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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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선

 

 

황규관 黃圭官

1968년 전북 전주 출생. 1993년 전태일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호랑나비』 『뒤로 걷는 길』 등이 있음.

grleaf@hanmail.net

 

 

봄날

 

 

민들레 옆에 제비꽃 제비꽃 옆에는 냉이꽃 냉이꽃은 꽃다지와 자매 같지 꽃다지 앞에는 개망초꽃 그 옆이 양지꽃인데 이 작은 아이는 씀바귀꽃들에게 올해는 마당을 내줬나 목소리가 작년보다 작아졌다 꽃잎을 떠나보낸 민들레씨를 받은 토끼풀꽃 토기풀꽃은 고개 숙인 할미꽃 아래에서 할미꽃을 쳐다보지만 할미꽃은 걷기 시작하는 손주 손 잡고 나무에 앉은 까치 소리를 듣는다

 

씀바귀꽃 뒤로는 누군가 줄지어 심어놓은 수선화 수선화는 모란을 기다리며 빛나고 그 위에는 막 피어난 키 작은 수수꽃다리 목련꽃이 지는 동안 명자꽃이 다른 마을에 폈다는 소식 명자꽃과 닮은 동백꽃도 돌아왔고 모과꽃은 좀 늦었다며 얼굴을 약간 붉힌다 이런 쑥스러움이 결국 향기로 남는 거겠지 그리고 개나리와 철쭉꽃과 조팝나무꽃과 노란 애기똥풀꽃과

 

나뭇가지마다 첫니 같은 잎사귀들

냇물은 알을 낳는 잉어 몸부림처럼 흐르고

마른 논에는 곧 물이 들어갈 테고

바람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지만

 

전쟁의 절규는 멈추지 않는다

 

 

 

감자의 시간

 

 

매번 얻어먹고만 살아서

이번에는 지나가는 돈 조금을 슬쩍해

멀리 사는 분께 감자를 샀다

조금 보냈으나 묵직하게 왔다

나는 갈수록 무게나 높이, 둘레 같은

살아 있는 것의 수치에 무능한 사람

(지나온 비탈길이 먼저 떠오르지)

단지 둥글둥글한 단단함 앞에서

다시 출가시킬 궁리 중이었는데

보내준 책 잘 받았다며

다른 감자가 답례로 도착했다

그렇게 낡은 집이 감자와 감자로

그득해진 느낌 때문인지, 어쩔 수 없이

서울놈으로 사는 비겁한 변명 때문인지

꿈에까지 따라와 굴러다니는 감자들

외면하면 벌받을 것 같은 두려움에

아이들을 불러 들려 보내고

몇몇 친구에게 봉다리를 쥐어주고도

올여름은 감자의 시간

밥도 되고 국도 되고 반찬도 되고

무엇이든 될 것 같은 흙 묻은 감자의

―고르게 가난한 시간!

얻어먹고 사는 것도 복된 일이지

덜 소유하고 덜 더럽히고

누군가를 지배하지 못하니까

이제는 내 뒤에 어둠만 있는 게 아니라

감자도 있다는 은혜 때문인지

아궁이에서 꺼내 먹던 재 묻은

감자도, 마저 찾아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