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네드 블랙호크 『선주민이 쓴 미국사』, 책과함께 2026
토착민과 미국사의 패러다임 전환
이정진 李廷進
한림대 한림과학원 HK 연구교수
godard1@naver.com
책의 제목 『선주민이 쓴 미국사: 만남과 충돌, 교류와 공존의 500년사』(한국어판 최재인 옮김)는 이 역작의 취지와 야심을 담기에는 다소 역부족으로 보인다. 원서의 제목은 ‘미국의 재발견: 토착민들과 미국사의 탈-형성’(The Rediscovery of America: Native Peoples and the Unmaking of U.S. History)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어구 하나하나가, 말하자면 ‘학술적 자의식’으로 충만하다. 우선 대번 도드라지는 부제의 ‘unmaking’(탈-형성)은 기존 미국사 서술에 대한 강렬한 대결의식을 드러낸다. 비슷한 계열의 학술어휘라 할 ‘deconstruction’이나 ‘unthinking’과 마찬가지로 일상어로서의 어색함을 무릅쓰는 과격한 조어 방식 또한 비판의 근본적인 차원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저자 네드 블랙호크(Ned Blackhawk)는 기존 미국사 서술에서 토착민들은 “아예 없거나, 발견과 지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객체 혹은 적의를 품은 객체로 등장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미국사에서 토착민의 존재를 되살리는 작업이 저자의 반문처럼 “과거의 드라마에 출연진을 새로 추가하는 것” 정도의 일이어서는 ‘미국의 재발견’이라는 대담한 제목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기획이 ‘탈-형성’의 학술적인 용례를 따라 해체에 준하는 비판이 재구축의 성과로 이어지는 것임을 자부한다. 즉, 토착민을 미국사 서술의 한축으로 삼을 때에야 비로소 “보다 포괄적”이고도 “온전한”(22면) 미국사 이해와 해석에 도달하리라는 것이다.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 토착민과의 ‘대면’(encounter)이 미국의 형성과정에서 지속적이고도 결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했다는 것인데, 이 야심찬 통사는 미국사의 전시기에 걸쳐 이런 대담한 주장을 입증하고자 했다. 2023년 전미도서상의 수상은 이 책이 그 작업을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평가를 말해준다.
이 서평 또한 그런 평가에 동의한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으로는 (영·프 간의) 7년 전쟁, 독립전쟁, 미영전쟁 등 식민지 시기 말부터 그 직후 시기 미국사의 전개방향을 가름했던 결정적인 역사적 국면들에 대한 재해석을 꼽을 수 있지 싶다. 그중에서도 독립전쟁의 배경과 기원을 다루는 1부의 5장(「정착민의 봉기: 미국혁명의 토착적 기원」)이 단연 돋보인다. 기존 해석은 과도하게 이념 중심적인 데 반해 이 책의 재해석은 다분히 ‘유물론적’으로, 경제적 동인에 초점을 맞춘다. 두 해석이 대비될 때 새삼 주류 미국사 특유의 예외주의적인(자기도취적인) 경향이 부각되면서 저자의 관점에 설득력을 더한다. 예컨대 비중있게 언급되는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1967)의 저자 버나드 베일린(Bernard Bailyn)은 독립전쟁의 발발을 거의 순수한 정신사적 사건으로 규정한다. 이 저명한 미국사학자는 계몽주의 “이념이 혁명 발발의 중심에 있었다”고 단언하면서, 당시 식민지 사회에 만연했던 “사회적 불만이나 경제적 혼란”(330면)과 같은 경제적 요인을 주변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이 책의 5장은 제목에서부터 다분히 베일린을 겨냥하며, 오히려 당시의 식민지 상황을 독립전쟁의 ‘토착적 기원’으로 지목하고, 영국 본국으로부터의 이반이 시작된 진앙지를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새로이 정착이 이루어지던 그 너머의 서부 ‘변경’으로 수정한다. 영국 정부가 토착민 ‘네이션’들의 영토에까지 진출한 정착민들을 탄압하자, 정착민들은 민병대를 조직하면서까지 확보한 토지를 지키고자 했다. 영국 정부가 토착민의 주권을 존중한 것은, 폰티악 전쟁(1763~66)을 통해서 드러난 토착민의 무시하기 어려운 군사력 때문이었다. 7년 전쟁(1754~63)의 승리 이후 영국 정부는 군사적 충돌의 억제를 통해 대폭 늘어난 제국 영토를 관리하려 한 반면, 이미 분배가 완료된 뉴잉글랜드의 토지 사정은 정착민들의 서부 이동을 압박하고 있었다.
미국사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토착민의 존재와 대응을 주요 변수로 고려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해졌다. 헌법 제정기의 최대 논쟁사안이었던 연방의 권한 규정 또한 이 책의 입론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사례이다. 1부 마지막 장인 6장(「식민주의와 헌법」)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각 주들을 대신해 연방이 토착민 네이션들과의 조약 체결 지위를 독점한 것이 연방 권한 강화의 중요한 계기였음을 설득력있게 입증해낸다. 그에 앞서 정작 독립을 달성하고 나서 미국이 내륙으로의 영토확장 수단으로 조약 체결을 최우선시한 것 또한, 토착민 네이션들의 군사적 역량과 더불어 그들과 동맹관계를 맺은 유럽 국가들의 참전 가능성 때문이었다. 이렇듯 이 책은 미국의 초기 국가건설 과정에서 결정적인 선택을 추동했던 역사적 논리를 토착민과의 관계 속에서 선명하게 제시한다. 조심스럽게 소망을 보태 예측하자면, 이 책이 기폭제 역할을 해서 조만간 토착민의 역사가 직전 시기 흑인 노예제 연구의 선례를 따라 “미국사 탐구에서 필수불가결한”(22면) 것으로 자리잡게 되리라고 본다.
저자는 서론에서 토착민들의 (일괄적으로 ‘주도성’으로 번역했으나 표현의 강도를 낮추어 ‘능동성’ ‘주체성’ 정도의 역어가 적당해 보이는) ‘agency’를 강조하는 서술방침을 선언한다. 그 다양한 양상을 아우르기 위해서 저자는 토착민 네이션들의 집단행동 외에도 이례적인 개인들의 서사에도 주목한다. 그중에서도 2장(「북동부 선주민과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부상」)에 등장하는 ‘디스콴텀’의 ‘오디세이아’는 너무나 인상적이다. 이 토착민은 납치되어 런던에서 노예로 지내다가 그 유명한 메이플라워호의 통역이 되어 아메리카로 돌아왔던 것인데, 플리머스 식민지의 초기 정착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흑인 노예제에 앞서는 토착민 노예제의 존재를 증언하는 동시에, 토착민과 정착민의 공존에 관한 비전을 품고 있다. 식민 역사의 핵심적인 서사 가닥과 교차하면서도 독자적인 운명을 개척한 개인들에 관한 이런 짤막한‘전기’들은 이 책의 독서를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2부는 크게 보아 토착민 정책사로 요약할 수 있다. 정착민들이 세운 국가가 확실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고 나서부터 토착민들의 존재는 이제 ‘대처’가 아니라 ‘처리’해야 하는 문제가 되었고, 그리하여 2부의 내용은 거의 읽는 내내 우울함을 유발한다. 그 와중에도 미국사에 대한 통찰은 이어진다. 예컨대 8장(「대외 정책의 형성」)은 먼로 독트린(1823)의 실질적인 의도 가운데 하나로 토착민 네이션의 외국과의 동맹 체결 봉쇄효과를 거론한다. 내전 시기를 다루는 9장(「붕괴와 전면전」)의 주장은 실증자료로 뒷받침되어 더욱 단호하다. 전쟁 수행을 위해 대폭 강화된 연방정부의 권력이 대규모 철도망 구축 같은 체계적인 토착민 학살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후 오랜 기간 토착민 정책은 보호를 빙자한 강제적인 동화 정책으로 유지되었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10장(「탈취당한 어린이와 조약지」)에서 자세히 다뤄지는 토착민 유소년 기숙학교 제도인데, 강제로 입소된 ‘학생’들의 상당수가 사망했음에도 오랜 기간 운영되었다. 이 책을 통해 새로이 알게 된 사실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이 사태는, 최근 미국이 중국의 소수민족 억압 정책을 이데올로기적 공세의 초점으로 삼는 행태 때문에 더욱 통렬하게 다가왔다. 그리하여 지난 세기 중반에 이르러 토착민 정책은, 여러 모순과 문제에도 불구하고 토착민 주권의 회복 가능성을 담지했던 거류구역의 해산을 유도하는 ‘종결’ 정책으로 치닫게 된다. ‘주권 확보 투쟁’이라는 2부 제목에 부합하는 반전은, 20세기 후반을 다루는 마지막 12장(「종결 정책에서 자결권까지」)에서야 등장한다. 과거 연방정부와 토착민 네이션들 간에 체결된 조약의 유효성을 주장한 법정 투쟁의 성과로 인해 토착민 주권을 새로이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파괴적 역사를 되돌리는 도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예컨대 토착민 집단이 법정에서의 승리로 확보한 토지의 관할권을 활용해 도박산업을 일군 사실은, 현실적인 생존전략으로 수긍이 되면서도 착잡한 기분이 들게 한다). 이 책은 바로 그 토착민 주권의 역사적 근거를 밝히고, 토착민과 정착민 간의 새로운 관계 구축의 가능성을 탐색함으로써 역사적 과업에 동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