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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1세기 한반도와 새로운 공동체

 

시민사회의 변화와 주권의 급진적 재편

 

 

조효제 趙孝濟

성공회대 시민사회복지대학원 시민사회단체학과 교수.

 

 

변화하는 국가주권의 양상

 

세계화 현상이 지방화 현상을 동반하듯, 국제 시민사회의 부상과 함께 국민국가 내 시민운동의 활성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씨애틀의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이 부분적으로 국제 NGO(비정부기구)의 활동 때문에 결렬된 것처럼, 한국에서도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씨애틀사태에서, 국제 시민단체들은 확실한 의제를 바탕으로 광범위한 연대를 이뤄냈으며 철저한 대비와 미디어의 능란한 구사로 눈길을 모은 반면, 각국의 정부는 정당성과 실행력 양면에서 빈곤함을 드러냈다. 과연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 의해 수립되어 근대화과정을 통해 대부분의 비서구권 국가에 수용된 ‘국가주권’ 원칙이 시민사회의 총궐기 앞에 위협받는 것일까?

초국적자본 앞에서 국가가 점차 무력해진다고 믿어온 사람들에게 씨애틀사태는 그 확실한 물증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믿음의 근거는 물론 세계화이다. 경제적·군사적으로 국가간의 교차 침투가 급증하고, 환경이나 초국적자본 등 지구적 차원의 문제를 국가 수준에서 대처할 능력이 없어진 반면 각종 비국가행위자(non-state actors)가 늘어남에 따라, 국가는 유일주권자에서 다수행위자 중 하나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국가주권의 약화로 인한 공백을 시민의 자발성을 제고함으로써 메울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이러한 시민사회론의 핵심이다.

그러나 작금의 시민사회 만개론에서 우리가 흔히 놓치기 쉬운 두 가지점이 있다. 첫째, 세계화된 자본과 시대에 뒤떨어진 국가주권에 저항하는 대항세력 내부의 뚜렷한 분화현상이다. 씨애틀에서 국제 NGO들이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지만, 숙고할 만한 점이 적지 않다. 씨애틀시위에 환경, 인권, 초국적자본 반대, 공정무역 등을 주요사안으로 하는, 비교적 제도화되고 전문적인 NGO들이 대거 참여했지만, 동물해방, 대체요법, ‘세계정부 음모’ 분쇄, 레즈비언 권리, 아나키즘, 반기술문명운동 등을 추구해 본질적으로 탈체제화 세력 또는 광의의 ‘잔여적 좌파’(leftover left)1로 분류될 수 있는 이른바 ‘NGO 무리들’(NGO swarm)이 적극 가세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들 탈체제화 집단의 전자네트워킹 결합방식과 역동적인 시위가 씨애틀사태를 급진화시켰고, 그 결과 잠시나마 ‘씨애틀해방구’가 형성되어 노동조합원과 농민운동가 또는 아나키스트와 극우 기독교근본주의자 같은 이질적 세력들이 ‘초교파적으로 하나가 되는’ 장이 펼쳐진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씨애틀사태는 ‘좌파와 우파의 문제가 아닌 상부와 하부의 문제’,2 즉 모든 형태의 권력을 거부하는 문화혁명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새로운 현상으로 볼 여지가 적지 않다. 이러한 현상의 바탕에는 합리성과 전문적 지식에 기반한 제도개혁론과, 직관과 자유로운 사유 그리고 첨단기술 민주주의에 근거한 해방론이라는 서로 다른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둘째, 국민국가를 이루는 원형질은 불변하는데, 세계화 현상 이후에 국가주권의 양상이 갑자기 변형되기 시작했다는 착각이다. 1933년 체결된 ‘국가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몬떼비데오협정’은 국가라는 법인격체는 일정한 거주민과 영토, 그 경계 안에서 효과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는 정부, 그리고 다른 나라와 외교관계를 수행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주권의 구체적 양상이 절대불변의 고정형인 것은 아니다. 주권의 내용과 범위는 나라와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2차대전 후 동구권 위성국가들은 주권의 실체적 내용이 빈약하기 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엿한 주권국가로 인정받았으며, ‘반국가단체’였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여러 국가와 공식적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자결권의 개념도 대체로 국가의 자조(self-help)의지의 정도에 달렸다고 보아야 한다. 군 작전통제권을 둘러싼 한국의 사정도 주권의 발육부전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의 신생독립국들 중에는 국제법적으로는 엄연히 주권을 인정받지만 국가의 실질적 내용은 결여된 ‘의사(擬似)국가’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주권이 안팎으로 가변적인 속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 일부에서 국가주권의 약화를 우려하는 경향은 특기할 만하다. 나아가 은연중 주권의 전통적 내용을 보전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는 가정도 상존함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세계화에 따른 대외적 국가주권에 대한 논의는 무성하지만, 대내적 주권의 양상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미약하기만 하다.

이러한 두 가지 문제제기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서 다음과 같은 함의를 지닌다. 우선, 근대국가의 주권적 통치씨스템을 가능하게 해주는 특별한 전제, 즉 ‘전문가씨스템’(expert system)을 둘러싼 대내외적 변화를 시민사회가 어떻게 볼 것인지, 그리고 시민사회가 국가주권의 ‘고유권한’에 어느 정도나 개입할 수 있을지 하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한국의 전문가씨스템 내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개념도를 그려보고, 세계화시대 국제 시민운동의 변화상과의 유사성 및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전문가씨스템의 대내외적 변화양상의 차이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 시민사회가 국가주권의 고유권한인 전문가씨스템 원칙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며, 더 나아가 국가 주권속성의 급진적 재편을 견인해야 함을 강조해 주장하고자 한다.

 

 

전문가씨스템의 두 가지 물결

 

기든스는 전문가씨스템을, 상징적 증표(예를 들어 화폐)와 함께 근대국가에서 일상적 사회관계를 특정한 맥락으로부터 추출하여 보편적 맥락으로 옮겨주는(disembedding) 기제의 하나로 보았다.3 전문가씨스템의 고전적 표현은 전문직(profession)이며, 그 핵심 부문은 법, 의학 그리고 정도는 조금 다르지만 교육을 들 수 있다. 이 영역들은 또한 안보·지식·생산·재정 등4 스트레인지가 분석한 국가의 4대 구조적 권력부문 중 지식부문과 일치한다. 법은 사회질서를 보위하고 의학은 국민의 물리적 재생산을 담당하며 교육은 가치의 재생산을 관장하는 국가권력의 중요한 부문이다.

전문가씨스템은 그러나 과거 한국의 권위주의 정치상황에서 철저히 도구적 기술로 전락했으며, 그에 대한 반발로 전문가씨스템의 정치적 의미가 고양되어 이른바 전문직의 진보적 사회운동이 등장하였다. 영역별로 활동 특성과 촛점은 달랐지만 진보적 전문직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성원으로 그리고 전문영역 개혁의 주창자로서 결코 작지 않은 역할을 수행했다. 진보적 전문가씨스템을 묶는 화두는 ‘정상화’와 ‘진보’였다. 예컨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근대적 사법원리인 법의 지배와 적법절차 정신을 수긍하면서도 단지 법의 지배만을 강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이들은 라즈의 주장처럼 법의 지배를 그 자체만으로 민주주의, 정의, 평등 그리고 더 나아가 인권·인신의 존중, 인간의 존엄성과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5 적극적·실질적인 시민·사회권을 옹호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는 의료전문직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면서 보건의료제도의 개혁과 인간화를 주창했으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역시 제도교육의 파행과 교육현장의 비민주성이 사실은 사회구조의 직접적 산물임을 밝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다시 말해 우리 전문직 사회운동은 계몽주의적 정상성의 획득을 전제로 하면서 사회정의, 평등주의, 집산적 지향이 혼합된 형태를 취했고, 이것은 전근대─근대, 보수─진보 구도가 뒤섞인 한국형 대결구도과 맥을 같이했다.

전문직 운동의 제1의 물결은 정치적·사회적 지형의 변화로 가능했는데, 최근 들어 법·의학·교육 부문에 미세하지만 의미심장한 변화가 다시 일기 시작했다. 우선 법의 영역에서 법률소비자운동이 등장해서 ‘사법주권’의 국민환원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법률가 독점주의, 법률가 강제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구성원 중 절반은 사회인사 가운데 공선제(公選制)로 선출하고 법원장·검사장·경찰서장 등 사법관련 기관장은 주민직선제로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을 폐지하고 변호사 자격시험을 도입하며 배심원·참심원·검찰심사회 등의 형태로 시민이 기소와 재판과정에 간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투명한 변호사보수법을 제정하고 무죄추정의 원칙 준수, 불구속수사 및 재판의 관례화, 그리고 수사기록과 소송기록의 자유공개를 내세운다. 의학영역에서도 저변에는 변화의 움직임이 뚜렷이 감지된다. 건강관리, 산후조리, 피부관리, 기체조 등 제도의료의 부심권이 보이는 약진세는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침구사들이 제도적 인정을 요구하면서 기성 한의학계를 공격하고 있으며 수지침, 민간침뜸, 각종 대안요법, 대체의학 등이 제도권 의료의 외연과 중첩하면서 광범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교육부문의 새 물결도 지나칠 수 없는 의미를 가진다. ‘화석화된’ 제도교육을 거부하는 가정학교(homeschooling)와 대안학교가 전국적으로 생겨나고 이들은 공교육씨스템에 실망한 학부모, 인간적 교육을 희구하는 시민들, 학교체제가 본질적으로 비자발성에 기초해 있다고 믿는 교육근본주의자의 지지를 받는다. 이러한 운동은 새로운 교육문화의 모색, 학부모 재교육, 탈학교 실천모임, 대안교육운동 네트워크, 도시형 대안학교 모델개발 등 다양한 형태로 뿌리내리고 있다. 조한혜정(趙韓惠貞)은 가정학교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저항교육’이라 규정하며,6 공동체운동의 한 형태인 지역통화(LETS)의 발상에 근거해 참여자들이 음악·미술 등의 특기를 서로 교환할 수 있는 교육통화도 생겨날 예정이라 한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이러한 대안적 물결이 시민운동의 형식을 취하거나 그것과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 변화는 전문직 일반에 대한 비판담론이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1990년대 들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의약분업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전문직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정책결정을 좌우하는 요인임이 확인되면서 국가가 전문직을 통치씨스템 작동기제의 근간으로 인정하고 그 독점성을 법률로 정당화해주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전문직화는 독점화와 같은 뜻이라고 간파한 벌란트, 핵심전문직은 시장지배를 통해 신분상승을 이뤄낸 직업집단이라고 비판한 라슨 등의 이론이 사회과학계에서 이미 중요한 연구분야로 자리잡았다. 더 나아가 프라이드슨은 전문직의 본질이 전문지식이나 이타심 같은 객관적 특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업종의 자율성을 고수하고 그것을 정당화할 수사를 재생산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비판담론은 전문직의 목적은 다름아닌 전문주의의 추구라고 단언한 존슨, 그리고 각 전문직이 자체의 관할영역을 확보할 때 다른 전문직과 담합한다는 설을 제기한 애봇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한다.7

전문가씨스템을 둘러싼 두 물결을 간략하게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의 물결은 민주화운동 ‘대오론’의 선상에서 저항에 동참했으며 제도주의, 과학성과 전문성, 더 나아가 국가공인에 의한 자격주의(credentialism)를 신봉하면서 공적 씨스템을 통한 문제해결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제2의 물결은 전문직 독점을 비판하고 제도적 접근을 거부하며 전문지식을 상대주의적으로 해석하여 다원적 전문직을 옹호한다. 또한 소비자주권과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며, 특정이념에 초연한 탈권위주의를 지향하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는 문제의 기본축이 바뀐 것이다. 이 물결은 우리 국민이 가진 정의적(情誼的) 취향, 탈세속·탈물질 명분담론과 내밀하게 조응하면서 더욱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이른바 포스트 제도주의 담론으로 무장한 시민운동의 저변이 확대되는 것이다. 이 운동들은 정신성과 풀뿌리 전통, 자조활동과 ‘생활정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른바 ‘신사회운동’적이지만, “추구하는 목적이 모호하고 특정 이슈를 중심으로 간헐적으로 결집하며 다차원적 행위자들의 느슨한 네트워크”8라는 점에서는 ‘포스트 신사회운동’적이기까지 하다. 또 분권적·자조적·공동체적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는 아나키즘운동과 닮았다. 그러나 국가공동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일면 제도적 개혁을 추구하고, 가능하면 제도권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며, 광의의 대안적 시민사회운동 세력에 속한다는 점에서 전통적 아나키즘과는 개념적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은 항상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결합할 가능성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례로, 5공체제에 참여해 ‘교육개혁’의 선봉에 섰던 이규호(李奎浩)는 요즘 들어 과학의 보편타당성과 객관성 그리고 과학적인 실재를 보장하는 실체의 개념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의 한국사회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과학적 언설의 정당성은 과학의 방법론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경험에 의해서 확인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신과학론은 정부가 “(일부세력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압력에만 굴종할 것이 아니라─인용자) 종래에 있었던 침구의술을 위한 법률을 다시 수정해서라도 침구사제도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9 이 말은 앞에서 확인한 제2의 물결의 특징을 상당부분 대변하면서, 동시에 경제적 자유를 위해 국가자격제도를 완전히 개방해 시장기능에 맡기라고 촉구했던 프리드먼(M. Friedman)의 우파적 반(反)전문주의를 강하게 반영한 것이다.

물론 제1, 2의 물결이 섞여 있고, 제1의 물결의 문제의식이 아직도 엄존하지만, 문제제기의 균열선이 놓인 지형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제2의 물결이 주장하는 지적 정당성 또는 담론의 외양으로 판단해보면, 이들이 서구 신사회운동의 다기한 흐름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이미 그것과 의사소통적 인접성(communicative proximation)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제1의 물결에 속한 비판적 전문가씨스템은 자신의 뒤를 잇는 탈체제적 지식담론을 긍정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양의학의 입장에서는 제도권 한의학의 실증적 효능성도 반신반의할 지경인데, 하물며 국가공인권 바깥에 존재하는 탈제도주의 의학논리를 쉽게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들의 지식기반에 대한 도전을 언짢게 여긴다는 점에서는 보수적 전문직이든 진보적 전문직이든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전교조의 한 간부는 이를 정확하게 짚어낸다. 그는 학교붕괴라는 상황을 이용해 교육상품의 선택권을 부여하자는 시장논리와 탈학교 주장에 강한 반감을 표하면서, 공교육을 공동체로서의 사회를 유지하고 사회적 생산에 필요한 과정을 가르치는 것으로 옹호한다. 과거에 교육이 역기능을 행한 점은 인정하지만, 공교육 자체의 기본적 전제에 대한 부정은 우리 사회의 연대감을 와해시키고 교육의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주장이다.10 요컨대, 제1의 물결에 속한 전문직은 물론 탈체제론자의 문제제기에는 수긍할 부분이 있지만, 제대로 된 공적 씨스템도 채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운동이 사회진보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회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공적 씨스템의 강화와 전문가씨스템의 재정비

 

그렇다면 우리 시민사회는 이같은 전문가씨스템의 양분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한편으로는 전문주의의 폐해를 지적해야 한다. 이들이 전문성을 내세우는 근저에는 ‘과학적’ 진리에 대한 확신과 그것의 안전장치로서 자격주의를 포기할 수 없다는 믿음, 그리고 국가로부터 보장받은 시장지배력을 고수하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전문직 진보운동으로서는 탈제도적 물결 앞에서 결과적으로 전문주의 기득권 옹호의 방패 역할을 수행해오지는 않았나 반성할 만한 소지가 없지 않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적 씨스템의 문제가 있다. 우리 사회의 상하층 모두에서 쌍방향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 현상은 실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초국가적 자본시장에 이미 편입된 계층이 주로 상대하는 법조인은 국제법조 컨설턴트들이다. 이들은 병이 들면 미국이나 일본의 일류병원을 찾고 자녀를 선진국에 조기유학 보내 국내 교육체계와 무관한 2세군을 만든다.11 국가의 공적 씨스템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상향이탈하는 것이다. 반면 극빈층과 약자는 비자발적으로 공적 씨스템으로부터 하향배제되는 형편이다. 소외계층의 법적 방위권은 허술하기 짝이 없고, 취약한 공공보건분야는 과연 이들도 명색이 국민국가에서 시민권을 가진 존재인지 의문을 품게 한다. 교실붕괴, 결식아동, 무단결석, 원조교제 등도 계급적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다. 이들에게 가정학교·대안교육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우리 시민사회는 고통스럽더라도 다음과 같은 과제를 직시해야만 한다. 국민국가의 주권적 독점성을 계속 인정하면서 진보성을 수혈하기만 하면 될 것인가? 아니면 탈근대적·다문화주의적·신우파적 문제제기를 적극 수용하면서 공적 씨스템을 지켜낼 것인가? 그 해답은 시민사회가 제도적·공적 씨스템의 유지를 지원하면서도 전통적인 국가작동기제의 근본적 재검토를 통한 변혁을 견인하는 데 있다. 공적 씨스템을 보전하고 그 근간인 전문직의 독점력을 인정하되, 전문주의의 행사방식과 내용을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편하는 것이다.

공적 씨스템을 단순히 보전하는 정도가 아니라 강화해야 할 필요성은, 서구의 탈근대 조류와 한국의 탈체제적 물결이 등장한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일반화를 시도하면, 서구의 경우 근대성 과잉에 대한 반동으로서 포스트모던의 기치가 정당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법질서의 본질적 질곡성, 교육제도의 본원적 억압성, 의학지식의 상대주의적 불완전성 자체를 문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근대성의 갈구가 역설적으로 탈체제적 물결로 이어진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법조 비리, 유전무죄 현상, 사법의 정치 예속이 법률소비자운동을 초래했고, 학교폭력, 왕따 현상, 체벌, 학력만능주의가 탈학교운동을 불러왔으며, 과다진료, 불친절, 상업적 의료행위가 대안의학을 부추겼다. 이는 계몽적 차원의 비정상성으로 인한 문제이며, 국가작동기제의 재편으로 상당부분 해소될 수 있다.

그렇다면 시민단체들은 국가작동기제를 재편하는 데 대해 어떠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원칙적으로 시민운동은 국가가 할 수 없는 부분인 ‘감시’(monitoring)를 행하고, 국가가 하기 싫어하는 것을 ‘주창’(advocacy)하며, 국가에 모자란 부분을 ‘혁신’(innovation)하고, 나아가 국가가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을 ‘제공’(provision)할 수 있다. 전문가씨스템의 재편이라는 과제는 시민운동의 역할 중 ‘주창’과 ‘혁신’ 부분에 해당한다. 따라서 공적 씨스템을 강화하는 동시에 근대국가의 작동기제를 재편하기 위해 우리 시민운동은 다음과 같은 원칙에서 활동해야 한다.

첫째, 전문주의 담론의 기술적 설득력을 압도할 수 있는 공공선의 담론을 창출해야 한다. 주권국가가 가진 궁극적 정당성의 원천을 공공선 원칙에서 연성화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랬을 때 시민사회는 공동체 정당성의 공동담지자, 공동체 문제 해결의 동반자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적 배제’의 조류를 ‘사회적 통합’(social inclusion)으로 바꾸는 가장 확실한 보증이 될 것이다. 공공선 담론의 구체적 방법은 캠블(D. Campbell)이 말한 ‘증거에 입각한 정책’(evidence-based policy)의 원칙을 전문가씨스템 운영의 초석으로 삼는 것이다. 이 원칙에 따르면 보수적 정책과 진보적 정책이 아니라, 효과있는 정책과 효과없는 정책이 있을 뿐이다. 공인의학이냐 비제도권 의학이냐, 또는 제도권 학교냐 탈학교냐는 더이상 논쟁거리가 아니다. 그것이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될 뿐이다. 물론 복지의 개념은 복지정책 수혜자의 만족과 주관적 판단까지 포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진보적 전문직운동이 주장하는 사회화된 제도보다 더욱 진전된 제안이며, 탈체제적 운동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전문가씨스템의 제도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이 전문주의·독점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감시하는 방법이다.

둘째, 시민사회는 일방적 통치(government)가 아닌 넓은 의미의 ‘공치’(共治, governance)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하나의 행위자로 인정받고 그에 걸맞은 민주적 책임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 목적을 위해서 국가주도를 의미했던 사회정책의 개념을 시민사회가 적극 참여하는 ‘시민정책’(civic policy) 개념으로 재조정할 필요가 생긴다. (예를 들어 군필자 가산점 부여 논쟁은 구사회정책적 관점으로는 풀기 힘든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남녀간의 쟁점이 아닌 주권적 속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민개병제란 주권국가가 대내외적 위협에 대응할 목적으로 국민의 인적 자원을 일정기간 강제적·배타적으로 차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군가산점 논쟁의 핵심은 비자발성이 근본적으로 내장된 제도를 시민사회가 어느 정도 용인하는가의 문제이다. 이렇게 본다면 경화된 주권주도형 사회정책이 아니라 시민정책의 기본관점인 자발성에 근거해서 남녀를 망라한 모병제를 실시하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비영리기구(NPO)가 아니라 다양한 비정부기구(NGO)의 시민운동론의 부상을 대표성이 없는 군중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해석하는 경향12을 경계하고 그것에 대처해야 한다.

셋째, 국제 시민사회의 성장을 확신하는 각종 서구담론이 초국적자본의 공세에 맞서는 현실적 방책으로 코즈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을 제시하는 경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만 한다. 이같은 세계시민적 관점은 필연적으로 세계정부적 관점을 전제로 하면서 모든 인류가 단자적(單者的)으로 세계공동체에 참여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로 개발도상국과 피식민지배 경험을 공유한 민족들이 선뜻 동의하기 힘든 제안이다. 국제 시민사회 내부의 남과 북의 NGO들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와 긴장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이 점에서 국민국가적 관점에 뿌리를 둔 민중들의 개방된 연대를 지향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제주의 담론13을 진지하게 모색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시민사회가 광의의 공치를 지향한다고 할 때, 시민사회와 국가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을 모색할 의무가 시민사회에도 있다. 국가와 시민사회가 추구하는 정책의 목적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으며, 그 목적을 추구하는 방법은 비판적 협조로부터 ‘지속가능한 대립’(sustainable antagonism)14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어느 한 지점에 위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적과 방법의 두 가지 축으로 시민사회와 국가의 관계를 유형화해서 이해해야 한다. 씨애틀에서 한국 정부와 시민단체들은 크게 보아 같은 목적에서 비판적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총선 낙천·낙선운동에서는 명백하게 다른 목적에서 대립된 형태로 양자의 관계가 설정되었다. 이 사례는 당분간 우리 시민운동과 국가의 관계가 지속가능한 대립, 아니 심지어는 지속불가능한 대립선상을 넘나들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던져준다.

장기적으로 보아 이번 낙천·낙선운동은 전문적 시민단체의 계몽성과 탈제도적 n(네트워크)세대의 감수성이 결합된 한국형 문화혁명의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 시민사회는 전문성과 탈제도성의 ‘행복한 결합’을 위해서 국가의 주권속성을 급진적으로 재정비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의 핵심적 기능을 강화할 책무도 동시에 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국제 시민운동과 국내 시민운동의 물줄기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이유가 된다. 결론적으로, 변화하는 국내외 상황에 따라 이제는 국가의 작동기제가 얼마든지 바뀌고 재조립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국가는 세계화의 충격에 맞서 내진형(耐震型) 철골구조를 갖추면서 시민사회의 요구에 맞춰 가변형 내부공간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며, 시민사회 역시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국가를 감당하면서 국가를 극복한다’는, 국가극복의 이중과제에 우리 시민사회가 사려깊게 대응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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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 Krauthammer, “Return of the Luddites,” Time, 1999.12.13, 19면.
  2. J. Smith & A. Gumbel, “Activists of the world, unite!” The Independent, 1999.12.11, 참조
  3. A. Giddens, The Consequences of Modernity, Polity Press 1990, 35면. 김호기는 이같은 기제를 ‘장소귀속탈피 기제’라고 부른다(김호기, 「후기현대성과 제3의 길: 앤서니 기든스의 사회이론」, 『경제와사회』 44, 1999).
  4. S. Strange, States and Markets, Frances Pinter 1994 참조.
  5. J. Raz, The Authority of Law, Clarendon 1979 참조.
  6. 『한겨레21』 1999.12.2, 56면.
  7.  이들의 대표적 저서로는 J. Berlant, Profession and Monopol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5; M. Larson, The Rise of Professionalism,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7; E. Freidson, Profession of Medicine, Dodd, Mead & Company 1970; T. Johnson, Professions and Power, Macmillan 1972; A. Abbott, The System of the Professions, Chicago University Press 1988 등이 있음.
  8. Amnesty International, “Social movements in the context of globalization,” Report of the 1998 Global Trends Seminar, AI 1998, 6〜7면
  9. 이규호, 「포스트모더니즘과 침구술」, 『시민의 신문』 1999.11.8.
  10. 김학한, 「학교붕괴의 뿌리」, 『한겨레』 1999.11.26.
  11. 『조선일보』 2000.1.28.
  12. 예를 들면 “The Non-governmental order: Will NGOs democratise, or merely disrupt, global governance?” The Economist, 1999.12.11, 18〜19면 참조.
  13. M. Ishay, Internationalism and its Betrayal, University of Minnesota 1995.
  14. P. van Tuijl, “NGOs and human rights: Sources of justice and democracy,” Journal of International Affairs 52-2, 1999, 50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