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2026 가을] 통권 213호
심사평

 

 

 

제29회 창비신인소설상에는 총 2,489편의 작품이 응모되었다. 신인소설상 제정 이후 가장 많은 응모작을 기록했던 작년에 비해서도 무려 600편 이상 늘어난 숫자다. 이와 같은 폭발적인 양적 증가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가져온 ‘한국문학의 높아진 위상’이나 ‘소설을 향해 정진하는 뜨겁고 치열한 마음’의 발로로만 모두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앞서 거론한 두가지 요인이 지닌 설명력을 얕잡아보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급격하게 발달한 AI 기술이 대중화되면서 소설 창작과정에 따르는 기능적·심리적 장벽이 크게 낮아진 현실이 우리 앞에 훌쩍 도래해 있으며, 이는 향후 문학을 쓰고 읽는 과정에 큰 변화를 가져올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러한 변화가 실제로 응모 열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더 좋은 소설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이는 응모작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음에 비해 새로운 소설적 활력과 야심을 보여주는 작품의 숫자는 예년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적어졌다는 실감에서 비롯한다. 오랜 고민과 망설임의 시간을 통과한 소설적 문제의식의 깊이와 날카로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뛰어난 도구적 기술을 손에 쥐더라도 좋은 소설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본심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 3인의 소설은 그와 같은 문제의식의 깊이와 날카로움을 개성적인 방식으로 품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먼저 「매몰」은 속도감 있는 전개를 통해 우리의 일상에 잠재된 위험과 파국의 징조를 흥미롭게 형상화함으로써 현대인이 지닌 불가해한 두려움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점이 눈에 띄었다. 절제된 문장의 운용이 특유의 서스펜스를 성공적으로 구축해내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결말의 서스펜스를 위해 혈육의 죽음을 비롯한 다양한 서사적 장치들을 작품 안에서 너무 쉽게 소비하고 있다는 의문을 끝내 불식시키기 어려웠다.

「무덤에서 나는」은 당선작과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작품이다. 일본 오오사까와 한국의 광주를 두 고장의 ‘타이거즈’ 야구팀을 비롯한 다양한 역사적 기표들과 함께 산뜻하고 날렵하게 엮어내는 솜씨가 단연 돋보였다. 지나간 역사의 상흔과 상실의 아픔을 현재와의 관련 속에서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포착해내려는 시선 또한 미더웠다. 그렇지만 일본의 전공투와 한국의 5월 광주를 비롯한 개별적인 사건들이 작품 안에서 피상적으로 연결된 건 아닌가 하는 물음도 동시에 제기되었다. 어쩌면 이는 그 사건을 체험하지 않은 세대가 지닐 법한 자연스러운 감각일 수 있다. 그러나 광주항쟁 미체험 세대의 입장과 태도가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된 바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제는 한 차원 더 깊은 소설적 분석이 필요한 면도 있다.

당선작 「미량의 윤강」은 본심에 오른 작품 중 가장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이다. 무엇보다 안정되고 깔끔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으며 소설적 장면을 만들어내는 공력도 만만찮았다. 심사위원들은 그와 같은 기술적 완성도와 더불어 작가가 고민하는 윤리적 감각에 대해서도 든든한 신뢰를 보냈다. 이 소설은 실패 이후의 시간에 관해 다룬다. ‘윤강’은 발전소를 상대로 한 투쟁에서 패배했고 ‘의민’은 그런 윤강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려다 실패했다. 소설은 두 인물이 겪은 실패에 집중하기보다 그 시간을 통과한 이후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그 흘러간 시간의 더미가 소설에 내적 깊이를 부여하고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과 지난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그 고단함과 지난함에 매몰되지 않고 ‘미량’일지언정 다른 세계의 기미를 포착해내려는 산뜻한 시선이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담담하게 물들이고 있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당선을 축하드리며 소설가로서의 힘찬 출발을 응원한다.

강경석 권영빈 김숨 김유나 박선우 정한아 한영인 황정아

 

 

 

수상소감

 

 

권이내

1994년 전북 군산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석사 과정.

 

수상소식을 듣기 전날 밤에도 소설을 쓰고 있었다. 눈이 쌓인 공터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칠월의 더위 속에서도 소설을 쓰면 겨울과 닿아 있는 느낌이 든다. 그 감각이 좋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조금 더 일찍 집에 와서 더 앉아 있어야겠다고 다짐도 했다.

다음 날 늘 막연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소식을 듣게 되었지만 멍할 뿐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당선된 소설을 여러번 다시 읽었다. 「미량의 윤강」은 누군가와 함께 지고 싶어서 쓴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쩐지 혼자서 이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를 보려고 쓴 소설이었는데 또 이야기의 안과 밖에서 모두, ‘나’만 남아버린 건 아닌가. ‘윤강’을 어딘가에 그냥 두고 와버린 것은 아닌가. 슬퍼져서 그날 밤엔 많이 걸었다.

슬퍼졌다니. 수상소감으로 이런 말은 정말 이상하다. 하지만 내게 소설은 그런 것이다. 끝내 닿을 수 없을 ‘너’를 말해보는 일. 번번이 ‘나’라는 벽에 닿게 되는 일. 그 벽에 서면 작은 숨을 들을 수 있다. 죽어가고 있는, 피폭되고 있는, 잘려나가고 있는, 너와 나의 숨을. 그러므로 슬픔은 기껍다. 그런 슬픔만이 우리를 구한다,고 믿는다.

 

세계는 점점 뜨거워지고 어쩐지 그럴수록 사람들도 더 열을 낸다. 주식, AI, 원전, 공항, 신도시, 반도체산업, 방위산업. 어디선가 그런 단어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함께 뜨거워지기보다 서늘함을 느낀다. 그것들이 휩쓸어갈 삶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 역시 그 가열에 연루되어 있다는 걸 떠올린다.

모순 속에서도 함께 살아남고야마는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이기기보다는 지는 소설을 쓸 수 있기를. 수상소식을 듣고 한동안 소설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내일부터는 다시 눈발 속에 두고 온 인물들에게 돌아가야겠다. 이 마음을 함께 붙잡아주는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당신들과 함께 슬픔을 나누며 오래 살아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