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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 이 계절에 주목할 신작
사라짐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미래
김다솔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붉은 언어로부터 무한히 탄생하는 세계: 이주혜론」 등이 있음.
solmeng2@naver.com
누군가 사라진 자리에
한 존재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에 관한 진짜 이야기가 도착한다면 그 사라짐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주영하와 정용준의 소설에서 사라짐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조건이 된다. 이들 소설이 상실과 죽음을 둘러싼 수군거림이 아니라, 누군가가 사라져 그에게 달라붙어 있던 고정된 의미가 풀리고서야 드러나는 삶의 흔적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짐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존재와 이야기가 다시 쓰이는 시작의 자리이다.
이 글에서 다룰 주영하의 첫 소설집은 재난과 참사, 재해 등에 휩쓸려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고 찾아다니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짜여 있다.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를 기억과 흔적이 부재하는 이를 문득 떠올리게 만든다. 주영하는 상실의 이야기를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새김으로써 누락된 존재들을 지금 여기로 불러들이고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정용준의 신작 장편소설에는 인간이 변태(變態)하는 곤충들처럼 완연히 다른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물로 변한 연인을 되살리려는 절실한 애정의 서사는 온전하게 소유할 수 없는 몸의 우발성과 불확실성이 불안이자 공포일 뿐만 아니라 회생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유의미한 사고 전환과 함께 발전하는 기술문명을 대하는 자세와 같이 현시대에 재정의되어야 할 ‘인간’ 존재 전반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두 소설 모두 유실되는 혹은 유동하는 인간성을 되짚기 위해 언어와 이야기의 힘을 거듭 소환한다. 소진된 이를 기억하는 유일한 방법이란 끊임없이 그 존재를 지금의 세계에서 부르고 기억하는 것밖에 없다는 듯이. 그러니 앞으로 살펴볼 소설들은 상실을 앓고, 그 기억을 언어로 성실히 되짚는 과정을 통해 사라지면서 매번 새롭게 ‘되어가는’ 존재들의 이야기이다.
상실의 감각과 끝나지 않는 이야기: 주영하 『굴과 모래』(창비 2026)
주영하의 소설에는 죽음과 상실이 연이어 등장한다. 표제작 「굴과 모래」에서는 굴 요리 전문 식당을 운영하던 ‘그’와 ‘아내’에게 난데없이 ‘굴의 멸종’이 닥친다. 유조선 사고라는 분명한 원인에서 시작된 먼 나라의 소식은 점차 정체불명의 재난으로 바뀌어 그들이 거주하는 도시까지 당도한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현상은 분명하다. 굴에서 모래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굴에 출처와 유입 경로를 알 수 없는 모래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그전엔 느껴보지 못했던 무언가가”(15면) 낯선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굴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굴에 대해 생각”(19면)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굴은 정말이지 너무 많은 의미였다”고,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온 것”(20면)과 마찬가지라고.
그런데 ‘그’가 잘 안다고 여겼지만 사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 굴뿐만은 아니다. “샴쌍둥이”처럼 “서로에게 단단하게 붙들린 채 행복한 사람들”(18면) 같았던 과거와 달리 아내 역시 낯선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그녀는 온갖 기억을 잊어버리거나 소중히 여겨온 물건을 내다 버리길 반복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굴의 폐사를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가 애도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남편이 굴과 관련이 없는 타국으로의 여행을 새로운 시작으로 제안했을 때, 아내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당신은 애도라는 걸 몰라.”(23면) 이때 소설이 바라보는 독특한 지향점이 드러난다. 사라짐을 받아들이고 되새기는 방식으로 굴을 기린 끝에 ‘삶과 죽음이 나란히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는 철학적 깨달음에까지 이른 듯한 남편보다, 멸종의 초입부터 끊임없이 무언가를 잊고 버려온 아내의 태도가 더욱 ‘애도’에 가까운 이유는 무엇일까.
무언가를 과거에 경험한 그대로 기억하는 태도는 대상을 고정시킨 채 그것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대상의 실제 모습과는 달리 주체가 기억하고 싶은 상을 덧씌워 확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평생을 “모든 것이 자명”(12명)하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타인과 여타 존재들은 오직 자신의 판단에 따라 명백히 나뉘었고, 기준이 되는 것은 주로 쓸모였다. 그는 타국에서 전해진 굴의 폐사 소식을 “선 너머”(11면)의 일로 치부했고, “먼 나라 사람들이 아닌 진짜 이웃들”(19면)을 구분했다. 아내는 자신을 지탱해줄 “부드럽고 튼튼한 주머니”쯤으로 여겼다. 삶의 의미 역시도 다르지 않아서 “역경을 이겨낸 삶 그 자체”(18면)라는 “성공”(24면)이 아니라면 무가치하게 여겼다. 그가 몇번이고 “‘다시’ 시작”(17면)할 수 있었던 건 한 존재의 끝을 의미값의 소멸이라 간주한 채 쉽고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렇게 판단하고, 포기하고,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과거 연이은 실패 끝에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 했던 사건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 굴이 사라지는 사건은 새로운 세계나 삶의 시작이기보다 ‘현재’의 끝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내는 다르다. 훗날 그가 기억하는 “한 장면”(10면)은 다음과 같이 예언하던 아내의 모습이다. “나는 죽고, 당신은 살 거야.”(11면) 이때 죽음 혹은 사라짐은 주영하의 소설적 세계에서 전연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기존의 가치를 버리고 새로운 뜻을 덧입는 것. 때문에 애도란 한 존재의 내부에 생경한 것이 침투하여 기존에 없던 의미를 획득하며 죽어가는 연속적·반복적 과정을 지켜보고 함께 겪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와 아내에게 닥쳐올 “모래의 세상”에서 이들은 끝내 결별할 수밖에 없으리라. 많은 걸 버리는 자는 죽고 되살아날 수 있지만, 고정된 가치를 좇는 자는 오직 그 모습 그대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하나의 조건이 덧붙은 아내의 마지막 말은 타당하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당신은 살게 될 거야.”(36면)
어떤 존재의 소멸과 함께 고정되어 있던 의미가 풀린 뒤에야 비로소 다채로운 이야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서사구조는 시작과 끝의 의미를 비틀면서 미래에 도달한다. 한 세계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될 때, 그곳에는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아니라 기존의 질서가 누락시켰던 존재들이 자리하게 된다. 따라서 작가의 시선은 원인을 알 수 없이 사라진 사람들에게로 향해 있다. 「얌은 어디에나」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나’는 시내 중심가의 대형 쇼핑몰 건물에 몰래 숨어 사는 열네살 소년 ‘얌’과 교류한다. 얌에게 무료로 밥을 주는 ‘나’는 첫 만남부터 얌이 “잘 단련된 거짓말쟁이”(148면)임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얌은 타고난 이야기꾼이기도 해서, ‘나’는 불 꺼진 방 안에서 얌이 들려준 이야기들을 자주 곱씹곤 했다. 그러면서도 얌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보다는 “무던한 귀 같은 존재”(149면)로 남기를 자처했기에, ‘나’는 얌의 진짜 이름이나 말에 담긴 진실에 크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 때문에 ‘나’에게 남아 있는 얌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얌이 들려준 자기 안에 살고 있는 “괴물이 해준 이야기”(같은 면)이다. 얌이 꺼내놓은 내밀한 이야기는 ‘나’에게 괴물의 이야기로 전달되었을 뿐이다.
어느날 쇼핑몰 일층에 트럭이 테러를 가하고, 그날을 기점으로 얌은 보이지 않는다. 가해자가 혼수상태에 빠져 그날의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게다가 “악의는 본래 정교하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그 진실이란 게 텅 비어 있을까봐”(151면) 두려움을 느낀다.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열네명의 사망자 중 신원을 파악하지 못한 시체 한구가 시립병원 안치실에 유치 중이라는 것과, 희생자는 십대로 추정된다는 사실뿐이다.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참사 이후 얌의 부재를 경험한 ‘나’에게는 두가지 이야기가 찾아온다. 하나는 가해자에게 부여할 서사이고, 다른 하나는 얌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전자보다 “괴물의 이야기가 아닌 진짜 얌의 이야기”(156면)를 떠올리기를 택한다. 혐오와 폭력에 전 이야기 대신 “우리도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던 얌의 “징그럽게 옳은 말”(157면)을 이어받는다. 의도적으로 배척당한 삶도 존귀하다는 말은 올바르지만 실현되기 어렵기에 때로는 혐오의 언어보다도 거칠고 무용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자리에서 “나의 이야기”(같은 면)를 쓰기로 결심한다. ‘나’는 얌을 떠올리며 쇼핑몰에 찾아간다. 그곳에서 “가림막 너머 어딘가에 여전히 누군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었다”는 소망을 밝히면서 “잘 단련된 그림자”(158면)와 같이 도시 곳곳에 숨 쉬고 있을 얌 혹은 얌‘들’을 찾아다닐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암시한다.
한편, 사라진 타인의 이야기를 건네받은 이의 삶 역시 변한다. 「햇살에게」는 석달 전 성당에서 발생한 일곱살 여자아이 ‘은햇살’의 실종사건을 신부인 ‘나’의 시점에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기존 세계가 지닌 문제를 드러내는 사연들은 지금까지 쌓아온 규칙과 그에 내재한 표면적인 평화를 위협한다. 그렇기에 성당 사람들은 사건에 “유괴, 납치, 가출 같은 정확한 이름 붙이기”를 거부하며 “부질없는 안도감”(166면)을 누리고자 한다. 사건을 담당한 형사는 햇살의 사라짐을 유괴가 아닌 “자발적 가출”(171면)로 규정한다. 일곱살 아이가 할 법한 행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나’는 어쩐지 이 해괴한 추측을 단번에 내칠 수가 없다. 햇살이 자연히 머물렀을 장소들을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그곳 어디에도 너는 없다”(172면)는 엄연한 현실 때문이다. 햇살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상상 곁에만 머문다. 오직 부재함으로써.
의도된 인과관계의 어그러짐은 “인간은 진실이 아닌 각자의 이야기를 산다”(197면)는 원리에도 모두가 자신만의 믿음을 숭고한 진실로 밀어붙이는 세태를 발가벗긴다. ‘나’의 회고를 통해 전달되는 또다른 이야기는 이렇다. 햇살은 친족 성폭행으로 태어난 아이였고, 팔년 전 햇살의 외할머니는 그 일을 철저히 감추기 위해 딸을 동정 잉태한 “하느님 신부”(194면)라 칭했다가 가족 모두 성당에서 퇴출당했다. 당시 성당의 보좌신부였던 ‘나’는 사건의 진상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성직자로서 지위 유지를 위해 외면했다. 이후 할머니와 햇살이 자신을 쫓아 성당을 옮겨왔고, 햇살은 엄마의 죽음 이후 조부모의 학대에 가까운 방치 속에 살다가 홀로 사라졌다.
얌을 찾는 일이 그러했듯 사라진 이들에게 가닿기가 어려운 이유는 그들이 기존의 경로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성폭행과 가정폭력의 피해자 그리고 방치된 아동처럼 사회가 정상적인지를 심문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은 손쉽게 소거되고 잊힌다. 그러므로 사라진 이들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삶에 이어붙이는 주영하의 태도는 배척당한 생의 서사를 되살리고자 하는 시도다.
이러한 행위를 결단한 이는 필연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인의 이야기가 침습하면서 다른 형상의 삶의 질서를 빚게 되기 때문이다.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거쳐 도달한 자리에서 ‘나’는 새로운 의미의 신앙을 창안한다. “기도와 믿음이란” 엄격한 규율과 예법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그를 생각하는 일”(226면)이기에 “햇살, 너는 살아 있다고”(206면) 믿기로 다짐한다. 햇살의 사건을 아동 실종이라는 뻔한 비극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하기로 선택한 자의 떠남으로 바꿔 읽어내기 위하여 ‘나’는 기꺼이 햇살의 이야기를 자신의 삶 중앙으로 끌어당긴다. ‘나’의 노력은 상대의 고정된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든 서사를 받아들인 자의 자세다. 햇살을 찾아 성당을 나서는 ‘나’의 마지막 행보는 그들의 이야기를 무관심 속에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끈질김을 보여준다. 이렇듯 주영하의 인물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누군가 “사라진 뒤부터 한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는 감각”(220면)이다. 이 감각이야말로 주영하가 우리의 삶을 다양한 얼굴들의 이야기로 채우기 위해 소설 속에 숨겨둔 무언가다.
되어가는 존재, 되찾는 말: 정용준 『겨울통』(은행나무 2026)
정용준 장편소설 『겨울통』에서도 이야기는 한 인물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제대로 도착한다. 시인인 ‘동아’와 촉망받는 조소 미술작가였던 ‘인하’는 소랑도서관에서 진행한 ‘내 이야기 내 책 만들기’ 사업에서 각각 글쓰기와 그림 파트를 담당하는 작가로 만났다.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상처를 안고 소랑에 오게 되었으며 오래도록 어떤 감각과 소망을 포기한 채 살아왔다는 점이다. 동아가 의미없는 말로 대화를 채우고 싶지 않아 소통을 줄인다면, 인하는 무언증을 앓고 있기에 침묵한다.
그러나 이들이 무감각한 부류는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침묵은 지나치게 섬세한 자가 살아오면서 겪은 상처를 소화하기 위해 굳어진 삶의 태도에 가까워 보인다. 동아는 “소망을 품자마자 시작되는 결핍과 초조가 두려워 차라리 혼자 있기를 택하는 사람”(80면)으로, “하려는 노력보다 하지 않으려는 노력”(45면)에 더욱 집중해왔다. 인하는 언어장애로 인해 생각하는 의미 그대로의 말, 즉 “원하는 말”을 내뱉을 수 없다. 잘못된 말 때문에 생길 오해와 해명이 싫어서 “말 자체를 하지 않게 된”(77면) 것이다. “슬픔도 분노도 느끼지 못하도록 훈련”함으로써 “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79면)해야만 했다. 그러한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여기면서도 왠지 서로에게만큼은 내밀한 모습까지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두 사람을 이어준다.
하지만 동아에게 ‘겨울통’이 발병하면서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만다. 소설에서 겨울통은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의 신체 일부 혹은 온몸이 물과 같은 투명한 액체로 변해버리는 병으로, 어떠한 원인과 치료법도 밝혀진 바 없다. 하지(夏至)에 발병한 신체는 동지(冬至)에 녹아내리며, 병에 걸린 이들은 즉시 몸 안쪽에 차가운 무언가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소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어렵게 연인이 된 동아와 인하가 겨울통을 겪는 과정을 세세히 펼쳐 보인다.
하지에서 동지까지 마지막 시간을 보내면서 인하는 도저히 동아를 보낼 수 없음을 절감한다. 동아는 밤낮없이 겨울통을 연구하는 인하에게 “무의미한 일”(119면)에 매달리지 말고 저주나 운명처럼 현실로 받아들이라고 말하지만, 인하는 끝내 한가지 불가능해 보이는 가설에 도달한다. 겨울통이 불치병이 아니라 “단순히 몸이 변하는 수준을 넘어 세포 단위에서 존재가 재정의”되는 “완전변태”(145면)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애벌레-번데기-나비로의 진화처럼 완전변태는 신체의 일부가 변화하는 불완전변태와 달리 존재의 구성물이 녹아내린 후 다시금 재구성되는 경로를 거친다. 인하는 겨울통을 완전변태의 과정으로 전제하고 동아가 녹아내린 액체를 그러모아 3D 스캐너로 만든 형상에 부어 얼리고 입춘에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동아를 되돌리고자 한다. “동아를 번데기로 만들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149면)이 인하의 목표다.
여기에는 동아의 신체만 아니라 기억까지 돌아오게 만들어야 한다는 난제가 있다. 인하는 기존의 연구결과들을 참고하여 액체 일부를 흡수해 유전자를 공유한 이가 기억과 정보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준다면 돌아올 수 있다는 미약한 가능성을 본 뒤 이에 매달린다. 이때 인하가 강요되어온 무감각을 거부한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불안을 이기고 여기까지 밀어붙였다. 그게 무엇이든 부정적인 마음 그 자체를 무시했다. 슬픔. 불확실성. 실현가능성 없음. 자기부정 (…) 나는 겁쟁이처럼 속으로 되뇌었다.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158면) 동아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자신을 감추고 모든 감각을 죽여왔던 습관을 포기하자, 인하에게 어떤 깨달음이 당도한다. 자신이 동아에게조차 “말하기를 실패하는 것이 싫어 말하기를 포기”해왔다는 것을. “부서진 언어”(193면)일지라도 동아에게만큼은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보여주고 싶었다는 속마음을 깨닫는다. 상대에게 온전히 가닿을 수 없을지라도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하기를 욕망해왔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게 된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 내내 인하는 시릴 정도로 추운 핀란드의 눈밭에서 동아의 번데기라 부를 수 있을 무언가와 함께 겨울을 난다. 그러는 동안 동아를 되돌리기 위해 매일같이 동아가 썼던 모든 종류의 글을 소리 내어 읽는다. 그 안에 담긴 동아의 내밀한 생각과 감정들을 읽어내는 일이 힘들고 괴롭더라도, 자신이 내뱉는 언어가 이해받지 못하거나 부족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안고서도 그렇게 한다. 인하는 동아가 쓴 것들을 읽으면서 “동아는 점점 동아가 되어갔다”(187면)는 사실을 이해한다. 시간과 경험을 거치며 되어가는 것이 바로 존재라는 것. 한 존재는 완성된 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나누며 살아가는 경험을 거치면서 그렇게 ‘되어간다’.
내면의 소리를 죽이던 버릇은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속박의 언어를 향하고, 솔직한 마음을 제대로 말할 기회를 얻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인하를 가득 채운다. 인하의 몸속에도 완전변태를 추동하는 액체와 같은 감각과 언어들이 녹아 흐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동아가 돌아오는 과정은 인하에게 말과 언어가 되돌아오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는 언어가 육체와 진득하게 얽히면서 외면했던 감각을 인지하고 발설하게 만드는 변화를 추동한다.
그렇다면 기적처럼 입춘에 마주하게 된 두 사람은 이전과는 같지 않은 새로운 ‘동아’이자 ‘인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정용준이 보여준 재생과 되돌아옴의 상상력은 단순히 한 존재를 복제하려는 자기만족적인 행위와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라진 존재가 다른 서사를 지닌 채 변형됨을 받아들이고, 그 이야기가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까지 허용하는 자기탈주의 행위에 가깝다. 존재의 자기동일적인 선이 “금 안쪽의 세계”와 “금 바깥의 세계”(179면)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면 이 선을 넘나들며 탈주하는 존재들만이 더 많은 이들에게 가닿을 수 있을 것이다.
주영하와 정용준의 소설에서 사라진 존재를 현재로 불러들이는 이야기는 남아 있는 이에게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요구하면서 다른 세계가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결국 이 소설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사라진 존재의 이야기를 받아들인 이가 자신의 존재를 변형시키며 펼쳐나가게 될 이후의 서사이자 미래의 이야기일 것이다. 보다 나은 미래 쪽으로 옮겨가기 위해 기어코 다른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반가운 소설들 곁에 조금 오래 머무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