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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신티아 플뢰리 『쓰라림, 여기 잠들다』, 문학동네 2026

르쌍띠망에서 벗어나는 길

 

 

김정환 金正煥

사회학자,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junghwan@hallym.ac.kr

 

 

 

12·3 내란 직후 각계각층에서 터져나온 규탄과 비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상담심리 및 임상심리 전문가 1,256명이 발표한 윤석열 퇴진 시국선언이었다. 비상계엄 선포는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업으로 삼는 이들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낼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이들의 직업적 윤리에 따르면 그것은 섣불리 “정신 나간 짓” 또는 “미친 짓”이라 예단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선언은 단지 그런 충격적 사건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오랫동안 “세상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들어온 이들이 대변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내담자들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참사로 가족을 잃은 자들의 고통, 아침에 눈 뜨는 것이 두렵다는 자영업자와 실직자의 고통, 외로움과 무력감 속에서 살길을 찾을 수 없어 삶의 포기를 목전에 둔 사람들의 고통이다. 선언문에서 말하듯 “인간이 겪는 마음의 고통은 ‘납득할 수 없는 경험’의 다른 이름”이라면, 마음의 이치는 세상의 이치와 연동되어 있으며 마음의 치유를 위해서는 세상의 개선 또한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며 고통을 겪는 자(patient)와 마음을 치유하는 상담사, 세상을 탐구하는 사회학자, 세상을 바꾸려는 활동가와 정치인이 근본에서 분리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 책 『쓰라림, 여기 잠들다』(CI-GÎT L’AMER, 2020, 한국어판 이혜원 옮김)에서도 말하는바, 세상이 부과하는 부조리한 경험만 인간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개인의 정신건강이 사회의 작동기능에”(321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모두가 자신의 쓰디쓴 삶에 대한 책임을 추궁할 희생양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 그리고 정치인과 지도자가 이러한 대중의 복수심에 편승하여 단죄할 대상을 찾는 데 몰두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언젠가 갈지 모를 지옥과 그리 멀지 않다. 게다가 이러한 적대적 욕동은 위협과 불의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자 정당한 비판이라는 외양을 띠고 있어서 이를 문제적 증상이라고 인지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기가 어렵다. 자신이 희생자라는 불쾌감, 그에 대한 분노에는 모종의 진정성이 있다(175면). “갈망과 질투, 타인을 향하다가 결국 자신을 향하는 경멸, 부당하다는 느낌, 복수하려는 의지, 이런 것들에 근접한 어떤 음침한 감정이 돌출하는 사태”(23면)가 바로 이 책에서 문제 삼는 르쌍띠망(ressentiment)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곱씹은-감정(re-sentiment)”(22면)인데, 이처럼 분노를 되새기며 날 선 상태로 감정을 묵혀두는 과정에서 주체는 “자기 자신을 갉아먹고”(28면) 결국에는 타인과 세상까지 갉아먹게 된다.

이러한 르쌍띠망의 정서가 우리 주변에서도 꿈틀거리고 있음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 오랜 친구들, 가까운 친지들이 부지불식간에 내뱉는 “원한의 말”(324면)을 듣고 종종 놀란다. 그런데 이들이 발산하는 원한의 대상이 대단한 권력자나 부유층이라면 심정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그들의 분노는 중국인,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장애인, 범죄자에게 향한다. 정당한 권리나 적절한 인정 또는 공평한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이들에게 제공되는 약간의 관심과 호의를 견디지 못한다. 일찍이 니체가 말한 것과는 달리 강자가 아니라 약자에 대한 르쌍띠망인 셈인데, 이러한 ‘가치전도’ 속에서 르쌍띠망의 주체는 약자들이 누리게 될지 모를 약간의 “평등에 의해 피해를 봤다고”(32면) 느낀다. 이처럼 ‘끓어오르는’ 감정의 배경에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우거나, 중국인의 개입으로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거나, 이동권을 요구하는 장애인의 시위 방식에만 주목하여 이들에 대한 비난 여론에 편승하는 정치인이 있다. 또한 성평등 논의 중에 콕 집어서 남성 역차별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거나, 대중적 감정을 근거로 하여 촉법소년 연령 하향을 검토하라며 증오와 불안에 불을 지피는 지도자가 있다. 이처럼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희생자로 규정하면서도 곧장 정의를 바로 세울 집행자의 역할을 자처할 때”(180면) 그 사회는 파시즘에 매우 근접해 있다.

드러내놓고 파시즘을 주장하는 이는 매우 드물겠지만 자기도 모르게 이미 파시스트를 불러내고 있으며 스스로 파시스트가 되어가고 있는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들이 가지는 원망과 피해의식이 별로 근거가 없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설득해보려는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을 것이다. 르쌍띠망은 논리가 아니라 정서이기 때문이다. 증오와 폭력의 분출이 스스로 억눌렸다고 믿는 이들에게 제공하는 “권력 만회의 환상”(217~18면)을 어떻게 합리적 언어로 진정시킬 수 있겠는가? 이들에게 말은 감정 표현이나 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욕동을 토해냄으로써 “다른 사람을 더럽힐 수 있는 수단”(324면)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미디어에 등장하여 조금이라도 더 자극적인 말을 내뱉으면서 이목을 끌고 그것이 돈이 되기도 하는 시대이다.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다고 했지만, 공동의 언어를 사용하고 가꾸면서 살아가는 공동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감각의 회복이 간절하다.

물론 르쌍띠망, 원한, 시기, 질투는 우리와 같은 불완전한 인간의 조건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하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이런 번뇌와 노여움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이들은 아마 없을 것이며, 나 역시 물론 그러하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원한이 나를 삼켜서 그 속에 잠식되도록 방치하지 않을 능력과 의지가 있다.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이기도 한 저자 신티아 플뢰리(Cynthia Fleury)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능력과 의지이다. 인생의 쓰라림(l’amer)을 맛보고는 엄마(la mère) 품으로 다시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넓게 열린 바다(la mer)로 나가야 한다는 것. 동어반복적인 말이지만, 르쌍띠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용기, 원한에 의해 지배받지 않으려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칸트가 말하는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는 계몽의 기획일 수도 있고, 지배받는 노예의 도덕이 아니라 주인의 도덕을 택하는 긍지일 수도 있으며, 푸꼬가 강조하는 자기 배려나 비판일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나의 안락과 기분을 침해하지 않고 품어주는 유아(唯我/幼兒)적 세계에 대한 환상을 깨라는 것. 그렇게 고통과 괴로움을 뒤로하고 쓰라림을 잠재운 채 나아간 세계에서 새로움과 놀라움을 발견하고 발명하며 경탄할 수 있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What a wonderful world! 그런데 이처럼 순수한 긍정 속에서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은 니체가 말하는 아이의 모습 아니던가? 그렇다면 르쌍띠망에서 벗어난 주체의 모습은 성숙한 어른인가 아니면 천진한 아이인가?

그 구체적인 상이 무엇이든 저자는 주체의 변형에서 르쌍띠망에 대한 해법을 찾고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니체적이지만, 르쌍띠망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열등감과 원한을 노출하고 만 니체보다 훨씬 ‘성숙한’ 것으로 보인다. 섬세한 문장을 통해서 언어가 가진 상징화 능력과 문학을 통한 승화 가능성을 모색하는 이 책은 그 자체로 저자의 자기수양 과정처럼 읽히기도 한다. 담담하면서도 결연함이 느껴지는 그의 작업에 큰 공감과 지지를 표하면서도, 사회학자로서 제기할 수밖에 없는 의문도 있다. 이러한 윤리적 기획이 결국엔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도달한 개인적인 성불 아니냐는 것. 파농, 호네트 등의 철학자와 릴케, 파운드 등의 작가를 적절히 끌어오는 그의 글을 읽는 일은 매우 즐거웠지만 그같은 고귀한 성찰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지적 자원을 갖춘 이들은 얼마나 드문가? 각자가 르쌍띠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한 증오와 멸시, 피해망상에 대한 조직적인 대응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마케팅이라며 5월 18일에 ‘탱크데이’를 운운한 기업에 대해 우리는 어떤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언어로 공동체의 위엄을 드러내고 범접해서는 안 되는 규범을 확인할 수 있었을까? 서두에 언급한 시국선언과 이 책을 함께 떠올리며 세상살이의 쓰라림과 사람들의 마음 그리고 우리의 언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