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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2000년을 여는 젊은 시인 20인
권경인 權敬儿
1957년 경남 마산 출생. 1991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 『변명은 슬프다』가 있음.
화개일기 1
카펫 밑에 방습포를 깔고 양말을 두 켤레씩 신었는데도
이사온 지 보름 만에 동상 걸리다 삼월이었다
별 경험을 다 한다 침대 옆에 장날 사온 실내화를 놓아두고
동상 연고를 벌겋게 부어오른 발가락에 문질러 바른다
살이 얼었는데 문지르면 이상하게 뼈가 아프다
양말을 신는다 신고 자기로 한다
매화꽃 진작에 피어오르고 낮엔 햇볕 제법 따뜻한데
내 방은 여전히 겨울이다 시베리아 벌판
캐온 쑥과 쑥부쟁이를 데치고 깨끗이 씻어서
냉동실에 차곡차곡 얼려놓는다 개수가 늘 때마다
이것들을 나누어 먹고 싶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나누어 먹게 될 사람들을 생각한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요즘의 내 중요한 일과인 것이다
사막은 가까이 있었고 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건너가곤 했지만
어느새 다시 이곳에 와 있었던 것을─
낙타를 타고 갔던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분명 그는 있었다 세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실존의 쓴맛을 실컷 보았었나
가재는 게 편이지, 그걸 자꾸 잊는다
꽃을 그리면 꽃이 피어나고
물고기를 그리면 물고기가 펄떡거리는 미래는
사실 없는 거다 그리고
아무리 굶주려도 썩은 고기는 먹지 않는 동물이 있다
화개일기 6
노산악인의 어깨에 산그늘이 희미하게 내려앉는다
이미 자랑이랄 것도 없이 되어버린 과거의 행적들이
온통 주름으로 남은 듯한 얼굴을 돌려 천천히 등을 보일 때
아, 선한 사람의 세월이 저런 것이구나 마음 복잡하였다
대만의 옥산도 일본의 북알프스도 여기는 없다
다만 현실이 있을 뿐
밟고 선 땅이 자꾸 기울어지는 까닭을 한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뒤뚱거리는 그의 발걸음이 현실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듯하다
확신과 의지로 갈 수 있는 길이 어디까지일까 아니
어디서부터일까
하지만 맞지 않는 안경을 끼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살아진다는 것, 목숨은 질긴 것이므로
그가 돌아서며 엷게 미소짓는다 나는 다시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이태리에서 벗에게 보낸 누군가의 엽서를 기억한다
정성스레 쓴 간결한 문장이 헌책방에서 산
라즈니쉬의 명상록 갈피에 끼워져 있었다
먼 여행길에서 고국의 벗에게 보낸 자신의 글이
전혀 모르는 여자의 수중에 들게 될 줄 어찌 알았으랴
지금은 그들에게 잊혀진 우정을 괜히 내가 못 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난 여자들의 우정을 믿지 않지만 남자들에 대해선 간혹 생각한다
(나는 그가 사진에 담아준 후지산과 북알프스를 잘 간직하고 있다)
그는 더 돌아보지 않는다 그의 외투자락이 바람에 잠시 펄럭 하더니
그만이다 나도 그만 돌아선다
가게의 통유리 너머 낯선 얼굴이 하나 떠 있었다
나는 중얼거린다
외로움은 외롭다고 말할 때 이미 넋두리가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