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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조은주 『세계에 속한다는 것』, 생각의힘 2026
세계가 뒤집힌 것을 모르는 척하는 어른들에게
이하나
문화공동체 히응 대표, 집필노동자
allmytown@gmail.com
10여년 전부터 시작된 어떤 징후에 대해 최근 길게 논한 적 있다. 집에서는 자신을 잃고 학교에 와서 자신을 찾는 아이들의 반복되는 생활에 관하여. 그러나 곱씹어보면 그런 아이들은 30년 전에도 40년 전에도 있었다. 나의 전생애에 걸쳐, 그들은 항상 주변에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학교가 마치 특별히 무엇을 잘못하거나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학교는 우물 같다. 사회가 이것저것 던지면 던지는 대로 받아낼 수밖에 없고, 그 안에서 견디기 어려운 아이들이 학교를 벗어날 뿐이다. 어른들은 앞다투어 청소년과 청년을 분석하고 학교와 교실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혐오, 차별, 배제, 우울, 무기력. 어른들이 내놓는 분석의 언어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모두 학교의 구성원이라는 경계 안에 넣고 분류하고 분석한다. 여태껏 우리 사회가 입시제도만을 중심으로 배제되거나 소외된 아이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면, 이제 눈을 들어 조은주의 『세계에 속한다는 것』을 읽을 차례다. ‘기득권’으로 태어나지 못한 청년과 청년이 될 이들의 삶을 가족-학교-사회의 연결 속에서 총체적으로 점검할 수 있다.
저자가 명명하듯 어린이부터 청년까지를 ‘신참자’(newcommer)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들은 세계에 처음 당도한 이들이다. 신참자는 앞서간 이들의 발자국을 보고 방향을 잡아야 한다. 배에 올랐으니 바다로 갈지, 강으로 갈지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참자들에게는 선장도 동료도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저자는 이들의 가족사와 이야기를 꼼꼼하게 엮어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저자 조은주는 가족과 인구, 교육을 연구하는 학자답게 가족이라는 기초 공동체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는 신참자들의 오늘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인다. 시대가 변하면서 점점 개인은 무력해졌고 주체성 역시 박탈당했다. 책에 따르면 지금의 신참자들을 길러낸 세대인 1960~70년대 출생자들은 ‘탐험가’로서 사회적 삶을 시작했다. 가부장제의 성별역할이 해체되고 모두가 돈을 더 벌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 세대가 신참자들을 세상에 내놓기 전부터 이미 일한 만큼의 댓가가 주어지는 세계는 서서히 소멸해왔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은 신참자들이 속해 있는 가족구성원 모두의 질문이다. 과거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이제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자본과 시장이다. 효율적인 자산운용가들과 금융시장에 의해 개인의 삶은 때로 파괴된다. 붕괴를 가까스로 면했으면 이동해야 한다. 불안정은 기본값이 되었다.
한국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과거에 비해 무척이나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등굣길의 진흙탕 길이 사라졌다 해도 개인의 삶이 누릴 수 있는 풍요는 찾아보기 힘들다. 국가의 다수 정책이 중산층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교육정책 역시 그렇다. 안정적인 소득을 기반으로 ‘자녀 계발’이 가능했던 시기에 이어, 지금의 중산층은 계급을 승계하기 위해 자녀를 ‘관리’한다. 이 체제는 정치적 발언과 참여가 가능한 일부 사람들만을 세계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며, 그 바깥의 존재들은 버릴 수 없어 어떻게든 끌고 갈 뿐이다.
책의 핵심적 질문 중 하나는 ‘꿈꾸는 것’의 허망함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신기루와 같은 대학 입시에만 매몰된 교육에 대해 되묻는다. 이것이 정녕 옳은가. 저자는 지금의 일반고가 과거 종합고등학교(한 학교 안에 인문계와 실업계 교육과정이 함께 있는 형태)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고 말한다. 진학 서열로 치면 선진국 유학, 특목고, 자사고의 다음 칸이다. 적지 않은 청소년이 뚜렷한 포부와 목표를 설정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일반계 고등학교로 진학한다. 학교는 입시 중심으로 돌아가며, 취업을 목표로 하는 마이스터고나 특성화고등학교에서도 입시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특성화고 3학년 교실에는 학생수의 3분의 1만 출석해 있다. 취업 인턴 중이거나 취업박람회에 간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누구는 결석했고 누구는 병가를 냈으며 누구는 가정학습을 신청했다.
책에서 짚은 대로 ‘내신이 불안하니 일년을 꿇겠다’는 다짐은 ‘나는 이 세계에 속할 자격이 없으니 다시 준비해서 진입을 시도하겠다’는 다짐과도 같다. 이러한 중단은 대학에 가서도 재현되고, 취업을 준비하다가도 재현된다. 연애, 결혼, 도전을 계속해서 미루며 세계에 진입할 준비가 될 때까지 자신을 닦아세우는 수단이 되었다. 학생들의 “꿈과 끼”(39면)를 지원하겠다는 정책 속에서 아이들은 오히려 끊임없이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며 ‘나는 이미 망한 쓰레기’라고 자조한다. 책 속에 나오는 아이들의 사례는 눈물겹다. 붕괴된 가정에서 가족은 안간힘을 다해 서로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개척자로 살아온 양육자들도 시장과 노동에 시달리다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쳐간다. 사랑도 우정도 지킬 수가 없다(143면). ‘불안은 공동체의 영혼을 완전히 잠식했다.’
전쟁을 겪은 한국사회가 출생 신분에 따른 계급화를 전복시키며 새롭게 만들었던 체제는 ‘능력제’였다. 이 능력제 뒤에 보이지 않는 일루지오(illusio)가 어떻게 숨어드는지 저자는 개인의 발화를 살펴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사회적 게임의 규칙이라 할 일루지오는 구성원 스스로 이 게임에 참가하겠다는 의지를 포함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기꺼이 오늘의 시간을 투자하겠다는 의지가 개인의 삶 속에서 형성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런 투지는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 때 불타오르는 것이다. 교실 안의 무기력은 지금의 신참자들이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측정기다.
저자는 이 책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고 썼다. 개인의 서사가 세상에 드러날 때 우리는 평등의식에 보다 가까워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내가 미워하는 이에게도 사연이 있고, 내가 폄하하던 이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우리는 곁을 내줄 수 있다. 사람이라 포악할 수 있지만 사람이라 공감할 수도 있다. 저자가 이야기를 강조하는 것 또한 일말의 인류애를 기대해서일 터다. 더 많은 노력을 했어야 한다는 체제는 이제 더 좋은 선택을 했어야 한다는 체제로 전환되고 있다. 왜 그때 거기가 아닌 여기에 집을 샀는지 땅을 치고 후회하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평등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그간 어른들은 경쟁체제에 순응하며 마치 자신은 승리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진 채 이 세계에 새로 도착한, 별에서 온 존재들을 방치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저자는 기능으로 작동하는 가정, 따라 할 모범 없는 사회, 상대평가의 문제 등을 다루었지만, 이 세계에는 책에서 미처 논하지 못한 문제들도 무수하게 널려 있다. 한권의 책이 모든 사회현상을 말해줄 수는 없다. 그럼에도 깜깜한 산길에 반짝이는 반딧불이를 만난 기분이다. 사회과학 책을 읽다가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의 동요를 여러번 겪었다.
지금도 교실에서는 좀처럼 남들 앞에서 입을 열지 않으려는 신참자들이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사회는 개인이길 표명하는 이들이 깃발 없이 모여 공정을 되찾으라고 말하지만, 자신을 분류표 안에 넣으며 성장해온 신참자들이 과연 이 세계에 안착하고 싶을까. 높은 곳에 앉은 자들이 사다리를 걷어차놓고 여기 올라올 길을 알고 싶으면 돈을 더 내라고 이들을 꾄다. 그런 높은 곳이 세계라면 차라리 그 높은 곳의 지옥문을 닫고 아래에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건 어떤가. 있는 그대로 모든 문을 활짝 열어둔 채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신참자들의 생애를 통해 한국사회를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문제를 처음부터 재구성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