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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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선

 

 

최지은 崔智恩

1986년 서울 출생. 2017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시집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 등이 있음.

choi_ce-@naver.com

 

 

좋은 이야기

 

 

오호라 이것이구나,

 

여자는 책장 사이 납작하게 눌러붙어 있던 그림자를

살짝 떼어내며 말했다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하고 바삭한 것이

살랑

흔들렸다

털이 일어나기 전

 

잠깐이었다

 

그림자의 털은 이내 부풀어 여자의 발밑을 맴돌고 있었다

 

한 손으로 책등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책의 배를 쓸어내릴 때

삼백년 전 개를 사랑한 사내의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국의 언어였고 한 글자도 소리 내 읽을 수 없었지만 여자는 그 마음만은 꼭 알 것 같아 손발이 따뜻해졌다

 

개를 잃은 사내가 삼십년에 걸쳐 쓴 단 한권의 책이라고

책방 주인이 일러준 뒤였다

 

좋은 이야기다,

 

꼭 한번 만나야 할 그림자를 책이 점지해준다는 건

 

좋은 일이다,

 

여자는 대부분 나쁘지 않은 사람이고 가끔은 좋은 사람 지나다 한번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한 사람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 날에도 다음 날 출근을 놓친 적 없는 사람

여자 외에는 누구도 그녀의 삶을 살아본 적 없고 그럴 수도 없는 일이지만 훤히 다 알 것같이 평범하고 굴곡진 삶 그게 여자의 것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자살 그게 아녔어도

삶이란 녹록지 않은 것이니 무엇이든 어찌 되었든

인간의 삶이란 모두 뻔해 슬픔에 대해 한 세월 떠들어대는 건 저 자신이 먼저 질려버리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나와 헤어져야 한다는 거

다시는 내가 나를 볼 수 없다는 거

더는 자신을 미워할 수도 없다는 거

죽은 사람의 죽고 싶은 마음 헤아리는 밤이면

평생을 다 쓰고도

그후로 삼백년을 더 써도 모자랄 것 같은 밤이면

 

한 손으로 다른 쪽 팔꿈치 살을 조금 잡아당기며

거의 느낌이 없는 살갗을 붙잡고서

꼭 남처럼

누가 여자를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자신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새벽에도 엉뚱한 기억은 떠오르고

 

웃음이 나고 창피하고 속된 생각 사이를

헤집는 털 난 그림자가 찾아오는

이토록

 

평범하고 굴곡진 삶

 

지난 일요일엔

꼬리를 흔드는 그 그림자

여름내 옥상에 묶인 여자의 건넛집 개를 떠올리게 했다

 

저 개를 사랑하는 나의 사라짐이라

그건

 

슬픈 이야기이다,

 

비에 젖은 개처럼 슬픔이 몸을 터는 것 같았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영영 모르는

 

좋은 이야기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다는 듯

 

사방에서

털 달린 슬픔이 달려왔다

 

꼬리 흔드는 슬픔을 위해

부러 제 몸을 더 부풀리는 어둠이 있고

 

거기서 더 잘 보이는 것

 

볼 수 있는 단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었다

 

 

 

여름 새벽의 탄젠트

 

 

생각이 없는

물방울

 

헤맴도 지혜도 냄새와 빛깔도

 

혼란이 없는

 

물방울

 

익숙한 형식

흔하고 흔한

 

물방울은 물방울

 

멍청하고

맹하고

싱겁고

한갓된 내 기억 위로 떨어지는

 

오직

한방울만큼의

생신

 

망각이라든지

정화라든지

성결과 신성 같은

포도알만 한 작은 욕심조차 애초에 무관한

 

나의

기억 위로 떨어지는

 

거의 없는 듯 가볍고 조그마한

 

동시에

분명하고 또렷한

 

한방울의

 

생각이 없는 물방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