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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박종기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고려』, 휴머니스트 2026
남의 ‘한국’과 북의 ‘조선’ 사이를 잇는 ‘코리아’의 발견
전범선 全範禪
밴드 ‘양반들’ 보컬, 사단법인 동물해방물결 이사장
junbumsun@windandflow.com
오늘날 한반도의 정세는 역사 서사적으로도 거대한 전환점을 지나고 있다. 북한이 헌법 개정을 통해 ‘조선’이라는 국호를 국가적 정체성으로 공고히 하고 남한을 공식적으로 ‘한국’이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남북은 별개의 ‘두 국가 체제’로 냉정히 갈라서는 양상이다. 평자가 보기에 이는 남북의 역사적 정체성의 뿌리마저 각기 삼한(남)과 고조선(북)으로 이원화될 수 있는 상황이기에, 분단의 골골마다 놓인 서사의 장벽은 그 어느 때보다 아득하고 두껍게 느껴진다. 서로를 상호 배제하며 고유한 역사적 계승성을 주장하는 이 냉혹한 분열 속에서 역설적인 진실 하나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남과 북이 아무리 서로를 향해 다른 역사적 정체성과 국호를 선언하더라도, 국제사회와 글로벌 정세 속에서 양측을 직관적으로 통합하여 규정하는 이름은 바로 ‘코리아’(Korea)라는 사실이다. ‘조선’도 ‘한국’도 아닌, 천년 전 한반도 전역을 하나로 묶어내며 세계 무대에 스스로를 각인시켰던 이름 ‘고려’가 바로 코리아의 원형이다. 남과 북의 정치적·지리적 이탈이 가속화될수록, 두 정체성을 모두 포섭하면서도 세계적 지평에서 남북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역사적 고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고려로 귀결된다.
박종기의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고려』는 바로 이러한 정세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더없이 중차대한 화두를 던진다. 저자는 40여년간 고려사 연구에 전념해온 한국역사학계의 거장으로서, 조선 성리학적 질서의 두꺼운 장막에 가려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사이에 어정쩡하게 박제되어 있던 ‘고려’라는 역동적 시공간을 오늘날의 삶 한가운데로 다시 소환한다. 한국 근현대의 역사담론이 성리학적 규범이나 조선 후기의 가부장적 유교질서에 과도하게 매몰되어온 시각을 넘어서, 이 책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저력과 역동적 유전자는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천년 전 고려가 남긴 유산을 깊이있게 파헤친다.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지점은, 분단과 배제의 시대를 극복할 정체성적 저수지로서 고려가 지닌 탁월한 포용성과 유연함이다. 고려는 전체 인구 중 귀화인 비율이 8.5%에 달할 만큼 열린 다문화 국가였다. 단지 주변부 유민을 받아들이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거란·여진·몽골·한족 등 한때 적대관계에 있던 세력의 인재들조차 국적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조정의 핵심 재상으로 삼을 정도로 개방적인 인재 등용 정책을 펼쳤다. 이는 단일한 혈통주의나 배타적 국족주의에 갇히기 쉬운 현대사회에 매우 강력한 경종을 울린다.
또한 고려는 자녀 균분상속과 여성 호주제, 여성 재가 자유 등 남녀평등적이고 유연한 사회제도가 원활히 작동한 사회였다. 고려의 이러한 다원적 역동성은, 훗날 조선 후기 성리학이 강요한 닫힌 가부장제 및 단일한 이념적 질서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도덕관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고려는 흔히 ‘유교화되기 이전의 미숙한 단계’로 오인되곤 했지만, 저자는 오히려 고려야말로 다원적 가치와 다양성이 숨 쉬던 ‘가장 앞서간 사회’였음을 역설한다. ‘조선’과 ‘한국’이라는 이항대립적 정체성을 극복하고, 장차 평화적 두 국가 체제나 연방제 등 어떠한 공존의 형태 속에서도 남북의 이질성을 끌어안을 수 있는 유연함이 바로 이 고려의 토양에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수년간 사회적 격차와 배타적 경쟁, 꽉 막힌 규범에 신음하며 이 땅을 ‘헬조선’이라 자조하던 시대를 지나왔다. 그리고 이제는 K팝·드라마·뷰티·푸드가 전세계를 매료시키는 ‘K담론’의 한복판을 통과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근본적인 물음이 생겨난다. 한국이 더이상 헬조선에 갇히지 않고, 더욱 국제적이고 역동적이며 포용적이고 다원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오늘날 전세계를 흔드는 ‘K’의 저력은 과연 어디에서 오며, 도대체 K란 결국 무엇인가? 박종기는 그 질의에 대해 단 한마디로 명쾌한 답을 내놓는다. ‘K란 곧 고려(Korea)다!’
국제무역항 벽란도를 거점으로 아라비아 상인들과 교류하며 세계에 코리아를 알린 해양무역의 역동성,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와 화약무기 기술, 고려청자의 정밀하고 감각적인 문화적 기술력 등 오늘날 K컬처와 K테크놀로지를 관통하는 자율성과 창의성의 원류는 조선의 닫힌 성리학적 질서가 아닌 고려의 열린 유전자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한국사회가 성리학적 유교 관습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옥죄던 그늘을 벗어나, 참으로 포용적이고 국제적인 선진 사회로 거듭나기 위해 우리가 되살려내야 할 마중물이 바로 고려의 정신인 것이다.
결국 이 책이 지금의 우리에게 제시하는 시사점은 ‘미래 한반도의 평화적 공존과 글로벌 확장성’이다. 북의 ‘조선’과 남의 ‘한국’이 적대적 두 국가가 아닌 평화적 두 국가로서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지형 속에서, 남북을 묶어낼 수 있는 상위의 공통분모이자 역사적 다리는 ‘고려/Korea’라는 상징일 수밖에 없다. 갈라진 남북의 역사적 서사를 다원적으로 포섭하고, 상호 배제적 국호를 넘어서는 유연한 공통 정체성의 원형이 바로 고려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고려』는 단순한 교양 역사서를 넘어, 분단과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한반도의 미래를 어떻게 구상할 것인가에 대한 묵직한 답을 제시한다. 조선 성리학의 두꺼운 장막을 걷어내고 고려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그것은 천년 전 고려가 품었던 개방성과 역동성이야말로 가로막힌 남북을 잇고 세계를 향해 나아갈 ‘코리아’의 가장 확실한 이정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