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현대철학분과 『다시, 동학』, 동녘 2026
동학은 어떻게 다시 질문이 되는가
백민정 白敏禎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mjbaek@catholic.ac.kr
어떤 사상은 시대가 지나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어떤 사상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동학은 분명 후자에 속한다. 지난 한세기 동안 동학은 민중종교였고 농민혁명이었으며, 천도교의 기원이었고 민족운동이기도 했다. 동학이 이처럼 다양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아온 것은 당대의 문제의식 속에서 새롭게 읽혔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동학』이 흥미로운 점은 동학이 본래 무엇이었는가를 해명하기보다 오히려 동학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다시 질문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이 책에서 ‘다시’라는 말은 과거를 복원하거나 동학을 오늘의 대안으로 호출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저자들은 동학이라는 사유를 매개로 우리가 근대와 문명, 국가와 민주주의를 이해해온 익숙한 언어와 문법을 새롭게 성찰하는 해석학적 시도를 선보인다. 이 책은 또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현대철학분과의 여러 연구자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토론하고 공부하면서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다양한 연구자들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동학을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아닌 오늘의 사유를 자극하는 지적 대상으로 재구성하였다.
저자들은 동학을 특정한 종교의 성립으로 설명하기보다, 인간과 공동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의 전환으로 이해한다.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시천주(侍天主)는 인간을 신분과 계층 이전에 똑같이 하늘을 모신 존재로 바라보는 혁명적 인간상을 제시했고,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이를 만물까지 포함하는 보편적 공경의 원리로 확장했다. 특히 동학공동체를 다룬 3장 ‘동학공동체와 공공의식’은 이러한 사상이 개인의 종교적 신념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인간관계와 공동체의 질서를 모색하는 삶의 실천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공동체의 공적 관계와 질서는 어떠한 인간 이해 위에서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초기 동학의 문제의식이 이후 천도교의 문명론과 해방 전후에 전개된 천도교청우당의 민주주의론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흐름의 출발점이 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이후의 천도교를 탐구한 5장부터의 내용들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어떻게 하나의 사상을 다시 구성하는 일로 나아갔는지를 보여준다. 손병희는 동학을 보존하기 위해서 오히려 동학을 변형해야 했던 인물이었으니, 천도교는 동학의 연장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자기 재구성의 결과였다. 이때 저자들이 주목한 것은 이러한 변형의 성패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노출된 불가피한 사상적 딜레마였다. 동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문명을 외면할 수 없었고, 서구 제도와 지식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완전히 의탁할 수도 없었다. 새 시대의 동학은 과거를 보존하는 것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근대를 수용하는 것으로 정체성을 유지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이런 긴장을 시대의 변화가 하나의 사상에 요구했던 복합적인 응답으로 이해했다. 천도교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완성된 근대상이 아니라 전통과 문명, 계승과 변형, 민족과 보편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되물을 수밖에 없었던 사유의 고뇌와 그 흔적들이다.
문화주의를 다룰 때 역시 천도교가 ‘근대’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식민지 현실을 돌파하기 어려웠던 역사적 조건에 다시 주목한다. 실력양성, 문명개조, 발전과 향상이라는 언어는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절실한 전략이었지만, 동시에 서구 근대가 구축한 발전주의의 문법을 내면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저항을 위해 근대를 수용하지만, 그 수용이 또다시 근대의 규범 속으로 자신을 위치시키는 역설. 바로 그 긴장을 저자들은 천도교 문화주의의 핵심 고민으로 읽어낸다. 천도교가 물질문명과 정신개조를 함께 말하며 근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그 시도는 끝내 역사적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책의 미덕은 그 좌절을 성공과 실패의 잣대로 손쉽게 재단하지 않은 데 있다. 천도교 주요 사상가라 할 『개벽』의 저자들이 해방적 의지를 공유하면서 결국 모순적 분열, 상실, 퇴행의 모습을 드러낸 것을 가감없이 소개한 점도 이 책의 또다른 미덕이다.
이러한 시선은 마지막 8장 ‘해방공간의 천도교 민주주의론’에서도 이어진다. 저자들은 청우당을 실패한 정치세력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민주권, 사회적 평등, 좌우합작, 남북통일이라는 서로 다른 과제를 하나의 민주주의론으로 통합하려 시도했던 사상적 실험으로 읽는다. 물론 이러한 구상은 냉전과 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다만 이 책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민주주의를 단순한 제도나 정치기술이 아닌 ‘공동체를 구성하는 정치적 원리’로 이해하려 했던 문제의식이다. 청우당에게 민주주의는 선거와 의회라는 절차를 마련하는 데서 완성되는 체제가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 민족과 사회, 통일과 자치가 서로 경쟁하는 이념 가운데 어떤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대립하는 가치를 공동체 안에서 조율하고 공존시키는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한 과제였다. 바로 이 점에서 청우당의 민주주의론은, 민주주의를 제도적 성취나 절차적 정당성의 문제로 이해하는 오늘날 우리의 익숙한 시선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렇다면 왜 동학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을까? 그것은 단지 역사적 상황이 새로운 해석을 요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동학 자체가 처음부터 완성된 교리가 아닌, 시대의 변화에 응답할 수 있는 사유구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개벽(開闢)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 이미 완결된 질서가 아니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는 사유의 원리이다. 시천주 역시 특정한 종교적 교의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과 생명, 사물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출발점이다. 이러한 개방성 덕분에 동학은 천도교의 문명론으로, 다시 청우당의 민주주의론으로 이어지면서도 자신의 문제의식을 잃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동학이 시대마다 다른 해답을 제시했던 점이라기보다, 오히려 사람과 공동체를 이해하려는 근본 문제의식을 시대마다 새로운 언어로 번역하고 갱신해왔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동학을 오늘까지도 반복해서 다시 읽게 만드는 힘일 것이다. 이 점에서 『다시, 동학』은 독자에게 지식을 하나 더 보태는 책이기보다 우리 자신의 문제를 새로운 언어로 질문하게 만드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