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초점 | 이 계절에 주목할 신작

 

몸의 언어로 살아가는 사람들

 

 

김준현 金俊賢

문학평론가, 시인. 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 동시집 『나는 법』 『토마토 기준』, 청소년시집 『세상이 연해질 때까지 비가 왔으면 좋겠어』 평론집 『낮은음자리의 어린이』 등이 있음.

kjh165@hanmail.net

 

 

김영승 시집 『파리 팔휘 토끼 톡휘 다리 달휘』(창비 2026)

 

김영승 시집을 일독하고 ‘눈이 멀다’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여기서 ‘멀다’는 흔히 말하는 ‘볼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신체 부위-시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대상, 헤아릴 수 없는 심연까지의 거리감을 드러내는 듯하다. “나는 요즘/눈이 안 보여/굵은 사인펜으로/메모를 하는데/까딱 손이 젖으면/시 메모가 번져/구슬피 울게 된다”(「손조심」)는 시인의 시는 피, 땀, 눈물 중 무엇으로 젖어버린 걸까. 현상 너머의 것들이 현상을 초과해버릴 때 사람은 눈이 먼다. 인간은 아주 사소한 것 앞에서도 얼마든지 눈이 멀 수 있고, 그 협소해진 시야가 극단으로 치달을 때 뜻밖에 삶의 본질에 닿기도 한다.

김영승 시집의 제목 역시 문자 텍스트의 한계를 벗어나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언제든 리듬의 가능성 내부로 돌진할 태세를 갖춘 화자의 유희적 분신이다. “팔휘” “톡휘” “달휘” 모두 ‘휘’로 끝난다는 발음값만이 유일한 접점처럼 보이는 이 병렬은 우리가 지금껏 세워온 추상의 연원이 육체에 미만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즉 시인은 분절되면서 명확해지는 뜻의 세계가 아니라 입에서 나와 귀로 흘러들어가는 소리의 세계에 천착한다. 음절 간의 경계 없이 한몸이 될 수 있는 소릿값의 세계는, 시인이 책 뒤의 산문에서 밝히듯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시이리라. 다른 것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나”의 세계이기도 하다. 눈멂의 상태를 촉발하는 환경은 낮이든 밤이든 ‘나’를 어둠으로 둘러싸이게 한다. 「단맛」에서 시야를 잃은 채 어둠 속에서 제 육체를 노랗게 견뎌낸 고구마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많은 당분을 축적했다니/이 겨울/고구마는 달고/추위는 숙연하다”던 화자는 “고구마는 얼마나 아팠을까”라는 질문에 이르러 “단맛”으로 환원된 통증의 정도를 묻는다. 또한 「손조심」에서 “눈이 안 보여” “얼마 전 새벽/참외를 깎다가 베어/응급실 가서 꿰맨/내 왼쪽 검지 손가락 하나”는 내내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고/곧추세워 들고 다”녀야만 하는 신체 일부가 된다. 눈멂의 상태가 야기하는 고통을 육체의 여러 부위가 분담해서 짊어지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앓고 있는 화자는 그러므로 늘 긴장하고 있는 상태다. 1986년부터 작품활동을 해온 시인의 ‘코어’가 여전히 곧추서 있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자꾸만 퍼져나가며 엷게 흩어지는 근래의 시들과는 달리, 김영승 시는 뼈의 윤곽이 다 드러나는 등신불(等身佛)을 연상케 할 만큼 또렷하다. 비유로 우회하거나 방법론이나 세계관을 방패로 삼지 않는다. 헐벗은 몸에 가까운 말들이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다. 그러나 정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날선 의문과 외침에 가까운 어조다. 단말마라는 표현은 이같은 시에 맞춤한 말이 아닐까. 이를테면 「아」의 “아 소리는/누가 꼬집었든가/칼로 찔렸을 때밖에/내본 적 없는데//아/나는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었군”이라며 비명, 즉 구어(口語) “아”를 영탄의 자리로 힘들여 옮겨온다. 시상의 말미에 다다랐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소리는 의미의 해체를 알리는 정서의 폭발음이다. 한 생을 10구체의 향가라고 한다면 김영승 시는 그 결구의 첫머리에 다다른 것만 같다.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나/꽃들은 그 짜증이/분노가/폭발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꽃이 아닐까”(「짜증」). 흔히 환희와 결실의 시간으로 환원되는 “꽃”은 결구의 첫머리에 가깝다. 흙속에 웅크려 있다가 싹을 틔우고 줄기를 세우고 마침내 피는 꽃이 앞둔 것은 시듦이다. “꽃 피는 것은/나무의 짜증이 아닐까/신경질이 아닐까”. 아픔을 빌미로 연민을 환기해 독자를 동참시키는 것이 아니라 “짜증” “슬픔” “울분”과 같이 인간적인 감정이 시상 전체에 입말처럼 배어 있는 김영승 시는 관념이 아닌 물리적 어둠과 대면한 자의 목소리다. 이 입말이 시라는 장르를 뚫고나올 것처럼 아슬아슬한 긴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둠을 가리키는 현(玄)과 한줄의 팽팽한 현(絃)이 한몸처럼 느껴지는 『파리 팔휘 토끼 톡휘 다리 달휘』에서는 내내 울림과 떨림이 계속된다.

 

 

조성래 시집 『햇빛 반사 유희』(현대문학 2026)

 

김영승 시에 나온 꽃들의 감정을 이어받는 것은 “오래전 이력서를 넣어둔 매장에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이제 와 내게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꽃들은 아름답게 피어나나”(「부재중 전화」) 의문하는 조성래 시집 속 화자다. 꽃(花)과 불(火)과 말(話)을 모두 ‘화’의 발음값으로 겹쳐 쓴다는 점에서 꽃은 시의 혈연일 수밖에 없는 숙명인 것 같다. 『햇빛 반사 유희』의 화자는 지상의 궁핍과 난처를 겪으며 목소리를 키워온 사람이다. “손님이라도 들어오면/나라는 통로는 약간의 짜증과 함께/온몸에 묻어 있던 먼지처럼 허공으로 흩어진다/그러므로 현실의 힘은 오직 비중에 있다”(「규칙 3」). “편의점”에서 일하는 화자의 무력감은 내 존재가 타자의 필요에 의해 도구화되는 순간마다 환기된다. 이제 2030세대의 보편 현실로도 수렴될 수 있는 단기 알바와 같은 노동환경 가운데 화자가 경험하는 생의 비의는, “버려진 의자”처럼 “존재하기의 마지막 단계”(「규칙 4」)를 너무 일찍 맞닥뜨린 자의 조로(早老)로 읽힌다. “인생이 무상하다”고 하지 않은가. 그것도 “서른한 살 되는 친구가//살아 있는 게 이상하다”(「무료」)며 삶의 당위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 않은가. 시집 전반에 걸쳐 빈번하게 쓰인 말줄임표 역시 이를 방증한다. 말줄임표에는 언제나 흩어지는 한숨, 체념, 허무, 피로 등 무엇으로 해석해도 하강할 수밖에 없는 정서가 배어 있다. 청년세대의 고통과 허무를 손쉽게 빛나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사회적 시선의 관성을 정면돌파하기 위해, 시인은 외침이 아니라 뒷말을 버리는 쪽을 택한다. 계속될수록 가벼워지는 말의 성질을 일찌감치 알고 의도적인 단절을 감행해 비근한 삶의 중량감을 전하는 것이다.

시집에는 시인이 그간 경유한 듯 보이는 지역과 일터가 구체적으로(“화곡동” “백석동” “동마산” “에어컨 공장” “편의점” “교보문고” 등) 소환된다. 이때 화자의 ‘몸’ 또한 함께 소환된다. “전처럼 시께 구걸하지 않는” 삶, “아무것에도 무릎 꿇지 않는” 삶, “여덟 시간을 자는 삶” “굳이 화낼 것 없는 삶”은 “순천”으로부터 멀어져 “살기 좋은 일산”―“이상한 낙원”(「평화로운 저주」)에서 가능하다. 결국 나를 떠나게 만드는 것은 몸의 생래적 욕구다. “세포 단위 이상의 것들은/다른 목숨을 취하지 않고서는/도저히 배길 수 없다는 듯이 꿈틀거린다”는 것. “현미경”(「벨 에포크」)을 통해 바라본 미시적 진실이다.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게 이상하다”(「이상하다」)며 우리가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일상의 장면부터 부정하는 것은, 삶의 풍경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그간 화자가 겪어온 외부적 조건들이 ‘나’의 감각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배치해버린 결과일지도 모른다. 더 치열하게 성취하기를 바라지 않고 무위에 몸을 맡긴 화자는 삶의 평균율을 상실해버린 것만 같다. 예측할 수 없는 흐름 가운데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일까. 시집 4부, 여섯편의 「규칙」 연작은 일종의 부표처럼 화자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처소로서의 육체에 투사되어 있다. “내 심박과 호흡”(「규칙 1」), “관절” “근육들” “갈비뼈”(「규칙 2」), “내 모습의 윤곽”(「규칙 3」), “깨끗하고 또렷한 얼굴”(「규칙 5」). 그것은 “나의 삶을 차지하는 그 압도적인 비중”(「규칙 3」)에 의해 쉽게 자신을 잃어버리기 십상인 현실에서 유일하게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이다.

조성래 시에서 언뜻 역마의 기질처럼도 보이는 화자의 이동은 생래적인 것이라기보다 주어진 삶의 조건 자체가 환대와 정착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등단작인 「도망친 남자」에는 여러 인연이 얽히고설킨 ‘마산’으로부터 도망쳐 ‘광주’로 간 남자가 나온다. 여기서 “광주의 광은, 넓은 광이었고, 미칠 광이었고, 빛 한 줄기 찾을 수 있었으면 하는 광”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떠난 마음의 파편들이/알 수 없는 타지에서//「햇빛 반사 유희」 하고 있는”(「민들레」) 민들레처럼 어떻게든 어둠 깊은 자리까지 뿌리내리는 사람. ‘나’를 연신 부끄럽게 만들고 숨고 싶게 만들고 떠나게 만드는 세계에서 버티는 사람. 그때 시작한 도망의 궤적은 준동하는 언어에 정확한 시의 상을 부여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햇빛 반사 유희』라는 제목의 병렬은 가장 자연적인 것과 그 자연적인 것을 흡수하거나 혹은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튕겨내어 다른 쪽으로 향하게 하는 행위를 보여준다. 스스로를 수용체가 아닌 ‘통로’로 삼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햇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조명받고자 하는 사람이 아닌 끝내 조명 밖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 그런 자신의 삶을 옮겨 적는 시 쓰기는 그 반사의 방향을 보여주는 ‘유희’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저 천진하게 자신의 몸을 언어의 장 안에 두고 그 움직임을 바라보는 신의 ‘유희’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내 낙관의 근거를 물으신다면/불에 탄 방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낙관론」)는 구절에서 낙관(樂觀)의 원의미를 바꿔, ‘관(棺)으로 떨어진다’는 유희적 해석을 덧붙이고 싶은 이유다.

 

 

김상희 시집 『두나 없는 두나』(창비 2026)

 

주체의 전유물로 보이지만 때로는 가장 반(反)주체적인 것, 주체의 의지를 넘어서버리는 것으로서 ‘몸’은 때로 정신의 우위에 서곤 한다. 우리의 몸이 타자가 될 때 애초에 맺었던 관계 없이도 우리는 홀로 이별을 경험한다. 김상희 시집 『두나 없는 두나』는 다양한 층위를 넘나들며 여러 종류의 상실을 펼쳐 보인다. 죽음, 소멸, 이별 등 상실의 현장으로부터 애도가 시작된다는 관례는 그러나 이 시집에서 유예된 듯하다. 근래 많은 시가 균열을 무릅쓰면서도 나아가고 회복되며 삶을 긍정하는 것을 윤리적 수행의 문법으로 삼아왔다. 이는 특히나 속칭 대중적 감수성에 맞춤한 문장으로 발현될 때 그 유효성을 강하게 입증했다. 그러나 김상희 시에서 화자는 나아가기보다는 멈춰 있다. 아니, 멈춰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느리게 뒷걸음질 친다. 육체로부터의 이탈을 시도하는 것이다.

“내가 보내주고 싶은 건/몸일 뿐인데/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싶을 뿐인데//내 몸이 깨져서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문이 열리고/처음 보는 몸과 인사하는 것이 보인다//나를 부르던 것/나를 놓아주는 것/나를 다시 잡아서 앉혀두는 것//모두 내 몸인데/나는 이제 빈 잔이 되어 식탁 위에 놓여 있다”(「빈 잔」). 조성래 시에서 통로로서의 몸이 주체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쓸모’의 개념으로 환원된 상황을 그린다면 김상희 시에서 몸은 그 쓸모조차 잃고 만다. ‘자아’라 규정했던 것들이 사라져가고 남은 “빈 잔”으로서의 육체를 환기한다. ‘나’의 육체임에도 그러한데 타자라면 어떨까. 애도가 남은 자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파동으로서 당사자가 아닌 이상 감각할 수 없는 것이라면, 육체는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모두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김상희 시에서는 화자와 멀고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죽음은 때로 화자가 몰랐던 이면의 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목마」에서는 “지난 주말에 수영이가 죽”고 나서 “교실에 수영이의 무덤이 생”긴다. “수영이의 옷가지가 쌓여 있”는 그곳은 익숙한 일상의 공간이 얼마든지 죽음의 기억이 내장된 공간으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선생님이 공 대신 손목을 주워 온 날” ‘나’는 수영이가 왼손잡이이며 아빠와 단둘이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은 육체가 뒤늦게 정보값을 쏟아낸다. “나는 운동장 구석에 버려진 흙 묻은 손목을 교탁 위에 올려두었다 손목은 이제 다 썩어버렸다 친구들이 자신의 왼쪽 손목을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내 왼쪽 손목에서도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수영의 죽음은 아버지와 연관된 듯 보이지만 끝내 미스터리한 상황이며 이는 애도의 시간을 유예하게 만든다. 화자에게 아직 해소되지 않은 수영이 삶의 시간에 머무르게 만드는 것은 여전히 남아 있는 수영의 “손목”이다.

시집 전반에서 화자는 정서적 상태와 육체의 관계성을 집요하게 모색한다. 「메이드 김양」을 보자. “말레이시아인”인 “메이드 김양”은 “싱가포르에서는 임신할 수 없다. 일을 하러 왔으면 그게 당연한 거라고 납작한 배를 보며 그녀의 임신 여부를 검사하는 의사는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녀가 외로워 보여서 보듬어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름다웠으니까 무기력했으니까 그래서 한번쯤 건드려보고 싶었으니까.” 길게 이어지는 이 언술에는 법과 정서와 욕망이 혼재되어 있으며 그 구심점에는 외국인 노동자의 임신을 제한하는 제도와 타자의 불길한 욕망이 교차되는 가운데 정의되는 수동태로서의 몸이 있다. “의사”로 대변되는 역설의 행간에서 “그녀”의 의지는 배제되고 “임신”한 몸만이 남는다. 그러나 “메이드 김양”은 ‘나’에게 “둘이 있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스스럼없이 “가려우니 좀 긁어달라고” 하는 사람이다. 제도 밖의 존재가 사람의 육체를 보금자리-도피처로 삼을 수 있음을, “둘”의 가능성으로 보여준다.

표제작 「두나」에서 세계의 청결을 유지하려는 “두나”는 “닦고 닦아도 닦이지 않는 얼굴로 바닥을 닦고 창문을 닦고 없는 먼지를 닦는다. 인간이 되자, 인간이 되자, 두나에게 말하면 두나는 금세 투명해진다.” ‘나’는 두나에게 “고전소설을 읽어”주고 “전시회에 데려”가지만 두나는 모든 것을 닦으려고만 든다. 비인간과의 관계 맺기는 인간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두나의 인식체계를 파기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데 세계를 청결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 설정은 사실 효율적이고 기능적이라는 점에서 단순하다. 물리적 효용성이 뚜렷하다. 그러나 인간이 되면 최초의 쓸모를 잃어버리고 그 존재는 투명해질 뿐이다. “그 시절 나는 사람 같지 않아서 슬펐”(「사람 같지 않은 슬픔」)다는 고백을 환기해보자. ‘나’는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시에서 두나는 인간이 아니라 대체품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불순한 것들을 “닦는” 육체로서의 의의만 남은 두나를 보며, 화자는 어쩌면 두나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존재가 아닌가 의심한다. “인간이 되자”며 두나의 해방을 요구하지만, 실상 화자 자신이 두나에게는 강력한 종속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마치 ‘나’와 몸의 관계로 읽힌다. “내가 두나를 부르지 않으면 두나는 두나보다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언술에서 이 점은 보다 구체화된다. 『두나 없는 두나』는 이별의 필연과 부재의 존재를 역설한다. 그 목소리가 매력적인 만큼 ‘두나’라는 이름이 분열된 두 자아, ‘두’(two) ‘나’(I)의 직관적 알레고리일지도 모른다는 감상은 다소 느리게 도착한다. 홀로 있을 때조차도 ‘나’를 타자화해 대화하고자 하는 생래적 외로움이 곧 시의 본체라는 사실을 새삼, 뒤늦게 상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