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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선
이근화 李謹華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칸트의 동물원』 『우리들의 진화』 『차가운 잠』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 『나의 차가운 발을 덮어줘』 등이 있음.
redcentre@naver.com
다른 얼굴로 네가 웃을 때
평화는 비둘기
뻔한 날개를 갖고 날아오른다
내게서 멀고
네게서 멀고
평화는 칼과 가위
절삭력을 높이기 위해
기계가 돌아간다
멈추지 않는다
평화는 스테이플러 리필침 33호
끝까지 다 쓸 수가 없다
어디에나 박혀 있지만
쉽게 사라진다
평화란 같은 얼굴로 웃는 것
너의 다른 얼굴
너의 다른 발자국
너의 다름
다름
다름
늦었어
평화는 날아오르고
찢기고 베이고 박히고
나의 평화는 너에게 간다
모르겠다 너의 선택을
마음에 넘치는 불편을
손끝에 머무는 불안을
서울 대구 부산에 평화시장 있고
광주 부산 구례 창원에 평화식당이 있다
어딜 가나 얌전한 손님이 되어
너와 나는 누런 이를 드러내고
서로를 향해 웃는다
웃어?
평화는 쉽게 깨진다
도자기처럼 깨지면서
아쉽고 아름답다
거짓말
식빵처럼 찢어진다
거칠게 굳어간다
자잘한 평화가 남고
너와 내가 깨질 차례
굳어갈 차례
사라질 차례
작은 입술이
말랑한 입술이
붉은 입술이
아니 파란 입술이 평화를 말한다
공원에서 광장에서 등대 위에서
다른 얼굴로 네가 웃을 때
평화가 방울방울
땀방울처럼 맺힌다
눈물처럼 고인다
빗물처럼 스민다
크고 놀라운 평화가 내게 있네 이 세상에는 없는 평화1
하루 종일 전화함
내용은 없음
아무나 받음
그냥 인사함
상대방도 인사함
용건은 없음
네가 아님
나도 아님
아무도 아니나
전화했음
번호를 눌렀음
잘못 눌렀으나
누군가 받음
네가 아님
나도 아님
다시 누름
손가락 아님
손톱 아님
내 손 아님
네 손 아님
여보세요
누구세요
인사는 차가움
전화는 뜨거움
전화기는 가벼움
너는 무게가 없음
선이 없음
보이지 않음
선이 있음
보이지 않음
넘어감
갈 수 없음
목소리 너머
네가 보임
나도 보임
목소리 너머
다이얼 없음
표정 없음
사랑스러움
하루 종일 통화함
인사가 시작임
끝임
- 찬송가 33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