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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리 빈셀·앤드루 러셀 『지탱하는 힘』, 이음 2026
혁신이라는 망상
이하람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부교수
lee.haram@snu.ac.kr
우리는 흔히 ‘혁신’을 근사한 성취로, ‘유지보수’를 비생산적인 잡일로 생각하곤 한다. 여기, 귀찮고 낡은 것으로 여겨져온 그 보이지 않는 손길의 귀중함을 새삼 깨닫게 하는 책이 있다. 『지탱하는 힘』(박서현·유상운·최형섭 옮김)이 그것이다. 2020년 출간된 이 책 원서의 제목인 ‘혁신이라는 망상: 새로운 것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가장 중요한 일들을 망가뜨리는가’(The Innovation Delusion: How Our Obsession with the New Has Disrupted the Work That Matters Most)는 저자의 핵심주장을 명확하게 표현한다. 과학기술학의 관점에서 두 저자 리 빈셀(Lee Vinsel)과 앤드루 러셀(Andrew L. Russell)은 새로운 기술을 맹목적으로 추앙하는 ‘혁신-언어’(innovation-speak)가 어떻게 세계를 장악하여 유지보수와 돌봄과 같은 핵심가치를 경시하게 만들고 사회적·경제적·환경적 피해를 초래하는지를 폭로한다.
책의 1부는 혁신-언어의 기원 및 확산 양상을 추적한다. 혁신-언어는 새로운 것을 무조건 좋은 것으로 규정하면서 뒤처짐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수사이자, 신기술 개발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34면)다. 혁신-언어는 기술과 지식의 유용성을 증가시키는 행위인 혁신과 종종 무관하고 심지어 실질적 혁신을 방해하기도 한다. ‘파괴적 혁신’을 추종하는 최근 경향과 달리 혁신은 사실 기존 기술을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고, 그 혁신의 성과는 적절한 유지보수 없이 영위될 수 없다. 혁신-언어는 역설적으로 혁신의 속도가 줄어든 1970년대에 부상하였고, 21세기에 들어서 미국 실리콘밸리 소재의 디지털 기술기업의 성공으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민간과 공공영역을 지배하는 담론으로 성장했다. 복잡한 첨단기술이 발전하면서 유지보수 작업은 더 중요해졌지만, 새로움을 최고선으로 간주하는 혁신 이데올로기는 이를 도외시하게 함으로써 파국적 사태를 초래한다.
2부는 혁신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근거 없는 추종을 ‘혁신 망상’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구체적 폐해를 분석한다. 혁신 망상은 경제적·양적 의미의 ‘성장’에 대한 맹신과 연결되어 국가의 인프라 퇴락을 방치하고, 사회와 조직의 물적·인적 피해를 야기하며, 개인의 건강과 주택 및 일상생활의 질을 악화시킨다. 혁신에 대한 맹신은 공공 교통·보건 등 사회 기본 인프라에 대한 유지보수를 소홀하게 유도함으로써 “느린 재난”(85면)을 초래한다. 2015년 미국 워싱턴 DC의 지하철 화재사고, 2014년 미시간주 플린트시의 식수오염 및 납중독 사태, 앨라배마주 블랙벨트 지역의 미처리 하수 노출에 따른 십이지장충 집단감염은 정부가 첨단기술의 개발·도입을 우선시하며 나머지 상하수도, 지하철 등 필수적인 인프라를 방치해 치명적 피해를 야기한 사례다. 더욱이 성장중심주의와 결합한 혁신 망상은 공공 인프라만 아니라 사회 전영역에 재앙적 피해를 가져온다. GDP와 같은 경제수치의 증가를 지상목표로 설정하고 무한한 성장을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간주하는 성장지상주의는 단기적 이윤창출에 매몰되어 결국 그보다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 예컨대 PG&E라는 캘리포니아 전력공급 회사는 주주 배당금을 최대화하기 위해 유지보수를 소홀히 한 결과 폭발사고와 산불을 발생시켜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를 야기했다. 미국 항공기 회사 보잉(Boeing)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품질보다 생산속도를 중시하는 기조 때문에 최신 기종의 결함을 간과하게 되었고, 이는 2018년과 2019년의 추락사고로 이어졌다. 수치화된 단기적 이익을 절대시함으로써 장기적인 사회적·환경적 비용을 무시하는 이러한 경향은 기업만이 아니라 교육과 의료, 개인의 건강과 돌봄노동, 주택관리, 소비의 영역에도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
마지막 3부와 에필로그에서는 혁신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고 유지보수와 돌봄의 가치를 회복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한다. 우선 무작정 새로움을 추구하고 공포를 자극하는 혁신-언어의 사용을 지양하고, 정말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기술과 물질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유지보수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지보수는 혁신에 따라오는 부차적 업무가 아니라 혁신의 성공을 지속시키는 데 핵심적인 작업이다. 실제로 예방적 유지보수는 기술과 인프라를 체계적으로 점검하고 수리함으로써 혁신의 성과를 확산시키고 미래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하는데, 어느 연구에 따르면 545%의 투자 수익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177면). 나아가 유지보수 및 보존을 중시하는 사회를 구축하는 일은 지속가능한 환경을 만들어가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재사용·재활용·수리 중심의 지속가능한 ‘순환경제’로의 이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기계공, 엔지니어, 간호사, 청소부 등 노동자들의 “관심과 헌신”을 알아차리고 정당하게 대우하도록 조직문화를 바꾸어 사회적 형평성을 높이는 일이다. 저자는 이런 변화와 태도를 혁신 이데올로기와 대비되는 “유지보수 사고방식”이라 부른다(178면).
이 책은 우리 사회에도 널리 퍼진 혁신-언어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제시하고 그 이면의 성장주의를 폭로한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하다. 유지보수가 돌봄의 영역이라는 말은 돌봄 및 돌봄노동자의 개념 확장과도 연결된다. 나아가 유지보수는 저자의 주장대로 정치적 성향 차이를 뛰어 넘어 좌파와 우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사회개혁 아젠다라는 점에서 확장성이 높다(269면). 기술문명의 성취를 보존하여 문화와 사회의 안정성을 수호하려는 보수주의자와 공공 인프라의 지속가능한 확대를 통해 불평등 해소와 공정한 분배를 추구하는 진보주의자 모두에게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오늘날 기후위기 및 지정학적 갈등의 심화로 인해 신자유주의 및 자본주의체제가 한계에 도달하고 있음이 명백해지고 있는 시점에 그 대안을 논의하기 위한 시작점으로 유용할 수 있다. 책의 논의에 기반하여 우리는 기술 및 인프라의 유지보수가 보존하려고 하는 “근대적 삶의 양식”의 역사적 유효성을 성찰하고(87면), 유지보수의 기치가 탈성장과 순환경제를 달성하기 위한 구심점으로 기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며, 궁극적으로 수리, 순환, 돌봄의 가치를 중심으로 글로벌 북반구와 남반구에 적합한 전환전략을 구상하고 실현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