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인터뷰
유령에게 말을 거는 사람
민가경 閔佳璟
문학평론가.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비평활동 시작. 주요 평론으로 「지금, 여기, 회색지대, 그리고 “빨강”」 등이 있음.
mgk1008@naver.com
천명관이라는 이름 앞에는 ‘이야기꾼’ ‘방외인’ 같은 수식이 줄곧 따라붙어왔다. 그중에서도 방외인이라는 말을 먼저 내놓은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는데, 그건 그가 오랫동안 스스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장편소설 『고래』(문학동네 2004)로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한국문학과 세계의 독자를 잇는 작가가 된 지금도 그에게 방외인이란 말의 실감이 여전한지, 아니 과연 여전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그 말에는 미묘한 결의 변화가 배어 있었다. 자전적 단편소설 「二十 歲(이십세)」에는, “언제나 어정쩡한 포즈로 사파(私派)와 이교(異敎)의 문 앞을 기웃대며 보낸 시간”1에 대한 자조가 담겨 있지 않았는가. 그러나 지금의 그는 “한곳에 뿌리내리지 못한 삶이 내 운명이고, 이제는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가 과거의 자신에게 비로소 건네는 다독임 같기도 했다.
그리고 ‘방외’에 대한 그의 감각은 자기이해에만 머물지 않고, 한때 분명 살아 있었으되 끝내 이름도 형체도 얻지 못한 채 역사의 조명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간 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의 신작 장편소설 『아코디언』(창비 2026)이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서울의 후미진 곳으로 밀려나 있던 ‘앵벌이 아이들’에게로 향하는 이유다.
‘그림자 인간’과 그 시대
『아코디언』은 전쟁통에 부모를 잃거나 가족에게 버려진 뒤 앵벌이 조직에 흡수된 아이들의 이야기다. ‘구름탄’이라는 마약에 길들여진 채 극한의 구걸 노동에 내몰리는 아이들을 소설은 낚시 새 “가마우지”(42면)에 빗댄다. 아무리 고기를 잘 잡아도 어부에게 끈이 묶여 있어 제 몫으로 삼킬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야기는 그 아이들 가운데서도 벌이가 시원찮았던 소년 ‘동이’가 우연히 낡은 아코디언을 쥐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몸이 기억하는 소리에 의지해 연주를 펼쳐내는 동이는 점차 거리의 명물이 되고, 불의의 사고로 거처마저 잃은 아이들은 동이를 중심으로 작은 앵벌이 공동체를 일군다.
그러나 소설은 아이들의 성장과 자립을 낭만적인 관점으로 다루지 않는다. 사고로 몇몇 아이가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더 나은 삶’을 향한 기대가 번번이 좌절되는 전개는 시종 아프게 읽힌다. 아이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경제적·정서적으로 착취하는 ‘양 목사’를 비롯한 여러 앵벌이 큰손들의 방해는 날로 악랄해진다. 아이들이 세운 공동체 내부에서도 불신과 분열이 이어진다. 그 와중에 우물 속에 가라앉아 있던 익명의 시신들처럼, 어디에도 이름 한줄 남기지 못한 죽음들이 망령처럼 소환된다. 그리고 소설은 끝내 앵벌이 큰손 ‘육손’의 사적인 보복으로 쓰러지는 동이의 마지막과 그 죽음을 알아채지 못한 군중의 뜨거운 시위 함성을 뒤섞어놓는다. 그런 점에서 『아코디언』은 ‘반공’이라는 기치의 광기, 아이들에게 저질러진 조직적 착취와 인신매매, 원조와 시혜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폭력 등 전후 사회를 지배한 여러 결의 폭력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공식 역사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자리를 촘촘한 상상력으로 채워넣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하나의 역사적 상상력의 보고(寶庫)에 가깝다.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1964년생인 작가는 왜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이 폐허의 시간으로 걸어 들어갔을까. 이 시대를 다시 자신의 눈앞에 불러오기로 결심하면서 그가 붙들고자 했던 문제의식은, 단지 전쟁의 참화만이 아니었다.
ⓒ엄기태
전쟁 직후의 삶은 우리 아버지 세대의 것이지만 우리 때를 떠올려보면 온통 반공이었어요. 학생들은 일제시대 교복인 가꾸란을 입고 거수경례를 하고, 교련복을 입고 군인처럼 군사훈련을 받고, 수시로 전국적 규모의 반공웅변대회가 열리는 등 혼란스럽지만 반공이란 이름 아래 강력한 질서가 작동하던 시대였죠. 그리고 그 반공 슬로건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올라가면 결국 자유당 정권이 있었고요.
형사들이 움막에 들이닥쳐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다짜고짜 ‘우리의 맹세’를 아느냐고 다그치는 대목과, ‘빨갱이’라는 말 한마디 앞에서는 “하나님도 (…)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98면)는 서술이 보여주듯, 그는 국가가 조직한 선전의 언어가 어떻게 사회의 가장 낮은 곳까지 유통되고 이식되는지 주목하고자 했다. 사회의 밑바닥까지 깊게 뿌리내린 분단체제와 냉전의 원점까지 거슬러올라가 보는 작업은, 오늘날까지 이념을 명분 삼아 서로를 낙인찍는 색깔론, 그 끈질긴 폭력의 원형을 톺아보는 작업이기도 했다.
분단은 여전히 한국사회를 압도하는 모순입니다. 그것으로 진영을 갈라 혐오와 갈등을 부추기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기득권 세력이 있고요. 안타까운 건 그 색깔론에 발목이 잡혀 우리의 의식이 더 다양하게, 더 멀리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만 이 무거운 시대적 배경을 향한 탐구욕이 이야기를 출발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아니었다. 그를 먼저 사로잡은 건, 언제나 그랬듯 소외된 자리에 놓여 있던 존재들의 구체적인 삶의 풍경이었다. 자유당 정권의 부패라는 당시의 상황과 천명관 특유의 입담을 생각하면, 정치판의 노리배들을 내세우는 더 화려한 스케일의 소설도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유령 같은 존재”(296면)들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었다. 거리의 가장자리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조용히 사라진 아이들의 삶을 통해서만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 시대에 살았던 것도 아니고 같은 처지에 처한 바도 없으니 쓰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작가적 상상력으로 돌파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게 이 인물들의 모습이 마냥 낯설지만은 않았어요. 우리 세대는 한국전쟁, 반공주의, 해외입양, 약물중독 같은 사회적 문제들이 늘 가까이 있었으니까요. 1970년대만 해도 약간의 결락을 가진 존재들이 언제나 공동체 안에 같이 있었어요. 하지만 군사정권은 대대적으로 판자촌을 철거하듯이 그들을 강제로 수용시설에 격리해 한국사회의 공적 공간에서 몰아냈는데, 그것은 ‘정화’라는 섬뜩한 단어 아래 행해진 또 하나의 국가폭력입니다.
천명관은 현대사의 질곡을 아이들의 시야로 포착하고, 상상에 기댈 수밖에 없는 역사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각종 자료를 들여다보며 고증에 공력을 들였다. 그 결과 소설에는 실제로 존재했던 창신동 절벽마을과 채석장, 해방촌의 지형, 당시의 전차 노선 같은 구체적인 사실이 스며 있다. 이러한 고증은 이야기의 ‘규모’보다 미세한 ‘결’을 채우기 위한 작업이었다.
동시에 그는 이 이야기를 특정한 시공간에만 결박하지 않고,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통용되는 이야기”로 만들어 보편적인 성찰을 제공하고자 했다. 특정 연도와 정치적 사건을 명시하기보다, 인간이 착취와 지배 아래 놓일 때 되풀이되는 ‘생존’의 조건 그 자체를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소설은 인물들의 의식을 통해 시대상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할 뿐, 정확한 시점과 사건명을 직접 못 박는 법이 드물다.
한편 그는 14년 전 ‘길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창비 블로그에 연재했던 서사 원형의 상당 부분을 덜어냈다. 동이가 도시로 돌아와 앵벌이 왕국을 세우고 몰락하는 고딕적인 서사 대신, 장편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예담 2016) 이후 10년간 매진해온 영화 작업의 감각, 즉 장면 하나하나를 눈앞에 펼쳐 보이듯 그려내는 영상적 상상력을 더했다. 물론 오랜 개고의 과정을 거치며 두고 와야만 했던 장면들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더 잘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남았지만, 이야기의 본질인 ‘아코디언’에 집중한 작업은 다른 제목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명료한 확신을 주기도 했다.
한 아이와 한 악기
천명관은 자신의 소설을 두 부류로 나눈다. 의식주 문제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의식주는 해결했으나 그다음 문제―외로움, 소통 불능, 방황―에 봉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을 전자에 더 끌리는, 조금은 ‘옛날 작가’라고 평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런 삶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는 그의 말은 분명 의미심장했다. 작중 울고 있는 ‘깜상’을 향해 양 목사가 건넨 말―“우리에게 더 중요한 건 우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17면)―처럼, 『아코디언』의 아이들이 당면한 문제는 ‘생존’ 그 자체였다. 전쟁이 갓 끝난 폐허 속, 보호자도 국가도 그들을 책임지지 않는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죽지 않고 하루를 버티는 일은 아이들이 그려낼 수 있는 최선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상, 생존이라는 키워드는 작가의 진술처럼 “이 이야기의 조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존의 문제 밑바닥에서도 동이를 지탱한 것은 다름 아닌 음악, 더 구체적으로는 당대의 ‘유행가’였다. 우연히 미군클럽 무대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은 뒤, 음악은 동이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드는 ‘희망’인 동시에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분수에 맞는 자리가 따로 있”(153면)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좌절’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고래』의 ‘금복’이 대왕고래에게서 “죽음을 이겨낸 거대한 생명체가 주는 원초적 감동”(65면)을 경험한 뒤 강렬한 욕망이 추동한 삶, 심지어는 파멸까지 몸소 살아냈듯 『아코디언』에서 음악은 동이에게 생존을 넘어선 욕망을 불어넣는다.
ⓒ엄기태
더해서 소설의 각 장이 「럭키 서울」 「목포의 눈물」 「슈샨 보이」 등 당대 유행가의 제목을 그대로 달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음악은 이 소설에서 인물의 욕망을 견인하는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스스로를 ‘팝송 세대’에 가깝다고 말하는 천명관은 그 시절 유행가에 당대 민중의 욕망과 결핍, 더불어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뒤늦게 확인했고, 늦게 도착한 애정만큼이나 음악을 배치하는 작업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이 책을 “그 시대의 노래들에 바치는 헌사”(‘작가의 말’ 306면)라고 표현할 정도다.
유행가의 가사를 보면, 그 시대의 민중적인 욕망이나 아픔, 생활상 같은 것들을 담고 있잖아요. 그때는 달리 문화생활이라고 할 것이 없었지만 대중들이 적어도 ‘노래’는 많이 들었을 것 같아요. 나도 락이나 팝을 많이 듣는 세대에 속하기도 했던데다 알게 모르게 예전의 음악이나 유행가에 대한 선입견이 좀 있었나봐요. 뒤늦게나마 알게 됐고 일부러 많이 찾아 들었어요. 유행가는 시대에 따라 민중의 애환을 끌어안으며 그들의 삶을 그려내왔고, 내 소설도 그런 노래가 되면 좋겠다고 ‘작가의 말’에도 썼죠.
그러나 대중음악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고상함과 통속을 가르는 오래된 경계가 남아 있고, 그는 이 경계가 오늘날까지도 견고하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경계들을 먼저 무너뜨리고, 대중을 설득하는 작업들이 더 많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의식은 소설의 서사형식으로도 연결되고 있었다. 역사물의 성격상 사실주의적 재현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기에 천명관은 서사의 완결성을 추구하는 한편, 독자들을 흡인할 만한 고유의 장르적 문법을 곳곳에 구축해두었다. 소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곳곳에서 불쑥 돌출하는 환상성과, 천명관의 소설들을 오래 따라다녀온 ‘구라’와 ‘우연’의 법칙, 그리고 ‘귀환’의 문법 등 장르적 장치들을 만나게 된다.
가령 불의의 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연이’의 할아버지가 사실은 살해당했다는 진실을 동이가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근거는 하나뿐이다. “아코디언이 가르쳐줬다”는 것이다. 양 목사는 “네가 미친 게 아니라면 아코디언에 귀신이라도 들러붙었단 말이냐”(176면)며 당혹스러워하지만, 동이가 알아낸 진실은 훗날 사실로 확인된다. 인과나 증언으로 설명되지 않는 진실이 오로지 악기라는 사물을 통해 발화된 셈이다. 또한 아이들이 세운 앵벌이 공동체가 가까스로 안정을 찾아갈 즈음 육손이 극적으로 등장하면서 소설은 야만의 세계와 누아르의 문법에 접속한다. 육손의 등장을 장르적 전환점으로 삼은 것은 명백한 작가적 의식의 산물이었다.
육손 같은 인물은 순문학에서 잘 나오지 않아요. 일종의 장르적 인물인 거죠. 나는 언제나 장르성을 적극적으로 이야기 속에 갖고 오고 싶었어요. 에필로그 속 깜상의 모습도 바로 그런 특징이 반영된 거죠.
천명관은 누아르의 오래된 문법을 동이의 마지막과도 포개어놓는다. 미련 없이 떠나면 그만인 상황에서, 굳이 누군가를 구하러 되돌아갔다가 안타깝게도 파국을 맞는 결말이다.
누아르는 항상 그래요. 주인공은 그냥 떠나버리면 되는 상황에서도 굳이 파멸이 예고된 상황의 한복판으로 걸어들어가거든요. 거듭해서 그렇게들 쓰는 이유는, 그게 ‘장르’이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장르의 규칙은 소설 말미의 짧은 에필로그에서 정확히 한번 더 완성된다. 동이의 죽음 뒤에도 이야기는 곧장 막을 내리지 않고, 한때 그의 곁을 스쳐간 인물을 뜻밖의 방식으로 다시 불러낸다. 이미 끝난 줄 알았던 은원이 뒤늦게 다른 방식으로 되돌아오는 이 짧은 에필로그는, 장르가 오래 사랑해온 ‘귀환’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사필귀정’이라는 우리 삶의 오랜 진실 한조각을 보여준다. 이렇게 한 시대의 생존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린 서사와 천명관 특유의 장르성이 태연하게 포개어진다. 이러한 교차성은 독자가 마지막 장까지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끔 활활 지피는 땔감이 될 뿐만 아니라 착취와 복수, 은원이 얽힌 세계의 원리가 이미 그 자체로 장르적이라는 천명관 소설의 오랜 테제를 스스로 증명한다.
동이의 마지막은 4·19혁명이 암시되는 광장 한복판에서의 황망한 죽음이다. 인파 속 누구도 그의 죽음을 알아채지 못한 채 시위는 계속된다. 한 개인이 거대한 역사의 함성 속에 삼켜진다는 뜻일 수도 있고, 기록되지 않은 그 죽음이야말로 공식 역사가 담지 못한 진짜 역사에 가깝다는 뜻일 수도 있다. 동이의 죽음과 희생에 실린 작가의 관점에 대해 물었다.
만약 동이가 죽는 것으로만 이야기가 끝났다면 그 장면을 그렇게 그리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홍이’가 있기 때문에 동이의 죽음이 단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 희생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 어둠과 압제를 뚫고 나가 그 끝에 결국은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역사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물론 짧은 환희의 순간 끝에 다시 독재자가 등장해서 매우 오랜 시간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만들어냈지만요. 그 모든 과정들이 쌓여서 또다른 자유를 확장시켜가는 역사의 흐름을 생각했을 때, 동이라는 한 개인의 희생이 결국 대극장 안에 울려퍼지는 홍이의 아코디언 연주로 이어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작중 ‘아코디언’은 애초에 하나의 유품으로 등장한다. 연이의 할아버지가 죽으며 남긴 아코디언은 화재의 잿더미 속에서도 그 형체를 보존한 채 동이의 손에 쥐어진다. 소설 막바지, 동이는 후배 앵벌이 홍이에게 그것을 물려주며, 반드시 훌륭한 연주자가 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할아버지에서 동이로, 또 동이에서 다시 홍이로. 누군가 밀고 당겨 바람을 채워넣어야만 숨을 쉬고 소리를 낼 수 있는 아코디언처럼, 천명관이 포착한 역사 또한 한 사람의 숨이 다한 자리에서 다음 사람이 그것을 이어받는 방식으로 계속되어왔다. 그렇기에 아코디언은 소설의 주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특히 이 상속을 매듭짓는 이가 오래전 하우스보이였던 ‘미키’(이제는 ‘찰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악단의 재주꾼)이고, 그가 홍이와 연결해주는 무대의 주인이 과거 동이에게 온정을 건넸던 ‘요시야’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스쳐 지나간 희망이라도 그저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며, 언젠가 반드시 어디론가 흘러든다는 작가의 믿음이 반영된 결과로 읽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 자신을 믿어야”(270면) 한다는 동이의 말을 꼭 쥔 채 대극장에서의 연주를 시작하는 홍이의 모습, “그렇게 음악은 죽음의 반대말이 되었”(303면)다는 문장 역시 같은 맥락이다. 연재 당시에는 도입부에 놓여 있던 이 장면을 결말로 옮긴 것도 ‘죽음’보다 ‘시작’의 이미지로 이야기를 맺으려는 작가의 선택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 그리고 듣는 사람
영화와 소설, 두 매체를 오래 오간 작가인 만큼 ‘영화인’으로서의 삶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영역의 근본적인 차이를 묻자 답은 명료했다. 영화는 일단 ‘다 안 된다’에서 시작되는 장르이고, 문학은 사실상 모든 것이 가능한 데서 시작되는 장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학의 ‘다 되는’ 자유야말로 그에게 가장 무서운 조건이다. 그 무한한 자유 속에서 창작의 온도를 끓는점까지 끌어올리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는지 묻자, 그런 건 없다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창작의 지난한 과정을 지탱한 것은 독자와 자신이 소설 안에서 공명하고 있음을 느낀 몇몇 순간들이었다. 자신을 “작가 이전에 누구보다 열렬한 독자”라고 설명하는 천명관은 거장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느꼈던 행복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글 역시 독자에게 그만한 행복을 돌려줄 수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어릴 때부터 저는 아주 성실하고 집요한 독자였어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열심히 찾아보고 계속 곱씹고, 그것을 보면서 행복을 느끼는 독자였죠. 나도 누군가의 책을 읽으며 굉장히 행복한 순간들이 있는데, 내 책도 누군가에게 그런 기쁨을 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죠.
ⓒ엄기태
그의 소설세계와 문단이나 세간의 평가에 대해 두루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문득 그가 자신을 형용하는 어떤 수사에도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단단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이야기꾼들, 이를테면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존 어빙, 모옌, 살만 루슈디를 언급하면서, 그들이 보여준 이야기성에 대한 깊은 경의와 애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자신을 애초부터 ‘창작자’라기보다 ‘매개자’, 더 구체적으로는 “이야기를 듣는 자”에 가깝게 설명하던 순간이 묘한 잔상으로 남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도 없고, 목소리를 낸다고 한들 얘기를 들어주는 이들도 없어요. 난 작가가 그걸 대신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할 얘기가 없었고, 설령 있어도 그것을 들어줄 사람이 없던 시절을 지나온 작가가 도달한 것은 자신이 시대의 “그림자 인간”(296면)들을 대신해 말하는 것. 방외로 밀려난 아이들의 노래, 청소되듯 쓸려나간 존재들의 목소리, 여전히 유랑 중인 유령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들은 만큼 써내려가는 일. 『아코디언』은 바로 그 ‘청취’의 자세로 빚어진 소설이다.
이 소설은 역사의 무대 뒤편에 있던 유령들에게 얼굴을 되찾아주고, 거대한 함성 속에 묻힌 죽음이 다시 제 목소리를 내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비극과 허무로 쉬이 봉인하는 대신, 한 사람의 끊어진 숨을 다음 사람이 이어받는 한자락의 연주를 결말에 남겨둔다. 한 시대 안에서 우리가 놓친 줄 알았던 한 아이의 삶이 뜻밖의 자리에서 다시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오래전에 지나간 줄 알았던 시간 또한 완전히 ‘지나가버린’ 것만은 아니게 된다. 천명관의 소설은 지금 우리에게 그 희미한 아코디언 여음을 들려주는 듯하다. 한 사람의 삶이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함께 끝나지 않으며, 그가 남긴 말과 미처 다 살아내지 못한 가능성은 다른 삶으로 흘러들어 다시 제 시간을 얻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역사가 언제나 한 시대의 ‘끝’을 다른 삶의 ‘시작’ 속에 남겨두었듯이.
그와 나눈 대화를 곰곰이 되짚으며 나는 결국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천명관은 말을 거는 사람이다. 독자에게, 문학에, 이제는 시대에, 가리워진 존재들에게 말을 건다. 자꾸만 먼저 말을 걸어서 말을 들으려는 사람이고, 또 그것을 열심히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치열하게 받아적고 때로는 받아치기도 하면서, 종국에는 ‘소통’하려는 사람이다. 그 어려운 것을 해내려는, 그리고 기어코 해내는 사람이다.
- 천명관 「二十 歲」, 『유쾌한 하녀 마리사』, 문학동네 2007, 38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