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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끝이면서 시작인 몸

은희경과 김기태의 최근 소설

 

 

양윤의 梁允禕

문학평론가, 고려대 학부대학 교수. 평론집 『앨리스의 축음기』 『포즈와 프러포즈』 등이 있음.

aleph2006@daum.net

 

 

터미널으로서의 몸

 

몸은 가장 사적인 동시에 가장 사회적인 장소다. 노화와 질병은 개인의 쇠퇴에 그치지 않고 돌봄의 분배와 노동의 지속가능성, 의료체계의 접근성, 기술의 수용성, 젠더화된 관계를 다시 묻는 사회적 사건이다. 최근 한국문학이 ‘돌봄’과 ‘몸의 취약성’이라는 화두를 거듭 호명하는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병든 몸, 늙어가는 몸, 관리 대상이 되어버린 통제된 몸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개인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론적이면서도 윤리적이고, 동시에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질문이 된다. 은희경 장편소설 『시간의 감촉』(문학동네 2026)과 김기태 중편소설 「퇴행」(『창작과비평』 2026년 여름호)은 동시대 문학이 ‘몸’이라는 문제의식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명료하게 보여준다. 두 작품은 노화와 질병을 겪는 몸을 통해 여성·젠더·노동·돌봄·의료 시스템·가부장제와 같은 한국사회의 쟁점들을 다양하게 드러낸다. 두 작품에서 ‘신체성’은 주인공들이 겪는 삶의 변화를 가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주제어이다.

『시간의 감촉』의 중심인물 ‘이안나’와 ‘이경선’은 60대 자매(둘은 같은 해 1월과 12월에 태어났다)로 노화와 죽음이 자신들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특히 동생인 경선이 신장 종양이라는 구체적인 질병을 겪게 되면서 그들에게 죽음은 이미 당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퇴행」의 ‘김승환’과 ‘이희림’은 각각 가전제품 설치일과 에디터 노동으로 허리디스크를 얻은 40대 인물들이다. 둘은 환자로 만나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가까워지지만, 병은 완쾌되지 않고 재발하거나 다른 병을 불러온다. 질병이나 노화를 겪는 이들이라면, 그러므로 사실상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인물들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거나 놓이게 될 것이다. 두 작품을 나란히 읽으며 동시대 한국문학이 몸을 사유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흔히 몸을 정신의 소유라 여긴다. 하지만 ‘몸은 정신이 거하는 장소’라는 오래된 사고방식은 실상을 놓친다. 정신은 몸을 소유하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정신은 몸의 상태이자 몸이 만들어낸 환각이거나 환영에 가깝다. ‘나’는 내 몸이 있는 곳, 내 몸의 상태, 내 몸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한 가설적 장치이다. ‘영혼’ ‘정신’ ‘나’ ‘자아’라는 이름들은 몸의 끝에서, 몸을 객관화하기 위해 설정한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몸이야말로 정신의 종국적인 구현체다. 이렇게 보건대 몸은 터미널, 즉 종점이며 여기서 다른 몸과의 새로운 교통로가 무한하게 생성된다. 은희경과 김기태의 소설은 ‘나인 몸’을 어떻게 사유하고 있을까?

 

 

감각과 기계

 

『시간의 감촉』은 신장암 수술을 받은 경선과 그녀를 돌보는 안나 자매를 중심으로 5대에 걸친 여성들의 가족사를 교차시킨 장편소설이다. 은희경의 전작 『빛의 과거』(문학과지성사 2019)가 한 시절의 공동체적 기억을 다뤘다면, 이 소설은 노년의 몸을 매개로 세대를 넘나드는 여성 계보를 그린다는 점에서 한걸음 더 확장된다. 소설은 예순다섯 안나의 생일날 장면에서 시작한다. 한살 아래 동생 경선은 암과 노화라는 급격한 몸의 변화를 겪고 있다. 긴 세월, 가족이 없이 혼자 살아온 언니 안나는 경선의 투병을 계기로 ‘보호자’가 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병과 늙음은 삶을 근거에서부터 잠식해 들어오는 부정적 작인(作因)만이 아니다. 그랬다면 탄로가(歎老歌)의 일종이 되었을 텐데, 소설은 다른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소설의 주된 정조는 탄식보다는 경탄 쪽에 있다. 예컨대 경선이 수술 후의 가스 배출이라는 사소해 보이는 생리현상에 의기양양해하는 장면(“귀하신 방귀니까 잘 적어놔”, 99면)은 소설이 병과 노화를 다루는 방식을 진지하고도 명랑하게 보여준다. 수술받은 환자에게 방귀는 자신의 생명을 판돈으로 건 내기에서 이겼음을 알려주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온천탕에 몸을 담갔을 때의 해방감은 어떠한가.

 

김이 피어오르는 탕 속에 깊이 몸을 담근 경선은 온몸을 조여오는 물의 포옹을 느낀다. 그다음에는 알몸의 자유로움을 한껏 만끽한다. (…)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이지만 안전하고 또 시간에 쫓기지도 않는다. 벌써부터 쭈글쭈글해지기 시작한 손을 보니 늙은 몸이 실감나지만 사실 그런 늙음은 받아들인 지 오래이다.(274면)

 

수술 후 회복 중인 경선은 안나와 손녀 ‘다니엘’과 함께 해외 온천여행을 감행한다. 경선이 온천탕에서 느끼는 감각인 물이 안아줄 때의 평안, 맨몸의 자유로움, 모든 무기를 내려놓은 무방비의 쾌적함은 노년의 몸, 다시 말해 뼈와 근육의 단단함으로 뭉쳐진 청년의 몸이 아닌 물을 닮아가는 몸, 시간의 흐름에 순연히 맡겨진 몸에 더 깊이 감지된다. 취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몸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체현된(embodied) 감각인 것이다. 동시에 노화는 몸의 감각을 새롭게 다듬는 계기이기도 하다. 경선은 “이제 고통을 통과한 몸에게 조금이나마 더 잘해줘야 할 테고 그러려면 먼저 사이가 좋아져야 한다고 느낀다.”(115면) ‘시간의 감촉’은 쇠퇴의 감각이 아니라 그렇게 시시각각 변해가는 몸의 감각이자 몸에 대한 감각이다. “한 사람의 몸 안에는 수많은 장소와 시간이 들어 있다. 몸은 기쁨과 고통과 욕망과 상실의 부화장이고 사랑의 꿈과 왜곡을 간직한 도서관, 마지막 삶이 거처할 최후의 집”(373면)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몸에 켜켜이 쌓여온 기록들은 기억과 감각을 통합하고, 몸들의 교류를 보장하며, 매순간 살아 있음의 상태를 켜(turn on)놓는다. 이처럼 소설은 늙어가는 몸이 오히려 감각과 관계를 다시 배우는 체현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김기태의 소설은 그 제목에서도 드러나는바, ‘퇴행’하는 몸에 관해 말한다. 이 소설에서 몸은 유기체보다는 무기체에 가깝다. 오래 사용해서 닳아버린, 시효를 다한 기계와 같은 몸이다. 이때 몸은 사회에 의해 구조화되고 제도에 의해 기능화된 일종의 구조물이기도 하다. 물질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인프라라면 이러한 몸 역시 인프라에 속한다. 몸을 통해 사회적 재화가 생산·유통·분배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설정되며 삶이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 몸-인프라는 사람이나 사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거나 차단하는 네트워크이자, 특별한 삶의 방식과 감정을 내면화하는 감각적 환경이다.1 「퇴행」의 두 인물들에게 ‘척추’는 인간의 신체를 지탱하고 이동시키는 인프라였으나 노동과 노화라는 이중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파괴된다. 이들이 겪는 고통과 수술과 회복의 과정은 기계론적이다. 고통은 인프라의 파괴 신호이고 수술은 수리 보강이며 회복은 기능의 임시적 복원이다. 감가상각을 겪는 이 몸은 유물론적이며 기계적이어서, 사물이 낡아가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몸은 늙어간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승환과 희림이 병원을 찾았을 때 그들의 몸은 ‘노동’을 위해 존재하는 몸이었다. 재빨리 몸을 고치지 않으면 두 몸은 시장에서 추방될 것이다. 승환의 허리는 가전제품을 나르고 설치하는 동안 소모되었고, 희림의 허리는 오랜 시간 책상을 지키며 콘텐츠의 이미지를 꾸미고 글을 다듬는 동안 굳어갔다. 둘의 몸은 노동력이라는 단일한 척도로만 측정된다. 몸이 생산수단으로 환원될 때 ‘나’는 실종되는데, 몸을 그런 수단으로 삼는 주인이 ‘나’가 아니라 노동을 사는 자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병원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마주친 순간, 그들의 몸은 노동이 아니라 통증이라는 다른 척도로 서로를 알아보게 된다. 이 전환이 결정적이다. 통증, 즉 퇴행한 몸이 보여주는 취약성은 생산성과 무관한(“파산 직전”의 몸, 225면), 오직 그 자신에게만 속하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둘의 몸은 자본을 위해 소모되던 노동의 몸에서 서로를 위한 자발적 돌봄의 형식으로 점차 변환된다.

병원 탕비실에서 마주친 승환과 희림은 바닥에 떨어진 텀블러 뚜껑을 주우려다 통증을 느끼고, 동시에 “악” 하고 비명을 지른다. 통증과 웃음이 동시에 “반사적으로”(197면) 발생한 순간이다. 둘은 즉자적 비명 속에서 서로를 발견한다. 고장나고 허물어져서 겨우 수선한 몸의 삐걱거림과 통증이 둘을 동시에 가로질렀다. 나와 너, 두 몸은 이렇게 통증을 통해 연결되고 접속된다. 앞서 『시간의 감촉』에서 ‘방귀’가 몸의 감각을 증명했다면, 여기서는 “악”하는 비명과 뒤이은 “괜찮……”(같은 면)냐는 질문과 대답이 서로를 대번에 알아보게 해준다. 강조해야 할 사실은 두 소설의 장면 각각에서 명랑한 유머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의기양양한 방귀도 그렇지만, 아픈 허리에서 내지르는 비명 또한 인물들이 서로의 처지를 한눈에 알아보게 만드는 공감의 순간이 되며 독자에게 묘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공적 공간에서 요구되는 예절과 가장 멀리 떨어진 신체 현상에서, 혹은 사람들이 가장 사적으로만 남겨두고 싶은 감각에서 말이다.

“탕비실에서의 마주침”(198면)이라는 사건 이후 둘은 가까워진다. 둘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에피소드 중 하나는 서로의 발톱을 깎아주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찜질방에서 서로의 발톱을 깎아주며 긴장(“교감신경계의 활성화”, 209면)과 설렘을 나눈다. 디스크 환자에게 발톱은 가닿을 수 없는 몸의 변방이다. 자기 손으로 하려고 들다가는 겨우 수선한 허리를 다시 꺾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 둘은 자기 몸의 가장 먼 곳으로 다가설 수 있는 서로의 몸을 발견한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나의 발톱에 손톱깎이를 댈 수 있는 그런 몸을. 그/그녀는 내 몸이 가닿을 수 없는 곳에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다. 고장난 몸들이 아니었다면 이런 발견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상태에 이르면 이미 불안은 설렘의 다른 얼굴이 된다. 이런 몸에게는 “점심 먹으면서 허리 얘기 좀 하실래요?”라는 다른 몸의 제안이 “어조에서 응큼함을 표백”(201면)한 순정한 제안이 된다.

 

 

시간과 노동

 

시공간은 몸을 구성하는 그물코들이다. 몸에 적용된 시간이 연속으로서의 삶이라면, 그 시간의 반복은 세대가 될 것이다. 몸에 소속된 공간이 연합으로서의 삶이라면, 그 공간의 확장은 세계가 될 것이다. 시간적으로 잇닿은 몸체는 대를 이어 전개된다. 공간적으로 이웃한 몸체는 ‘관계’로 맺어진 몸들의 연합이다. 은희경의 소설은 전자에 가깝다. 이 소설이 촘촘하게 엮은 서사의 타래를 펼치면 모계 중심의 가족사 소설이라고 불러도 좋을 장구한 서사가 된다. 경선의 예순다섯살의 몸과 아홉살 손녀 다니엘의 어린 몸이 서로를 알아보고 웃음의 형태까지 닮아 있는 것(유전적·감각적 유사성)은 몸이 감각을 이어준다는 상호신체성을 보여준다. 반면 김기태의 소설은 후자에 가깝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다른 존재자, 이를테면 노동자, 환자, 간병인, 채무자 등으로 호명된다. 이 소설에서 인물들은 다른 언술·제도·기구·체계·구조에 끊임없이 포획된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퇴행」의 인물들은 노동의 효율에 의해 소진된 몸이 병원이라는 제도적 공간에서 타자의 몸과 접속하면서, 다른 몸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명한다.

『시간의 감촉』은 확실히 ‘시간성’이 두드러지는 소설이다. 감촉은 몸의 현존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며 현존은 시간의 지속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 소설은 현존의 시간을 호출한다. 이 소설에서 두 자매의 몸은 지나간 시간을 현재로 불러들이고(이것이 회상의 본질이다), 현재의 시간을 현존 속에서 부각하며(이것을 긴장이라 부르자), 미래의 시간을 미리 당겨온다(이것을 예감이라고 하자). 독자는 회상과 긴장과 예감의 교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회상과 긴장과 예감은 단순히 시간 배치가 아니라 몸의 호흡을 따라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리듬이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노년에 이른 경선과 안나의 몸이 세계를 감촉하는 장면들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그러다 회상과 예감이 교차하면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둘을 둘러싼 5대에 걸친 삶의 내력들이 펼쳐지는 4부 ‘언젠가 멋진 날’에서 시간은 미래의 한 시점을 향해 질주한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회상과 긴장과 예감이 이렇게 만난다.

 

경선은 불현듯 중얼거린다. 춤춰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나. 그리고 다음 순간 두 팔을 벌려 길게 뻗어서 앞으로 모아본다. 고개를 한쪽 어깨 너머로 젖혀 먼 허공을 바라보는데 조금쯤 위로 떠오르는 느낌이 든다. 몸이 여기에 있고 낯설지 않다.(376면)

 

저 춤사위는 먼 기억의 저편에서 온 것이다. 지금 시간에 구현된 것이면서도 먼 미래(“먼 허공”)를 향한 것이다. 이렇게 한 몸에 구현된 시간성으로 인하여 이 소설은 자매의 연대기이자 자매의 신체 계보가 된다. 소설의 표면적 시간은 길지 않지만 실제로 안나와 경선의 시간은 내부에 여러겹으로 말려 있어서 둘 각자의 생애주기, 일생을 감당한다.

게다가 이 시간들은 두 인물의 몸에만 배당되어 있지 않다. 남편의 사업이 망하고 한동안 두 딸을 따로 키워야 했던 어머니,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지닌 두 할머니의 서사가 안나와 경선의 어린 시절과 더불어 그려진다. 또한 가부장적 남편과 시댁으로 인해 불행을 겪고 있는 경선의 딸 다은과 손녀 다니엘의 서사도 있다. 그 사이에 안나가 끝내 밝히지 못하는 국어교사와의 미묘한 추억과 경선이 품은 전 남편 P와의 사랑과 배신의 드라마도 놓여 있다. 5대에 걸친 이 서사는 그러나 할머니-어머니-안나·경선-딸-손녀의 시간으로 순차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회상과 예감으로 인해 서사들이 분절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이들이 세계 각지의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억압과 차별을 대를 이어 서로 다르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서사들은 5대에 걸친 몸의 서사이면서, 여자라는 하나의 거대한 몸을 통과하여 발현된 서로 다른 삶의 갈래들이기도 하다. 이들이 하나의 몸으로 겹쳐지는 아름다운 장면이 여기 있다.

 

“우리의 첫!”

“나의 첫 선생님은 국민학교 1학년 김향자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것은, 쥐 박멸 기간에 학교에 내야 하는 쥐꼬리를 안 가져가서 야단을 맞았지만 카라멜 모양의 회충약도 나눠주고 풍금도 잘 쳤습니다. (…)”

“우리의 첫!”

“나의 첫 선생님은 소망어린이집의 에스더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것은, 졸업한 뒤에도 엄마가 스승의 날에 카드를 보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그 이름이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첫!”

“나의 첫 선생님은 유치원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것은 싫어하는 짝짓기 무용을 시켜서 유치원 가기가 싫었다는 것입니다.”(245~46면)

 

반백년의 시차가 가로놓인 할머니와 손녀 사이에, 어떤 위계도 차별도 없다. 세대를 건너뛰어 각각의 몸에 새겨진 ‘첫’의 경험을 서로 감촉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다니엘의 ‘첫’은 불과 얼마 전이고 할머니들의 ‘첫’은 오래전일 테지만, 세 사람은 서로의 시간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주고받는다. 암수술을 받은 환자 경선과 노쇠한 보호자 안나, 오랜 시간 가족과 절연한 듯 지냈던 안나로 인해 얼마간 어색한 자매 사이를 이어주는 손녀 다니엘. 이렇게 세 사람이 경제적 불안 속에서도 감행한 첫 해외여행은 모종의 ‘모험’이 된다. 이들이 함께하는 ‘우리의 첫’ 장면은 세대적 위계나 재래의 혈연 중심 가족제도의 서열로 환원되지 않는다. 몸의 기원이란 그 몸의 역사 전체를 포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한편에는 노년의 시간을 쇠국, 파국, 몰락으로 봉인하려는 완력과 “그들 머릿속의 스테레오 타입”(173면)으로 여성을 재현하려는 강압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매일 아침 새롭게 눈을 뜨는 여성‘들’의 몸이 있다. 작가는 후자로 전자에 맞선다.

한편 「퇴행」은 확실히 ‘공간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의 몸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허리디스크는 병원, MRI, 수술실, 재활기구, 담당의사, 의료지식, 바이오해킹 정보, 연인과 같은 다양한 인간·비인간 요소를 서로 연결한다. 환자의 몸은 하나의 기관이 아니라 여러 이질적 요소가 결합하는 어셈블리지(assemblage)이며, 관계망 속에서 끊임없이 재배치된다. 이 몸은 의료기술, 병원 시스템, 진단 장비, 운동기구와 분리될 수 없는 기계-몸(machine-body)이다. 「퇴행」의 두 주인공은 허리보호대, AI 데이터, 수술대, 입식 책상, 좌욕기, 이상지질혈증 약과 같은 인접물들과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다.

「퇴행」의 서술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 사이사이에 이질적·혼종적인 텍스트가 삽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이질적 텍스트들(광고, 백과사전식 정보, 노화를 조롱하는 랩의 가사 등)은 독해를 단속적으로 만든다. 주 서사와 다종적 삽입 텍스트들을 오가는 서술방식은 독특한 리듬과 입체감을 형성한다. 그 절단과 재개의 형식은 (쇼츠를 보는 방식이 그러하듯) 스크롤을 내리며 광고와 랩을 번갈아 넘기는 동시대 미디어 감각과 네트워크화된 ‘읽기 방식’을 구현한다. 이런 배치는 몸을 둘러싼 감정과 주의집중이 어디에 머물고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재배치하는 시각적 정동 장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삽입 텍스트들은 몸에 대한 정동―연민, 불안, 수치, 안도―을 누가 언제 향유하고 방출할 수 있는지를 시각적 구획을 통해 배치, 재분배하고 있다. 더욱이 이 텍스트들은 사실상 ‘몸을 관리하라’는 명령어로 이루어져 있다. 수술하라. 관리하라. 예방하라. 건강을 유지하라. 어떤 텍스트는 몸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대상으로 만들고, 어떤 텍스트는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만든다. 또다른 텍스트는 그 모든 시스템의 언어들을 불신한다. 「퇴행」에서 두 사람의 몸은 이 갖가지 담론과 기구와 제도의 교차점을 이룬다. 이것이 이 소설이 몸들을 세계와 연결하는 공간적 확장술이다.

여기에 두 몸 사이에서 생겨나는 정동이 기재될 수 있을까? 사랑이 이 차가운 기계들을 넘어설 수 있을까? 주치의 ‘장필혁’의 후일담을 보면 언뜻 비관적일 것 같다. 수술을 맡은 의사는 환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신과 다름없지만, 그런 장필혁도 더이상 일할 수 없는 몸(죽은 몸)이 됨으로써 모든 영광과 후광을 잃는다. 「퇴행」은 ‘노동하지 못하는’ 노동자의 몸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승환과 희림은 서로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의 노동 정체성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가전제품 설치기사 김승환입니다.” “프리랜서 에디터 이희림입니다.”(237면) 둘은 허리디스크, 하지정맥류, 치질, 오십견 등을 겪으면서 노동 주체로서의 능력을 상실해간다. 노동력의 유무가 이 과정을 비가역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점은 이 과정에서 돌봄의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노동을 할 수 없게 되는 몸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돌봄과 의존의 관계에 따라 재배치되는 회로 속으로 진입해야 한다. 이로써 ‘정상적 노동’이라는 이름 아래 블랙박스화되었던 네트워크―노동을 지탱해온 도구, 신체, 병원 시스템, 온라인 담화, 돌봄노동 등―가 가시화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노동 바깥의 몸이 오히려 새로운 관계와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노동하지 못하는 노동자의 몸‘들’은 단순히 생산이 중지된 몸이 아니라, 생산성의 규범이 멈추면서 노동체계의 폭력과 결핍을 드러내는 몸이 된다.

나아가 승환과 희림은 아픈 몸들의 공명(共鳴)이 내는 신호, 즉 공감을 사랑으로 발전시킨다. 둘은 장필혁식 인사법을 따라하며 서로를 소개한다.

 

“디스크 환자 김승환입니다.”

“나도 디스크 환자 이희림입니다. 그리고 하지정맥류 환자 치질 환자 이희림입니다.”

“이상지질혈증 고위험군 김승환입니다.”

(…)

그가 침묵하다가 천장을 보는 채로 말했다.

“이희림 보호자 김승환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데, 제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요?”

그녀가 그를 향해 몸을 돌리고 눈을 보며 말했다.

“김승환 보호자 이희림입니다.”(237~38면)

 

경쟁사회에서 뒤처진, 아픈 몸끼리 만난 두 사람이 그 몸을 맞세워 고백하고 선언하는 장면으로, 어떠한 감동을 자아낸다. 앞서 이 소설의 서술방식이 디지털 미디어의 시각화 방식을 구현하고 있음을 짚은바 이를 ‘밈’ 형식의 서술방식2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승환과 희림은 서로의 말을 그대로 받아안는 이른바 둘만의 밈, 동어반복의 형식을 발명한다. “허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지요.” “허리를 보호해야 하니까요.”(208면) 이 반복은 상대의 자세, 통증의 리듬, 숨의 간격을 그대로 되받는 신체적 모방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허리를 굽히면 다른 사람도 같은 각도로 허리를 굽히고, 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면 다른 사람도 비명을 지른다. 이런 신체적 동조 속에서 둘은 그 반복된 격자를 통해 정동을 담아낸다. 이것은 감응(感應)―몸이 몸에 그대로 반응하여 울리는 것―의 발명이다. 이 감응을 통해 두 사람은 관리사회의 정동적 구획 안에 자신들만의 비구획, 서로에게 열려 있는 통로를 만든다.

소설 속 둘의 대화는 예의 매번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모방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사는 게 무서워요.” “사는 게 무섭지요.”(226면) “죽는 게 무서워요.” “죽는 게 무섭지요.”(245면) 이런 반복은 둘 사이에 어떤 간극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결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서로의 보호자가 되겠다는 선언은 결혼식에서 늘 암송되는 문구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가 가닿을 자리, 임종의 장면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머리맡을 지키는 그 자리를 지키겠다는 선언이다. 과연 두 사람은 먼 훗날 이를 실행하며, 이것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이룬다. 이 반복으로 인해 소설은 차가운 물질들의 세계에서 로맨스 문법 하나를 내장하게 된다.

 

 

 

끝과 시작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므로 질병과 노화를 겪는 몸은 끝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터미널이 새로운 출발점이 되듯, 두 소설은 그 끝을 구부려 새로운 시작을 만든다.

『시간의 감촉』에서 몸은 은유적으로 연계된 몸들로 이어진다. 할머니와 손녀, 어머니와 딸의 몸은 공명하는 감각으로 묶여 있다. 그 결과는 여자들의 ‘연대’라 불러도 좋을, 즉 몸들의 민주주의다. 이들은 어림과 젊음과 늙음을 차별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연대가 몸을 하나의 특성으로 쉽게 일반화하거나 동질화한다는 뜻은 아니다. 몸들의 민주주의는 “노인이라는 일반화”(77면)에 포섭되지 않는 개별적이고도 생생한 앎을 끊임없이 ‘생성’해낸다. 어린 다니엘의 연구노트에 담긴 무수한 연구목록들처럼 말이다. 다니엘은 경선의 몸(세수하는 모습)과 표준화된 세면대 규격 사이의 불일치, 안나의 신장에 맞지 않는 병실 간병인 침대의 비표준적 크기 등을 관찰하고 궁리하는데, 사태를 예단하지 않고 연구하면서 그저 곁을 지킨다. 이런 앎은 체화된 암묵지의 형태로 수행된다. 이 연구목록은 기존의 사전에는 등재되지 못한 채 오랫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던 ‘수행되지 않은’(undone) 앎들의 계보이다.

또한 이들은 계급과 신분을 따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사례로 간병인들의 서사를 꼽을 수 있다. 수술을 받기 위해 경선이 입원하자 안나가 보호자가 되고, 자매는 옆 침대의 간병인들(재중 교포 ‘김연화’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최순영’)과 친해진다. 이들의 국적, 간병일을 하게 된 사연, 성격, 환자를 다루는 전문성, 이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TV 프로그램까지 모두 알게 된다. 그들이 “처음에 안나를 탐탁잖아 했다”거나 “자매에 대한 인성 평가도 마친 상태였다”(91면)는 서술에서는 병실 안에서 간병인이 가지는 독특한 위치도 전해진다.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우리는 경선과 안나의 삶이 혈연을 넘어, 국경과 인종을 넘어 여성들의 몸을 통해 더 너르게 연결되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병실에서 마주친 다양한 이야기들의 연합은 은희경이 『빛의 과거』에서 ‘은파여관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1970년대, 주인공 ‘유경’이 서울 소재 여대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시절, 기숙사생들이 은파여관에서 묵었을 때의 일이다. 아침 일찍, 기숙사생 중 한명인 ‘송선미’가 마당에 나왔다가, 낯선 중년 남자에게 위협을 받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러자 이 방 저 방에서 문이 벌컥 열리며, 온갖 원색적인 사투리가 뒤섞인 집단적 저항이 터져나온다(311면). 그것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기숙사생들의 목소리이자, 모든 언어가 연대하여 폭력적 외부를 향해 대항적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다. 한 개인을 집단적 연대의 무대 위로 옮겨놓는 기원적 장면3이라 할 수도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억압되지 않는 공동의 기억이자, 공동생산(co-production)되는 앎에 대한 알레고리다.

「퇴행」에서 몸은 환유적으로 인접한 몸들로 확산된다. 이 소설의 인물들이 몸의 신음과 고통을 어떻게 공감과 상호의존의 관계로 바꾸었는지, 다시 거기서 사랑을 이끌어냈는지를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것은 ‘나는 나’라고 선언하는 동일자의 방식이 아니라, 타자를 경유하는 관계의 방식―“이희림 보호자 김승환”이라 말하는 방식―이다. 반복은 상대의 말을 부정하거나 반박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안는다. 하지만 노화와 질병은 설상가상 악화되는 쪽으로만 향한다. 퇴행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두 사람 혹은 두 몸은 어떻게 대처할까? 둘은 노화와 질병에 사로잡히지 않은 몸을 상상한다. 두 사람의 사랑의 결과일 아기의 시선을 미래로부터 당겨오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아기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두 사람의 삶의 내력이 여러차례 정리된다. “우리는 아팠고 바빴고 무서웠고, 너를 낳아서 키우기는 더 무서웠고, 우리가 어떤 용기를 냈는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너도 네 몫의 삶을 겪으며 알게 되겠지…… 하지만 알아주지 않아도 좋으니 네 삶은 무서운 게 아니기를, 사랑과 행복으로만 가득하기를, 영영 평화롭기를……”(226면) 안타깝게도 미래를 당겨와서 쓴 이 대화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아기를 갖기 위해 노력했으나 두 사람에게 아기는 찾아오지 않았고 “미로 끝의 보물상자”(242면)인 아기는 이 유물론과 기계들의 세계에서 환상으로 남았다. 그러나 아기는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첫번째 세포”, 같은 면)으로서 두 사람이 마침내 사랑으로 맺어졌음을, 그리고 끝내 서로의 보호자가 되었음을 증언하는 가상의 시점을 제공한다. 환상과 상상 속에서 아기는 두 사람을 방문했다. 둘의 사랑을 증언하는 어린 ‘몸’으로 거기 있었던 것이다. 결혼식의 화동처럼.

안나와 경선, 승환과 희림은 이렇게 끝나면서 새롭게 시작된다. 노화와 질병과 그로 인해 다다를 미구(未久)의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하지만 이 몸들은 다른 몸으로 이어지고, 이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고 전승되고 재생산될 것이다. 이렇게 몸은 서로 얽히고 연결되고 연합할 것이다. 고통과 신음 속에서도 사랑을 발견할 것이다. 결국 몸은 터미널이다. 터미널은 도착역이자 환승역이다. 기억은 몸에 내리고, 통증은 몸을 출발점으로 삼고, 사랑은 몸을 지나 다른 몸으로 옮겨간다. 『시간의 감촉』에서 몸은 시간을 다른 몸으로 건네주는 터미널이며, 「퇴행」에서 몸은 노동과 통증을 돌봄과 사랑으로 환승시키는 터미널이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 마지막 날, 즉 임종의 순간은 비극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이 될 것이다. 그것은 서로에게 마지막 날을 선물하는 일, 곁을 지켜주는 일, 마지막까지 서로가 서로의 보호자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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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rian Larkin, “The Politics and Poetics of Infrastructure,” Annual Review of Anthropology 42, 2013, 329면.
  2. 김기태 소설의 ‘밈’적 발화 형식에 대해서는 많은 논자들이 언급한 바 있는데, 이희우는 “기립하시오 당신도!”를 밈의 형태로 분석함으로써 “동등한 둘의 우애와 협력, 공생의 형식으로서의 시험 중인 사랑”이라는 의미를 도출했다. 이희우 「평범한 자는 돌아오라」,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해설, 문학동네 2024, 329면.
  3. 졸고 「삼중은유(Triphor)」, 『크릿터』 2호, 민음사 2020, 271~7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