를 살피는 감각, 한마디로 ‘관계성의 인식’도 그중 하나인데, 중앙과 지방 간에도 이것을 구현하자는 것이다. 물론, 중앙이 그 말을 금방 알아들으리라고 믿을 만큼 저자가 순박하지는 않다. 그것은 듣든 말든 하며 힘을 뺀 채 중앙에 전하는 지방의 통첩 형태로 발화된다. 유행하는 메가시티 논의도 같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변경의 통첩을 외면하고 소도시와 마을들을 집어삼킬 것인가, 그것을 받들어 그들이 거기 있도록 두고 관계를 되찾을 것인가.
‘뭐든 바로 할 수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음’의 힘에 바탕을 두고 우선 관계를 살피자니, 대체 무슨 말인가 싶기도 하겠다. 혹여 왜곡이 안 되기를 바라며, 평자 나름으로 얼마간 풀어서 적어보자면 이런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변경의 방식’은 무엇보다도 (자연·자원·정보·인프라·관계망 등을 포함하는) 환경과 (생산·유통·소비는 물론 그에 대해 부담과 책임을 지는 일까지 포함하는) 그 사용방식이 불균등하게 분포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또 인정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이 인정으로부터, 거대도시와 중앙권력이 추구하는 속도전, 전격전, 전면전과 생사여탈 양자택일의 논리를 벗어나 불균형을 조정하는 방향에서 서로 만족할 수 있는 답을 하나씩 찾아가는 길이 열린다. 중앙의 방식은 ‘그러다가 즉각 답을 찾지 못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를 따져 물으며 위협하는 것이다. 변경의 방식은 ‘당장 답이 없는 게 당연한 거지 뭐가 문제냐’고 되물으며 안심시키는 것이다. 시군을 ‘통합’해서 메가시티를 만드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그전에 먼저 시군들이, 또 그 주민들이 ‘연합’해서 무언가 해보는 일이다. 서로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을지 꼼꼼히 따져봐야 하지만, 그와 내가 ‘동료시민’임을 발견하는 일이 우선이고, 그러려면 그와 내가 ‘비상연락망’을 갖추고 어려울 때 서로 전화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산적한 문제도, 바로 찾아지지 않을 정답도 모두 현장에 있음을 확인하되, 현장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민주성이다. 민주주의 원리가 관철되지 않는 현장성 강조는 중앙식의 불도저 정치로 귀결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글의 글머리에 적은 이 책의 애매함, 즉 ‘정확히 뭐라고 말하기 어려움’의 문제에 관해 다시 말할 수 있다. 서울에 살든 지방에 살든 중앙의 방식에 익숙한 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그럼 뭘 어쩌자는 거지?’라는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궁금증들을 잔뜩 응축한 후,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대안이 아니라 방향성과 의미 부여라고 주장한다. 그 길에 설 때, 약자의 방식, 변경의 방식, 쫀쫀하게 싸우기, 관계들을 살피기, 동료시민을 찾아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또 청하기가 무기가 된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저들이 먼저 무너질지도 모르니, 어쩌면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일지도 모른다”(266면)라는 것이었다. 인류학자인 평자가 볼 때, 저자가 염두에 두는 것은 인류학적 아나키즘의 정치 같은 것으로 보인다. 즉, ‘맞서기’보다 ‘같이 하지 않기’를 앞세우는 분산주의적 일상정치의 행위양식이다. 이런 행위양식은 색깔이 옅고 다른 색과 인접해 있으면서, 색의 중심부에서 볼 때 모호하고 애매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이 책을 정확히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빠른 결정보다는 더딘 결정이 좋고, 아무것도 안 하기가 무엇이든 하기를 이길 수 있다고 여기며, 비효율로 보여도 최대한 깊고 넓게 맥락을 살피려는 변경의 방식은 아주 분명한 실체로서 거기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가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포도밭출판사 2016)에서 “파괴할 수 없다 해도 우회하고 동결하고 변형해 점차 그 실체를 박탈할 수는 있다”고 적었을 때 거기에 밑줄을 친 사람들, 제임스 스콧( James C. Scott)이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여름언덕 2014)에서 ‘과정 중시의 아나키즘’에 관해서 설파할 때 우리식의 점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도록 권하고 싶다. 역으로, 이 책을 읽고 무언가 더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들에게는 위의 두 책을 권한다. 노후 열차 퇴역 후 신규 열차를 발주하지 않아 운행 편수가 격감 중인 무궁화호는 2028년 완전소멸이 예정되어 있다. 그 자리 일부는 운임이 더 비싼 전동차가 채우고, 어떤 자리는 끝내 채워지지 않으며 일부 역들이 추가 폐쇄될 것이다. 설치 예고된 무궁화호 영전에 변경의 사유, 변경의 방식, 변경의 정치를 바치려는 저자에게 응원을 보낸다. 실은 그 기로에 우리 모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