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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1세기 한반도와 새로운 공동체

 

가상‘공동체’인가 ‘가상’공동체인가

 

 

김도현 金度賢

우석대 기계·자동차공학과 교수. 소설가.

 

 

들어가며

 

공동체라는 말에는 어쩐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함께 나타난 경쟁단위의 미분화 추세에 따라 모든 개인들이 원시적인 무한투쟁의 장으로 내몰리는 요즘의 분위기 탓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21세기의 공동체를 건설할 무대가 싸이버스페이스라는 점을 굳건히 믿고 있으며, 이에 힘입어 하루에도 여러 개의 새로운 ‘가상공동체’(virtual community)들이 자신들의 싸이트 혹은 게시판을 개설한다. 이 중에는 온전히 싸이버스페이스에서만 존재하는 것들도 있고, 각종 통신동호회처럼 싸이버스페이스에서 만들어진 후, 오프라인 모임과 병행되는 형태나, 시민단체·동창회처럼 실제로는 현실공간(real space)에서 존재하는 모임이 싸이버스페이스에 보조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형태도 있다. 이같은 가상공동체는 그 구성원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 거주하든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 심지어 기술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접속하는 물리적 위치를 영원히 모르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같은 속성 때문에 기 쏘르망(Guy Sorman)이나 스칼라피노(R. Scalapino)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들이 가상공동체야말로 국가라는 체제를 위협하는 21세기적 공동체라고 예측한다. 더 나아가 오오마에 켄이찌(大前硏一)는 정보통신혁명이 국민국가라는 20세기적 공동체의 종말을 이미 선고했다고까지 주장한 바 있다. 물론 그의 ‘선고’는 싸이버 금융거래에 의한 초국적 경제체제의 형성에 더 촛점이 맞춰진 것이지만, 인터넷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통신·왕래수단보다도 쉬운 방식─오직 단 한번의 클릭─으로 공간의 한계를 무너뜨리며, 이것이 물리적 지역공동체를 기반으로 형성된 국민국가의 장악력을 약화시킨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필자는 이처럼 급격히 형성되고 있는 이른바 가상공동체의 특성을 살펴보고, 그것이 대안적 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을지를 나름의 관점에서 검토해보고자 한다. 다만 이 글은 정보사회학 논문이라기보다는 그저 한 인터넷 사용자로서의 견해임을 미리 밝혀둔다.

 

 

가상공동체는 진짜 ‘공동체’인가 ?

 

이른바 CMC로 약칭되는 컴퓨터 매개 커뮤니케이션(Computer Meditated Communication)과 관련된 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이 라인골드(H. Rheingold)이다. 그의 1993년 저작 『가상공동체』(The Virtual Community)는 수많은 가상공동체 논쟁에 항상 인용되곤 한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www.rheingold.com)에서 스스로를 전문적인 가상공동체 건설자라고 소개할 만큼, 가상공동체의 열렬한 옹호자이다. 가상공동체에 대한 그의 개안(開眼)은 컴퓨터통신 초창기인 1985년에 건설된 웰(WELL, www.well.com)을 통해 이루어진다. 초기의 웰은 웹의 활성화 이전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던 것과 같은, 다이얼업(dial up)1 기반의 사설게시판 형태였는데, 그 모양새는 아마 우리나라의 키즈(Kids, kids.kornet.nm.kr) 게시판과 유사했던 것 같다. 라인골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상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스크린을 통해 칭찬하고, 농담하고, 때론 논쟁에 끼여들며, 물건을 사고 팔고, 지식과 감정을 공유하고, 남을 흉보기도 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친구를 사귀고 때론 잃기도 한다. 게임을 하고 시시덕거릴 뿐 아니라 때로는 함께 예술을 창조하기도 한다. 가상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실제 생활에서 누리는 거의 모든 것을, 자신의 육신을 뒤에 젖혀놓은 채, 누리고 있다. 물론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입맞출 수는 없고, 당신의 면상에 한방 날릴 수 있는 사람도 없겠지만, 가상공동체 안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2

 

이같은 경험은 통신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공유했을 법한 것이다. 싸이버스페이스에서는 학교나 직장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종류의 일들이 빠르고 빈번하게 일어난다. 하룻밤의 채팅으로 연애감정을 느끼거나 별 생각 없이 올려놓은 글이 수십개의 뤼(Re>)가 붙는 뜨거운 논쟁으로 번지거나, 10분 전에 알게 된 사람과 번개모임이 이루어지는 따위의 일은 별로 드문 게 아니다. 이처럼 싸이버스페이스에서는 모든 일들이 매우 격렬하게 이루어지곤 한다. 다른 통신수단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무제한의 접속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공간과 시간을 순식간에 뛰어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역동성에 감동한 사람들은 싸이버스페이스에 존재하는 가상공동체를 공동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니, 현재 존재하는 그 어떤 공동체보다도 더 그럴듯한 공동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클리포드 스톨(Clifford Stoll)의 이런 생각은 또 무엇인가?

 

통신망 속의 사회는 실재하지 않는 사회이며, 흔적 없이 녹아 사라질 수 있는 무(無)의 조직이다. 인터넷은 밝고 유혹적으로 빛나는, 힘있는 지식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은 우리로 하여금 실제 생활에서 보내는 시간을 포기하라고 유혹한다. 그것은 실제 생활에 대한 보잘것없는 대체물로서, 욕구불만이 넘치고 교육과 진보라는 신성한 이름 아래 인간관계의 중요한 측면을 무자비하게 평가절하하는 가상의 현실이다.3

 

우연찮게도, 스톨 역시 웰의 사용자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라인골드와 스톨이 동일한 가상공동체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인터넷과 가상공동체에 대해서 스톨은 상당히 비판적이며 비관적이기도 한데, 그의 이런 시각은 최근 그가 펼치는 ‘컴퓨터를 교실에서 몰아내는’ 운동에서도 드러난다. 많은 인터넷 비관주의자들이 인문학을 배경으로 하고 과학기술에 대해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생래적인 부담감 내지는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과는 달리, 스톨은 전형적인 과학기술자의 길을 밟아온 사람이다. 그는 『뻐꾸기 알』(Cuckoo’s egg)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뛰어난 컴퓨터 전문가이고, 천문학 박사이면서 동시에 로봇공학에 조예가 깊은 전기공학자이기도 하다.4 1969년 미국 국방성의 군사연구용 네트워크로 개발된 아르파넷(ARPANET) 시절부터 싸이버스페이스의 진화를 바로 곁에서 지켜본 그가 싸이버스페이스와 가상공동체에 대해 이처럼 비판적인 이유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어떻게 낙지가 빨판을 이용해 달라붙는지를 알 수 있는가?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는가? 간단하다. 낙지를 만져보고, 바닷물을 맛보면 된다. 이것이 바로 전자적인 통신망을 이용한 교육으로는 배울 수 없는 것, 경험이다.5

 

이런 견해에 따르면, 별자리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최선의 방법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책을 뒤지고, 사진을 바라보고, 인터넷에서 움직이는 천구도(天球圖) 파일을 구하는 따위의 일들은 모두 그 직접적인 방법의 보조수단 혹은 우회로일 뿐이다. 물론 실제 체험보다 더 현실적인 ‘가상’현실이 기술적인 진보에 의해 창조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많다. 『디지털이다』(being digital)로 잘 알려진 네그로폰테(N. Negroponte)가 이끄는 MIT의 미디어랩(Medialab, www.media.mit.edu)을 중심으로 한 가상현실 연구자들은 시청각뿐 아니라 후각과 촉각까지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모사할 수 있게 되면,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가 무의미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비슷한 종류의 견해 차이가 가상공동체에 관한 논의에서도 존재한다. 스톨처럼 가상공동체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싸이버스페이스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대면(face-to-face) 커뮤니케이션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조셉 월터는 비언어적인 단서(non-verbal cue)가 결여된 컴퓨터통신상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는 구성원들의 사회적 존재감(social presence)이 형성되기 어렵다고 주장한 바 있다.6 그가 문자만으로 구성되는 통신방식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이 고안한 여러가지 방식(예컨대 ·_· 나 :P같은 문자기호들, 소리파일의 첨부)들에 대해 언급하지만, 생각해보라. 웃는 기호가 주는 느낌과 내 어깨를 치면서 시원하게 웃는 친구의 얼굴이 주는 느낌의 강도가 비슷할 수 있는 것인지. 한 연구자는 컴퓨터통신에 의해 매개되는 관계가 대면적 관계에 비해 친밀감이나 신뢰감 형성에 시간이 더 걸릴 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주장했지만,7 필자의 경험으로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만일 어떤 통신동호회가 절대로 오프라인 모임을 갖지 않는다면 그 동호회가 활발히 활동할 수 있을까? 오프라인 모임에 한번도 참석하지 않은 회원과 오프라인 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한 회원들이 같은 정도의 친밀감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대면접촉보다 빈약한 통신의 윤택성(richness)8 문제가 통신의 기술적 발전에 따라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역시 존재한다. 사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통신망의 발전이 원거리 커뮤니케이션의 대역폭(band width)을 혁신적으로 넓혔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기 어렵다. 통신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정보의 증대속도는 무어의 법칙9을 능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컴퓨터통신은 이제 상대방의 표정을 보면서 대화하는 화상채팅, 여러명의 사람들이 같은 문서나 프로그램을 놓고 동시에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작업할 수 있는 토론씨스템(마이크로쏘프트의 넷미팅 같은)처럼 훨씬 더 풍부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기술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통신의 윤택성이 대면접촉을 대체할 만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컴퓨터통신상의 정보윤택성을 증가시키고자 하는 현재의 노력들이 본질적으로 인간과 인간이 대면해서 주고받는 정보를 최종목표로 상정하고 끊임없이 이를 ‘흉내’내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서 주고받는 감각과 정보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친밀감과 신뢰감이 공동체를 규정하는 핵심요소라고 한다면, 가상공동체는 진짜 공동체와는 다른 일종의 의사공동체(pseudocommunity)에 불과하거나, 현실에 존재하는 공동체들의 확장된 활동공간 혹은 강화수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가상공동체는 결코 타자의 죽음에 대면해서 타자와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함께 있다고 하는 공동성을 느끼는 그런 성스러운 연대감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10 가상공동체가 자신의 이해와 관심을 적확하게 만족시켜줄 때 그 구성원들은 매우 활발히 참여하지만,11 가상공동체가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쉽게 ‘잠수’하거나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공동체의 정의는 시간에 따라 변화해왔다. 유럽공동체(EC)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산업사회에서 공동체는 그 공동체에 대한 귀속감·친밀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게마인샤프트(Gemeinshaft)에서 계약과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성립하는 게젤샤프트(Gesellshaft)의 방향으로 그 의미가 변해온 것이다. 사회의 복잡화가 진전됨으로써 공동체들은 좀더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분화되며, 공동체를 묶고 있는 공유가치나 역사적 배경들은 더욱더 희미해진다.12 따라서 공동체라는 단어가 대면접촉으로 형성되는 끈끈한 친밀감에 의해 구성되는 어떤 것을 뜻하는 대신, 관심과 이해에 따라 다양한 층위로 묶이고, 이해의 변동에 따라 빠른 속도로 이합집산할 수 있는 느슨하고 희미한 연대감을 가진 집단을 뜻하는 것으로 더 변화한다면(아마도 그것이 이른바 정보화시대에 걸맞은 공동체의 정의일지도 모른다), 가상공동체는 이처럼 새롭게 정의되는 공동체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안적 가상공동체의 장애물   

 

필자는 앞에서 가상공동체가 현실의 공동체와 같은 연대감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가상공동체가 무시해도 좋을 만한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통신수단으로서 인터넷이 갖는 가장 중요하고도 혁명적인 특징, 즉 기존의 통신수단에서 이루어지던 정보의 윤택성과 도달범위(reach)의 역관계가 무너진다는 점 때문이다.13 예컨대 텔레비전 광고보다는 신문광고가, 그리고 신문광고보다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쪽이 정보의 윤택성이 더 크다. 즉 정보를 심도깊게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보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는 정반대의 순서이다. 이에 비해 인터넷상에서는 정보를 복사하고 유포하는 데 드는 비용이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이러한 윤택성과 도달범위의 역관계가 무너져버린다. 원론적으로는 어떤 집단도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전세계에 유포할 수 있고, 따라서 공동체 범위의 무한확장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가상공동체를 새로운 희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한다. 이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봄직한데, 그 하나는 인터넷이 뜨거운 가슴을 지닌 사람들의 광장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고, 다른 쪽은 가상공동체가 거대한 시장을 열어젖히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지상의 모든 사람이 인종·경제력·군사력·출생신분에 의한 특권이나 편견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우리가 창조하는 사회는 누구나 자신의 신념을, 그것이 아무리 특이한 것이라 할지라도, 침묵이나 동조를 강요받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14

 

가상공동체가 기업활동에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면이 더 많다. 아마존이나 코스메틱처럼 단골고객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가상공동체를 통해 소비자들의 반응을 대단히 저렴한 비용으로 신속하게 파악할 수도 있다. 이윤을 조금 나누는 대신 지속적인 소비를 보장받을 수도 있다. 오히려 가상공동체는 기업의 마케팅 채널로 대단히 매력적인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앞선 기업들은 자사 상품에 충성스런 가상공동체를 조성하고자 노력하고 있다.15

 

이들 두 부류의 사람들은 싸이버스페이스에 대해 일종의 기술결정론적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이들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한쪽은 싸이버스페이스의 미래를 결정할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데 반해 다른 쪽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온세계의 사람들을 자유롭게 연결시킬 수 있는 장점을 지닌 인터넷이 자유로운 지구촌(global village)을 쉽게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는 싸이버 독립운동가들의 생각은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안타깝게도 기술결정론적 낭만주의에 가깝다. 일찍이 아로노비츠(S. Aronowitz)가 『권력으로서의 과학』(Science as Power, 1988)에서 설파한 것처럼, 현대의 과학기술은 그 자체가 새로운 이데올로기나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기능을 거의 상실한 채 생산과정 속에 녹아든 하나의 요소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기술은 대규모의 예산과 인력을 필요로 하는데,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자본이나 국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한계를 갖는다. 비록 원자력공학이나 우주공학 같은 거대기술 분야보다 그 정도는 덜하겠지만, 정보통신분야 역시 이같은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자본이라는 괴물이 전세계적인 ‘시장공동체’의 열망에 가득 차 있는 한, 인터넷의 미래가 어떠할지 예측하는 것은, 우울하게도 별로 어렵지 않은 셈이다.

싸이버스페이스가 일종의 아름다운 대안공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유즈넷16으로 대표되던, 인터넷의 초기 모습에 감동했던 사람들이 꽤 많다. 관심분야가 비슷한 이들이 모인 이 작은 그룹들은 휘황찬란한 자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새로운 장소였다. 그러나 국내 인터넷 사용자가 1천만명을 헤아린다는 지금, 싸이버스페이스가 그런 공간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이제 텔레비전을 닮아가고 있다. 번듯하게 자리잡은 쇼핑몰, 증권사의 실시간 거래 싸이트, 그리고 포르노싸이트의 사용자들은 바야흐로 일 대 다의 소통형태로 바뀌어가는 인터넷에 길들어가는 것이다. 최근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가상공동체들은 고객의 마케팅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기업들이 친절히 마련해준 ‘가짜’공동체들(가입시 주는 경품에 의해 구성되곤 하는)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가상공동체가 시장주의자들에 의해 점령당하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표준을 누가 어떤 방향으로 결정하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보통신산업에서 정보형식의 표준은 기술적 표준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내용을 결정하게 된다. 이를테면 XML17이나 플래시18 같은 기술적 표준들은 좀더 응집력이 강한 가상공동체를 만드는 것보다는 전자상거래나 싸이버 증권거래를 하는 데 훨씬 더 적합하다. 또 클리퍼(Clipper)19나 PICS20 같은 기술표준들은 싸이버스페이스를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영토로 편입되도록 하는 중요한 기제로 활용될 것이 거의 틀림없다. 이처럼 정보형식 및 정보암호화 표준들이 시장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향으로 결정되면, 인터넷상에 소통되는 정보들은 비표준화된 정보들을 축출하면서 현실과 유사한 질서와 위계를 형성할 것이다.

자주 제기되어온 문제인 정보접근성의 계층화 내지는 정보소외현상 역시 정보표준과 일정한 연관성을 지닌다. 인터넷은 무료라는 환상에 감동하던 사람들이, 기실 인터넷 접속성(connectivity)이 현실세계에서 소유한 부와 상당한 비례관계를 갖는다는 점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광섬유 초고속인터넷망이 구매력 높은 인구가 밀집된 대형아파트 단지에 주로 설치되는 사례에서 드러나듯, 언제나 고속과 대용량을 요구하도록(정치적 가상공동체들의 이데올로기가 3차원 멀티미디어 채팅에 의해 획기적으로 강화될까?) 변화하는 정보표준들은 인터넷에 부에 따른 신분질서를 만드는 셈이다. 이렇게 형성된 이른바 디지털 불평등(digital divide)은 계속 확대재생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미국이 건설하는 제2의 인터넷 NII(National Information Infrastructure)가 유료화될 것이라는 예측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정보‘고속도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공동체를 변방의 보호구역으로 가두어버린 대륙횡단철도처럼 자유로운 가상공동체들을 싸이버스페이스의 구석으로 밀어넣는 수단이 될지도 모른다.

또다른 중요한 문제는 검열이다. 지오씨티 싸이트 접속차단 사례처럼 특정 홈페이지에 접속하지 못하도록 관련된 전체 도메인의 접속을 모두 막아버린다거나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도박 국회의원들의 명단을 올렸다는 이유로 홈페이지 폐쇄명령을 내리는 따위의 사례들은 일면 국민의 ‘평안’을 위해 정보를 검열하고 재단해주겠다고 우스꽝스럽게 구는 국가권력의 계몽의식 과잉현상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싸이버스페이스를 향한 국가권력의 집요한 의지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검열 앞에서 ‘모든 검열을 거부한다’는 명쾌한 입장을 취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전혀 검열이 없는 싸이버스페이스의 의사소통이 결국 정보 쓰레기더미를 만들어낸다는 경험법칙 때문이다. 공개된 게시판에서 벌어지는 논쟁들이 채 열 번을 넘기지 못하고 육두문자와 빈정거림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가상공동체가 계속되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자체검열이 필요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통신동호회에서 흔히 목격하는 것처럼) 그 자체검열의 행위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언제나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자유와 ‘공공이익’ 사이에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싸이버스페이스 이곳저곳에서 종종 맞닥뜨리는 일이다. 국가권력은 이러한 줄타기의 틈바구니에서 법과 도덕, 공공이익의 수호자를 자임하면서 다양한 법적·기술적 장치들을 통해 검열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벌이고 있다. 

정보표준의 설정이나 검열 문제에 있어 주목할 만한 것은 싸이버스페이스 안에서의 이런 권력행사가 개별국가의 차원에서 완수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몇몇 국내 포르노싸이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외국 도메인과 웹호스트를 이용하는 경우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도메인의 접속 자체를 막는 따위로서 원시적이고 비효율적인 방법이 고작이다. 물론 각국 정부들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이와같은 시도를 계속하겠지만, 기술적 한계나 상당한 부작용 등을 생각할 때 결국 검열의 주체는 개별국가를 넘는, 그리고 역시 자본의 이익을 대변할 것이 거의 틀림없는 어떤 국제적 권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 포르노싸이트 접속차단 쏘프트웨어들이 전세계적으로 유통된다거나, PICS표준을 만드는 것이 마이크로쏘프트를 중심으로 한 다국적 기업연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같은 가능성은 이미 실현되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가상공동체들이 자유로운, 더 나아가 대안적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겨루어야 할 상대는 기존의 국가권력이라기보다는 싸이버스페이스의 제패를 노리는 초국적 시장자본주의인 셈이다.

 

 

나오며

 

필자는 이 글에서 가상공동체가 기존 현실공동체와는 다른, 느슨한 연대감을 지닌 공동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같은 느슨한 공동체는, 그러나 때때로 대단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곤 한다. 그것은 바로 최근 진행되는 낙천·낙선운동의 예에서처럼, 공고한 유대감으로 결합된 현실공동체가 하나의 핵으로 작용할 때이다. 오직 싸이버스페이스에만 존재하는 공동체들의 경우에는 그 구성원들이 갖는 익명성과 즉흥성 때문에 실제적 힘을 발휘하기 힘들지만,21 실체가 있는 운동이 싸이버스페이스에서 지지자들을 확보하면 그 운동이 현실세계에서 갖는 운동량은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의 이같은 보완이 또다른 차원에서도 재삼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믿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의 한계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 앞에 24시간이라고 하는 시간적 한계를 갖게 된다. 모든 여유시간을 오직 싸이버스페이스에 투여한다면, ‘이웃의 이름은 모르고 미국의 친구만 갖게 되는’ 식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느슨하지만 거의 무한한 확장범위를 갖는 가상공동체와 자신이 발을 딛고 선 현실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시분할(時分割)이 최적화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가상공동체는 삶의 진정한 확장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필자는 가상공동체들이 현실세계의 권력구조와 다르거나, 더 나아가 현실세계를 변화시킬 교두보로서의 싸이버스페이스를 구축하기 위해 초국적 시장자본주의에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서는 가상공동체들이 국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터넷을 통한 국제적인 연대는 블루 리본(Blue Ribbon)22 운동에서 보는 것과 같이 실제로 승리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 않는 우리나라 같은 국가들의 경우, 작은 규모의 가상(혹은 현실)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국제적 시야와 연대력을 가지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트레이드(E*trade)23가 짧은 시간 내에 한국판을 만드는 것처럼 시장자본의 기민한 세계화 전략 앞에서 어떻게 국제적 연대력을 확보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나라 가상공동체들 앞에 놓인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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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반 공중전화망을 이용한 통신회선을 일컬으며, 데이터통신에서 상대방을 호출할 때 전화기의 다이얼을 사용하여 전화를 거는 방식을 뜻한다.
  2. www.rheingold.com/vc/book
  3. 클리포드 스톨, 『허풍떠는 인터넷』, 세종서적 1996, 9면.
  4. 그러나 그에 대한 정보를 원한다고 그의 홈페이지 www.ocf.berkeley.edu/~stoll에 들어가보는 건 실수다. 그의 홈페이지는 미니멀리즘의 극치이다.
  5. 같은 책, 214면.
  6. Joseph B. Walter, Interpersonal Effects in Computer-Mediated Interaction: A Relational Perspective, 19(1), Communication Research 1992, 52〜90면.
  7. 김선업, 「컴퓨터─매개 인간관계의 사회심리」, 『정보화동향분석』 제4권 3호, 1997.
  8. 이 글에서는 richness를 윤택성이라고 번역하기로 한다. 이때 richness란 주고받는 정보(감정을 포함한)의 양과 깊이를 의미한다.
  9. 18개월마다 반도체 집적회로의 집적도 및 속도가 2배씩 증가한다는 법칙. 인텔의 창업자 고든 무어(Gordon Moore)가 제창했다.
  10. 니시가끼 토오루, 「인터넷의 미래와 공동체」, 『창작과비평』 1996년 가을호, 73〜74면.
  11. 통신상의 동호회들은 끊임없이 가지치기를 해나간다. 영화동호회에서 애니메이션동호회로, 다시 ‘애니메’ 동호회가 생겼다가 ‘오! 나의 여신님’ 동호회로. 자신의 입맛에 맞을 때까지 동호회 회원들은 공동체를 분화하고 재조립한다.
  12. T. Luke, “Community and ecology,” S. Walker (ed.), Changing Community: The Graywolf Annual Ten, St. Paul: Graywolf Press 1993, 207〜21면; J. Fernback & B. Thomson, “Computer-Mediated Communication and the American Collectivity: The Dimensions of Community Within Cyberspace,” the annual convention of the International Communication Association(Albuquerque, May 1995)에서 재인용.
  13. 이러한 특성을 경영전략의 측면에서 논의한 책으로는 P. Evans & T. Wurster, Blown to Bits, Harvard Business School Press 1999.
  14. J.P. Barlow, “Cyberspace Independence Declaration”(hobbes.ncsa.uiuc.edu/sean/ declaration.html)
  15. 『한경비즈니스』 184호, 1999.6.
  16. 유즈넷은 1970년대 말에 개설된 UUCP(Unix go Unix Copy Protocol)를 기반으로 한 BBS(전자게시판)다. 현재는 NSFnet(National Science Foundation Network)에 흡수되어 써비스되고 있는데, 관심분야에 따라 2만여개의 게시판이 운영중이다.
  17. eXtensible Makeup Language의 약자로, HTML의 확장언어이다. XML은 홈페이지 구축기능과 검색기능 등이 강화되었을 뿐 아니라, 사용자로 하여금 클라이언트 씨스템의 구조화된 데이터베이스를 조작할 수 있도록 한다.
  18. Macromedia사가 개발한 웹전용 애니메이션 제작툴. 웹상에 빠른 속도의 애니메이션이 가능하게 한다.
  19. 미국 클린턴 정부가 1993년 4월 16일 제정한 인터넷 암호법안과 그 기술표준을 일컫는 말로서, 컴퓨터 네트워크와 전화 네트워크상의 기밀정보를 자동적으로 암호화하면서도 미국 정부기관이 필요로 할 때는 언제나 정보를 해독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명분은 싸이버테러나 국가기밀 유출 등에 대응한다는 것이었으나, 미국 정보기관이 전세계의 모든 인터넷 정보를 임의로 열람할 수 있게 된다는 점 때문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20. Platform for Internet Content Selection. 미국 오락쏘프트웨어 자문위원회(RSAC)가 개발한 인터넷내용 선별 표준기술체계. IBM과 마이크로쏘프트사 등이 주축이 된 인터넷내용 평가등급연합(ICRA)은 이를 이용하여 인터넷상의 정보를 등급화하고, 각 등급에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사용자들은 그 정보를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21. 어떤 국가기관이나 기업이 많은 항의성 전자메일에 굴복하여 입장을 바꾸었다는 이야기들이 ‘전자민주주의’의 장밋빛 미래를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되곤 하지만, 국가나 기업은 곧 전자메일이 그저 투덜거림 이상의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투표나 불매운동의 현실적 힘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22. 1995년 6월 미국의회에서 공공통신망에 저속한 자료를 올릴 경우 형사처벌을 한다는 정보통신 규제조항이 수정·통과되자, 이에 맞서 자신의 홈페이지에 파란색의 리본을 삽입하는 운동이 진행되었고, 결국 법개정이 이루어졌다. 이후 다른 나라의 통신사용자들도 정부의 정보검열 및 통제정책에 반대할 때 이 상징을 사용하게 되었다.
  23. 미국의 대표적인 싸이버 증권거래 싸이트. 수수료 인하전략을 통해 많은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싸이버 증권거래로 인해 하루에 수십 차례의 주문을 내는 초단기 증권매매가 폭증하면서 증권시장이 불안정해진다는 지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