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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李箱과 식민지근대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보들레르와 근대」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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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英語)가 판치는 세월이라 그런지 요즘은 송구영신(送舊迎新)이란 말도 듣기가 힘들다. 이는 변화에의 순응과 발빠른 변신에 사활을 거는 이 시대의 풍토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때일수록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가 아쉽지만, ‘낡은 것을 보내고 새 것을 맞는다’는 당위의 진정한 실행 또한 절실하다. 문학에서도 그렇다. 새로운 천년을 맞은 평단에서는 리얼리즘이니 모더니즘이니 하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여기는 풍조가 대세를 이룬 듯하다. 특히 재현(주의)에 본바탕을 둔 리얼리즘(론)은 이제 역사적 시효를 다하고 낡아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창작이든 비평이든 선배들이 피땀으로 쌓아놓은 유산을 그토록 쉽게 망각하고 식상해하는 데는 문학 자체에 파괴적인 시류가 극성을 부린 탓도 있지만, 그렇다고 대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고루한 리얼리즘론자나 ‘영신(迎新)’에만 급급한 지식인들의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문단의 이런 정황을 염두에 둘 때 이상(李箱, 본명 金海卿, 1910〜37)을 간과할 수는 없겠다. 더욱이 지난 100년 동안의 문학유산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한 이 싯점에서 그는 30년대 모더니즘에─거꾸로 그 모더니즘이 이상에─걸리는 대표적인 표본인지라 어떤 경우든 리얼리즘·모더니즘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는 작가인 데다가, “호기영신(好奇迎新)을 따라 돌아다니는 유행아”라는 김안서(金岸曙)의 비판이 말해주듯이1 시대의 최첨단을 달린 상징적 사례라서 우리 근대문학에서의 송구영신을 생각해볼 좋은 기회도 되겠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몇년 전에 나온 흥미로운 문제제기, 즉 30년대 모더니즘을 보는 시각의 재조정 및 프로문학 주류성 해체와 더불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會通)2이 공표된 저간의 상황에서 바로 그같은 눈으로 서구 모더니즘을 염두에 두고 이상 문학 전체를 검토하려는 노력은 매우 드물었다고 하겠다.
물론 현재 평단에서 30년대식 ‘프로문학’은 잔해만 남았으며 리얼리즘·모더니즘의 회통 문제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리얼리즘을 쇄신하겠다거나 리얼리즘·모더니즘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양자를 종합하겠다는 젊은 평자들의 작품을 밝히는 눈은 그리 형형하지 못했으며, 동구권 붕괴에 잇따른 ‘포스트’ 사조의 창궐에 별다른 창의적인 대응도 없었다. 또한 시대의 정신적 위기에 대응한 비판정신으로서 모더니즘을 옹호한 논자는 그 선언적 주장만큼 작품의 실질적 성취와 한계를 정밀하게 규명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요컨대 “근대를 진정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내포된 역설적 가능성을 온몸으로 사는 자세, 극단까지 가는 철저함과 진지함이 요구된다”3는 열정적인 신념이 공허한 일반론을 벗어나려면 모더니즘의 역설적 가능성과 극단의 성격을 작품을 통해 구체적으로 식별·평가해내는 작업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 과업을 제대로 인식하고 떠맡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근대문학의 가난함을 직시해야 한다는 솔직한 자기반성이 있었지만, 가난할수록 풍요에 대한 갈구가 깊어짐 자체를 부정할 일도 아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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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 “烏瞰圖라고 오자(誤字)를 내는 것부터가 알 수 없는 수작이 아니냐.”4 이상이 줄곧 비평가와 일반독자 모두의 관심대상이 된 데는 『오감도』(1934)의 충격적인 파문이 시사하는 바의 ‘망측한’ 난해성이 결정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로 말미암아 이상의 전문연구자들은 각종 첨단 수입이론을 한번씩 시험가동해보는 ‘호사’도 누렸지만, 그에 비례하여 일반독자와 이상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최근 국문학계의 이상 비평에서 ‘텍스트’ ‘욕망’ ‘해체’ ‘기호’ 등이 난무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작품에 천형(天刑)처럼 새겨진 난해성에서 비롯된 현상일 것이다. “한국 모더니티의 흑사병”5이라는 그 난해함의 진상은 오히려 그런 최신 언설을 통해 더 용이하게 은폐·왜곡된 느낌마저 있다. 요컨대 일제를 통해 들어온 서구문학의 단순한 모방·답습이 아니라 근대문학 자산, 특히 20년대 문학의 성과가 어느정도 축적된 토양에서 자라난 30년대 특유의 현상으로 이상의 난해성을 파악하려는 발상은 빈약하고, 그같은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엄밀한 작품평가를 특히 4·19 이후 민족문학의 성과를 감안하여 시도한 경우는 전무한 실정이다.
이상뿐만 아니라 해방 전후의 여타 모더니즘 작품에 각인된 역사적 문맥을 회복하고 엄정하게 평가하려는 문제의식은 계속 이어져야 마땅하다. 그 가운데서만 이상을 얽어맨 이론의 족쇄가 풀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30년대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 장르의 성취가 그런 족쇄를 용인하지 않을 수준의 주체적 의식에서 달성된 것임을 상기할 때 더욱 그렇다. 앞으로도 우리의 소중한 문학자산으로 남을 『삼대』 『임꺽정』 『탁류』 등이 모두 30년대의 산물이거니와, 이상 자신이 삽화를 그려넣기도 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에서 박태원은 조이스(J. Joyce)의 『율리씨즈』에 대해 “그것이 새롭다는, 오직 그 점만을 가지고 과중평가할 까닭이” 없음을 당당히 밝히기도 한 것이다. 반면에 이상의 모더니즘을 모든 근대적인 것의 부정이나 초극으로 규정하는 논자도 있지만, 그것은 근대의 일면적인 부정이나 초극보다 훨씬 복잡한 ‘현상’이다. 이상은 『오감도』에 대한 당시 몰이해를 두고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년씩 떨어져도 마음놓고 지낼 작정이냐”(3권 353면)라고 개탄했으면서도 정작 그렇게 앞서간 토오꾜오의 “표피적인 서구적 악취”(3권 234면)를 혐오해 마지않은 식민지 지식인의 선구적 자각이 있었던 것이다.
「오감도」가 그러한 자각과도 무관하지 않다면, 우리는 얼치기 개화꾼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이상의 이중성과 선진성을 식민지근대 고유의 역사적 현상으로서 좀더 참구(參究)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근래 사회과학계에서 개발과 수탈 양극단으로 ‘식민지근대화’ 논쟁이 활발했지만, 그런 사회과학적 논쟁의 허실을 오히려 이상의 문학을 통해 더 깊은 차원에서 밝혀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즉 전근대의 수많은 구습이 일제의 폭압적 근대화기획에 뒤섞여들어가는 복합적인 이행과정에 대한 진정 근대다운 고뇌로서 이상을 읽어보자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전근대의 종요로운 유산과 후진적 폐해 모두를 온전히 계승·혁파할 수 없게 된 현실, 겉모습은 어지럽게 발전하는 듯하지만 근대정신의 내실은 공허한 식민지사회가 이상 문학의 핵심 문맥이 된다. 또 바로 그런 문맥에 1920〜30년대를 풍미한 진보적 문학이념과 이상의 도저한 실험의식이 놓여 있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등장한 여러 유파의 문학 중 ‘진보성’을 따진다면 역시 카프(KAPF)를 첫손꼽아야 할 것이다. 이상 연구 가운데 이상과 카프의 ‘동시대성’6만큼 오래 망각된 주제는 흔치 않으며, 카프의 와해와 이상의 홀연한 등장이 하나의 시대적 국면에서 파악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골수 모더니스트로서의 이상을 철저하게 운동과 이념으로 일관한 카프와 연계하는 발상 자체가 지난 몇십년간 리얼리즘·모더니즘의 골이 깊어진 (국문)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었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이미 30년대의 창작지형에서조차 카프가 주도적 실세가 아니었음은 물론, “우리 같은 가난한 계급은 이 몸뚱이 하나가 유일 최종의 자산”(3권 221면)임을 토로한 이상 역시 “작가는, 대체, 초근목피 편이냐 응접실7 편이냐”(3권 250면)를 준열하게 물었음도 기억함직하다. 게다가 이상이 남긴 ‘수필’ 가운에 백미로 통하는 「권태」(1937)는 카프의 어느 작품 못지않게 식민지의 질곡을 실감케 한다. 이를테면 이상과 카프의 동시대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통념적인 리얼리즘·모더니즘의 대립구도도 자연스레 해체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작품 차원에서는 그 구도가 더 불투명해진다. 「날개」(1937)의 ‘모더니즘적’ 화자 하나만 해도 당대 진보적 지식인의 다양한 정신적 편린과 비교할 때 그 일탈성이 두드러질지언정 그들보다 덜 ‘리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희박하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이냐 모더니즘이냐를 그렇게 갈라 따지기 시작하면 오히려 식민지조선을 구더기가 들끓는 무덤으로 한탄한 『만세전』(1924)의 이인화나 망국의 온갖 신고(辛苦)를 때이른 계몽의 환희로 뒤바꾸어놓은 『흙』(1932)의 허숭처럼 일제와 함께 앞서간 지식인들이야말로 식민지시대를 망각하고 헛것을 본 혐의가 다분하다. 나아가 “남에게 예속된 강아지의 행복을 누리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내 뜻대로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걸어가겠느냐?……하는 기로에” 선 『황혼』(1936)의 단호한 결단마저도 「날개」에 비추어보면 진보를 빙자하여 너무도 손쉽게 현실을 털어버린 것이 아닌가. 이상 당대의 비평으로 말하자면, 바로 이 작품을 겨냥한 김문집(金文輯)의 맥고모자 운운한 “위악적인 허튼말”8이 악명높은 예지만, 실상 이상의 재능을 누구보다도 인정하고 그 요절을 안타까워한 최재서(崔載瑞)의 이른바 ‘리얼리즘 심화론’ 역시 주관/객관의 이분법에 가둔 혐의가 뚜렷하다. 동시에 김남천(金南天)이 “허위의 사실주의”로 질타한, “일상의 속악한 실재에 만족하고 본질을 빼어놓고 비본질적 쇄사(鎖辭)에만 종사하는 공허한 ‘리얼리즘’”9과는 격이 다른 본질적 현실에 천착한 작품이 바로 「날개」라는 사실을 재확인할 필요도 있다. 「날개」를 읽어보겠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기상(奇想)과 황당한 논리가 일견 뒤섞인 듯한 서사(序詞)는 「날개」에 대한 작가의 교묘한 해석인 동시에 그 특유의 감수성의 현시다. “가증할 상식의 병인 위트와 패러독스”로써 “여인의 반”만을 “영수(領受)하는 생활”을 “머릿속의 백지에 깔리는 바둑 포석처럼” 보여주겠노라는 포부는 전형적인 모더니스트적 태도다. 미망인·여왕벌의 본성을 가진 한 여성과의 삶을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것과 같은 아이러니로써” 구현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의 본질을 그렇게 정의하는 행위가 “여성에 대한 모독”이냐고 반문하는 화자의 “감정은 딱 공급을 정지”했다.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諸行)이 싱거워서 견딜 수 없게 된” 결과 내면이 텅 비어버린 상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구석진 방의 이불 속에서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그런 세속적인 계산을 떠난 가장 편리하고 안일한 말하자면 절대적” 무위무책(無爲無策)을 ‘실현’하려는 룸펜이다. 이상은 전통적인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가 성립할 리 만무한 식민지현실에서 “그날그날을 그저 까닭없이 펀둥펀둥 게으르고만 있으면 만사가 그만”인 룸펜, 화류계의 “한 떨기 꽃을 지키고─아니 그 꽃에 매어달려 사는 (…) 도무지 형용할 수 없는 거북살스런 존재”, 즉 기생인간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다.
식민지 지식인의 통한이 삶의 의지를 일깨우는 처녀작이자 유일한 장편 『12월 12일』(1930)을 예외로 치면, 「날개」를 포함한 「지주회시(會豕)」(1936) 『동해(童骸)』(1937) 「종생기(終生記)」(1937) 「환시기(幻視記)」(1938) 「실화(失花)」(1939) 등 이상의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룸펜의 존재방식은 한마디로 ‘권태’다. 이는 상품의 물신화가 전면적인 현실이 되어버린 빠리 거리에서 발생하는 ‘충격 체험’으로서의 보들레르식 권태나 식민지 지배자로서의 정신에 깃들인 삶의 허무에 맞선 까뮈의 강렬한 부조리의식과도 사뭇 다르다. 이상의 권태는 삶의 모든 의미 부재(不在)를 영혼의 허기로써 극단까지 체험한 식민지 지식인의 상황에서 연유한다. 참다운 예술가를 이해하고 북돋아줄 수 있는 교양계층의 빈곤이 외부로부터 강제된 결과 더이상 ‘삶에의 부름’이 들리지 않게 된 현실에서 역설적으로 지향하게 된─“권태를 인식하는 신경마저도 완전히 허탈해”(3권 142면)져버리려는─삶의 방식이다. 삶의 부름과 소임은 있어야만 하고 또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주어지지 않는 현실 자체로의 부름과 부재로서의 소임만이 존재할 뿐인 식민지근대가 낳은 지식인의 극한적 자의식이다. 현실의 진정한 고뇌가 ‘부정의 정신’으로서의 권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부름 아닌 부름, 소임 아닌 소임이 엄연한 현실로 주어졌기에 「날개」의 화자가 룸펜으로 제시되는 과정에는─외부세계에 대한 반응을 문자 그대로 박제인간의 정신상태로 제한하는─엄혹한 예술적 절제와 인내가 따르게 된다.
“도스또예프스끼 정신이란 자칫하면 낭비”라는 아리송한 발언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스스로 원한에 사무친 인간임을 자학적·피학적으로 고백함으로써 모든 제도화된 삶과 대립하는 도스또예프스끼적 ‘지하생활자’의 병적 흥분을 「날개」에서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값싼 행복과 고귀한 고통, 과연 어느 것이 더 나은가”10라는 지하생활자의 염세적인 물음도 제기되지 않는다. 그것은 ‘권태’ 이전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의 매매춘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룸펜인뗄리겐찌아의 ‘절름발이 삶’을 아무런 대안 없이 제시하면서도 불구의 삶을 휘도는 식민지현실을 완곡하고도 끈질기게 증언한다. 짐짓 어눌한 백치의 자폐적 자의식을 통해 권태의 표면 아래 잠긴 자기모멸·자학·자조·자살충동이 제어되면서 시대의 어둠을 견디는 룸펜 아닌 룸펜의 현실이─아내의 매매춘과 소외의식이─그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30년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품으로서의 「날개」 고유의 미덕은, 그 문학의 단골 주제인 도시공간의 매혹과 환멸 및 거기서 벌어지는 자기파괴·소외에 탐닉하는 기색이 희박하다는 데 있다. 특히 「날개」에 관한 한, 근대성의 그런 병리적 징후들은 오히려 현실탐구의 동력으로 작용한다고 봐야 옳다. “돈을 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은 화자가 벙어리저금통을 변소에 갖다버리는 대목이 말해주듯이 (어떤 면에서는 작금의 IMF 현실마저 환기되는) 경제현실 및 인간소외를 통렬하게 고발·거부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 폭로는 목적의식이 생활을 앞질러가버린 카프의 생경함과 거리가 있다. 자기 내부의 피폐를 응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반(反)생명에 대한 ‘백치’의 본능적 거부에 더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감동이 그런 유의 고발이나 거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로 얽어매어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현실을 집요하게 재현하는 과정에서 “닭이나 강아지처럼 말없이 주는 모이를 넓죽넓죽 받아먹”기나 하는 룸펜의 삶도 종국에는 더불어 부정하는 특이한 성취가 이루어지는 것이다.11 즐겨 인용되는 마지막 대목이다.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싸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 가렵다. 아하, 그것은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미쯔꼬시(현재 명동의 신세계백화점) 옥상에서 내려다본 30년대 경성의 ‘초현실적 비전’12을 통해 이상은 근대화 특유의 휘발적 활력을 포착한다.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는 다름아닌 근대화를 수행한 물적 토대에 해당하는 셈이니, 도시의 혼돈스런 팽창을 암시하는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도 근대인의 자기분열적 일상성을 구성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마지막 대목이 두고두고 독자의 뇌리에 남는 것은, 근대(성)의 그같은 첨예한 드러냄보다는 “현란을 극한 정오”로 표현된 식민지근대와 대결하는 이상의 자세에 기인한다. 그것은 「날개」의 화자처럼 미쯔꼬시 옥상이라는 절망의 벼랑에 섰지만 노동운동을 선택했다가 끝내 변절해버린 『인간 문제』(1934)의 신철과는 다른 길이다. 그것은 훼절의 현실에서 스스로 박제가 되어버린,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룸펜의 생활과는 다른 차원의 삶, 지금까지 숱한 해석13이 가해진 비상(飛上)의 꿈이다. “허허벌판에 쓰러져 까마귀 밥이 될지언정 이상(理想)에 살고 싶”(3권 217면)어하는 절절한 희망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상의 좌절을 발전동력으로 활용한 일면마저 있는 (식민지)근대에서 우리가 그 희망만을 가지고 과연 또다른 비상을 감행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을 박제, 아니 ‘해골〔童骸〕’로밖에 인식할 수는 없는 텅 빈 인간의 비상에 우리는 어떤 염원을 실어주어야 하는가? 그 희구가 아무리 절절했다 해도, 이상 개인을 넘어선 식민지근대는 엄연하다. “꿈에는 생시를 꿈꾸고 생시에는 꿈을 꿈꾸”(「지주회시」)어야 하는 현실에서 갈망하는 이상의 비상은 만해의 「잠 없는 꿈」 「꿈과 근심」 「꿈이라면」 등과는 사뭇 다른 국면을 맞는 것이다. 1919년 만세운동의 역사적 메아리마저 남김없이 잠들어버린 30년대가 비단 한반도의 시련만은 아니었건만, 식민지배 종식이 아득해진 전시체제기(1937〜45)로 돌입하는 시대의 이상은 문자 그대로 형해만 남는 것이다. ‘님’의 기억이 전통으로 살아 있는 한 침묵은 희망으로 움틀 수밖에 없던 만해의 20년대가, 산산이 부서진 사랑을 목놓아 찾아헤맬 수 있었던 소월의 20년대가 차라리 행복했다. 심지어 이상은 “내 꿈을 지배하는 자는 내가 아”님을, “내가 지각한 꿈에서 나는 극형을 받았”음을(『오감도』 시 제15호) 넋두리처럼 늘어놓는다. ‘미망인·여왕벌’로서의 아내가 준 수면제에 의해 강요된 악몽이 배태되는 현실은 일제의 파쇼제국주의 외에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문맥이 없다.
「날개」의 ‘꿈’ 해석에서도 식민지의 근대의식이 결정적인 변수인바, 그것은 ‘반현실’에 대항하는 의지(意志)적 성격을 띤다. 이상 스스로 고백하듯이 비상을 실현하는 “천사는 아무데도 없”고, “‘파라다이스’는 빈터”(3권 191면)인 황량한 현실을 ‘시적 비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조차도 다분히 의지로서의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30년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날개」를 그런 의지의 산물로 규정하고 비상의 선취(先取)를 강조할수록─동화 「황소와 도깨비」를 제외한다면─거의 모든 이상의 작품에 스민 모더니즘 예술 특유의 ‘불모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김동인(金東仁)이 『춘원연구』(1934)에서 『무정』을 두고 지적한 바와 같은 당대 조선의 생생한 전통과 공동체적 삶의 연속성을 감지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참된 전통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우리로서는, 오히려 그럴수록 작품 차원의 현재 평가에서 비상이 함축하는 의지의 관념성을 지나치게 의식·비판할 일은 아니다. 또한 이룰 수 없는 ‘예술’을 위한 지조쯤으로 이상의 문학을 단순화해버리는14 평범함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상 스스로 인정한(3권 242면) 실패작 「동해」를 비롯해 「환시기」 「종생기」 등은 「날개」의 복합적 성취를 돋보이게 하고, 비상의 꿈이 관념적이면 관념적인 대로 「날개」는 박제인간·룸펜의 현실과는 대비되는 시대의 절박함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동시에 「날개」의 앞서간 근대의식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모더니즘적 기질 및 그 문학의 병폐를 적시한 듯한 이상의 자기반성도 떠올려볼 필요가 있겠다. 즉 “고황(膏肓)을 든, 이 문학병을─이 익애(溺愛)의 이 도취의…… 이 굴레를 제발 좀 벗고 표연할 수 있는 제법 근량 나가는 인간이 되고 싶”(3권 223면)다던, 성숙에 대한 ‘모던뽀이’ 이상의 진지한 갈구도 독자는 「날개」의 비상을 통해 마음으로부터 공감해봄직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상 문학의 난해성도─서구 휴머니즘이나 가부장제의 인간형과도 사뭇 다른 울림을 담은─‘인간다움’을 향한 절실한 물음과 떼어 생각할 수 없게 된다.
3
이상의 난해함이 단순히 기교나 기법만의 문제가 아니고, 식민지현실의 재현 및 그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다움’의 문제와 깊이 연루된다면, 『오감도』의 파격을 1차대전 전후 서구의 다다·초현실주의·미래파 등의 자장 안으로 무작정 끌어들이려는 안이한 문제의식도 재고해야 마땅하다. 근대 부르주아 합리주의에 극단적으로 반발함으로써 오히려 그런 합리주의를 ‘비논리적’ 형태로 답습한 혐의에 걸린 유럽의 아방가르드를 이상의 난해성과 곧바로 동일시하기는 힘들다. 또한 타율적으로 맞은 근대에서 모국어마저 빼앗긴 식민지 모더니즘의 성과를 T.S. 엘리어트나 에즈라 파운드로 대변되는 영미의 주류 모더니즘과 동렬에 놓을 수도 없을 듯하다. 그렇다고 빠블로 네루다나 옥따비오 빠스 등이 예시하는 제3세계문학의 시적 성취와 대등한 차원에서 견줄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파운드라기보다는) 엘리어트가 대변하는 모더니즘적 성취 자체도 오랜 영시(英詩) 전통의 현대적 활용에 크게 빚진 것인데다가, 파괴를 위한 파괴와 허무주의적 정치행위로 치달은 초현실주의는 이상의 식민지체험과 거의 무관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반면에 무자비한 식민통치의 수탈과 함께 들어온 서구의 문화적 유산 덕을 보면서도 실제 피억압민중의 삶으로 깊숙이 파고든 중남미의 출중한 시인들에 비한다면 이상의 어떤 한계는 더 뚜렷해진다. 『오감도』를 대하는 당대 대중정서가 단적으로 말해주듯이 폭넓은 교양계층이 제공하는 문화의 혜택을 이상이 향유하기에는 30년대 식민지현실은 너무도 초라하고 전통문화와의 단절도 그만큼 극단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상이, 특히 시에서, 서구의 어느 전위주의 작가 못지않게 논리와 경험의 해체 및 언어파괴를 극단적으로 실험한 것은 사실이다. 그중 어떤 시가 그런 전위주의의 치기어린 모방이나 기계적인 반복이고 어떤 것이 원숙한 성취에 해당하는가는 구체적으로 가려내야 하겠지만, 평가를 위해서도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모더니즘 시학의 기본원리인 ‘몰개성’과는 분명히 구분되는─식민지 지식인의 개인적 체험 양상이다. 그 주조음은 각혈과 아내 금홍의 매춘 및 가출이 남긴 절망과 불구적 삶의 긴 신음소리다. “기침이 난다…/나는 무너지느라고 기침을 떨어뜨린다./웃음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자조하는 표정 위에 독한 잉크가 끼얹힌다./기침은 사념 위에 그냥 주저앉아서 떠든다./기가 탁 막힌다”(「행로」). “무사한 세상이 병원이고/꼭 치료를 기다리는 무병(無病)이 끝끝내 있다”(「紙碑」, 1935년 작품). “수명을 헐어서 저당잡히나 보다”(「가정」). “안해는 아침이면 외출을 한다/그날에 해당한 한 남자를 속이려 가는 것이다”(「紙碑」, 1936년 작품). “안해는 외출에서 돌아오면 방에 들어서기 전에 세수를 한다/닮아온 여러 벌 표정을 벗어버리는 추행(醜行)이다.”(「추구」)
그런 주조음에는 어김없이 식민지의 어둠이라는 변주음이 따른다. ‘영원한 귀양살이의 땅’(『오감도』 시 제7호)인 식민지, “이 손바닥만한 하늘 이편에 방망이로 흰 비둘기의 떼를 때려죽이는 불결한 전쟁이”(『오감도』 시 제12호) 벌어진다. 무덤에 있는 백골(조상)마저 자신의 삶이 떠안고 있는 빚을─“혈청(血淸)의 원가상환”(「문벌」)을─청산하라고 재촉한다. 개인의 절망과 식민지의 어둠이라는 이중주는 때론 해독불가에 가까운 언어적·형식적 실험을 통해 ‘화음’을 만들어내는바, 그 주조음과 변주음이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갈라지고 합쳐지는지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 가운데서 근거없는 낙관주의와 상투적인 염세주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에 대한 부정과 긍정이 어우러진다. 그 대극의 양상은 「회한의 장(章)」과 「육친의 장」의 비교에서도 두드러지지만, 그 시적 긴장은 「꽃나무」에서 더욱 생생하고 복합적으로 확인된다.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 나는 막 달아났소. 한 꽃나무를 위하여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런 흉내를 내었소.
─「꽃나무」 전문15
하지만 이 시의 ‘꽃나무’를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로 나누고 개념화하여 후자가 전자에 도달하지 못하는 근대인의 소외와 고독으로 이해하는 태도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시를 시로서 정독한 결과라기보다는 모더니즘의 상투성을 시에 강제한 해석에 가깝기 때문이다. 먼저 꽃나무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가, 꽃나무가 과연 무엇을 어떻게 재현하는가는 물음을 던져본다.
앞의 세번째 문장까지를 염두에 두면, 재현대상은 명백하다. ‘꽃나무’다. “근처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는” 단독자로서의 꽃나무가 ‘꽃나무’를 그리는 상황이다. 그것은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꽃을 피”우고 섰다. 여기서 소설의 재현 개념을 적용하려 든다면 애초에 가당찮은 물음이지만, ‘생각하는 꽃나무’라는 심상이 독특한 울림을 퍼뜨리는 현상만은 여러모로 음미해봄직하다. 문제는 다음, 즉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 갈 수 없”다는 야릇한 문장이다. 반영주체/모사객체를 상정할 수밖에 없는 재현 개념에 비추면 이 진술은 (「거울」의 상황처럼) 자연적 실체로서의 꽃나무와 그 반영상(反映像)인 꽃나무 사이의 근원적 불일치를 암시한다고 생각해볼 여지마저 생긴다. 「꽃나무」에는 이미 “열심으로” 꽃을 피우고 선 꽃나무와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꽃나무가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아무런 접속사 없이 병렬된 두 꽃나무 사이에는 일종의 역접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충동이 내재한다. ‘열심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으나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로 읽힐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이럴 때 지향점으로서의 반영상인 꽃나무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무엇으로 설정되는바, 90년대 문단을 휩쓴 포스트모더니즘의 ‘재현 불가능’이라는 이데올로기마저 환기된다. 아무튼 이 꽃나무 하나가, 마치 이론과 실천의 괴리처럼, 모종의 분열을 내포하는 듯한 실감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즉 ‘꽃피움’을 실제로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꽃나무와 꽃나무라는 상(像) 내지는 이데아에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꽃나무의 관계가 불확실해지고, 결과적으로 이상이 꽃나무라는 존재의 어떤 면모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지 자체가 불투명해지고 마는 것이다. 이 현상을 끝까지 응시하면, 다섯번째 문장 “나는 막 달아났소”라는, 일견 시의 문맥을 완전히 일탈해버린 것으로 보이는 구절은 바로 그런 분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작가 ‘나’의 좌절된 자의식으로 읽힐 근거가 뚜렷해진다. 그러나 다음 대목, “한 꽃나무를 위하여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런 흉내를 내었소”는 더욱 묘하다. 무엇보다도 이 대목에서 ‘그런’의 의미가 도무지 안개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안개가 「꽃나무」를 그 정도 둘러쌌다고 해서 ‘꽃나무’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시는 꽃나무의 어떤 본질적 의미를 시화(詩化)하려는 이상의 시도가 흡족하게 이루어지기보다는 막다른 벽에 부딪친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준다. 한 폭의 쓸쓸한 회화를 떠올리게 하는 이 시에서 꽃나무를 되살리려는 행위는─‘이상다운’이라는 말장난마저 함축한─“이상스런 흉내”로 표현된다. 그 ‘흉내’ 또는 재현의지야말로 이상의 작품을 난해하게 만드는 일차적 요인임을 다시 확인할 때, 「꽃나무」의 종잡을 수 없는 어법도 이상이 ‘꽃나무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시도하는 “참 그런 이상스런 흉내”의 결과가 된다. 「날개」에서 확인한 비상의 꿈 역시 바로 그런 꽃피움을 향한 재현의지과 무관하지 않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결과적으로 당대 다수 민중의 생활체험과도 너무 멀어지게 된 일면이 있는─난해성을 단순한 현학취미 및 무분별한 전위주의와 일단 구별해야 하는 것은, 권태의 근원을 성찰하면서 누구보다도 충격적인 실험을 감내한 그가 ‘이상’스런 흉내의 한계마저 자각했기 때문이다. 성숙을 향한 이상의 갈망을 앞서 확인했거니와,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3권 360면)는 탄식도 바로 그런 복합적 자각의 일면이겠다.
그 자각이 실제로 얼마나 작품다운 작품을 낳았는가는 또 별개의 문제다. 이상 개인의 절절함은 있을지언정 소설의 됨됨이로서는 태작인 「동해」나 「환시기」 등이 그러하듯 시에서도 기교와 절망의 극단을 오락가락하면서 기교에 현혹되고 절망의 눈물이 역력한 작품도 많다. 예컨대 「선에 대한 각서」 시편들은 관념과 기교의 산물이며, 그 유명한 『오감도』 시 제1호 ‘13인의 아해’ 역시 13이라는 숫자가 반복적으로 환기하는 온갖 부질없는 연상을 제외하면 ‘까마귀의 눈’, 즉 오감(烏瞰)으로 시대적 불안을 환기하는 정도에 그친 듯하다. 절망의 기교적 수작(手作)일 뿐 그 이상의 시는 아니다. 개인의 아픔과 시대의 어둠 모두 “밤 사이에 찾아온 습관”(「아침」)처럼 되어버린 결과인 것이다.
하지만 냉정한 평가일수록 살아 있는 작품에 기반해야 함은 비평의 불문률이다. 앞서 분석한 시를 비롯해 간간이 인용한 「오감도」의 몇몇 시편과 「절벽」 「거울」 등은 서구 모더니즘에 비추어도 손색없는 작품으로서, 이상과 여러모로 대조적인 동시대 시인 김기림이나 정지용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어법과 발상이 눈에 띈다. 근대를 진정으로 경험한 만큼의 치열한 인식과 현대적 의식─“능금 한 알이 추락하였다. 지구는 부서질 정도만큼 상했다”(「최후」)─의 선취를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시는 ‘이해’와 ‘해석’ 이전의 것이다. 흔히 난해시란 선입견 때문에 대중과의 거리가 미리부터 전제되고, 서구 문학이론을 들이대야 그 난해성이 풀린다고들 하지만, 실제로 안심하고 읽으면 우리 당대의 황량한 내면풍경마저 환기되는 것이다.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는”(「거울」) 현대인의 일그러진 자기고백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상의 현재성은 거듭 확인된다. 동시에 개인의 고백 차원으로 한정하는 ‘독법’만으로는 이상에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도 빠뜨릴 수 없다. 도저히 헤어날 길 없는 역사의 질곡에 빠져버린 한 룸펜인뗄리겐찌아의 몸부림─절망과 기교의 복합적 내면화─은 분단체제에 대한 문학지식인의 싸움이 자기 내부의 적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는 암시를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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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상의 현재성을 확인하는 것도 30년대를 되돌아봄으로써 가능하지만, 식민지라는 역사의 어둠이 당대 문학에 어떤 ‘빛’을 던져주는가는 작품을 두고서만 구체적으로 논할 수 있다. 다만, 원론 수준에서 식민지를 직접 경영하는 쪽과 그런 경영을 억압으로 체험하는 입장이 사뭇 다르리라는 점은 자명하며, 그 차이를 강조할수록 루카치식 서구 모더니즘 비판을 우리의 30년대 모더니즘에 그대로 대입하기 어려워진다. 서구의 모더니즘이 “사회적 내용을 회피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 사회적 내용을 눈에 안 보이게끔 형식 자체 속에 격리시킴으로써 그러한 사회적 내용을 관리하고 통제하는”16 예술이라면, 그같은 형식적 의도 내지는 실험이 실제 내용의 근본적인 도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현장이 다름아닌 제3세계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 핵심부의 중산계급 예술에 대한 루카치의 가차없는 (일반적) 비판을 접수한다 하더라도 그중에서도 우리가 창의적으로 끌어들여 우리 문맥에서 활용할 만한 ‘모더니즘 작품’은 따로 구별해야 하며, 다른 한편 비서구 식민지의 전위작품이 20세기 서구 모더니즘과 실제로 얼마나 다른 종류의 문학인가 하는 자기비판적 의문도 자동적으로 따라온다고 하겠다.
이상의 시를 두고도 그런 물음을 던져볼 만하지만 그보다는 역시 소설, 특히 「지주회시」가 더 안성맞춤일 듯하다. 기생적 삶의 양태가 거미〔蜘蛛〕와 돼지〔豕〕로 양분되고 적빈(赤貧)의 아귀인 거미와 사치·방탕의 짐승적 형상인 돼지가 먹고 먹히는 현실의 악순환이 그려짐으로써 카프의 이념성은 물론 카프카 같은 작가마저도 환기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정 계급으로 환원될 수 있는 적나라한 알레고리적 형상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평자들은 유독 이 작품을 통해 30년대의 자본주의 현실과 식민지 예속을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거미의 징그러움과 흉측함, 그 흡혈성, 끈적끈적하는 거미줄, 수많은 다리와 촉수들”에서 “수만명의 감시원이 감시의 눈을 번득이며 민족의 생활을 속속들이 규제하는 공포스런 현실”을 곧바로 대입하는 식의 재현주의적 태도가 단적인 예다.17 하지만 작품에서 과연 어떤 상상이 실제로 가능한가를 따져보기 위해서라도 줄거리를 먼저 소개하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아내를 거미라고 믿는 그는 성탄절 아침에 한때 절친했던 벗 오군(吳君)을 만나러 길을 나선다. 미술에 뜻을 둔 오였지만 이젠 기름 바른 머리에 금시계, 보석 박힌 넥타이핀 등을 몸에 두른 양돼지가 되었다. 그는 오의 사무실에서 언젠가 돈 백원을 빌린─그의 아내가 여급으로 일하는─R까페의 사장 뚱뚱신사를 보고서 얼떨결에 그만 꾸벅 인사를 해버린다. 아내를 앞세우고 돈 빌릴 때 “유까따(浴衣)를입고내려다보던눈에서느낀굴욕을오늘이라고잊었을까.” 그런데 R까페에서 열린 망년회 행사날 밤 오의 친구인 R까페 전무의 발길질에 그의 아내가 층계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넌 왜 요렇게 말랐니?”라는 전무의 말에 “당신은왜그렇게 양돼지모양으로살이쪘소?”라고 응수한 것이다. 다음날 경찰서로 출두한 이 부부는 오와 뚱뚱신사가 무마비조로 건네준 20원을 받는다. 고소할 수도 없지만 받지 않고 배겨낼 재간은 더 없다. “썩어들어가는 쉬적지근”한 거미 내음새가 풍기는 밤이다. 끓어오르는 복수심과 회한을 어쩌지 못해 그는 그 거금 20원을 손에 들고 다시금 집을 나선다. 절치부심(切齒腐心)이다. 그런 그는 아내가 당한 만큼 오의 정부 마유미를 옆에 끼고 허무하도록 한번 놀아제껴보려는 심산이다. 그래서 그 돈이 날라가면? 그래도 걱정없다. 그는 이렇게 외친다. “아내야또한번전무귀에다대이고 양돼지 그래라. 걷어차거든두말말고층계에서내리굴러라.”
이렇게 줄거리를 정리해봤자 ‘인간거미〔蜘蛛〕’가 ‘인간돼지〔豕〕’를 만나게〔會〕 되는 희한한 사연이 그대로 전달될 리 만무하겠지만, 눈여겨볼 점은 그 만남이 단순히 1·3인칭의 주관적 관찰자나 객관적 방관자가 아니라 ‘의식의 흐름’이 절묘하게 가미된 일종의 ‘체험된 발화’(die erlebte Rede)로서의 자유간접화법을 통해 기술되는 형식이다. 등장인물 각각이 처한 정황이 해당 시각에서 그려짐과 동시에 그 시각들의 교호(交互)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식민지사회의 전체상이 포착되는 이 작품의 주된 어조는 위트마저 간간이 섞인 신랄한 해학과 풍자 및 자조다. 구어(口語)의 생기가 감도는 다성(多聲)적 내러티브는 각 인물의 서로 다른 속내와 그들이 맺고 있는 기생관계의 성격을 정확히 드러낸다. 가령 그, 그의 아내, 오, 오의 정부 마유미의 독백을 들어본다.
또거미. 아내는꼭거미. 라고그는믿는다. 저것이어서도로환퇴18를하여서거미형상을나타내었으면─그러나거미를총으로쏘아죽였다는이야기를들은일이없다. 보통 발로밟아죽이는데신발신기커녕일어나기도싫다. (…) 거미내음새다. 이후덥지근한내음새는 아하 거미내음새다. 이방안이거미노릇을하느라고풍기는흉악한내음새임에틀림없다. 그래도그는안해가거미인것을 잘 알고있다.
그러나아내는깜짝놀란다. 덧문을닫는─남편─잠이나자는남편이덧문을닫았더니생각이많다. 오줌이마려운가─가려운가─아니면저인물이왜잠을깨었나. 참신통한일은─어쩌다가저렇게사(生)는지─사는것이신통한일이라면또생각하여보면자는것은더신통한일이다. 어떻게저렇게자나? 저렇게도많이자나? 모든일이희한한일이었다. 남편. 어디부터어디까지가부부람─남편─아내가아니라도그만아내이고마는고야. 그러나남편은아내에게 무엇을 하였느냐─담벼락이라고외풍이나가려주었더냐.
“이게마유미야이뚱뚱보가─하릴없이양돼진데좋아좋단말이야─金알낳는게사니이야기알지(알지)즉화수분이야─하룻저녁에3원4원5원─잡힐물건도없는데돈주는전당국이야. (정말?) 아─나의사랑하는마유미거든.” 지금쯤은아내도저짓을하렸다. 아프다. (…) 시계보석을사주었다가도로빼앗아다가끄리고19 또사주었다가또빼앗아다가끄리고─그러니까사주기는사주었는데그놈이평생가야제것이아니고내것이거든─쓱얼마를그런다음에는 (…) 보석은또여전히사주니까남는것은없어도 여러번사준폭이되고내가거미지, 거민줄알면서도─아니야, 나는또제요구를안들어주는것은아니니까.
“저이가거짓말쟁인줄제가모르는줄아십니까. 알아요(그래서)미술가라지요. (…) 이마유미가속는게아니라구요. (…) 선생님은아시지요(알고말고)으쨌든그따위끄나풀이한마리있어야삽니다.(뭐?뭐?)생각해보세요─그래하룻밤에3,4원씩벌어서뭐에다쓰느냐 말이에요─화장품을사나요? 옷감을끊나요허긴한두번아니여남은번까지는아주비싼놈으로골라서그짓도허지요. 허지만허지만허구헌날화장품을사나요옷감을끊나요? (…) 그래두저런끄나풀한마리가지는게화장품이나옷감보다는훨씬낫습니다. (…) 그러니까저를빨아먹는거미를제손으로기르는셈이지요. 그렇지만또이허전한것을저끄나풀이다수긋이채워주거니하면아까운생각은커녕즈이가되려거민가싶습니다.”
그와 그 아내의 심경은 내면독백에 가까운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오와 마유미의 속내는 1인칭 대화적 독백으로 처리된다. 이런 다채로운 내러티브는 얽히고설킨 ‘거미와 돼지’의 비유적 그물망, 즉 흡혈과 착취가 꼬리를 문 세계로 그 촛점이 모아진다.20 이 점은 카프카의 대다수 작품을 특징짓는 내러티브, 즉 철저하게 주관적 의식으로 매개되는 1인칭 서술과는 대조적이거니와, 이런 다층적 내러티브를 통해 네 인물에게 적용되는 비유로서의 거미와 돼지는 끝까지 비유로 남으면서 ‘거미와 돼지’가 판치는 세상을 높은 밀도의 알레고리가 가미된 사실적 수준에서 풍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인물들의 심층이 정확히 투시될수록 그의 심리적 가학·자학은─“아무 자극도 감격도 없는 영점(零點)에 가까운 인간”인 「날개」의 룸펜보다─더욱 격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그 함의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피는 재미있는 방법은 여러모로 「지주회시」의 알레고리를 떠올리게 하는 카프카의 「변신」(Die Verwandlung, 1915)과 대비해보는 것이다.21
「변신」에 대한 해석은 안팎에서 참으로 분분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해석22들을 세세히 검토하기보다는 「변신」의 충격적 실감을 차분하게 되새겨보는 편이 더 합당하겠다.
누구나 「변신」을 당혹스런 작품으로 느낄 법한 것은, 잠자가 어떤 알레고리나 상징적 의미를 숨긴 복선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인간에서─심지어 어머니조차 외면하는─벌레로 변하고, 그런 변신이 추호의 작가적 회의도 없이 실제 현실로 시종 집요하게 묘사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집요함은 또다른 벌레가 등장하는 초기 미완성작 「시골에서의 결혼준비」(Hochzeitvorbereitung auf dem Lande)보다 훨씬 전면적이다. 악몽 같은 벌레 상태에서 깨어나려는 잠자의 의식이 처절하고 절박할수록 더 깊어만 가는 소외로 인해 독자가 잠자의 변신을 다른 무엇으로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럴수록 분명히 ‘현실’은 아닌 변신의 상황을 통해 그레고르의 사실적 삶의 조건은 더욱 강렬하게 환기될 뿐이다. 아니, 누이를 음악학교에 보내리라는 살가운 꿈을 끝까지 간직한 벌레 잠자를 두고 던지는 그 누이의 절규─“아빠는 그것이 그레고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만 해요”─가 증언하듯이 그의 변신은 누이를 위한 애틋한 희망보다 더 냉혹한 현실성을 획득한다고 말해야 더 정확할 듯하다. 변신의 ‘현실’이 너무도 생생한 나머지 독자는 ‘그것’이 그레고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것’이 결국 굶어죽음으로써 정상적인 삶을 되찾은 가족의─진정제를 맞은 듯 안온한─행복의 예감이 제시되는 작품의 마지막 대목에 가서도 우리는 벌레 잠자의 인간적 고뇌를 도저히 잊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도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카프카 자신이 「변신」을 작품으로서 전혀 자랑스러워하지 않은바, 잠자가 벌레로서 버림받은 세계 이면에는 온전한 공동체를 이룰 수 없는 카프카의 가족, 특히 아버지, 그 부권에 대한 강렬한 회한이 억눌려 있다는 사실이다. 「변신」의 비현실적 환상에 냉혹하기 짝이 없는 현실성이 담기는 것은 바로 그런 전기적 비사(秘史)23와도 아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그 애증에는 좀더 큰 역사적 테두리, 즉 항구적인 유배와 식민 상태에서 떳떳한 공민(公民)의 지위를 구걸할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 아버지들과 그런 인간적인 희망에 끝까지 양가적(兩價的) 태도를 버릴 수 없는 카프카들이 존재한다는 점도 상기함직하다.
하지만 이상과 카프카 모두가 객혈로 고통받고 여성과의 저주스런 관계마저 공유한 채 그런 불행한 개인사와 겹쳐진 식민체험의 어둠까지를 체험했을지는 몰라도, 「지주회시」를 생각하면서 「변신」을 읽을 때는 차이가 두드러진다. 후자에 촛점을 맞춘다면, 벌레라는 외피를 두른 상태에서 내적으로 잠자의 인간적 고뇌가 전개되는 과정이 극단적인 분열로 치닫는다는 사실을 특히 강조할 만하다. 깨어나니 오싹한 악몽이었다든가 꿈결 같은 현실이 허망한 환상이었다는 식으로 화자의 이야기가 정리됨으로써 그 허무와 희망이 동시에 불러일으켜지기보다는 그런 불러일으킴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루카치가 카프카의 한계로 비판한 바로 그 점, 즉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희망과 절망의 다같은 몽환적 유예(猶豫)야말로 카프카 모더니즘의 진수요 특장에 해당하는 것이니, 「지주회시」에서 거미·돼지의 비유 차원을 완전히 떠나지 못하는 인물군상이 주어진 ‘객관적’ 현실에서 일정한 생명력을 얻는다는 점이나 ‘던져진 존재’─“어떤 거대한 모체(母體)가 나를 여기다 갖다버렸나”─로서의 극단적인 소외의식이 작품 표면으로 노골화되는 점을 볼 때, 역시 이상은 아직 카프카의 경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다른 한편 자칫 상념에 빠져들기 쉽고, 경우에 따라서 지식인들의 값싼 절망의 안식처 노릇도 해온 카프카적 극한에 비추면 이상 모더니즘의 어떤 면모가 더 분명해지는가 하는 점이 궁금해진다.
그러면 「변신」과 「지주회시」를 대비함으로써 이상의 모더니즘적 성취를 좀더 구체적으로 가늠해보자는 원래 취지로 돌아가자. 이때 흥미로운 사실은 「지주회시」가 「변신」의 ‘극단’에는 못 미친다는 (상대적으로 쉽게 합의할 수 있는) 전제를 달면서도 이상이 그런 극단에 빠지지 않음으로써 카프카가 서구 작가로서 처한 역사적 딜레마─카프카가 활동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식민지 체코와 온갖 민중적 체취가 희석되어버린 문어(文語)로서의 독일어24─를 환기해주는 면마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촛점은 모더니스트 카프카의 성취와 한계보다는 님이 잊혀져버린 식민지의 현실에 어쩔 수 없이 가위눌린 이상의 삶에의 의지다.25 삶을 향한 인간 잠자의 몸부림이 벌레의 현실에 압사되는 카프카의 그것은, 가령 『소송』(1925) 『성(城)』(1926) 등에 가서 더욱 분명해지듯이, 그 자체가 일종의 불가해한 억압이 됨으로써 ‘삶 속의 죽음’을 극화하는, 이른바 악무한(惡無限, Schlechte Unendlichkeit)으로서의 삶에의 의지에 해당한다. 살아 있는 모든 삶의 역사적 계기가 무대화된 결과 꼭두각시들이 늘어선 무대 위로 어른거리는 불가해한 메씨아의 환영(幻影)만이 남는다.26 그러므로 기술·관료주의적 반(反)문명의 본질을 (「유형지에서」처럼!) 의지의 악무한적·기계동력적 순환으로 섬뜩하게 드러낸 카프카의 불길한 매혹과 구도자적 열정이 아무리 현대인을 사로잡는 ‘생명력’을 지닌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건 이상의 삶에의 의지와는 차이가 있다. “신에 대한 최후의 복수는 부정되려는 생을 줄기차게 살아가는 데 있”(『12월 12일』)음을 천명한 이상, 하지만 “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生活이모자라는까닭”(「家庭」)임을 알았던 이상, 그리하여 「날개」의 반생명·반현실적 상황에 대해 명백한 ‘시적 거부’를 표명하고 삶에의 의지를 생활에서 끝내 구현하려는 이상의 면모27와는 다른 것이다.
이처럼 이상의 집요한 삶에의 의지를 강조할 때 “20세기를 생활하는 데 19세기의 도덕성밖에 없”음을 통탄한 그의 ‘전근대적 근대인’으로서의 자세도 달리 해석될 여지가 많다. 그것은 20세기를 관념적으로 앞질러 간 서구 모더니즘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음은 물론, 근대의 경계를 한참 벗어난 듯한─그토록 심혈로 쓴 작품들이 모두 불태워지기를 원한 만큼은 그 메씨아에게 다가갔을지도 모를─카프카의 구극적(究極的)인 진정성과도 다른 맥락에서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폭압적으로 강요된 20세기에 끝내 휩쓸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사지가 잘리듯 단절되어버린 전근대 19세기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던 이상이, 그 가혹한 긴장을 짧은 생애에나마 창조적으로 감내함으로써 서구 자연주의와 모더니즘 두 범주의 기계적·정태적 세계관을 탈피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벌레 잠자의 ‘비현실’이 현실세계의 냉혹함을 가차없이 비추어주는 카프카의 그로테스크한 ‘환상’과, 현실에 잇닿은 「지주회시」의 아슬아슬한 환상적 충동을 비교할 때 그 점은 좀더 분명해진다. 현실세계의 논리를 일거에 뒤흔드는 벌레 잠자가 일단 제거되면─우리에게는 너무도 낯익은─잠자 가족의 안정된 일상만이 남는 카프카와는 달리, 발동되기는 하지만 가까스로 억제된 「지주회시」의 변신 충동은 외부의 실제세계를 향해 일종의 원심적 파동(波動)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망측한 ‘변신’이 강렬하게 재현하는 외근 쎄일즈사원 잠자의 빠듯한 삶의 사실적 조건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결국 부르주아적 삶을 내면화한 잠자 가족으로 좁혀지는 카프카와는 뭔가 다른 삶의 결단을 예고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러하다.
밤은안개로하여흐릿하다. 공기는제대로썩어들어가는지쉬적지근하여. 또─과연거미다.(환투)─그는그의손가락을코밑에가져다가가만히맡아보았다. 거미내음새는─그러나10원을요모조모주무르던그새큼한지폐내음새가참그윽할뿐이었다. 요새큼한내음새─요것때문에세상은가만히있지못하고생사람을더러잡는다─더러가뭐냐. 얼마나많이축을내나. 가다듬을수없는어지러운 심정이었다. 거미─그렇지─거미는나밖에없다. 보아라. 지금이거미의끈적끈적한촉수가어디로몰려가고있나─쪽소름이끼치고식은땀이내솟기시작이다.
근대 모더니즘의 ‘적자’ 구보(仇甫)들이 고뇌어린 방황 끝에 결국 회피해버린 것도 식민지 노예근성에 대한 바로 이같은 고절(孤節)한 자기고발이 아니었던가! 새큼한 지폐 향기에 “가다듬을수없”이 취해버린 와중에도 자신의 식민성에 대한 냉엄한 자인(自認)이 「지주회시」에는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 이상의 그런 처절한 자각도 마유미라는 ‘양돼지’에 대한 포한(抱恨) 풀이로 낙착된다. 하지만 “거미는나밖에없다” “물뿌리처럼 야외들어가는아내를빨아먹은거미가너자신인것을깨달아라” 식의 통절한 자기인식 및 “부모를배역한이런아들을아내는기어이이렇게잘뙹겨주는구나” 같은 원념 가득한 반성은 ‘거미와 양돼지’가 판치는 식민지현실 전체를 불러일으키는 집약성을 띤다. 조국의 독립은커녕 온전한 가족의 꿈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소외되어버린 한 인간의 가련한 근대적 배냇짓을 통해 당대 노예현실이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만큼 이는 한낱 추상적 인간조건을 한탄하는 태도와도 거리가 먼 것이다. 오, 뚱뚱신사, 순사(巡査) 등에 대고 속으로 내뱉는 항변 “당신들눈에내가구더기만큼이나보이겠소”에서 황국민(皇國民)의 내선일체를 상상하기 힘들거니와, 경찰서로 불려가 “새파랗게질린채쪼그리고앉아있는새앙쥐만한” 아내와 “그저한없이공손히고개를숙여주었을뿐”인 그의 모습은 식민치하의 민중현실이 어떠한가도 여실하게 느끼게 해주는 바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의 이 모든 ‘상상’도 이상 개인의 고뇌와 각성이 벼랑 끝까지 간 결과다. 역설과 아이러니, 자기풍자가 다성적으로 근저에 깔린 모더니스트의 그런 절실함과 고독이 스며 있기에 쓰디쓴 자학과 독기서린 웃음이 뒤섞여버린 마지막 대목까지 읽고 나면 한 근대인의 전형적인 소외의식만이 아니라 식민지민중의 착잡한 분한(憤恨)까지도 작품의 지배적인 어조로서 독자의 뇌리에 곱다시 남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주회시」의 분한에서 변소에 처넣어진 「날개」의 벙어리저금통이 연상되는 것도 그만큼 자연스러우며, 「날개」의 의뭉스런 유아적 백치 화자와 식민지의 통한어린 삶을 증언하는 「지주회시」의 화자는 이상다운 감수성의 양면임이 확인된다.28 분열적으로 드러나는 거미인간의 현실적 비애와 박제인간의 비상을 향한 갈구가 식민지근대에서 짓밟힌 삶의 진상을 증언하거니와, 우리는 그처럼 분열되어 드러나는 이상의 실험적 감수성을 이 시대의 정신적 위기를 앞에 두고 적극적으로 통합해볼 필요가 절실한 것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새것이라면 환장들 하는 현재 문단의 경조부박(輕浮薄)한 풍토에 휩쓸리지 않고 “‘주머니가 가난한 자’의 현실적 절박함과 ‘마음이 가난한 자’의 가없는 진정성이 결합된 경지”29를 실감할 수 있다. 동시에 “정직하게 살겠습니다. 고독과 싸우면서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3권 242면)고 있겠다는 이상의 이상다움을 복잡다단한 우리 현실에서 제대로 되살릴 때 현실지향의 변혁이념으로 인해 오히려 관념의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에 직면하는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의 숙명을 망각으로부터 일깨울 수 있는 것이다.
5
우리의 식민지근대가 서구의 근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역사적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남겨주는 까닭은, 보내드려야 할 전근대와 맞이해야 할 근대 모두를 일제가 식민지 지배전략에 왜곡·활용했다는 데 있다. 그로 인해 가해자 일본은 하나의 업보(業報)로서 전후의 ‘뒤틀림’이라는 온갖 불행한 정신적 유산을 스스로 짊어지게 되었지만,30 한반도에도 쉽사리 치유되지 않는 역사적 상흔을 남긴다. 그중 하나가 이상의 문학인바, 서양 따라잡기에 나선 선진일본의 환상에서 일찌감치 눈뜬 이상이 낙후된 전근대에 발목잡힌 채 근대의 근대다운 세례를 온전히 받지 못한 것은 제3세계문학의 보편적 불행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식민지근대 특유의 가능성과 희망으로 작용하는 일면도 있다. 즉, 식민지근대가 그토록 궁핍했기에 이상의 악전고투는 전근대와 근대 모두에 대한 처절한 이중적 싸움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그 어둠의 유산이 온전히 물러갔다고 말할 수 없는 지금, 그의 싸움이 근대(성)의 성취(또는 적응)와 극복이라는 근대한국의 현단계 이중과제와 직접적으로 연계된다는 점은 우연으로 볼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이중과제의 완수를 위해서라도 이상과 2,30년대 모더니즘은 20세기 근대문학사에 온당히 자리매김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식민지근대의 문학유산만으로는 그같은 과업을 충분히 감당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해방 이후, 특히 60년대 이후 전개된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의 성과가 가세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전민족적 참화인 6·25가 「요한시집」(1955) 같은 또다른 이상의 흔적을 드리웠지만, 이상의 ‘극복’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된 문학의 일차적 계기는 역시 4·19혁명이라 하겠다. 그 양상은 (서구) 모더니즘에서 배울 것은 철저하게 배우고 이겨낼 것은 끝까지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작품으로써 혁명의 본질에 육박해들어간 김수영 등을 떠올릴 때 좀더 분명히 그려진다. 모더니즘과의 참다운 회통도 바로 그같은 배움과 극복과정을 전제해야 하거니와, 이상의 현재성 운운하는 언설 역시 우리 당대문학의 성취가 따라줄 때 비로소 구체적인 내실을 얻을 수 있다. 폭넓고 깊은 시민들의 참여와 깨달음이 힘을 보태줄 수 없었던 식민지근대의 어둠이 이상의 예술적 선취와 좌절을 동시에 낳는다. 그 선취와 좌절은 우리 당대에서도 여전히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의 꿈을 한데 비추어보는 하나의 역사적 거울이 된다. 이상과 그 30년대 모더니즘은 본질적으로 극복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계승의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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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현, 『이상 소설 연구』, 소명출판 1999, 408면에서 재인용.↩
- 최원식, 「한국문학의 근대성을 다시 생각한다」, 『창작과비평』 1994년 겨울호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작품으로의 귀환」, 『현대 한국문학 100년─20세기 한국문학 어떻게 볼 것인가』, 민음사 1999 및 토론문 참조.↩
- 진정석, 「모더니즘의 재인식」, 『창작과비평』 1997년 여름호, 171면.↩
- 林鍾國 편, 『李箱全集』 제3권, 泰成社 1956, 317면. 이는 『오감도』를 읽은 당대 독자의 반응이었다고 한다. 필자가 알기로 이상의 작품을 전집 형태로 낸 경우는 임종국의 문성사(文成社 )본 (개정판, 1972)말고도 이어령 교주(校註)의 갑인출판사본(1977, 78)과 김윤식·이승훈이 4권(1권 시, 2권 소설, 3권 수필, 4권 이상에 관한 비평)으로 엮은 문학사상사본(1991)이 있다. 작품 인용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문학사상사본에 근거하되, 괄호 안에 전집 권수와 면수만을 병기하며 띄어쓰기는 「지주회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현재의 표기법에 따랐다. 상론할 계제는 못 되지만, 각 판본의 문제점에 대한 성실한 고찰로는 김주현, 앞의 책, 3부 참조.↩
- 고은, 『李箱評傳』, 청하 1992, 13면.↩
- 박영희의 전향선언─“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며 상실한 것은 예술이다”─은 1933년 10월 7일에 나왔다. 그해 이른바 ‘신건설사사건’으로 카프는 사실상의 와해에 접어든다(좀더 구체적인 카프 해체과정은 임규찬, 「카프 해산 문제에 대하여」, 김학성·최원식 외, 『한국근대문학사의 쟁점』, 창작과비평사 1990 참조). 시의 경우 이상의 첫 공식 발표작은 1931년 7월호 『朝鮮과 建築』에 실린 「이상한 가역반응」 외 5편이었다.↩
- 문학사상사판에는 “作家는─大體─草根木皮 편이냐 應接害 편이냐”로 되어 있다. 임종국의 개정판(186면)을 보나 전후맥락에 비추어 보나 응접해는 ‘응접실’의 오식임이 분명하다.↩
- 최원식, 「서울·東京·New York─이상의 「실화(失花)」를 통해 본 한국 근대문학의 일각」, 『문학동네』 1998년 겨울호, 174면.↩
- 김남천, 「낭만적 정신의 현실적 구조─신창작이론의 정당한 이해를 위하여」(1934), 김재용 엮음, 『카프비평의 이해』, 풀빛 1989, 504면.↩
- Fyodor Dostoevsky, trans. M. Ginsburg, Notes from Underground, Bantam Books 1974, 151면.↩
- 엠이 지적한 것처럼 이 지점에서 화자는 유아적 백치라는 ‘서술자의 가면’(narrating persona)을 벗어던진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서사’의 경쾌하고 아이러니컬한 이상의 모습과도 다르게 나타나는 비상의 갈구 장면을 식민지 지식인의 절망과 침묵으로 해석하는 것은 너무 제한된 읽기가 아닌가 한다. Henry H. Em. “Yi Sang’s Wing Read as an Anti-Colonial Allegory.” Muæ, Kaya Production 1995. 특히 107, 110면.↩
- 하지만 이 대목의 초현실성을 제대로 실감하기 위해서는 김동노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가령 그 당시에는 공장에 싸이렌이 울렸다고 해요. (…) 아침 8시가 되면 출근시간을 알리는 싸이렌이 울리고 노동자는 도시락을 싸들고 뛰어가는데 이것은 옛날에는 없었던 시간개념이거든요. 그리고 12시에 싸이렌이 울리면 배가 고프든 안 고프든 가서 밥 먹으라는 신호고, 그 다음에 다시 싸이렌이 울리면 퇴근하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단순히 공장의 노동자뿐만 아니라 싸이렌이 공장 밖으로 넘어가서 일반인들의 생활에도 기준이 되었지요.”(좌담 「한국문학에서 식민지근대와 민족문제」, 『민족문학사연구』 13호, 1998, 37면 참조)↩
- 최원식의 경우는 이 대목을 “음습한 골방 생활을 청산하고 거리의 사회성을 향해 날개를 폈던 충일했던 시점의 작가의 의욕을 표상하”는 징표로 읽는다. 필자 역시 공감하는 바인데, 다만 곧이어 “이상 모더니즘은 이 지점에 이르러 거의 리얼리즘에 육박하는 것이다”라는 진단은 앞서 필자가 경계한 통념적인 모더니즘·리얼리즘 구도를 반복할 우려가 있다고 본다. 최원식, 같은 글, 184면.↩
- 황현산, 「『오감도』 평범하게 읽기」, 『창작과비평』 1998년 가을호 참조. 물론 황현산의 정확한 표현은 “그는(이상은) 예술이 이룰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기보다는 차라리 이 폐허에서 이룰 수 없는 어떤 것을 예술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안에 웅크려 들었다. 이 점에서 그의 자궁 퇴행, 그의 거울 속 본질 자아의 방부처리는 민족의 자기보존이라는 시대의 명령이 지극히 개인적으로, 절망적으로 내면화된 형식이다”(354면)이다.↩
- 『카톨릭 청년』 1933년 7월호에 처음 발표되었을 당시 「꽃나무」에는 마침표가 처음 (“꽃나무 하나가 있소”)과 끝(“이상스런 흉내를 내었소”)에만 찍혀 있었다. 필자가 임의로 마침표를 찍어 문장을 구분한 것은 어디까지나 해석상의 편의에 따른 것이다.↩
- Fredric Jameson, “Reflections on the Brecht─Lukács Debate,” The Ideologies of Theory: essays, 1971〜1986, vol. 2,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 138면.↩
- 윤지관, 「모더니즘의 세계관과 정직성의 깊이」, 『문학과사회』 1988년 여름호, 604면 참조.↩
- 이 대목도 임종국이 정확하다. 문학사상사판에는 환투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환생을 뜻하는 환퇴(幻退)의 오식일 것이다.↩
- 여기서 ‘끄리다’는 ‘싸서 묶어두다’의 의미인 ‘꾸리다’이다.↩
- 작품의 이같은 면모는 붙여쓰기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인물간의 착잡하게 뒤얽힌 관계가 바로 그런 형식을 통해 ‘불편하고 낯설게’ 재현되는 것이다.↩
- 텍스트는 F. Kafka, Sämtliche Erzählungen, Franfurt a.M. 1970; 번역본, 이주동 역, 단편전집 『변신』, 솔 1997.↩
- 부자(父子)간 오이디프스적 갈등의 극화라든가, 산업사회의 비극과 소외라든가 하는 통설은 물론, 그레고르의 죽음을 그 가족이 대변하는 부르주아적 질서와의 궁극적 화해나 정반대로 그로부터의 일탈로 보는 등, 서로 엇갈리는 시각 외에 국내 여러 작가와의 비교문학적 접근도 있는 것으로 안다. The Metamorphosis (tr. Stanley Corngold, Norton 1996)에 실린 비평 및 국내 『카프카 연구』(한국카프카학회 편) 등에 실린 논문들 참고.↩
- Franz Kafka, Brief an den Vater (Frankfurt a.M. 1981), 72면. 카프카 가족의 내면사, 특히 카프카 부자간의 착잡하게 얽힌 애증 관계를 토로한 이 장문의 편지는 부쳐지지 않았다.↩
- 이에 대해서는 염무웅, 「리얼리즘의 눈으로 읽은 카프카의 소설」, 『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 창작과비평사 1995, 특히 439〜42면 참조.↩
- “카프의 흥분이나 친일문인들의 비행은 물론, 이태준·정지용 같은 재능있고 사려있는 문인들도 시대의 가장 중대한 사실인 ‘님의 침묵’을 정말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하겠는가? 오히려 ‘쓸데없는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렸고 ‘기다림’의 의무를 태만히한 것은 아닌가? 오직 이상(李箱)만이 ‘님’이 완전히 가버리고 가버렸다는 것조차 잊어버리도록 멀어진 황량한 시대를 정녕 참을 수 없는 시대로, 그런데도 가위에 눌린 것처럼 깨어나려도 깨어날 수 없이 엄연히 우리가 살아야 하는 시대로 파악했다.” 백낙청,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I』, 창작과비평사 1978, 54면.↩
- Walter Benjamin, “Franz Kafka. Zur zehnten Wiederkejr seines Todestages,” Benjamin über Kafka, Texte, Briefzeugnisse Aufzeichnungen, Frankturt a.M. 1981, 14면.↩
- 이같은 이상의 면모를 생각할 때 니체의 『즐거운 지식』(Die Fröhliche Wissenschaft, 1882) 제125절에 등장하는 광인(狂人)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장편 『12월 12일』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지금까지 이상 연구자들이 간과한 사실, 즉 이상이 이미 초기 습작시절부터 기독교적 연민의 세계와 거리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니체의 니힐리즘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했다는 사실마저 확인되기 때문이다.↩
- 또 바로 이런 양면이 살아있기에 “나는 嚴冬과 같은 天文과 싸워야 한다. 氷河와 雪山 가운데 凍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나는 달에 對한 일은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새로운 달을 發見하기 爲하여”(3권 194면)라는 그의 다짐조차도 단순한 근대주의와는 사뭇 다른 싸움을 우리에게 예시하는 것이다.↩
- 졸고 「보들레르와 근대」, 『창작과비평』 1997년 겨울호, 334면.↩
- 카또오 노리히로, 서은혜 옮김,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 창작과비평사 1998 참조.↩