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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솔뫼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 『겨울의 눈빛』 『사랑하는 개』 『우리의 사람들』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영릉에서』, 장편소설 『을』 『백 행을 쓰고 싶다』 『도시의 시간』 『머리부터 천천히』 『고요함 동물』 『미래 산책 연습』 등이 있음.

songbook1123@gmail.com

 

 

 

물은 있지만 그는 혼자이다

 

 

사소한 일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임누리는 지난달부터 요코하마 나카구 인근 상점가에서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 강사 일을 맡게 되었다. 대학원 선배가 하던 일을 2회만 대타로 담당하기로 하였으나 첫 강의가 지나자 왜인지 모두가 임누리가 이 일을 계속해서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 임누리 선생님께 박수! 임누리는 이 일이 어쩌면 새로운 계기가 될지도 몰라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고 원래 약속과는 달랐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서 일을 하게 되었다. 요코하마까지 가는 길은 멀었고 시급을 생각한다면 다른 일을 하는 편이 나았지만 아무도 임누리가 무언가를 가르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 일을 이어서 하고 싶게 만들었다. 하지만 앞일은 알 수 없다. 다음 일은 그러니까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잠시 생각하게 된 것은 해당 지역사업 담당자가 오늘 수업에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이다. 참석이 아니라 참관이 아닐지. 글쓰기 수업이 진행되는 공간은 원래 오래된 이불가게가 있었던 곳으로 몇년간 비어 있던 자리였다. 그곳에서 수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점점 빈 상가가 늘어나는 상점가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들이기 위해서였다. 아직은 크게 염려할 정도는 아니지만 계속해서 빈 상가들이 있었고 평소 오가는 사람들이 아닌 새로운 사람들을 불러들여보자는 취지였다. 말하자면 빈 상가가 조금씩 늘어나는 상점가의 재생사업으로 이 공간에서 수업을 하거나 영화 상영이나 북토크 혹은 이민자들의 고향 음식 만들기 워크숍 같은 것을 진행하게 된 것인데 해당 사업을 지원하고 진행하는 시의 담당자가 오늘 수업에 참관하여 사업의 진행상황을 확인한다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전해준 것은 강사 일을 맡긴 이이다인데 임누리는 이 자식이 그걸 왜 이제 말해주지 그래서 일을 맡긴 건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고 평가가 나빠서 사업이 중지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지난주부터 이어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수업을 잘 못한다고 한들 뭐가 바뀌겠는가라는 식으로 점점 호방한 태도를 애써 꾸며내게 되었다. 잘못한다고 한들 잘리기밖에 더 하겠는가. 마음을 편하게 먹기 위해 그래그래 짤라라 짤라 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헤치며 걸음을 옮기는 임누리.

글쓰기 수업이라고는 하지만 이 일이 글쓰기에 관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첫날부터 알 수 있었는데 이 수업이 정말로 글쓰기에 관해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한다면 외국인인 임누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애초에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의외로 꽤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외국인이니 누군가의 일본어 문장에 대해 뭐라고 말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기 때문 아닐까. 사람들로 가득 찬 전철에서 열리고 닫히는 문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오늘 수업을 어떻게 진행하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그려보던 임누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묘하게 자신감이 치솟다가 이유 없이 가라앉다가를 반복한다. 하지만 가르치지 않는 것은 글쓰기뿐만이 아니고 사실 무엇도 그다지 가르치지 않는 수업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주제에 관해 사십분쯤 쓰고 그것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었으므로 수업이라기보다 음식 만들기처럼 워크숍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배우는 것이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은 남의 말을 끊지 않는 방법이나 열받아도 욕하지 않아야 한다거나 싸워도 수업이 끝나면 같이 웃으며 마셔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임누리는 흥분하다가도 언성은 높이지 않던 황과 내내 들뜬 얼굴을 하다가 차분하게 이노우에에게 잘못을 지적하던 니키를 떠올린다.

아직 요코하마에 익숙해지지 않아서일까. 전철을 세번 갈아타고 상점가로 향하는 길에서 사람들의 옷차림과 간판들이 조금씩 도쿄와 다르다고 어김없이 느낀다. 사소한 일을 계시처럼 여기는 임누리는 가슴속에 느낌표가 찍히는 것을 느끼지만 이 계시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늘 알 수 없었다. 당신은 새로운 곳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몸짓과 이야기를 할 준비를 하세요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이전의 자신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긴장된 얼굴에서 조금씩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 임누리. 초여름인데 작년보다는 덜 더운 날씨였고 짧은 팬츠를 입은 여자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몇개의 가게가 들어서 있는지 셀 수 없이 빼곡한 간판을 단 건물들을 지나치면 언젠가 각자의 세계가 펼쳐질 저 문들을 다 열고 들어가보아야 할 것 같지만.

지난주 황을 마주친 까페에 들를까 하다가 관두고 도토루로 가서 토스트와 커피를 시키고 곧 있을 일들을 생각했다. 십분쯤 일찍 가서 정돈된 상태를 한번 체크하고 오늘 주제를 화이트보드에 쓰고 담당자가 오면 예의 바르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사람들이 모이면 가볍게 근황을 이야기하고 하지만 근황은 늘 가볍게 끝나지 않는다. 임누리는 이전에 여러차례 해보았고 지금도 아르바이트로 매주 하고 있는 한국어 수업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늘 하고 싶어했고 가볍게 시작된 요즘의 이야기지만 누군가에게는 늘 큰일이 있었다. 가까운 존재가 아프거나 그것이 사람일 때보다 강아지일 때 모두가 더 슬퍼졌고 자전거를 도둑맞거나 자전거를 도둑맞으면 수업에 오기가 두배는 힘들어진다고 말하고 어떨 때는 정말로 별일이 아닌 것 같은데 모두가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집에서 사과를 너무 많이 보내서 먹고 먹어도 남아서 처치곤란이라는 아니 저 좀 주면 안 되나요 말하고 싶은 일에 모두들 정말 힘들겠다고 동의를 한다거나 아무튼. 토스트를 먹다 고개를 들자 황이 지난주처럼 리트리버를 데리고 지나간다. 개의 이름은 밤비라고 했었지. 할아버지 대부터 대만에서 일본으로 건너와서 살고 있다는 황은 옆자리에 앉은 이노우에의 말에 따르면 이 근방에 건물과 기타 등등을 가진 부자라고 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단호한 목소리의 황과 부자야 부자 하고 약 올리듯 덧붙이는 이노우에. 이 수업에서 열받아도 욕하지 않고 참는 것을 배운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배우는 것은 없고 아직 참을 만해서 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황과 이노우에는 아니 어쩌면 예상치도 못한 누구와 누구는 언젠가 치고받고 싸울지도 모른다. 임누리는 넋이 나간 척을 하며 흥미진진하게 구경을 하는 자신을 떠올리지만 더 나아가면 안 돼 얼른 수업 준비를 하라고 싸움 구경을 하는 임누리 앞으로 또다른 임누리가 튀어나가 멱살 잡은 남자들을 말리고 싸울 기운 없던 늙은 남자 둘은 어쩔 수 없이 주먹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황은 임누리의 아버지뻘로 보였고 키가 크고 단단한 체격에 열받을 때는 말하려고 들면 할 말이 많지만 너무한 말이기 때문에 참는다는 표정을 했다. 요코하마의 차이나타운은 넓고 거대했고 조명은 반짝이고 글자는 화려했다. 대부분 식당이지만 중간에 호텔과 숙박업소도 있었고 중국식 찻집과 까페도 있었다. 황의 건물은 이 근방일까 아니면 이곳과 저곳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임누리는 차이나타운에서 밥을 먹어야지 생각하다가도 이 빽빽함에 어지러운 기분이 들어 한번도 먹지 못했던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매주 어딘가로 가 새로운 문을 열어젖혀보자. 애쓰지 않아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니까. 임누리는 수업용으로 산 메모지에 혹시 갑자기 말문이 막히거나 진행이 너무 빨리 되어 시간이 남을 때 할 말들을 적어두었다. 예를 들어 지난주의 정리 이번주와의 연결 그리고 다음의 예고 같은. 손으로 쓴 일본어는 알아보기 어렵다.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지난주 받은 과제 코멘트를 작성하였다.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는데 얼굴은 금세 떠오르지 않고 실루엣으로 남아 아 이 사람들을 오늘 보고 다음주 또 보면 그때는 기억해낼 수 있을 거야 그것이 문득 조금 벅차게 느껴졌다. 수업 준비를 끝낸 임누리는 남은 토스트를 한입에 넣고 커피를 마시고 걸음을 옮겼다. 오오카강 인근 다리에 모인 갈매기는 언제나 모형처럼 미동도 없다가 사람이 지나갈 때만 푸드득 움직이곤 이내 제자리에 앉는다. 플래시가 터지듯 연이어 흰 날개를 움직이는 갈매기들을 지나 상점가에 도착한 임누리는 아직 시간이 이십분이나 남았지만 주변을 얼쩡거리지 않고 그대로 수업을 진행하는 상가로 들어간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차분하게 다시 한번 내용을 정리해보고 있을 때 오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반팔 셔츠를 입은 남자가 들어오고 남자는 익숙한 몸짓으로 명함을 내민다.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담당자 다카스카입니다. 아주 우수한 선생님이라고 이이다씨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아니요 아니요. (손을 절레절레 고개도 절레절레) 이이다씨와도 아는 사이신가요?

네, 이이다씨가 고치고 있는 오래된 집도 제가 담당하는 사업 중 하나입니다. 작년에 오래된 집을 게스트하우스로 만드는 프로젝트로 신청을 하신 게 통과가 되었거든요.

아 전혀 몰랐어요.

네, 생각보다 여러 일이 진행되고 있거든요. 미리 말씀을 못 드렸는데 오늘은 저희 어머니도 수업에 참여하실 예정인데 괜찮으실까요?

아 그럼요 그럼요.

 

임누리는 그전에 명함도 명함지갑도 없이 살았지만 작년부터 일하게 된 한국어 교실에서 만들어준 명함을 쓰기 시작하자 세상에는 명함을 건넬 일이 의외로 많았다. 지하철역 앞에서 산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익숙하게 상대에게 건넨다. 이런 지갑은 조금 그렇지 하지만 사소한 일을 오래 고민하는 임누리는 뭔가를 사려고 들 때에도 생각이 많아졌고 아 지나가다 또 적당하다 싶은 걸 사버리자라고 결론을 내고 잊어버리려 했지만 꺼낼 때마다 아 이런 지갑은 조금…… 하고 신경이 쓰였다.

 

임누리입니다.

 

임누리는 받은 명함을 살피며 다카스카씨?라고 다시 한번 남자의 성을 확인하고 뒤이어 들어온 커트 머리의 자세가 곧은 칠십대쯤의 여성과 인사를 하였다. 남자가 다카스카라면 높은 확률로 어머니도 다카스카겠지 하지만 새로운 사람이 왔으니 자기소개를 또 하자. 임누리는 담당자가 어머니를 데려오리라는 생각은 못했지만 강의 평판이 나쁘지 않으니 어머니를 모시고 온 것이겠지 생각하며 안심하다가 아니 그런데 어머니가 오늘 듣고 나쁘다고 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오락가락했다. 남자와 어머니가 그리 닮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말하자면 다른 종류의 거푸집이라는 느낌이었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남편이라는 사람이 있겠지 이 닮지 않음 타인 같은 느낌에 남편이라는 남자를 세워두면 대충 얼개가 들어맞을지 몰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발을 했는지 좀더 짧아진 머리의 이노우에가 들어왔다. 임누리가 뭐라고 설명하기도 전에 이노우에는 반가운 얼굴로 어머니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이어서 들어온 황에게 다카스카 모자를 소개한다.

모두 자리에 앉은 이후에 젊은이1 유스케와 젊은이2 니키가 들어온다. 유스케와 니키의 나이 차는 열살이 넘을 테지만 이곳의 분위기로 보아 대충 사십세 이하는 젊은이로 치고 있었다. 아니 왠지 육십세 이하도 그럭저럭 젊은이로 쳐줄 것 같은데 아직 사오십대가 없어서 모르지만 하는 생각을 하다보니 수업이 좀더 진행되면 사람들이 늘지도 모르지 싶은 생각이 들었고 이런 식으로 점점 애착이 생기는 것인가 임누리는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그러고 보니 오십대로 보이는 이가 없지는 않았는데 다카스카는 어머니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임누리는 젊은이와 늙은이 (아니 어르신이라고 해) 사이의 다카스카를 보며 대충 젊은이로 넣어줄 수도 있겠군 싶어졌다. 그러다 니키와 유스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 싶어졌는데.

시계는 정각을 알리고 임누리는 새로 오신 분이 두분이나 계시니 자기소개를 하겠다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안내를 한다.

 

임누리라고 합니다. 도쿄에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입니다. 맥도날드와 스타벅스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르바이트로 한국어를 가르칩니다. 취미는 네일아트였는데 요즘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제는 취미가 없는 것 같네요. 의외로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임누리는 맞은편에 앉은 이노우에를 가리키고 이노우에는 퇴사 후 경비 일을 하고 있고 취미로 밴드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어머니와 함께 오시다니 갑자기 반성이 되네요. 저도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거든요. 하지만 어머니와 함께 수업을 듣는 것을 생각하니 뭔가 그건 좀……

 

(그 말을 자르듯이) 니키입니다. 필리핀에서 왔고요. 아, 다음주에는 필리핀에 가기 때문에 못 와요.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스물세살입니다.

 

니키는 누가 봐도 어려 보였기 때문에 스물세살이라는 나이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줄줄이 이어서 자신의 나이를 댈 생각을 하면 그건 좀…… 싶어지는 사람들.

 

다카스카 료코입니다. 니가타에서 택시 운전 일을 오래 했습니다. 아직 할 수 있고 하고 싶은데 아들이 걱정이 된다고 해서 요코하마로 왔습니다. 아직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요코하마도 니가타처럼 바다이고 강도 있어서 그 점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조금 지내보고 생각할 예정입니다. 니가타에서는 낚시를 자주 했고 등산도 좋아합니다. 니가타 길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습니다. 여러 사람들을 태우고 어디든 갔습니다. 요즘은 앞으로는 무얼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아들 다카스카는 이것이 일임을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성격인지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무관히 자신을 소개했다. 별개의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앞 사람과 연결지어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요코하마에서 일을 한 지 이십년이 넘었고 그전에는 건축회사에서 짧게 일을 했다고 말했다. 황은 왜인지 다카스카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다 근처에서 건물 관리 일을 한다고 짧게 소개한다. 이어서 저도 근처에서 일을 합니다 바를 하고 있어요 참고로 오늘은 휴일입니다라고 덧붙이듯 말하는 유스케의 순서를 끝으로 모두의 소개가 끝나고 임누리는 화이트보드에 사랑이라고 쓴다. 쓰면서 스스로도 조금 쑥스럽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차분하게 적은 뒤 오늘의 주제는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

 

라고 말하는 이노우에의 얼굴도 어딘지 쑥스러워 보였는데. 원래 이번주에 쓰기로 한 주제는 가족이었는데 평소에는 서로 말도 별로 하지 않던 니키와 황 두 사람이 가족 이야기는 골치 아파서 싫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러면 사랑으로 하죠 가족도 사랑에 포함이 되고 친구도 사랑에 포함이 되잖아요라고 말한 사람은 이혼 후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 유스케였다. 그렇죠 강아지나 고양이도 사랑이고 가족이죠 요코하마에 대한 사랑도 사랑이고요. 덧붙인 말이 좀 어색하고 뜬금없다고 느꼈지만 지난주 수업이 끝나고 술을 마시다 본 간판에는 I love noge라고 술을 마신 동네인 노게(野毛)가 들어간 문구가 쓰여 있었다. 수업이 시작하고 한시간쯤 지난 뒤라 슬슬 머리가 아파온 임누리는 뭐든 다 좋다는 생각에 자 그럼 다음주 주제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수업을 끝냈었다.

종이를 나누어주며 여러분이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 어떤 사랑이라도 좋으니 사랑에 대해 써봅시다. A4용지를 나누어주는 순간만은 늘 조금은 엄숙하고 진지해진다. 나누어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필통을 들고 오지 않은 니키와 다카스카 모자가 가운데 테이블에서 연필을 집어 가고 황과 이노우에와 유스케는 각자 필통에서 펜을 꺼낸다. 종이에 고개를 묻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조용히 지난주 과제를 돌려준 뒤 고개를 들면 오후의 햇볕이 유리로 된 문으로 비스듬히 쏟아지고 있다. 임누리는 왜인지 좋아하는 소설 한 구절이 떠오르고 그후에 나는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후에 나는 세상으로 돌아왔다 한번 더 그 구절을 속삭여보는데. 여기에 서 있으면 논문이라거나 돈이나 한국의 가족이라거나 해야 할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의 많은 것들 그런 여러 일들이 왜인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아주 멀리 있고 이미 끝난 일 진작에 관둔 일처럼 느껴졌다. 이곳이 새로운 세상인 것인지 아니면 도쿄로 학교 근처 맨션으로 돌아가는 것이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사실은 잘 알 수 없었다. 아니면 가본 적 없던 곳으로 향하는 것이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잘 모르는 얼굴의 사람들에게로 잘 모르는 거리로.

바다가 있고 항구가 있고 커다란 차이나타운이 있고 그러고 보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십여분 걸으면 나오는 고토부키초는 전후 야쿠자와 재일조선인이 양분했다고 할 정도로 재일조선인이 많이 살았고 지금도 많이 살고 있는 동네였다. 가격이 싼 숙소가 많아서 일용직 노동자들의 거리라고 하는데 그건 잘 모르겠고 길에서 술을 마시는 나이 든 남자들과 까마귀들의 거리 같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요코하마라는 곳이 지나치게 크고 몇개의 근육들이 들어왔다 나왔다 하는 거대한 살덩어리 몸뚱어리처럼 느껴졌다. 오래된 부촌이 있고 외국인들이 거주하던 구역이 있고 미나토미라이가 있고 코리안타운도 있고 고토부키초가 있고 임누리가 수업을 하는 동네가 있다. 그리고 바다가 있고 오오카강이 흐르고 물결이 넘실거린다. 학교도 많고 산도 공원도 있다. 커다란 항구로는 배와 화물이 오갈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오고 많은 것들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진지하게 무언가를 쓰고 있었고 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많은 것들이 오가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거세지 않고 가벼운 바람에 실려 유유히 흐른다.

 

사랑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것은 이상하게도 이혼을 결정했을 때였다. 나와 전 부인은 대학 때부터 연애를 했고 중간에 헤어진 적도 있지만 오래 만나왔고 함께 살았기 때문에 결혼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사이는 나쁘지 않았고 지금도 전 부인의 성실함이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취직 준비를 한 적도 없고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늘 음악을 트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왔고 전 부인과 비교했을 때 사회생활 경험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그래서 공무원인 전 부인의 (아 이름이 유키인데요 유키라고 할게요) 유키의 어른스러움을 옆에서 조금씩 배웠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유키는 나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었을까? 인간적으로 크게 싫어하지 않는 이전에는 좋아했던 두 사람이 왜 이혼을 결정하게 되었을까. 언젠가부터 나는 유키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꼈고 시간이 지나서는 유키가 나의 하고 싶은 것을 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상태를 견딜 수 없어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먼저 유키에 대한 마음이 식었으면서 유키가 차가워지자 왜인지 이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감정은 그런 식으로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 아무튼 그 시기를 지나서 생각한 것은 나는 유키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잘 살펴보지 않았다는 것, 그 이전에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잘 몰랐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각사각 연필로 무언가를 쓰고 임누리는 세상이라는 것이 어디이고 무엇인지 혹은 아무것도 겪지 않은 것 같은 자신이 무언가를 무릅쓴 사람처럼 그후에 나는 세상으로 돌아왔다고 말을 해도 되는지 그러나 사람들의 머리 위로 흐르는 무언가를 따라 흐르고 흐르다보면 어딘가에 닿아 있을지도 모르지 생각하다 고개를 들었다.

아직 알람은 울리지 않았고 시간은 좀더 남았지만 고개를 든 임누리와 유스케의 눈은 마주쳤고 유스케는 그것이 싸인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자신이 쓴 것을 읽기 시작한다. 임누리는 글쓰기 수업이라고는 하지만 글쓰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굳이 무언가가 중요하다면 정해진 시간에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하고 그리고 그다음 주 또 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썼던 것도 짧은 글이었고 특히 유스케는 자신을 드러내는 글을 쓰지는 않았다. 유스케는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에 관해 이어서 말한다. 그리고 이제 유키라는 사람과의 관계는 끝이 났지만 나를 알아가며 유키와의 시간에 대해 이해해볼 것이라고 했다. 유스케의 글을 듣다가 임누리는 문득 자신도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앉아 머리 위로 무언가가 흐르는 사람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이곳이어도 좋고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간 뒤라도 좋을 것이다. 유스케의 글이 끝나자 알람이 울리고 유스케는 어? 하고 모두 조금 웃었다.

 

그러면 이제.

 

임누리는 옆에 앉은 료코에게 손짓을 하였다.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모르겠고 젊을 때 생각이 나기도 하지만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다고 해야 할지. 하지만 기억에 남는 순간은 나이 차가 열살쯤 나던 막내이모가 재일조선인 남자와 살겠다고 집을 나서던 때일 것이다. 당시 니가타항에서는 매주 커다란 소련 선박이 청진항으로 가는 사람들을 태웠고 가족 친척 친구들이 꽃다발을 들고 환영을 하고 손을 흔들었다. 이모의 또다른 친척 아저씨는 공산당 당원으로 전국 각지에서 니가타로 모인 사람들이 며칠이라도 마음 편히 지내는 것을 돕기 위해 귀국협력회에서 봉사를 하였는데 이모는 친척 아저씨를 돕다 거기서 그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한참 뒤에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서야 들은 이야기니까 나도 훗날 알게 된 것이다. 이모는 그 남자랑 북조선으로 갈 준비를 하고 유치원 선생님 일도 관두고 책을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책을 다 팔고 아무튼 가방 하나를 꾸리는 느낌으로 남자랑 살았습니다. 조국에 가면 학교도 병원도 무료라고 선전했으니 돈이 필요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결혼을 하면 집을 떠나는 것이니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때는 이렇게 카라가 달린 원피스를 큰언니인 어머니가 마음먹고 사주었는데 그런 원피스에 가방을 들고 뭔가 영화 같다고 어릴 때 생각했습니다.

여기까지 썼어요.

 

무슨 이야기인지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왠지 우리 어머니 할머니 이야기 같네요.

 

황은 그렇게 덧붙인다. 재일조선인 남자를 만나 북으로 가려 한 일본인 아내. 임누리는 자신이 결말을 아는 이야기처럼 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싫었고 이 글을 이대로 쓰여진 그대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해 생각했지만. 이 이야기는 자신이 들을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너무 많이 판단하고 상상하기 때문이었다. 임누리는 화이트보드 앞에 선 채로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자신이 쓴 글을 다 읽고서는 종이를 내려놓은 료코를 내려다보았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고 큰 체격이었는데 어떤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사람을 보는 일은 생각보다 사람의 몸을 그려보는 일이었다. 이렇게 앉아서 이런 목소리와 떨림 그리고 팔에는 핏줄이 보입니다. 사람에게는 살이 있고 주름이 있고. 얼굴을 쓰다듬고 목을 만지면 따뜻하겠지. 살에 손을 대보고 싶다. 료코의 목소리와 움직이는 몸과 따뜻한 살이 그가 하는 이야기와 섞여 북으로 가려고 한 젊은 여자와 아주 다른 몸 같기도 하고 그리 다르지 않은 몸 같기도 했다. 황은 재일조선인 친구들이 요코하마에 많이 산다고 했다. 내 친구들 중에도 몇명 있어요. 친척 중에 그쪽으로 간 사람들이 근데 나는 잘 모르고 우리 어머니 친구 중에 실제로 간 사람들이 있어요 몇명이나.

 

그런데 알고 보니 남자가 교토에 제주도 출신 아내와 딸이 있어서 그걸 속이고 있다가. 아니 속였는지 아니면 이모도 알았는지. 어느날 아내랑 딸이랑 같이 배를 타고 떠났어요. 이모가 어머니 그러니까 저희 할머니가 아프셔서 병간호를 했는데 그사이에 짐을 챙겨 가버렸어요.

 

바람을 피워도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이런 질문을 하기에 너무 어리다고.

 

니키는 눈을 빛내며 묻고 이노우에는 그런 걸 왜 묻느냐는 듯 손을 내저으며 덧붙인다. 바람을 안 피우는 좋은 남자를 만나라고. 임누리는 아니 이건 그런 이야기가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다가 그런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 같은 것은 없고 그런 판단이 지겹다는 생각을 이어서 한다. 그런 이야기가 아닐 것은 없다. 료코는 어릴 때 원피스를 입고 가방을 들고 사랑을 위해 떠나는 이모를 태워 가는 택시 운전사가 멋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 이후로 한참 잊고 있다가 남편이 몸이 안 좋아졌을 때 운전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유스케는 매번 다른 여자와 오던 남자 손님 이야기를 꺼낸다.

 

저는 일을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제 가게가 제일 멋있고 제일 좋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근처에 다른 좋은 가게도 많고. 그런데 그 사람은 대체 왜 그런 것인가.

여자를 만나는 데 에너지를 써서 가게를 고를 에너지가 없는 거야.

사람이 뭐든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지 않는다고. 그냥 사는 대로 사는 거지.

 

모두 잠시 웃다가.

 

택시 운전을 하면 정말 여러 사람들을 만날 것 같아요.

유스케는 가게를 열기 전까지만 해도 음악을 좋아하는 또래 남자들이 많이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사람도 온다 싶은 일이 많다고 아니 대부분이 그렇다고 말한다. 료코는 정말 여러 사람들 가령 니가타에 오는 유명인들을 태운 적도 있고 목적지가 없는 사람은 매해 꼭 약속한 것처럼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제는 표정을 보면 보입니다.

 

예전에 중앙부두로 간다는 사람을 태운 적이 있었어요. 내가 묻지는 않았는데 귀국선을 타는 사람 같았어. 서른살 정도 된 남자였는데 나중에 자기가 말하더라고. 부두에 도착해서도 시간이 남았으니 삼십분 정도 드라이브를 해달라고 해서 차를 타고 바다를 따라서 달리다가 내려주었는데 왜 그랬는지 그때 내가 선물로 받은 새 손수건이 있었는데 그걸 갑자기 그 손님에게 주었던 기억이 나네. 이모가 배를 탈 뻔하다가 안 타서인지 니가타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그때는 나도 젊어서인지 갑자기 그 손님한테 뭔가 왈칵하는 기분이 들었던 거지 멀리 가니까. 이모는 배는 안 탔지만 이후에 병이 생겨서 한참을 고생하다 그즈음 돌아가셔서 뭔가 허망하고 사는 일이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손님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떠난다고 하니까 뭔가 기쁘고 슬프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거예요.

 

그런데 아내와 딸이 있는데 주변 사람들도 알지 않았을까요.

유스케는 그게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고 말하고 이노우에는 나도 그 생각을 했다고 말하고 줄곧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카스카는 어머니를 칭찬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조금 타인처럼 칭찬하려는 것인지 지금은 여성 택시 운전사가 많지만 그때는 거의 없었을 텐데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말한다. 니가타일보에 실린 적도 있다고. 임누리는 몸에 딱 맞는 셔츠와 조끼를 입고 흰 장갑을 낀 채 핸들을 쥐고 달리는 어떤 여자를 떠올려본다. 여자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차 있는지 모르겠고 차 안은 쾌적하고 좌석에는 코바늘로 뜬 레이스가 깔려 있다. 고개를 돌리면 왜인지 황이 그 옆을 함께 달리고 있었는데 지금보다 젊은 황이 무언가를 쫓듯이 차를 타고 달린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차선을 질주하고 있는데 임누리의 왼쪽에는 황이 달리고 오른쪽에는 젊은 시절의 료코인지 아니면 누군지 알 수 없는 여성 택시 운전사인지 곧은 어깨에 큰 키와 튼튼한 팔을 가진 여자가 달리고 있다. 아니 왜 거기 있는 거야? 황은 임누리를 향해 묻는다. 글쎄 좀 멀리서 이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그랬나. 임누리는 운전을 하지 않고 차 안도 아니고 그런데 어떻게 운전하는 두 사람이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계속 질주하는 자동차의 두 사람.

우리가 이제 가까워진 것인지 아니면 모두 사랑이라는 주제 앞에서는 겉옷을 하나쯤 벗게 되는 것인지 사람들은 모두 이전보다는 길게 자기 이야기를 했다. 니키는 히라가나와 영어를 반쯤 섞어가며 썼고 지난주 가족에 대해 쓰기 싫다고 몇번이나 말했으면서 마닐라에 사는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썼다. 요코하마에서도 꼬박꼬박 성당에 다닐 것을 약속해요. 보고 싶어요. 다카스카는 자신은 과제로 따로 내겠다고 웃으며 종이를 접는다. 그런가 하면 황의 글은 이렇게 시작했다.

 

나의 개 밤비는 남동생의 전 부인이 데려온 개다. 태어난 지 한달도 안 된 개였다. 나는 개를 좋아하고 남동생은 여자를 좋아하고 평생 여자에게 약했다. 남이라는 여자였는데 여자에게 남동생은 세번째 남편이었다. 나는 사랑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

 

황은 사랑에 관해 아는 것이 없지만 밤비와 산책을 하고 나이 든 밤비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에 책임을 느낀다. 밤비와 산책을 하는 시간이 가장 조용하고 즐거운 시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편안한 시간이기도 했다. 남이라는 여자는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였고 남동생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밤비는 그런 사정과 아무 상관 없이 좋다고 했다. 이노우에는 그래도 이 형님이 여자에게 인기가 많다고 말하고 그때 말이야 하고 덧붙이자 황은 그만두라고 손을 젓는다.

 

결혼 여러번 하셨지요?

저 말입니까?

네. 인기가 많으셨다고 해서요.

많이는 아니고 두번 했습니다.

 

유스케는 자기도 그럭저럭 나이를 먹었지만 어른들의 대화는 종잡을 수가 없다고 느끼며 황과 료코의 대화를 듣는다. 오래된 사진첩 속에 마르고 허약해 보이는 남자들은 끝없이 여자 문제를 일으키고 그 옆의 여자들은 어쩐지 일을 잘하는 경향성이 있는 것 같지 않나요. 젊은 시절 황은 튼튼하고 짙은 눈썹을 가진 다듬어지지 않은 얼굴로 카메라를 보고 있다. 나는 무서운 것이 없다. 그러나 울게 되겠지. 임누리의 머릿속에서 두 사람은 여전히 나란히 서로 다른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고 그러다 문득 임누리는 료코의 손수건을 받고 북으로 향하는 배를 탄 남자를 떠올린다. 당신은 손수건을 들고 북으로 향하였는지. 그 손수건은 금세 사라지고 말았는지 아니면 오래 함께하였는지. 그러는 사이 결혼 이야기를 하던 두 사람은 금세 화제를 바꿔 낚시의 즐거움에 대해서 말한다. 구경하듯 둘의 이야기를 듣던 유스케는 자신도 낚시를 좋아한다고 어느새 끼어든다. 배를 빌려서 치바 쪽에서 낚시를 하는 거예요. 이러다 세 사람은 연락처를 교환하고 다가오는 주말에 배를 타고 낚시를 하러 떠날지 모른다. 어쩌면 곧 그렇게 될 것만 같다. 임누리는 아까부터 자꾸만 자신이 알던 여러 사람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과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인사를 한 친구와 십여년 전 어학연수를 갔던 도시에서 잠깐 만났던 사람들과 밤을 보냈던 사람들 스쳐갔던 사람들을 이 테이블에 불러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혹은 그들은 이미 서성이고 있거나.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죽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거나 이제는 없는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늘 여러 일에 정신이 팔려 있던 임누리는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등 뒤로는 시간들이 가만히 흐른다.

 

황의 이야기에 불려나온 남이라는 여자는 이렇게 스치듯 지나갈 여자가 아니었는데 여기에는 쉽게 지나갈 수 없는 애정과 치정이 얽혀 있었는데 황은 지금보다 젊을 때는 그 여자의 이름조차 입에 담을 수도 없었지만 왜인지 오늘은 그 여자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도 놀란다. 아주 오랜만에 남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고 어쩌면 다음에는 더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는 될 수 없다고 그 여자는 쉽게 불러낼 수 없는 이름이라고도 느낀다. 그 여자를 땅을 파서 집어넣으라고 멀리 떨어진 곳에 버리고 오라고.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이노우에는 자신도 다음주에 과제로 내겠다고 종이를 접고 임누리는 왜요 오늘 주세요 하다가 그래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말한다. 이번주는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는 것일까.

료코는 황의 요코하마와 요코스카에서의 낚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러나 어느 모로 보아도 니가타와 비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이곳을 무시하듯 말하면 안 되겠지 하고 참는다. 이야기를 대충 맞추어주었지만 도무지 비교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니가타는 긴 강이 일본에서 가장 넓고 긴 시나노강이 흐르고 바다에서는 여러 물고기들이 잡힌다고. 그렇게 강이 있고 바다가 있고 물은 흐르고 물을 보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물이 흐르는 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또 앞으로는. 이이다는 유스케와 약속을 한 것인지 수업이 끝날 때가 되자 조용히 들어와 앉는다. 임누리는 이런저런 별 이야기를 하더라도 수업이 끝나면 다 같이 웃으며 함께 마시는 거야 그걸 배우는 거야라고 자신있게 생각했지만 오늘은 어떨까. 눈을 마주친 이이다가 손을 들어 마시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오늘은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지난주와 같으면서도 무척 다른 오늘은 어디로? 임누리는 다음 주제는 좀더 생각해보고 말씀드리겠다고 말하며 오늘 덜 쓰신 분들 발표 안 하신 분들은 과제로 써 와달라고 한다.

 

오늘 시간 괜찮죠?

오늘은 먼저 갈게요. 다음주에 봐요.

 

아 정말? 웃으며 손을 흔든다. 응, 다음주에 또. 눈으로 웃으며 말한다. 임누리가 오늘 배운 것은 같이 마시지 않는 날도 있다는 것 혼자 있는다는 것 혼자 있어도 많은 것들이 서성인다는 것. 그리고 다음주가 있다는 것. 정리를 끝낸 임누리는 가방을 챙겨 문을 열고 나간다. 그후에 나는 세상으로 돌아왔다. 임누리는 어디로도 돌아가지 않고 밖으로 나와 걷는다. 언제까지라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집으로 가는 길은 길고 임누리의 등 뒤로 흐르는 지난 시간들은 어느새 유유히 요코하마 거리를 흘러간다. 천천히 냄새를 맡고 호흡하며 이곳이 어딘지 탐색하며. 오늘은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대답 대신 서서히 걸어나가는. 기억은 원래 이곳에서 태어나 살아간 것처럼 몸을 바꾸어 흐른다. 물처럼.

 

 

* 본문에서 반복되는 “그후에 나는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로베르또 볼라뇨(Roberto Bolaño)의 『부적』(Amuleto, 1999, 한국어판 열린책들 2010) 9장 첫째 줄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