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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홍대용의 사상적 분투와 혁신성

 

 

박희병 朴熙秉

국문학자, 사상사 및 예술사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주요 저서로 『한국의 생태사상』 『유교와 한국문학의 장르』 『연암과 선귤당의 대화』 『나는 골목길 부처다』 『범애와 평등』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 『한국고전소설 연구의 방법적 지평』 『통합인문학을 위하여』 『한국고전문학사 강의』 『김시습, 불교를 말하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공부』 등이 있음.

chillwon@snu.ac.kr

 

 

1. 들어가는 말

 

최근 홍대용(洪大容, 1731~83)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들이 나왔다. 김명호의 일련의 논저1와 강명관의 『홍대용 평전』(전2권, 푸른역사 2025)이 그것이다. 여기서 김명호는 홍대용을 ‘혁신적 주자학자’로, 강명관은 ‘실천적 정주학자’로 규정했다. ‘주자학자’와 ‘정주학자’는 기실 같은 말이다. ‘혁신적’ ‘실천적’이라는 상이한 형용어를 붙이기는 했으나 홍대용이 본질상 주자학자라고 본 점에서는 둘이 동일하다.

필자는 2013년에 출간한 『범애와 평등』(돌베개)에서, 홍대용이 애초 주자학에서 출발했으나 중국에 다녀온 후 사상적 자기갱신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주자학에서 탈피해 조선사상사에서 전무후무한 대단히 독창적인 사상세계를 구축했음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김명호 강명관 두 교수는 이런 주장과 정반대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음에도 나의 입론을 정면으로 논박하고 있지는 않다. 이는 다소 의아한 일로 느껴진다. 학문 행위에서 이견의 제시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제출되어 있는 기존의 입론에 대한 정당한 비판과 반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필자는 올해 출간 예정인 창비 한국사상선 제12권 『홍대용·김정희』의 편저자로 참여하게 되어 홍대용이 쓴 글들을 다시 꼼꼼히 읽게 되었다. 『범애와 평등』이 출간되고 몇년 후 홍대용이 중국인 벗들과 주고받은 서간 백수십통이 세상에 공개되었다.2 이 자료들 또한 면밀하게 검토했다. 김교수와 강교수는 이 서신들을 홍대용이 주자학자임을 증명하는 자료로 이용하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서신들에 그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필자는 오히려 이 서신들이 홍대용의 탈주자화(脫朱子化) 과정과 독자적인 사상 구축 과정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본다.

홍대용을 주자학에 가둘 경우 그가 이룩한 사상적 성취들이 제대로 이해될 수 없을뿐더러, 그 사상 행위의 사상사적 의의를 정당하게 읽어낼 수 없게 된다. 필자가 이 글에서 홍대용 사상에 대한 두분의 견해를 논박하며 탈주자학에 이르는 홍대용의 사상적 분투 과정과 그 사상세계의 탈주자학적 면모를 논구하고자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3

김명호와 강명관은 홍대용의 후기 사상에서 이단(異端)이 수용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주자학의 ‘혁신’으로 보거나 정주학의 이단 포섭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주장이 이론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그뿐 아니라 두분이 홍대용의 후기 사상이 주자학임을 입증하기 위한 논거로 제시한 자료들의 해석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사상사 연구에서는 텍스트의 ‘맥락’을 정당하게 읽어내는 것이 관건적 중요성을 갖는데, 두분 모두 이 지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자학이란 무엇이며, 어디까지가 주자학이고 어디부터가 주자학이 아닌지를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된다. 폐일언하고 세가지만 지적하기로 한다.

유학에는 원래 자신과 이단을 구획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성향이 있다. 이때의 ‘이단’이란 유학 이외의 사상과 학문들, 이를테면 노자·장자·양주(楊朱)·묵적(墨翟)·불교 같은 것을 가리킨다. 송대(宋代)에 성립된 유학의 한 특수한 형태인 주자학은 역사상 존재했던 그 어떤 유학 유파보다도 이단에 대한 배척이 심했다. 주자학은 노자·장자·양주·묵적·불교를 배격했을 뿐만 아니라, 주자의 시대에 성립된 학문인 육학(陸學)과 사공학(事功學)4 역시 이단으로 간주해 배격했다. 그뿐 아니라 명대(明代)에 성립된 학문인 양명학(陽明學)도 이단으로 지목해 배격했다. 이처럼 주자학은 자신 이외의 학문과 사상을 적대시하고 배격함으로써(이른바 ‘벽이단闢異端’이다)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속성을 갖는다. 주자학은 스스로를 ‘정학(正學, 옳은 학문)’이라 칭하면서 ‘정학/이단’의 프레임을 견지함으로써 진리 인식을 독점한다.5 그리하여 주자학 이외의 일체의 사상·학문은 ‘사설(邪說, 사악한 주장)’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만일 주자학자가 육왕학(陸王學, 육학과 양명학)이나 양주·묵적과 같은 이단의 진리성을 승인한다면 그는 이미 더이상 주자학자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특히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주자학의 순정성(純正性)을 중시했다. 이런 사상적 풍토에서 주자학자이면서 양명학이나 양주·묵적과 같은 이단을 긍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 주자학의 진리성은 이단의 진리성과 결코 공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단의 진리성을 받아들여 주자학을 혁신하거나 확장하는 것이 애당초 가능하지 않다. 이단이라는 비동일성의 수용은 주자학이라는 동일성의 부정을 낳기 때문이다.

주자학에는 이러한 벽이단의 속성과 함께 유별난 ‘화(華)/이(夷)’ 준별(峻別)의 속성이 있다. 동일성을 견지하며 타자를 철저히 배척한다는 점에서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주자학 내부에 있는 한 화이론의 온전한 해체는 불가능하다. 만일 어떤 학자가 화이론을 완전히 부정한다면 그는 주자학 바깥에 있다고 해야 옳을 터이다.

한편, 주자학은 ‘리(理)’를 절대화한다. 천(天)은 곧 리이다. 여기서 ‘천리(天理)’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리의 본원인 태극(太極)에서 음양 이기(二氣)가 나오며 여기서 우주만물이 생성된다는 것이 주자학의 우주론과 존재론이다. 만일 천은 리가 아니라 기(氣)라고 주장하거나 리의 절대성을 부정하거나 음양오행의 개념을 철폐한다면, 그것은 주자학의 우주론과 존재론 바깥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주자학이라고 하기 어렵다.6

만일 홍대용의 사상(정확히 말해 후기 사상)에서 벽이단의 거부, 화이 준별의 부정, 주자와는 다른 우주론·존재론의 기획이 확인된다면 이는 탈주자학이라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홍대용은 젊을 때부터 진리에 대한 탐구심이 강했다. 그는 선입견을 무척 경계했으며 열린 태도로 학문에 임했다. 그 덕분에 자신의 생각을 거듭 갱신하면서 대담한 사상 행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홍대용의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상적 분투의 과정 전반에 대한 ‘동태적’ 파악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7 필자는 이 글에서 종래 이루어진 적이 없는 이 작업을 개략적으로나마 시도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홍대용 사상의 발전 과정이 여실히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이어서, 주자학 너머에서 홍대용이 이룩한 사상의 풍광(風光), 즉 『의산문답(毉山問答)』을 필두로 한 그의 후기 사상의 핵심적 면모를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써 본고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2. 주자학자로서의 출발과 ‘정학/이단’ 프레임에 대한 회의

 

홍대용의 사상 발전은 크게 세 시기로 구획될 수 있다. 제1기는 1765년 연행(燕行)을 떠나기 전까지이고, 제2기는 연행 후 1771년 이전까지이며, 제3기는 1771년 이후 세상을 하직하는 1783년까지다. 이 장에서는 제1기 및 제2기에 이루어진 홍대용의 사상적 분투를 검토하고, 제3기는 장을 따로 하여 검토하기로 한다.

 

출발점으로서의 주자학

홍대용은 12세인 1742년 남양주에 있던 석실서원(石室書院)의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문하에 들어가 십몇년간 주자학을 공부했다. 김원행은 홍대용의 종고모부로,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재야에서 평생 학문에만 힘쓴 주자학자였다. 그는 경전을 외거나 경전에 주석을 다는 데 힘을 쏟던 당시 주자학의 병폐를 경계하면서 학문에서 실심(實心, 진실된 마음)과 실사(實事, 실제의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김원행에게 실심과 실사란 ‘본래의 주자학’을 회복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 시기 홍대용은 스승의 영향을 받아 주자학자로서 참된 학문의 길을 가고자 노력했으며, 명리(名利, 명예와 이익)를 추구하는 학문을 배격하였다. 또한 병학(兵學)과 천문역법에 관심을 쏟았는데, 이는 실사를 중시한 스승의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다.

석실서원 학규(學規) 중에는 “성현의 글이나 성리설이 아니면 서원에서 펼쳐 읽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과 “글을 짓는 것은 반드시 의리에 바탕을 두어야지 이단의 괴기한 설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8는 규정이 있었다. 이를 통해 석실서원 내에서는 유교 경전과 성리서만 공부해야 했으며 양명학이나 노장, 양주·묵적이나 불교와 같은 이른바 이단에 대한 독서는 일절 금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주목되는 것은 홍대용이 이 시기에 주자학을 무조건 추수(追隨)한 것은 아니며, 주자학의 교조화와 매너리즘화에 회의를 품은 채 사상적으로 분투했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20대 전반에 쓴 「논어문의(論語問疑)」에 보이는 『논어』 「태백(泰伯)」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들 수 있다. 홍대용은 종래의 해석과 달리, 주(周)나라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탈취한 것이라 보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태백」에 기재된 공자의 말과 주자의 주석은 모두 진실을 호도한 것이 된다. 홍대용의 이러한 해석은 단지 주자의 설에 대한 비판을 넘어 유교의 핵심부에 대한 아주 중대한 문제제기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주나라를 중화문명의 표준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홍대용은 성인인 문왕과 무왕에게 흠결이 있으며 그들이 꼭 인의로 천하를 얻은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런 관점은 『의산문답』으로 이어져 마침내 중화문명의 탈신비화를 가능하게 했다.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홍대용이 주자학자이던 시절에도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진리 추구의 열의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정학/이단’ 프레임에 대한 회의

제2기 홍대용의 근본 화두는 주자학에 의해 구축된 ‘정학/이단’ 프레임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것이었다. 전근대시기 한국의 사상가 중 이 화두를 붙들고 이론적으로 씨름한 사람은 홍대용 외에 달리 발견되지 않는다. 한국만이 아니라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홍대용처럼 치열하게 이 문제와 정면승부를 벌인 사상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문제의식은 한갓 주자의 경전 해석에 대한 의문의 차원이 아니라 주자학의 배타적 진리성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된 홍대용의 사유 행위에는 두개의 중요한 계기가 존재했다. 하나는 선배 학자인 김종후(金鍾厚)와의 서신을 통한 논쟁이고 다른 하나는 북경에서 사귄 중국인 벗 엄성(嚴誠)과의 서신을 통한 의견 교환인데,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원래 홍대용과 김종후는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김종후는 홍대용이 중국에서 돌아오자 그가 오랑캐 나라의 선비들과 사귄 것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에 홍대용과 김종후는 서신을 통해 이 일이 옳은지 그른지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김종후는 철저한 주자학자로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고수했다. 그래서 오랑캐인 청나라의 선비들과 사귀는 일이 옳지 않은 일이라 본 것이다. 홍대용이 1766년 가을 무렵 김종후에게 보낸 서신에는 이런 말이 보인다.

 

춘추의리를 표방하며 효종과 우옹(尤翁, 송시열)까지 끌어와 사람을 오랑캐 쪽으로 몰아붙이시니, 저는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며 ‘공부가 충분치 못한데다 말을 제대로 못했으니 실로 내게 죄가 있다’라고 여기면서 마음 아파했습니다. 옛 성인(공자)이 사설을 배척하고 이단을 물리친 데에도 또한 폐단이 없지 않았거늘, 사람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발에 족쇄를 채우시니 사는 게 즐겁지 않습니다.9

 

홍대용과 북경에서 필담을 나눈 중국 선비들은 “왕양명과 육상산에 물들고 불교를 섭렵하여 순정한 학문을 하는 우리나라 사람과는 같지 않았다.”10 김종후는 홍대용이 이들과 형제의 의를 맺고서 더불어 하지 않은 말이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개탄했다. 홍대용이 이단과 사설을 운위한 것은 이 점을 의식해서 한 말이다.

그러므로 이 인용문에서는 한국사상사에서(나아가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지극히 중요한 두개의 의제가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고 할 만하다. 하나는 ‘이단’이란 무엇인가이며, 다른 하나는 ‘오랑캐’란 무엇인가다. 필자는 앞에서 주자학에 유별난 ‘벽이단’의 속성과 함께 ‘화/이’ 준별의 속성이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벽이단을 넘어서거나 중국 중심적 세계관인 화이론을 넘어서려면 주자학으로부터의 탈피가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홍대용이 주자학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제1기와 달리 주자학의 배타적 진리성 자체를 회의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점은 홍대용이 3년 후 김종후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글피 세상을 돌아보며 몇번이나 도유입묵(逃儒入墨)하고자 했습니다”라고 한 데서 잘 알 수 있다. ‘도유입묵’은 유가에서 벗어나 묵가나 도가나 불교와 같은 이단으로 들어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홍대용이 이 시기에 실제로 도유입묵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 말을 통해 적어도 그가 사상적으로 깊이 고뇌하며 ‘정학/이단’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분투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홍대용은 1767년 중국인 벗 엄성에게 보낸 편지의 별지에 정학과 이단의 관계를 묻는 문목(問目)을 적어 보냈다. 이 문목에서 홍대용은 주자학의 이단 배척이 과연 정당한가, 이단에는 진리성이 존재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11 이는 당시 홍대용의 ‘사상 심층’에 자리하고 있던 중대한 의문의 솔직한 토로였다. ‘정학/이단’의 프레임에 대한 홍대용의 이런 의문은 기실 김종후와의 논쟁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었다.

엄성은 홍대용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답변을 보내왔다 “이단을 비록 수용하지는 않더라도 굳이 공박할 필요는 없으며, 서로 각자의 길을 가면 됩니다. 훈고학은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엄성은 청조(淸朝) 고증학이 지배적 학문으로 자리잡은 건륭(乾隆) 연간의 학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주자학자였음에도 훈고학(즉 고증학)을 적극 수용하는 한송(漢宋) 절충론의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학자들 중에는 홍대용의 사상이 이후 탈주자학으로 바뀐 것이 바로 이 엄성의 충고 때문이라고 보는 이도 있지만,12 그것은 홍대용 사상 발전의 내적·주체적 계기를 몰각한 주장으로 생각된다. 엄성의 답변은 당연히 홍대용의 사상적 모색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홍대용이 엄성의 충고로 인해 이단을 수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엄성은 어디까지나 이단의 ‘방관’을 말했을 뿐이며 이단의 ‘수용’을 긍정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홍대용은 훈고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엄성의 간곡한 말에도 불구하고 평생 그 말에 따르지 않았다. 훈고학은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실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아서다.

중요한 것은 홍대용이 엄성에게 보낸 문목을 통해, 이 무렵 홍대용의 의식 내부에 주자학을 유일무이한 절대적 진리로 간주하는 통념에 균열이 생기고 주자학에 의해 구축된 ‘정학/이단’ 프레임에 대한 회의가 싹트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는 하나 그것은 아직 말 그대로 암중모색이었을 뿐이며, 이 프레임을 대체할 새로운 명제나 개념을 고안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할 것이다.

 

 

3. 공관병수(公觀倂受) 테제의 정립

 

홍대용은 제2기에서의 모색을 거쳐 제3기의 초입인 1772년 전후에 ‘공관병수(公觀倂受)’ 테제를 정립했다. 공관병수는 공정하게 보아 이단의 장점을 두루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는 홍대용이 만든 용어다.13 이 테제는 홍대용의 사상 행위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홍대용의 진리관과 진리 인식의 태도가 집약된 강령(綱領)에 해당한다. ‘공정하게 보기 때문에’ 이단의 장점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공정하게 본다’는 것은 동시에 주자학이나 유학의 잘못된 점을 거부하거나 비판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말은 주자학과 유학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며 거기에 ‘비진리’가 내포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처럼 ‘공관’은 비판성을 전제한다. ‘비판성’은 진리로 간주되어온 주자학과 유학만이 아니라 이단에도 향할 수 있다. 어떤 학문도 절대 진리는 아니며 장점과 단점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관병수는 ‘정학/이단’ 프레임을 해체하고, 이단의 장점을 수용하기 위해 고안되었다.14

홍대용은 이단의 학문이 비록 여럿이나 징심구세(澄心救世, 마음을 맑게 하고 세상을 구함)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라고 보았다. 이처럼 공관병수의 정당성은 ‘징심구세’에서 담보된다. 그리하여 홍대용의 사유 속에서 공관병수와 징심구세는 하나의 개념적 쌍을 이룬다.

다음은 홍대용이 1771~72년 무렵 쓴 시15에 나오는 말이다.

 

조물주가 만물을 만드니,

洪匀陶萬品

궁발(窮髮)에 사는 사람도 상도(常道)를 지킴은 동일하네.

窮髮同秉彜.

강역(疆域)에는 안과 밖이 있으나,

疆界有內外

범애(汎愛)하여 사사로운 치우침이 없네.

汎愛無偏私.

소박하고 정직함으로 본심을 보존한다면

質直存性靈

도덕적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베풀 수 있네.

德敎可平施.

 

‘궁발’은 『장자』 「소요유(逍遙遊)」에서 유래하는 말로 초목이 자라지 않는 북쪽의 황폐한 땅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오랑캐의 거주지를 뜻한다. ‘범애하여 사사로운 치우침이 없다’ 함은 조물주, 즉 하늘을 가리켜 한 말이다. ‘하늘이 범애한다’라는 말은 장자가 아니라 묵자와 관련이 있다. 예전에 묵자의 ‘겸애’는 ‘범애’로 이해되기도 했다. 묵자는 겸애나 비공(非攻)을 비롯한 자기 학설의 바탕을 ‘하늘’에 두었다. 하늘의 뜻이 만물에 대한 겸애에 있으므로 인간은 차등애(差等愛)가 아닌 평등애(平等愛)를 해야 옳다는 것이다(특히 『묵자』 「천지(天志)」에 이런 메시지가 뚜렷하다). 이렇게 본다면 『의산문답』에 제시된 탈화이론(脫華夷論)의 사상적 근거가 흔히 말하듯 장자의 가치 상대주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묵자의 범애(겸애)에도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위 인용문은 이 시기에 홍대용이 묵자를 수용하여 화/이의 차별을 부정하면서 오랑캐에도 도덕적 본성이 있음을 노래한 것이다.16

하나의 사례를 더 들기로 한다. 다음은 홍대용이 1773년 무렵 쓴 시17에 나오는 말이다.

 

화려한 문사(文辭)는 쇠퇴한 세상의 징후니,

藻華徵衰季

태곳적 질박한 행실을 생각하네.

質行想太古

노자와 묵자는 이단이라고는 하나,

老墨雖異敎

순박함과 검소함은 또한 취할 만하네.

淳素亦可取

 

여기서는 이단인 노자와 묵자에 취할 점이 있다고 했다. ‘이단이라고는 하나’라는 구절은 맥락상 사람들의 통념을 말한 것으로 이해해야지, 홍대용 자신이 여전히 ‘정학/이단’ 프레임 속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발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실질상 공관병수의 표명이라 할 것이다.

한편 1770년대 중반경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일동조아발(日東藻雅跋)」에서 홍대용은 “‘정학을 밝히고 사설을 없앤다’는 주장은 급선무라고 할 수 없다”라고 했다. 여기서 말한 ‘사설’은 양명학을 가리킨다. 비록 여기서도 통념을 고려해 방어적으로 온건하게 말하고 있기는 하나, 이 발언이 ‘정학/이단’ 프레임의 부정을 의미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홍대용은 이 무렵 양명학의 진리성 역시 승인했다. 만일 주자학을 진리로 간주하면 양명학은 비진리일 수밖에 없다. 거꾸로 양명학을 진리로 간주하면 주자학은 비진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홍대용이 양명학의 진리성을 승인했다 함은 곧 주자학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한다. 적어도 조선에서 주자학자이면서 양명학을 진리로 수용하는 사태는 있기 어렵다.

홍대용은 1776년 10월 중국인 벗 손유의에게 보낸 편지의 별지에 ‘정학의 이단 배척에 동의하지 않으며, 이단에도 진리성이 있으므로 공관병수해야 옳다’는 자신의 생각을 문목으로 적어 질정을 부탁했다. 주자학자인 손유의는 이에 답하기를, ‘이단을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공자·맹자·정자·주자만이 진리이니 거기서 절대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에 홍대용은 손유의에게 “문로(門路)가 순정하고 지론이 평실(平實)하니, 감히 감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극히 짧은 답변을 보내는 데 그쳤다. 김명호 교수는 이 답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홍대용이 이단에 대한 손유의의 생각에 동감을 표한 것으로 봤지만,18 이는 맥락을 오독한 것이다. 홍대용의 답변은 손유의의 견해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더이상 말해봤자 소용이 없겠다 싶어 의례적인 감사의 말로 마무리한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홍대용은 태인 현감으로 있을 때인 1779년 중국인 주문조(朱文藻)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자기와 다른 것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몰래 남을 이기려는 마음(勝心)을 과시하며 거만스레 유아독존의 뜻을 드러내는 근세 도학(주자학을 이름―인용자)의 준칙(準則)은 참으로 심히 미워할 만합니다”라고 했다.

홍대용은 제3기에 와서 공관병수의 입장에서 노장·불교·묵자·양주의 사상만이 아니라 진량(陳亮)과 같은 사공학파의 사상에도 진리가 있다고 보아 수용하였다. 주자학에서는 이것들을 모두 이단·사설로 보았으며 이것들을 물리쳐야 요순 이래 공맹(孔孟)의 도가 드러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이 어지럽게 된다고 보았다. 양명학을 포함한 이단의 수용은 주자학의 혁신과 확장이 아니라 주자학의 탈피를 낳는다. 주자는 이단을 비진리로 간주해 부정했는데, 주자가 부정한 비진리를 긍정하는 것은 곧 주자학의 진리성을 부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홍대용 사상의 고점(高點)을 보여주는 저작은 최만년에 쓰인 『의산문답』이다.19 이 책에는 홍대용의 존재론·우주론·문명론·역사철학·화이론이 총망라되어 있는바, 주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상세계가 구축되어 있다. 가령 존재론만 보더라도 홍대용은 주자 존재론의 근간을 이루는 태극·음양·오행을 완전히 부정했다. 『의산문답』에서 ‘리’는 일절 거론되지 않으며, 장재(張載)의 기철학(氣哲學)에 의거해 세계와 존재의 근원을 ‘기(氣)’로 설명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는 홍대용과 동시대 중국의 사상가 대진(戴震, 1724~77)이 장재의 기철학에 기대어, 리를 절대화한 주자학을 통렬히 비판·공격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다음은 『의산문답』의 한 대목이다.

 

오행의 수는 원래 정해진 의론이 아닌데, 술가(術家)들이 이를 숭상하여,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로 견강부회하고20 『주역』의 상수(象數)로 억지 주장을 펴, ‘생극(生克)’이라는 둥 ‘비복(飛伏)’이라는 둥21 허황되게 둘러대며 여러 술수를 장황하게 말하지만 결국 그런 이치는 없다.

 

‘상수’는 『주역』의 상(象)과 수(數)를 말한다. 『주역』의 상과 수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주만물의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을 상수학이라고 한다. 주자는 『역학계몽(易學啓蒙)』에서 상수학을 긍정했으며, 이를 토대로 우주의 근본 실재로 간주된 태극(리)에서 음양오행이 나오고 음양오행에서 만물이 형성되는 과정을 원리적으로 설명하는 한편, 우주의 구조와 운행 원리를 밝히는 역학적 모델을 완성했다. 이처럼 『역학계몽』은 주자가 만년에 자신의 존재론과 우주론적 구상을 집약한 책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홍대용은 1770년대 중반 무렵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역학계몽』의 의문점에 대해 기록한 「계몽기의(啓蒙記義)」에서 주자가 오행생극의 설이라든가 술수가의 부회한 말을 받아들인 데에 의구심을 표했다. 요컨대 홍대용은 주자가 자신의 존재론과 우주론의 토대로 삼은 상수학을 ‘술수학(術數學)’이라며 비판적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의산문답』의 이 대목은 「계몽기의」에 이어 『역학계몽』의 논거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주자의 존재론과 우주론에 대한 전면 부정이다.

홍대용의 우주론에 대해 조금 언급한다면, 그는 덴마크의 천문학자 튀코 브라아(Tycho Brahe, 1546~1601)의 우주 모델을 수용하되, 거기에 자기대로의 우주적 상상력을 보태어 ‘우주무한론’과 같은 독특한 주장을 펼쳤다. 지구 중심적 관점의 폐기도 주목된다. 홍대용에 의하면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 속에 존재하는 변변찮은 하나의 행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행성적’ 관점에서 지구를 본 것은 전근대 동아시아 사상가들 가운데 홍대용이 유일하다. 행성적 관점은 ‘인간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한 존재’라는 종래의 인간관을 수정하게 한다.

그러므로 『의산문답』은 한갓 과학사의 입장에서만 볼 대상이 아니다. 물론 이 책에 우주론과 자연학에 있어 홍대용의 서양과학 공부가 대거 반영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역시 홍대용 사상의 일부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의산문답』은 홍대용이 오랫동안 치열한 사상적 분투 끝에 완성한 ‘사상서’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의산문답』의 기저에는 장자의 가치 상대주의와 묵자의 천(天) 겸애사상이 짙게 깔려 있으며,22 묵자를 비판한 맹자가 반비판되고 있는가 하면 순자의 성악설을 수용한 흔적도 발견된다.23 이 점에서 만일 주자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의산문답』은 그 전체가 하나의 사설이자 이단이다.23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어떻게 이처럼 종횡무진으로 자유분방하게 그리고 대담하게 자신의 사상을 펼칠 수 있었을까? 공관병수 테제에 힘입어서다. 만일 홍대용이 공관병수 테제에 이르지 못했다면 『의산문답』은 결코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4. 홍대용 사상의 혁신성

 

비동일성·타자·바깥의 복원

홍대용의 후기 사상에서는 ‘동일성’ ‘주체’ ‘안’의 억압하에 있던 ‘비동일성’과 ‘타자’와 ‘바깥’이 온전히 복원된다. 비동일성·타자·바깥은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가치적으로 열등하거나 미개하거나 저열한 것으로 인식되어왔는데, 홍대용은 이를 부정하고 그것이 동일성·주체·안과 완전히 균등하다고 했다.

비동일성·타자·바깥에 해당하는 행위자로는 ‘비인간’ ‘비지구 행성’ ‘오랑캐’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주변으로 간주되어온바 그 반대편인 중심에 있는 것이 ‘인간’ ‘지구’ ‘중화’이다. 홍대용은 인간중심주의, 지구중심주의, 중화중심주의는 결국 허구이며 인간과 비인간, 지구와 비지구 행성, 중화와 오랑캐는 근본적으로 균등하다고 말했다. 요컨대 중심과 주변이 균등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며, 이는 실질상 중심의 해체를 의미한다. 중심이 해체되면 만물은 모두 균등한 존재론적 의의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균등은 평등과 통한다. 이 점에서 홍대용의 사상은 ‘평등의 감수성’이 대단히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중화문명의 탈전범화(脫典範化)

유교에서는 삼대를 정치와 문명의 전범으로 삼는다. 중국이든 한국이든 전근대 유학자들은 늘상 ‘삼대지치(三代之治, 하·은·주 삼대의 정치)’를 운위하며 그 이상적 정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삼대는 덕치와 예악에 의해 다스려지고 도덕이 실현되며 민본(民本)이 중시된 세상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홍대용은 주나라의 은나라 방벌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이 아니며 권력욕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은 유교의 성역을 허무는 것이랄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공자가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한 주나라의 문물(文物) 역시 제왕의 사치와 호사를 위한 것이었다고 보았다. 『의산문답』에 이런 말이 나온다.

 

영대(靈臺)와 벽옹(辟雍)은 구경하고 놀기 위해 아름답게 꾸몄고, 구정(九鼎)과 천구(天球)는 간직하기 위한 보물이었으며, 옥로(玉輅)와 주면(珠冕)은 사치스러운 기물이었고, 구빈(九嬪)과 어처(御妻)는 아름다운 미색을 약취(略取)한 것이었다. 낙읍(洛邑)과 호경(鎬京)에서는 토목공사가 번다했으니, 대저 진시황과 한무제가 대형 토목공사를 많이 일으킨 건 이를 본받은 것이다.

 

이처럼 홍대용은 유교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를 해체하면서, 주나라의 문물이 그 본질에 있어 제왕의 사치와 향락을 위한 것이며 어디까지나 백성의 착취 위에 이루어진 것임을 말하고 있다. 삼대 이후 한당(漢唐)의 군주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오로지 왕조를 지키고 보전하여 죽을 때까지 권세와 영화를 누리다가 자손 대대로 전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이었을 뿐이다. 홍대용의 군주제 비판은 청초의 황종희(黃宗羲)가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에서 시도한 군주제 비판을 능가한다.24 황종희는 여느 유학자처럼 삼대는 건드리지 않았으며 오로지 삼대 이후의 군주만을 문제삼았다.

김명호는 군주제에 대한 홍대용의 이런 비판이 주자가 진량에게 보낸 편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 바 있는데,25 이는 홍대용의 『의산문답』이든 주자의 편지든 텍스트의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내린 판단으로 여겨진다. 단적으로 말해 주자는 삼대를 철저히 옹호했으며 그 신화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삼대지치와 성인으로 떠받들어지는 우왕·탕왕·문왕·무왕의 탈신비화는 결국 중화문명의 탈전범화로 이어진다. 중화문명이 전범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예악문물이 완벽한 성인에 의해 이룩된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인의 실상이 그렇지 않을 경우 전범으로서의 지위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홍대용의 독특한 문명론이 개진된다. 중화문명의 핵심을 점한다 할 주나라가 이룩한 문명을 ‘사치의 문명’으로 특징지은 것이다. 홍대용은 이 사치의 문명에 대단히 부정적이었으며, 그와 달리 오랑캐의 특징인 ‘검소의 문명’을 적극적으로 긍정했다. 이러한 긍정의 기저에는 도가와 묵가 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유교의 통념을 완전히 벗어나는 홍대용 특유의 이 문명론을 기반으로 화이론의 해체가 이론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화=문명/오랑캐=야만’과 같은 문명론의 프레임 속에 있는 한 화이론은 절대 극복할 수 없다. 그래서 홍대용은 ‘중화=사치의 문명/오랑캐=검소의 문명’으로 문명론의 프레임을 바꿔버린 것이다. 이 프레임에서는 중화와 오랑캐가 문명적으로 대등, 즉 ‘균(均)’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랑캐의 문명이 강점이 있고 가치적으로 더 우월할 수도 있다. 그러니 중화중심주의에 기초한 화이론은 원천적으로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홍대용은 ‘문명/야만’의 장구한 중국 중심적 프레임을 해체하고 ‘사치/검소’의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함으로써 인종적·지리적 기준에 입각한 화이론만이 아니라 ‘문화적 기준’의 화이론까지 넘어서는 탈화이론(脫華夷論)을 구축했다.

 

사상의 자유 옹호

당시는 주자학만이 진리로 인정되는 세상이었다. 주자학이 이단 사상을 사설, 즉 비진리로 공격하고 배척했음에도 홍대용이 이단의 진리성을 승인한 것은 그 자체가 사상의 자유에 대한 옹호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중국사상사의 걸출한 두 인물인 이탁오(李卓吾, 1527~1602)와 대진 역시 주자학에 반대했다. 대진이 고증학자인 것과 달리 이탁오는 급진적 양명학자였다. 둘은 그 사상세계가 상이했지만 그럼에도 주자학 비판에 있어서는 통하는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들의 주자학 반대는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欲,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없앰)’을 내세우며 예교(禮敎)를 강조하고 욕망을 부정하는 주자학의 교의(敎義)를 향한 것이었지 ‘정학/이단’의 프레임 자체를 깨부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그 당시 중국의 사상적 지형이 오직 주자학만이 진리로 군림한 조선과는 달라서다. 그로 인해 중국에서는 사상의 자유에 대한 옹호나 사상의 자유를 위한 분투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유의해야 할 점은, 자유에 대한 문제의식의 결여는 필경 성역을 허물며 진리 인식을 고양하거나 사상적 관용에 대한 사유를 이론적으로 정초하는 작업‘들’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에서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사상의 자유에 대한 대자적(對自的) 인식은 지극히 중요하다.

홍대용은 비단 주자학만이 아니라 유학을 넘어 사상의 자유를 추구했다. 그 결과 홍대용은 조선이라는 일국(一國)을 넘어 동아시아 사상 공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아주 독특하고 혁신적인 사상서 『의산문답』을 쓸 수 있었다.

 

이외에도 홍대용의 후기 사상에는 모든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동을 해야 한다는 ‘만민개로(萬民皆勞)’의 사상, 신분제 해체의 사상, 반침략·평화주의 사상, 군주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사회사상, 심원한 생태주의적 사유 등이 발견된다. 그뿐 아니라 홍대용은 『임하경륜(林下經綸)』에서 모든 인민으로 하여금 직접 나라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하자고 주장하고 있는바, 이는 비록 한계가 있기는 하나 민주적 감수성에 있어서 일정 정도의 진전을 보여주었다고 할 만하다.

 

 

 

5. 맺음말

 

홍대용은 단일한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고 진리의 다양성을 승인하면서 진리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므로 주자학으로부터의 탈피와 유학의 상대화가 불가피했다. 홍대용 사상의 주자학/탈주자학 여부는 한 개인의 사상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를 넘어 조선후기 사상사 전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조선후기 사상사가 도달한 정점이 어디인가에 대한 물음과 직결되기에 중차대하다. 그러므로 홍대용 평생의 사상적 분투를 동태적으로 읽어내지 못한다면, 또 그가 펼친 사상 행위의 의의를 사상사의 맥락 속에서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홍대용의 사상적 정체성과 성취는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사상가로서 홍대용의 특출하고 남다른 점은 중국사상과 서양과학을 수용해 자기만의 독창적인 사상을 구축한 데 있다. 그는 단지 탈주자학의 사상가로만 규정되어서는 안 되며, 탈유교를 통해 ‘통합사상’으로 나아간 사상가로 규정되어야 마땅하다.

홍대용은 공관병수를 통해 인간·사물·역사·문명·우주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수립함으로써 하나의 세계관을 정초했다. 이 점에서 그는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배출된 걸출한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서, ‘홍자(洪子)’라고 불릴 만하다. 홍자의 사상은 중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는바, 그 내부에 인류 미래의 사상 자원이 될 수 있는 의미있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홍대용의 사상은 문명론에 있어서든 화이론에 있어서든 ‘탈중화’의 지향이 두드러지며 이 점에서 주체적이다. 그의 사상은 중화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북벌론과 북학론을 모두 초극했다. 필자는 근년에 한국고전문학사를 보는 거시적 관점으로 ‘토풍(土風)/화풍(華風)’이라는 쌍개념을 제시한 바 있는데,26 이 도식에 기댄다면 홍대용의 사상은 토풍의 면모가 강하다. 토풍이 비동일성을 옹호한다면 화풍은 동일성 쪽을 바라본다. 홍대용에 있어 비동일성의 옹호는 단지 토풍에 한정되지 않고 비인간과 사물로까지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하다.

‘대심(大心, 넓고 정대한 마음가짐)’이 없고서는 공관병수가 불가능하다. 역으로 공관병수는 우리로 하여금 대심을 갖게 만든다. 만일 홍대용을 전근대 사상사에 국한시키지 말고 오늘날의 맥락에서 독해한다면, ‘공관병수’는 사상의 자유, 타자에 대한 관용과 연결된다. 이 점에서 그것은 사회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밑받침하며 그 향상에 기여하는 명제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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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대용과 만촌 여유량」, 『민족문화연구』 77호, 2017; 「청조 문인과의 왕복 서신을 통해 본 홍대용의 사상」, 『한국기독교박물관지』 14호, 2018;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 돌베개 2020.
  2.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서 영인한 『중사기홍대용수찰첩(中士寄洪大容手札帖)』 『간정후편(乾凈後編)』 『간정부편(乾凈附編)』이 그것이다.
  3. 강명관의 『홍대용 평전』은 비단 홍대용의 사상에 대한 해석에서만 중대한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니다. 홍대용의 생애사에 대한 이해라든가 그가 남긴 텍스트의 독해에서도 적지 않은 오류가 발견된다. 일례로 홍대용이 영천군수로 있을 때 부정축재를 했다는 저자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상상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 그런 것까지 논할 수는 없다(이 문제는 곧 출간될 나의 책 『홍대용 연대기 변증』에서 자세히 논했다). 이 글에서 나는 그간의 내 생각을 보완하거나 좀더 발전시키는 가운데 홍대용 후기 사상의 본질과 그 문제성을 논하는 데 집중하기로 한다.
  4. ‘육학’은 육상산(陸象山)의 학문을 말한다. 육학은 주자학이 격물(格物, 지식의 확충)을 중시한 것과 달리 마음의 깨달음을 중시했다. 이 때문에 주자학 쪽에서는 선학(禪學)에 물들었다고 비난했다. ‘사공학’을 대표하는 학자는 진량(陳亮)인데, 그는 성리학을 공리공론이라고 비판하면서 사공(事功) 즉 실용과 공리(功利)를 중시했다. 그래서 주자학 쪽에서는 의리(도덕적 가치)를 경시한다고 비난했다.
  5. 이 경우 진리 인식의 문제는 권력과 분리되지 않는다.
  6. 이외에도 주자학의 핵심적 면모를 드러내는 개념으로 궁리진성(窮理盡性, 리를 궁구해 도덕적 본성을 실현함)과 격물치지(格物致知, 물을 탐구해 앎을 온전히 이룸)를 거론할 수 있을 터이다. 궁리진성은 성즉리(性卽理)라는 주자학 고유의 심성론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만일 조선시대의 어떤 학인이 성즉리를 폐기하고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한다면 그는 주자학자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어떤 학인이 존재론이나 심성론에서 이기설(理氣說)이나 성리설(性理說)을 일절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주자학자라 보기 어려울 터이다. 주자학의 격물치지론은 존덕성(尊德性, 덕성을 존중함)과 도문학(道問學, 지식의 탐구) 가운데 후자를 중시하는 편향을 보이며 이 때문에 지식주의로 흐르는 폐단을 낳기도 하는데, 만일 어떤 학인이 이와 반대로 존덕성을 중시하며 지식의 확충보다 마음의 수양을 강조한다면 그는 주자학자가 아니라 양명학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7. 김명호·강명관 교수는 홍대용의 사상을 요소적·정태적으로 읽고 있을 뿐이다. ‘요소적’이란 말을 쓴 것은 사상의 맥락, 사상의 운동 과정에 대한 고려가 결여되어 있음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8. 『미호집(渼湖集)』 권14, 「석실서원강규(石室書院講規)」.
  9. 「김종후에게 보낸 편지(1766)」, 『간정후편(乾凈後編)』,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10. 「김종후에게 보내려고 했던 편지(1766)」에 나오는 말이다. 이 편지는 『담헌서』에도 실려 있다.
  11. 이 문목에서 이단으로 거론된 것은 노자·장자·불교다. 양주·묵적은 아직 거론되지 않았다.
  12. 후마 스스무(夫馬進) 교수가 그러하다. 그의 저서 『朝鮮燕行使と朝鮮通信使』(名古屋大學出版會 2015) 제14장 「洪大容 『医山問答』の誕生」의 제2절 「朱子學からの脫却の契機」 참조.
  13. 다만 17세기 초반의 문인이자 주자학자인 이식(李植, 1584~1647)이 비슷한 말로 ‘겸채병용(兼採倂用, 이단을 두루 채택해 두루 쓴다는 뜻)’이라는 단어를 쓴 바 있다. 그는 오직 정자와 주자의 가르침만을 배워야지 이단을 겸채병용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며, 만일 그리할 경우 그것은 학문에 죄를 짓는 것인바 차라리 학문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다. 이식은 주자학을 유일한 진리로 인정했기에 이렇게 말했다. 이식의 이 말을 통해 ‘공관병수’라는 명제가 주자학자에게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4. 나는 ‘공관병수’가 홍대용의 후기 사상을 이해하는 데 키워드가 된다는 사실을 『범애와 평등』에서 강조해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김명호·강명관 교수의 논저에서는 이 용어가 일절 언급되고 있지 않다.
  15. 1773년 7월 등사민(鄧師閔)에게 보낸 편지(『간정부편』에 수록)에 동봉한 13편의 시 가운데 하나인 「잡영십수(雜詠十首)」의 제5수에 해당한다. 등사민은 손유의(孫有義)와 마찬가지로 홍대용이 귀국길에 사귄 중국인 벗이다. 홍대용은 이 13편의 시가 1771·1772년에 쓰인 것이라고 말했다.
  16.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맹자의 묵자 비판을 반비판하면서 묵자를 옹호했다. 이 점은 뒤에 언급한다.
  17. 「손유의에게 보낸 편지(1773년 7월)」(『간정부편』에 수록)의 별지에 적힌 「용주(蓉洲)가 추루(秋𢈢)에게 부친 시에 차운하다」라는 시이다. 이 시는 『담헌서』 내집 3권에도 실려 있다. ‘용주’는 손유의의 호이고, ‘추루’는 홍대용이 북경에서 사귄 벗 반정균(潘庭筠)의 호다.
  18. 「청조 문인과의 왕복 서신을 통해 본 홍대용의 사상」 52면.
  19. 학계에서는 『의산문답』이 쓰인 것이 대체로 1780년 이후일 것이라 보고 있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필자는 홍대용이 이 책을 쓴 것이 영천 군수를 사임한 1783년 5월 5일에서 세상을 뜬 동년 10월 22일 사이로 본다. 그가 뇌졸중으로 급서(急逝)한 것은 고도의 정신적 집중이 요구되는 이 책의 집필작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0. ‘하도’는 중국 복희씨(伏羲氏) 때 황하의 용마(龍馬)가 지고 나왔다는 55점으로 된 그림이고, ‘낙서’는 우왕(禹王)이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있었다는 45개의 점으로 된 아홉개의 무늬다.
  21. ‘생극’은 오행의 상생과 상극을 말하고, ‘비복’은 한대(漢代)의 역학(易學) 용어로 겉으로 드러난 점괘를 ‘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점괘를 ‘복’이라고 하며 이로써 길흉을 점쳤다.
  22. 이 점은 『범애와 평등』의 제2장 제5절을 참조할 것.
  23. 박희병 편저 『홍대용·김정희』(한국사상선 12, 창비, 2026년 가을 간행 예정)의 198·222·224· 231면을 참조할 것.
  24. 박희병 편저 『홍대용·김정희』(한국사상선 12, 창비, 2026년 가을 간행 예정)의 198·222·224· 231면을 참조할 것.
  25. 후마 스스무, 앞의 책 392면. 홍대용의 군주제 비판은 단지 군주의 전제권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군주제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문제적이다. 후마 스스무는 홍대용의 후기 사상을 탈주자학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는 필자와 의견을 같이하지만, 홍대용의 탈주자학이 공관병수와 관련하여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사상의 결들과 그 함의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26. 김명호는 “종래 연구자들에 의해 크게 주목받아온 이러한 과격한 비판 역시 탈주자학적인 대담한 발언이 아니라 주자학에 의거한 주장”(『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 돌베개 2020, 256면)이라고 했다. 강명관은 『홍대용 평전』 2권에서 “이 과격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교적 근본주의 혹은 실천적 정주학자라는 본령을 포기한 건 아닐 터이다. 아니, 그것의 연장일 수 있다”(394면)라고 했는데, 주장의 근거는 밝히지 않았다.
  27. 박희병 『한국고전문학사강의 1』(돌베개 2023)의 제6강 ‘고려 전기의 토풍과 화풍’ 및 제9강 ‘삼국 다시 읽기와 토풍의 소환: 『삼국유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