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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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선

 

 

김중일 金重一

1977년 서울 출생.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국경꽃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 『내가 살아갈 사람』 『가슴에서 사슴까지』 『유령시인』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차원 이동 가능』 등이 있음.

ppooeett@naver.com

 

 

싱크홀

평화의 장소 찾기

 

 

*

 

밤사이 가라앉았던 지열이 반등하기 시작하는 정오의 놀이터

벌써 땀에 푹 젖은 아이가 그네를 타고 있다

여덟살쯤 된 아이가 그네 위에 두 발을 올리고 서서 힘차게 발을 구르고 있다, 우리를 빤히 보며

마치 까마득한 아래로 뛰어내리는 연습이라도 하는 듯

지면에서 구십도 기울기를 넘나들며 그네를 타고 있다

너는 불안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지만 정작 아이는 꽃잎을 타고 노는 나비처럼 고요하다 나비처럼……

아이가 이번에는 미동 없이 철봉에 매달려 있다

곧 뛰어내리기 직전 숨을 멈춘 듯

까마득한 지구 반대편으로 떨어져도 이제는 하나도 위험할 것이 없다는 듯

영혼의 무게만큼 남은 한쌍의 날개 외에는

이미 상처 입을 만한 무게를 몸에서 다 덜어냈다는 듯

 

그 순간 미사일이 아파트를 타격했다

‘까맣게 그을린 냉장고’ 한대가, 조각난 운석처럼 날아와 놀이터 한가운데 박혔다

여름 햇빛에서 빠져나온 아이가

문짝이 떨어져나가, 싱크홀처럼 시커먼 구멍이 된 냉장고 속으로 뛰어내린다

정오의 놀이터에 뚫린 싱크홀

냉장고 속으로 건물 잔해들이 뒤이어 쏟아져내린다

보다 못한 너는 내 손을 끌어당기고, 아이를 따라 싱크홀 속으로 뛰어든다

 

**

 

백일몽을 꾼 듯 싱크홀에 빨려들어 빠져나온 또다른 지구 한편

모두가 학교에 간 적요한 정오의 놀이터

한 아이가 학교도 안 가고 그네를 타고 있다

여덟살쯤 된 멍투성이 아이가 그네 위에 미동 없이 앉아 있다

마치 까마득한 아래로 뛰어내리기 직전처럼, 생각에 잠겨 있다

햇빛이, 아이의 몸에 난 싱크홀 같은 ‘검은 멍’으로 뛰어들고 있다

햇빛은 깊은 싱크홀 속에서 다쳤을까

햇빛은 저녁처럼 검푸르게 멍들었을까

 

‘까맣게 그을린 냉장고’ 속으로 뛰어내렸던 지구 저편의 나비 한마리가

싱크홀 같은 ‘검은 멍’에서 막 빠져나와, 아이의 귀에 앉아 묻는다

누가 그랬니 누가 그랬어?

대답할 말을 골라내고 골라내다가 몸 안에 가득했던

건물 잔해처럼 무거운 ‘못한 말’들을 다 끄집어내다가 나비 날개만큼 얇은 몸피만 남았다

햇빛처럼 해진 한숨만 남았다

 

대답 대신 한여름의 열기처럼 아이는 떠오른다

‘가장 낮은 옥상’에서 그 장면을 내려다보던 우리는 놓치지 않으려 아이를 붙잡아 안는다

생각보다 큰 멍자국들, 보다 못한 너는 내 손을 꼭 잡고

그 싱크홀 속으로 뛰어든다, 마치 햇빛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 둘은 슬픈 한 아이의 마음 안에서

아이라는, 우리가 찾아다닌 평화의 장소에서 다시 처음 만난다

 

밤새 네 몸속의 눈물이 다 빠져나가고

오늘 나는 너의 흔들리며 풀썩 내려앉는 눈동자를 본다

눈동자라는 네 마음의 싱크홀 속에,

미친 듯 타들어가는 현생의 여름 놀라 우는 너의 입속에,

너의 꿈……이라는 한밤의 싱크홀 속에

 

나보다 먼저 뛰어내려,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내일의 나를 본다

 

 

 

가장 낮은 옥상

평화의 장소 찾기

 

 

하늘이 사람의 몸을 얻는다면 내디딜 수 있는 가장 깊은 곳, 깊은 우물 같은 곳

이 도시에서 ‘가장 낮은 옥상’

몸을 얻지 못한 하늘이 조바심 나서 한순간 소나기로 쏟아져내린 옥상

 

공기처럼 세상에 가득 차 세상을 떠돌던 우리는 엘리베이터처럼 물웅덩이를 타고 하늘로 오를 수도 있지만

나는 너와 함께 비 맞으며 빗소리를 듣는다

창문이 없어서 오히려 빗소리를 잘 들을 수 없다고 너는 아쉬워했고

그 와중에도 세상에서 ‘가장 낮은 옥상’부터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왜 아름답고 낮은 옥상이 가득한 나라에만 미사일이 폭우처럼 쏟아질까

낮은 옥상들이 거의 다 파괴되어가자 우리는 다급한 마음이 된다

이 도시에서 가장 평화로운 장소는 ‘가장 낮은 옥상’이라고

나만 죽겠다고 그래서 나만 살겠다고

그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건, 빗살무늬 아름다운 옥상을 고장 난 장갑차처럼 한구석에 처박고, 버리는 거야

그것은 너의 생각, 생각만이 아니라

 

몸소 ‘너’는, 저 하늘과 가장 낮고 아름다운 높이의 옥상을 깁는 ‘실오라기’처럼 재봉선 같은 옥상 난간에 달라붙어 있다, 마치 옥상 난간의 일부처럼

하늘의 한 끝단이, 바닥에 하늘하늘 끌리는 원피스 자락처럼 넓게 펼쳐져 있는 저녁

오늘 군인의 총에 맞은 소녀로부터 벗겨진, 붉게 찢긴 원피스 같은

노을 번진 ‘가장 낮은 옥상’ 위에서

 

하늘과 옥상을 깁고, 잇는 한가닥 실오라기처럼 마지막 매듭처럼 옥상 난간에 매달려 있는 너

한가닥의 너는 죽어도 끊어질 수 없어,

너마저 옥상 너머로 떨어뜨릴 수 없어,

하늘과 ‘가장 낮은 옥상’을 기워 한벌로 지어 입고 싶어

너를 안아본다, 너를 입듯

 

나는 그렇게밖에 할 게 없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의 ‘가장 낮은 옥상’마저 무방비로 사라지고

유일무이하고 아름다운 각도로 눈앞에 남아 있는 한장의 전망마저 사라질 테니까

유독 태풍이 잘 형성되는 불안정한 대기의 나라처럼,

그런 나라의 대기처럼, 우리도 조바심 나서 결국 소나기로 쏟아져내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